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자 어디 갔어
“만약 우리가 그에 도움을 줬다는 오해라도 산다면….”
“설마요. 그런 쿠데타가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건 아니잖아요. 심지어 각성자 천여 명까지 가담했다면 상당히 오래전부터 차근차근 준비했을 텐데, 얼마 전에야 처음 본 우리가요?”
대사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 어려서 어쩔 수 없다는 듯, 연장자의 눈으로 한율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올바르고 이성적인 사람만 있다면 이런 걱정도 안 합니다. 게이트가 발생한 후로 비이성적이고 야만스럽고 이기적이기까지 한 사람이 무척 늘었어요. 목적을 위해 멍청한 음모론을 만들거나 휘둘리는 척하는 인간들도요. 어쨌든.”
대사가 한숨을 내쉰 뒤 말을 이었다.
“조사한다는 핑계로 괜히 발목 잡을 수 있으니, 한율 씨는 빨리 러시아를 떠나는 게 좋겠습니다. 아직 모스크바 쪽으로 진군한다는 소식은 없지만, 혹시 모르니까요.”
“네. …아. 그럼 막심이 지키던 게이트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게이트는 상당히 크고 높은 곳에 떠 있어, 수십 킬로미터 너머에서도 결계의 유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뉴스와 인터넷을 통해 결계가 아직 사라지진 않았지만, 재로 변하지 않는 괴물이 늘어나고 있다는 정보도 알 수 있었다.
“예비 병력을 보냈다곤 하는데…. 아니.”
말하던 대사가 고개를 흔들었다.
“한율 씨는 할 일 다 했으니, 더는 신경 쓰지 마세요. 도와줘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말고요.”
애초에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으나, 한율은 머뭇거리는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잠시 후 공항.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는데, 러시아 정부에서 나온 이들이 한율을 찾아왔다. 그들은 VIP 대기실로 한율을 안내한 뒤, 게이트 경계 지역과 방어선, 그리고 러시아군 숙소에서 머무는 동안 특별히 보고 들은 게 있으면 모두 알려달라고 했다.
한율은 그동안 노트북으로 정리한 각종 동영상과 녹음 파일을 몽땅 건넸다. 그러나 죄수들을 격전지로 보내기 위해, 각성자 행세를 하던 죄수들을 알고도 모른 척한 것 같았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실험에 참여할 각성자를 취합해 그곳으로 보낸 건 러시아 정부였을 테니.
그 일에서 러시아 정부와 막심은 공범이었다.
[혹시 이 안에 실험 영상도 포함됐습니까?]
“네. 나중에 연구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촬영했습니다. 화질은 조금 안 좋지만, 소리는 잘 들어갔을 거예요.”
[협조 감사합니다.]
러시아 정부 측은 대사의 걱정처럼 한율을 의심하거나, 남아서 도와달라고 붙잡지 않고 순순히 물러갔다.
각성자 연구소 직원이 자신의 추측을 말했다.
“애초에 그 게이트에서 실험해달라고 한 게 러시아 정부라, 꼬투리 잡지 못하고 그냥 간 게 아닐까요? 막심 밑에서 그의 동태를 살피는 군인들도 있을 테고요. 그런데 왜 쿠데타를 일으켰을까요?”
외교부 직원이 조용히 말했다.
“도착한 첫날, 막심이 괴물 사체와 648명을 한꺼번에 화장했다고 했잖습니까. 그중 절반이 막심의 부하 병사들이었다고 합니다. 전부 불태우란 명령이 내려왔을 당시 살아있었지만, 부상이 심해 움직일 수 없어 그대로 죽게 된 병사들이 많았다더군요.”
“아….”
“그리고 우리가 겉으로 본 것과 달리 물자 공급도 원활한 것 같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이제 겨울이 시작되지 않습니까. 다 내 추측이지만, 그대로 게이트를 지켰다가는 모두….”
“그냥 사리사욕에 눈먼 미친놈일지도 모르죠.”
정상욱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끼어들었다.
“행위만 보십시오. 결계가 곧 사라질 걸 알면서 그 위험한 레드 게이트를 방치하고 도망치려는 거잖습니까. 본인들이 떠나면 그 일대가 어떻게 될지 뻔히 알면서.”
“아….”
똑똑. 항공사 직원이 찾아와 탑승을 안내해주었다. 무겁게 내려앉은 분위기 속에서 그들은 비행기로 이동했다.
한국에 도착한 건 12월 2일 새벽.
한율이 게방부의 차를 타고 어스래빗 숙소에 도착했을 땐, 건물의 모든 불이 꺼져 있었다. 거리엔 여전히 한율을 보러 온 팬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최대한 낮춘 목소리로 인사하거나 카메라로 촬영만 했다.
“태워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러시아 출장, 수고 많으셨습니다.”
