소설리스트

663화 (415/427)

사람이 가장 무섭다더니

실험 전, 한율은 각성자들에게 말했다.

정말로 각성자가 아닌 사람, 자진해서 온 게 아니거나 뒤늦게 실험 참여에서 빠지고 싶은 사람은 솔직히 나와달라고. 그러자 일반인 중 서른 명 남짓이 슬금슬금 대열에서 이탈했다.

정작 가짜 각성자가 많은 죄수 중에서 빠진 이는 고작 열 명. 가짜 각성자는 태도도 불량했다.

[어쩌나? 보이지 않는 정신 공격 계열이라 남들처럼 여기에다 힘을 쓸 수 없네요?]

권한정이라면 한눈에 진짜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겠으나, 일부러 데려오지 않았다. 속아서 실수인 척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상관없으니 써보세요.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능력을 사용하는 순간 발산되는 에너지가 있거든요. 이건 그걸 흡수하는 결계고요.”

[형씨를 내 마음대로 조종할 수도 있는데.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네. 성공하면 지구는 당신 것이 될 겁니다.”

휘익! 빡빡 민 머리에다가 현란한 문신을 새긴 죄수가 휘파람을 불었다. 지켜보던 군인이 총으로 그를 겨눴다.

[쓸데없는 소리 한마디만 더하면 감옥으로도 못 돌아갈 줄 알아!]

[좋아. 한다, 한다고.]

죄수는 어깨를 으쓱이곤 실실 웃었다. 그러곤 결계 앞에서 능력을 사용하는 척 상당히 우스꽝스러운 동작을 취했는데.

“…….”

한율은 불쾌감에 미간을 구겼다. 어스래빗의 노래 중 후렴구 안무를 상당히 더러운 몸짓으로 추고 있었다. 이는 명백한 모욕이자 도발이었다.

“이 미친 새끼가!”

옆에서 지켜보던 이해원이 화를 내던 그 순간.

타앙!

이곳 레드 게이트 전선 지휘관, 막심이 스킨헤드 죄수에게 가차 없이 총을 쐈다. 끄아악! 엉덩이 두 짝에 사선으로 구멍이 뚫린 죄수는 고통스러워하며 바닥을 굴렀다.

막심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부하에게 지시했다.

[국가 안위를 위한 중대한 실험을 방해한 반역자다. 끌고 가서 괴물 미끼로 사용해. 다음.]

그 말을 조용히 통역한 최중이 조심스레 덧붙였다.

“…놀라실 것 없어요. 여기 인권, 최소한의 선 따윈 무너진 지 오래입니다. 다들 사람의 죽음에 익숙해져서 반 미친 상태라고 보는 게 좋아요.”

한율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막심이 씩 웃으며 말했다.

[어제 말씀드린 것 중 하나는 진심이었습니다. 죽어도 상관없는 범죄자 새끼들이란 말이요. 살려둬봤자 식량과 세금밖에 더 축내겠습니까? 아, 귀한 총알 하나까지 낭비하게 했네요. 이 하등 쓸모없는 벌레 새끼들.]

* * *

실험을 마치고 돌아온 곳은 러시아군이 머무는 숙소였다. 러시아 측은 편히 지낼 수 있는 호텔을 잡아주겠다고 했으나, 테러 집단이 다시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오가는 시간을 절약하려면 가까운 곳에 묵는 게 좋겠다는 이유로 양해를 구했다.

“두 분 다 오늘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어제 제대로 못 자서 무척 피곤했을 텐데.”

볼품없는 침대 세 대가 놓인 좁고 삭막한 방. 한율의 말에 이해원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고생은 한율 씨가 하셨죠. 인간 같지도 않은 것들 상대하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곳에서 지내도 불편하지 않겠습니까?”

최중이 있어서 그런지 이해원은 딱딱한 말투를 사용했다.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러시아군 내부에도 말도 안 되는 헛소문에 심취한 자들이 있다던데요.”

“보호 결계를 칠 테니 안심하셔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두 분껜 죄송하네요. 괜히 저 때문에.”

최중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여기도 다 사람 사는 곳인데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중이 욕실로 들어가 씻는 동안, 한율과 이해원은 편히 대화를 나눴다. 혹시 몰라 방음 마법도 쳐놓고.

“처음엔 정말 무례한 놈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유심히 살펴보니까 최중 씨 말처럼 러시아 군인들 정상이 아닌 것 같더라. 지휘관인 막심? 그 사람도 눈이 반은 돌아가 있던데? 이러다 네 핑계 대고, 죄수들을 모조리 죽인 후에 실험 중 벌어진 사고로 덮어버리진 않을까. 그런 생각까지 들 정도야.”

