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5화 (417/427)

우리 지구 잘 부탁드립니다

큭큭.

“…….”

바로 앞에 한강이 흐르는 주차장. 차에는 향긋한 커피 향이 감돌았다.

한율은 고개까지 돌리며 웃는 계나리를 향해 물었다.

“그게 그렇게 재밌어?”

계나리가 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드디어 수능을 봤다는 감격과 허한 마음이 공존하는 붕 뜬 상태로 터덜터덜 나오다, 유명한 아이돌이 차 두 대를 허공에 띄운 채 교통 정리하는 비현실적인 상황을 마주하면 누구나 웃음부터 터뜨릴걸요? 아, 내가 치른 시험은 지극히 상식적인 현실이었구나.”

“놀리는 거지?”

“아니요? 아닌데용? 그나저나 오빠 너무한 거 아니에요? 어떻게 진짜 모습으로 마중 나와요? 나 나중에 사회생활 어떻게 하라고?”

그러나 계나리의 얼굴은 걱정이 아닌 웃음기로 가득했다. 한율은 선물을 건네며 말했다.

“이미 전 국민이 다 아는데 새삼. 자.”

“이게 뭐예요?”

“수능 보느라 수고했다는 선물 겸, 지금까지 여러모로 도와준 것에 대한 작은 보답.”

“와, 예쁘다!”

선물 상자를 열어본 계나리의 얼굴이 환해졌다.

“지금 차봐도 돼요?”

한율은 대답 대신 손을 내밀었다. 계나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왼손을 내밀었다. 한율이 준비한 선물은 아주 작은 토끼 장식이 달린 얇은 팔찌였다.

직접 팔찌를 채워주며 말했다.

“전기 충격기 일일이 들고 다니는 거 번거롭잖아. 그래서 비슷한 공격 마법이랑 보호 마법 새겨놨어. 필요할 때 강도 조절해서 사용해.”

“이렇게 제자의 니즈를 파악해 선물해주는 센스에, 크! 감사합니다! 그런데요, 오빠?”

계나리가 채워진 팔찌를 이리저리 살피며 물었다.

“두 가지 외에 또 다른 마법의 기운도 느껴지는데요? 뭐죵?”

한율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아. 위치 추적 마법.”

계나리가 화들짝 놀란 표정을 과장되게 지으며 한율과 거리를 벌렸다.

“왜죠?!”

“네 신상이 퍼진 이상 언제든 널 노리는 놈들이 나타날 수 있잖아. 그럴 때를 위한 대비 수단이니까 걱정하지 마. 네 신변에 이상이 생기지 않는 한 추적할 일 없어.”

“아니, 하지만…. 이러면 왠지 감시당하는 것 같고, 나중에 대학 가서 남자친구 사귀게 되면 그때도 왠지 오빠가 날 지켜보고 있지는 않을까, 살짝 의심이 들어서 마음 놓고 연애도 못 할 것 같고….

“너도 내 핸드폰에 위치 추적 앱 심어놨잖아.”

“……?!”

“새 핸드폰 사면 몰래 깔아놓고, 또 깔아놓고. 모를 줄 알았어?”

계나리가 팔찌를 감싸며 고개를 돌렸다.

“…쳇. 들켰나.”

[속보입니다.]

그때, 작게 켜놓은 라디오 속보가 두 사람의 신경을 끌었다.

[러시아에서 각성자 천여 명이 단체 행동에 나섰다는 소식입니다.]

한율은 살며시 라디오 볼륨을 높였다.

라디오는 그동안 비인권적인 생체 실험을 당했던 러시아 각성자들이, 한율의 게이트 실험 참여로 모인 것을 기회로 똘똘 뭉쳐 조직을 결성했다고 알렸다.

[실험에 참여하면 당분간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어 본인들도 상당히 불안했을 텐데요.]

[네. 이에 일부 러시아 국민은 실험이 시작되기 전 단체 행동에 나서지 않은 것만 봐도, 이들이 오롯이 본인의 안위를 위해 움직이는 게 아니라며 지지 의사를 표했지만, 각성자들 뒤에 레드 게이트를 지키는 군부대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큰 파장이 일고 있습니다.]

[사실상 각성자들과 함께 정부에 반기를 든 것이군요.]

[네. 그러나 많은 전문가는 사실상 공동의 적, 즉 게이트가 있어서 내전으론 쉽게 번지진 않을 거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우선 러시아 각성자들의 요구사항을 보면….]

쯧쯧. 계나리가 혀를 찼다.

“기껏 도와줬더니 자기들끼리 난리네요. 설마 이 일로 오빠 탓하는 바보가 나오진 않겠죠?”

“글쎄.”

한율은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나저나 대학은 어디로 갈 생각이야?”

하하하. 계나리가 교과서를 읽는 톤으로 웃었다.

“합격하면 알려드릴게요. 공부를 제대로 못 해서 시험을 망쳤거든요.”

“그런 것치곤 시험장에서 나왔을 때 기분 좋아 보이던데?”

“그거야 오빠의 모습을 보고?”

계나리가 생글생글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곤 저 멀리 한강 너머를 바라보며 작게 숨을 내뱉었다.