대문을 열고 캐리어와 가방을 챙겨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현관문이 벌컥 열리더니 달냥이 튀어나왔다. 므아아앙! 뭐 하다 이제야 왔냐는 듯 요란스럽게 울면서.
이어서 차남석이 나왔다.
“네가 온 거 알았는지, 문 열어달라면서 자는 사람 머리 때리더라.”
한율은 달냥을 안아주며 차남석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형.”
“줘.”
차남석이 슬리퍼를 직직 끌면서 한율의 캐리어를 대신 들었다. 새로 염색했는지, 상한 머리카락이 여기저기 엉망으로 뻗쳤다.
“이프림이 지금 형 모습을 봐야 하는데.”
“너 멤버들 개인 라방 안 챙겨보지? 이런 자연스러운 모습 오픈한 거 한두 번 아니거든?”
“미안해요.”
“괜찮아, 나도 마찬가지라. 어쨌든 타지에서 고생 많았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는지 이건우와 라이언이 비실비실 거실로 나왔다.
“한율아, 왔어?”
“하뉼~, 하이~.”
“다녀왔습니다. 잠 깨워서 미안해요.”
“아니야. 어서 와.”
이건우가 반쯤 눈을 감은 채 어깨를 가볍게 끌어안곤 토닥거렸다. 라이언도 한율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헛소문 믿고 테러한 멍청이들은 혼내줬어?”
“그쪽 사람들이 대신 혼내주기로 했어요. 그동안 별일 없었어요?”
이건우가 거실에 설치된 대형 케이지를 가리켰다.
“구동이가 박가람이 가져온 화분 잎사귀 다 뜯어 먹었어. 그래서 벌 받는 중.”
케이지에 갇힌 구동이 철창을 꼭 쥐고 서서 애처롭게 울었다. 끼우웅….
“저런.”
케이지 문을 열어주자 구동이 폴짝폴짝, 한율의 발등으로 올라와 바지를 꼭 잡았다. 끼웅.
라이언이 물었다.
“밥은 먹었어? 배 안 고파?”
일주일 가까이 거칠고 삭막한 러시아 군인들에 둘러싸여 지낸 탓일까. 어스래빗 숙소엔 평화롭고 몽글몽글한 공기가 흐르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보일러 덕에 따뜻하기도 하고.
“일단 씻고 눈 좀 붙이려고요. 형들도 들어가서 다시 자요.”
“응. 잘 자, 하뉼.”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미리 톡으로 말해. 준비해놓을 테니까.”
“네.”
방은 멤버들이 매일 청소해주었는지 깨끗했다. 한율은 우선 짐부터 모두 정리한 후 욕실로 들어갔다. 씻고 나왔을 땐 달냥과 구동이 베개 양쪽에 자리 잡고선 한율을 빤히 바라보았다.
한율은 편히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동안 밝아진 새벽빛은 암막 커튼으로 가렸다.
‘러시아군의 쿠데타 기사는….’
포털사이트 세계 뉴스란에 딱 하나가 올라왔다.
[러시아 군부 쿠데타 발생]
짤막한 기사엔 한율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 러시아 병사들이 일행에게 총을 겨눴던 일과 쿠데타를 일으킨 막심이 레드 게이트 현장 지휘관이라는 사실, 천여 명의 각성자가 가세했다는 사실도.
‘내가 만든 결계가 쿠데타 기회로 작용했다는 사실보단, 각성자 천여 명이 가세했다는 사실을 감추고 싶어서 정보를 통제하는 게 아닐까?’
러시아는 각성자를 대상으로 위험한 생체 실험을 자행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런 나라에서 수백 명도 아니고 천여 명이 단체 행동을 했다? 그 자체로 러시아를 향한 수많은 의혹을 불러일으킬 터.
한율은 실험 중 만난 러시아 각성자들을 떠올렸다.
한율을 정말 아이돌처럼 바라보는 시선, 경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많았으나, 무거운 근심을 짊어진 듯한 사람도 많았다. 당시엔 게이트 사태로 힘들어서 그렇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말이다. 인원이 워낙 많아 일일이 대화를 나눌 틈도 없었고.
한율은 작게 한숨을 내쉬곤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어차피 다신 갈 일도 없고, 다른 나라 상황까지 신경 쓸 만큼 자신은 오지랖이 넓지 않다. 그래야 할 이유도 없고.
그렁그렁. 기분 좋게 골골송을 부르는 달냥을 쓰다듬으며 생각의 주제를 바꿨다.
‘게이트의 축소 속도를 높일 만한 더 효율적인 방법은 없을까?’
잠들었다가 다시 일어난 건 정오 무렵.