“그렇게 대놓고 죄수 처리에 이용하려 들면 참 불쾌해지는데 말이죠.”

이해원이 한율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 할 거지?”

“네. 아무리 극악무도한 범죄자라고 해도 저한테 그들을 처벌할 권리가 있는 건 아니잖아요. 나중에 외교 문제로 불거질 만한 일을 만들기도 싫고요. 그래서 모두 녹화도 하는 거고.”

“응. 괴물을 이용하는 것만으로도 게이트 크기가 줄어드는데, 괜한 모험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그나저나 한율아. 혹시 여기 각성자 중에 아는 사람 있어? 어제부터 누구 찾는 눈치던데.”

“아. 러시아에서 가장 강한 각성자도 왔나 해서요.”

“그게 누군데?”

한율은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 유명 인사는 아닌 듯하여.

“있어요.”

한율이 찾았던 러시아 최강의 각성자, 알렉세이는 애초에 이 자리에 오지 않았는지 끝까지 보이지 않았다.

러시아군은 각성자라고 뻔뻔하게 거짓말하고 바깥 공기를 쐬러 나온 죄수들을, 국가 안위를 위한 중요한 실험을 고의로 방해했다며 온갖 죄를 붙여 괴물과의 격전지로 보내버렸다.

한 범죄자는 군인들에게 끌려가면서, 한율에게 알리려는 듯이 영어로 외쳤다.

[씨발, 어쩐지 용돈 거하게 나온다고 꼬드기더라니!]

오히려 죄수들이 거짓말까지 하며 실험에 참여하도록 부추겼던 모양이었다. 이들의 수를 줄이기 위해, 처음부터 이렇게 처리하려고 각성자 검증을 제대로 하지 않았던 것.

그 사실을 깨달은 최중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사람이 가장 무섭다더니….”

러시아에 온 지 일주일째.

모스크바에 있던 일행이 다시 게이트 경계선을 찾아왔다. 그들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오는 동안 별일 없었어요?”

“네. 러시아군과 함께 움직여서 그런지, 이상한 놈들이 오기는커녕 다들 피해서 가더라고요. 한율 씨는 컨디션 어때요?”

“괜찮아요.”

그들은 한국에서 챙겨온 장비로 단단히 무장했다. 8인승 차 두 대에 나눠 탑승하곤 게이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곳 게이트 방어선은 상당히 범위가 넓었다. 이유는, 날아다니는 괴물이 유독 많이 출현해서. 언제 어디에서 격추당한 괴물이 떨어질지도 모르는 터라, 한율은 이동 내내 하늘을 경계해야 했다. 여차하면 보호 마법을 써야 하므로.

차는 게이트와 약 1km 거리를 두고 멈췄다.

[이 이상 들어가는 건 위험합니다.]

러시아 군인의 딱딱한 영어에, 한율은 같은 차에 탄 각성자 연구소 직원 두 명과 외교부 직원, 이해원을 돌아보곤 말했다.

[그럼 다녀올게요.]

툭. 이들의 안전을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이해원의 팔을 가볍게 쳤다. 이해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율은 가방에 넣어둔 인형이 잘 있는지 확인하곤 차에서 내렸다.

잠시 후. 푸른색을 띤 대규모 결계가 스멀스멀, 괴물을 끝없이 쏟아내던 게이트를 감쌌다.

비현실적이면서도 신비로운 광경에 모두 넋을 놓은 것일까.

포격음이 일순 그치고, 지상에서 인간들을 공격하려던 괴물들까지 움찔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게이트에 갇힌 채 몸부림치다 재로 변하는 괴물들. 괴로워하는 비명이 들리지 않기에 오히려 섬뜩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해원은 저 멀리 총을 든 군인이 그 광경을 보며 울면서 웃는 모습을 목격했다.

지도에도 표기되지 않은 게이트라 더 힘들었을 전장. 저 병사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해원은 다시 고개를 돌려, 게이트 앞에 작은 점이 된 한율을 바라보았다.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역시, 언제봐도 멋있어.’

그 순간이었다.

철컥.

차의 맨 뒷좌석과 조수석에 앉은 러시아 군인들이 그들을 향해 총을 겨눴다.

“……?!”

[이게 무슨 짓입니까!]

헉. 놀라서 굳은 연구소 직원들 사이에서 외교부 직원이 러시아어로 따졌다. 운전석에 앉은 군인이 룸미러를 통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의 입에서 유창한 한국어가 나왔다.

“듣자 하니 서한율이 만든 보호 부적은 총알을 못 막는다던데. 인질이 되어주셔야겠어요, 여러분.”

“뭐라고요?! 당신들,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아줌마 되게 시끄럽네. 한 명 정돈 없어도….”

이해원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

그의 웃음소리에, 거들먹거리던 군인이 불쾌한 표정으로 돌아봤다. 고글에 가려진 이해원의 눈동자가 푸른색으로 변한 것도 모른 채.

“잘난 각성자 행세라도 하고 싶은가 본데….”

촤악. 한국어로 떠들던 군인의 목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이…!]

조수석에 앉은 군인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꺄악!”

“으악!”

각성자 연구소 직원들과 외교부 직원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군인이 쏜 총알은, 그 사이 이해원이 발동시킨 팔찌의 보호 마법을 뚫지 못했다.

“불시에 날아드는 걸 막기 힘들단 소리지, 전혀 못 막는 건 아닌데.”

이해원은 두 손을 가볍게 움직였다.

[…커헉!]

뒷자리에서 총을 겨눴던 다른 군인까지 바람의 마나로 휘감아, 앞유리창과 뒷유리창에다 세게 처박았다. 콰앙! 충격으로 차가 흔들리고, 눈을 질끈 감은 세 사람은 다시 비명을 질렀다.

“으악!”

“엄마아!”

“살려주세요!”

이해원은 두 군인이 의식을 잃은 것을 확인, 한율과 정상욱 중위에게 무전으로 이 사실을 알렸다. 무전을 들은 정상욱은 곧바로 차에 있는 러시아군을 향해 총을 겨눴으며, 한율 또한 몸을 돌렸다.

지휘관 차량에서는 현장 지휘관인 막심이 내렸다.

* * *

서늘하고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은 지휘실. 그러나 밖은 게이트 결계에 환호하는 러시아 병사들의 목소리로 상당히 시끄러웠다. 우와아아! 한율! 한율!

소식을 듣고 모스크바에서 여기까지 달려온 대한민국 대사가 막심을 향해 큰소리로 따졌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주셔야겠습니다! 러시아를 돕기 위해 온 사람들에게 오히려 총을 겨누다뇨!]

테이블에는 모든 상황이 녹음된 핸드폰이 놓여 있었다. 러시아 군인들이 총을 겨눴던 그때, 각성자 연구소 직원 중 한 명이 손목에 찬 스마트 시계의 녹음 기능을 켜는 기지를 발휘했다.

[면목 없습니다. 부하들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

대사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일은 정식으로 항의할 것이며, 신뢰가 무너진 이상 남은 실험 및 연구 협조 또한 어렵다고 판단되니! 모두 중단하고 돌아가겠습니다.]

막심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사고 회로 어딘가가 고장이라도 난 것인지, 다신 한율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어 상부로부터 문책받을 처지에 놓였음에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네. 정신 똑바로 박힌 놈들로 안전하게 배웅해드리죠.]

그래서 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가기 전에.”

한율은 막심을 향해 물었다.

“그 병사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지난번 호텔을 습격했던 자들과 한패인지, 아니면 다른 목적을 가지고 그런 행동을 한 건지. 당사자로서 직접 묻고 싶은데요.”

통역을 들은 막심이 씩 웃었다.

[안 됩니다. 피해자가 세계를 구한 영웅이든, 지나가던 일반인이든, 군인이 저지른 잘못은 군이 먼저 조사한다. 이게 이곳의 원칙입니다. 결과는 공식 창구를 통해 서면으로 알려드리지요.]

아주 잠깐 만나는 것도 안 되냐며 한국 대사가 따지듯이 물었으나, 막심은 강경한 태도로 끝끝내 거부했다.

[그럼 전 한율 씨가 고생해서 만든 결계가 사라지기 전, 엉망이 된 전열을 재정비해야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결국 한율 일행은 불쾌감을 안은 채 게이트 군사 작전지역을 나와, 모스크바로 향했다.

다음 날.

한국 대사가 헐레벌떡 한율을 찾아왔다.

“어제 그 미친 지휘관이 일을 저질렀습니다.”

막 한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던 한율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요?”

“인질로 한율 씨를 잡으려던 어제 그 병사들이 실은 러시아 정부에서 심어둔 자들이고, 국민을 보호해야 할 정부가 오히려 나라를 위기에 빠뜨리려 했다고 주장하면서 친정부 성향의 군인들까지 매국노로 몰아 대거 숙청,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리고?”

“실험을 위해 모였던 각성자 중 천여 명도 합세했다더군요. 그간 생체 실험을 당한 것 때문에 정부를 향한 반감이 컸었나 봅니다.”

입맛에 맞게 이용당한 처지가 되었으나, 한율은 헛웃음을 흘렸다.

“나라 꼴 잘 돌아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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