숙소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고요했다. 어스래빗 단톡방을 살펴보니 라이언과 강보배는 트레리안 스케줄, 길우성과 차남석, 이건우는 RMMA 특별 무대 연습을 하러 간 듯했다. 유호와 박가람은 따로 톡을 올리지 않았다.
한율은 주방으로 가서 커다란 냄비 뚜껑을 열었다. 박가람의 생일이라 소고기미역국을 끓인 걸까.
쿵, 쿵. 그때 누군가 리듬을 타듯 계단을 내려오더니, 한율을 보곤 화들짝 놀랐다.
“워우씨! 뭐냐, 서한율? 언제 왔냐?”
“오늘 새벽에요. 구동이가 무슨 화분 잎사귀를 먹은 거예요?”
하아. 박가람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쌀떡이 친구 꽃집 가게에서 보내준 화분. 굉장히 비싼 거라고 했는데, 되게 예뻤는데, 잠깐 한눈판 사이에 구동이 자식이 죄다 잘근잘근 씹어먹었더라. 하하하. 정원 돌봐줄 전문가 쌤을 모셔와야겠어. 구동이 자식, 수액 편식하는 거 너 알고 있었냐? 이제 인터넷으로 주문한 수액은 먹는 둥 마는 둥 하고선 사람 빤히 쳐다본다? 이게 최선이야? 이런 표정으로? 그걸 네가 봤어야 했는데 진짜.”
고요했던 숙소가 시끄러워졌다.
“그만 떠들고 밥 먹어요.”
“엉. …아니, 네가 물어봐서 대답한 거잖아!”
뒤늦게 일어난 유호까지. 한율은 세 사람과 늦은 점심을 먹으며 그동안 어스래빗 멤버들, 그리고 주변에서 벌어진 온갖 잡다한 일을 들었다.
“아. 그리고 오늘 나리 씨 수능인 거 알지?”
“오늘이었어요?”
“엉. 괜찮을까 모르겠다. 공식적으로 얼굴 드러낸 적은 없지만, 웬만한 애들은 인터넷 통해서 나리 씨 신상 알고 있을 거 아니야.”
“그런데 나리 씨, 어느 학과 지망이야?”
“당연히 컴 쪽 아닐까?”
“국가 기관에서 알바할 만큼 이미 해킹 실력이 뛰어난데, 대학에 가서 굳이 또 배운다고?”
“응? 듣고 보니 그렇네? 이따가 만나서 물어보면 되겠지.”
한율 또한 계나리의 희망 진로를 들은 적이 없었다. 계나리 본인도 ‘이번’ 역시 대학에 갈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한 상태였고.
“언제 만나기로 했는데요?”
“내일이나 모레. 학교에서 널 대신해 우리한테 기초 가르쳐준 분이잖아. 수능 수고했다는 의미로 맛있는 밥을 대접하기로 했지. 서한율 너도 따로 선물 준비할 거지?”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야죠.”
그동안 계나리를 여러모로 부려 먹기만 하고, 제대로 보상다운 걸 해준 적이 없었다.
한율은 무슨 선물이 좋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집었다.
늦은 오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진 한 학교.
정문 앞에는 수험생을 기다리는 학부모의 차로 가득했다. 본래는 주정차 금지구역이지만, 날이 날인지라 무척이나 혼잡했다. 정상적으로 통행하는 차량에 방해될 만큼 엉망으로 차를 세운 사람도 많았다. 아예 길을 어중간하게 막아선 차도 있고.
그 때문에 왕복 4차선 도로가 1차선 도로가 된 상황.
‘답답하네.’
웬만하면 운전 중에 짜증을 내지 않던 한율도 미간을 찡그렸다. 급기야 한 운전자가 비상등만 켜놓고 길을 막은 차를 향해 소리 질렀다.
“차 빼요! 뭐 이따위로 세워놓… 뭐야, 운전자 어디 갔어?!”
운전자가 없다고?
졸지에 함께 도로에 갇히게 된 한율은 어쩔 수 없이 비상등을 켜곤 차에서 내렸다. 수억짜리 스포츠카를 신기하게 구경하던 사람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한율?!”
“워, 서한율이다!”
“서한율? 어디요?!”
한율은 뒤에 있던 다른 운전자들에게 꾸벅꾸벅 양해를 구하며, 앞에서 길을 막은 차에 다가갔다. 정말로 운전석에 사람이 없었다.
이딴 식으로 차를 세워놓고 가면 모두에게 피해가 된다는 걸 모르는 걸까. 수험생을 기다리는 차라면 바로 근처에 운전자가 있을 테지만, 누군지 몰라도 뻔뻔하게 철판을 까는 게 분명했다.
한율은 한숨을 푹 내쉬곤 길을 막은 차를 공중에 띄웠다. 자신의 차도 함께. 그러곤 도로에 갇힌 다른 차들을 향해 이동하라고 손짓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