“실은 수능을 본 것만으로 정말 행복하거든요. 지난번엔 수능은커녕… 음, 그랬으니까. 과거로 돌아와 오빠들이랑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도, 수능 날짜가 다가오는 걸 보면서도 솔직히 ‘진짜 내가 대학에 갈 수 있나?’ 했던 의심이 계속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게이트 크기까지 줄어들고….”

계나리가 한율을 향해 활짝 웃었다.

“아침엔 시험장에 딱 앉자마자 울뻔했다니까요?”

“그래도 아직 기뻐하기엔.”

“아니요?”

계나리가 고개를 저었다. 타악. 그러곤 제 가슴팍을 치면서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날 봐요, 오빠. 나, 건강하잖아요.”

“……?”

의아하게 계나리를 바라보던 한율은 뒤늦게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아.”

계나리가 씩 웃었다.

“미래의 내가 다시 과거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건, 지금 오빠가 하는 일들이, 가는 길이 틀리지 않았다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오빠.”

꾸벅. 계나리가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도 우리 지구 잘 부탁드립니다.”

한율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 * *

계나리는 오늘 가족끼리 저녁 외식을 하기로 한 터라, 밥은 다음에 먹기로 했다. 계나리를 집 앞까지 태워다준 한율은 곧장 WB래빗 엔터로 차를 몰았다.

어스래빗 연습실.

“써한, 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거냐.”

길우성이 다짜고짜 TV를 가리키며 물었다.

“뭔 짓을 했길래 뉴스에 네가 나오냐고.”

몇 시간 전, 한율이 길을 막은 불법 주정차량을 허공에 띄워 교통정리를 한 모습이 뉴스에 나오고 있었다.

[불법 주정차량에 도로에 갇힌 각성자, 결국]

한율은 어깨를 으쓱이곤 안무 연습용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17일에 열리는 뮤닷 RMMA는 안전을 위해 비대면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시상식만 생방송으로 진행되고 공연 무대는 모두 사전 녹화 형식으로 이뤄질 예정. 어스래빗은 전날인 16일에 사녹을 진행하기로 했다. 한율의 첫 솔로 데뷔 무대도.

잠시 후. 여덟 명의 어스래빗 멤버가 연습실에 모두 모였다.

멤버들 앞에 선 유호가 새삼 기쁜 얼굴로 말했다.

“오래간만에 우리 멤버 전부 모인 거 보니까 반갑다. 한율이 넌 오늘 새벽에 귀국했는데, 컨디션은 괜찮아?”

“네. 비행기에서도 자고 숙소에서도 푹 자서, 팔팔해요.”

“좋아. 그럼 다 같이 몸부터 풀고, 연습하자.”

오래간만에 하는 단체 안무 연습. 그동안 게이트 관련 일로 바빴다지만, 아이돌이 본업이라고 공언한 만큼 무대에서 엉망인 모습을 보이는 건 꼴이 우습다. 한율은 그동안의 연습 부재로 일어난 자잘한 실수를 바로바로 반복하면서 고쳤다.

“한율아, 각도 조금만 더 맞추자.”

“네, 죄송합니다.”

단체 안무 연습이 끝난 후엔 보컬 연습실에서 노래 연습을 하고, 다시 어스래빗 연습실로 돌아왔다. 그사이 직원들이 박가람의 생일파티 라이브 방송을 위해 화려하게 꾸며놓았다.

라이브 방송 시작.

“안녕하십니까! 어스!”

“래빗!”

“인사드립니다!”

“드디어 다시 1년이 지나, 오늘이 돌아왔습니다!”

화려한 고깔모자를 쓴 박가람이 두 팔을 위로 뻗었다.

“바로 이 몸의 탄생일이!”

“박가람! 박가람!”

-가람아 생일 축하해♡♡♡♡♡

-혹시 율톢, 가람이 생일 축하해주려고 맞춰서 오늘 귀국한 거야ㅠㅠ?

-애들 다 모인 거 보니까 너무 좋다ㅜㅜ

-두 달 만에 단체 라방ㅠㅠㅠㅠ

오늘 생일파티 라방은 주인공이 박가람인지라, 여느 때보다 시끌벅적하게 시작되었다. 생일 축하 노래에 이어 선물 증정식이 이어진 후엔, 평소처럼 근황을 떠들거나 올라오는 채팅을 읽었다.

“그러고 보니 한율아, 너 오늘 교통정리 실검 뜬 거 그거 뭐야?”

“아. 오늘 친한 동생이 수능을 봤거든요. 그래서 수고했다는 의미로 선물 전해줄 겸 갔다가, 길을 막은 차가 있길래 좀 들어 올렸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서한율이라 가능한ㅋㅋㅋㅋ

-세계 최강의 각성자도 불법 주정차량엔 어쩔 수 없지ㅋㅋㅋ

-[친한 동생=미스터리 해커?]

-나 그거 너튜브에 올라온 영상 봤어ㅋㅋㅋ

-아니 무슨 차를 도로에 떨어진 인형 줍듯이 말해ㅎㅎ

-율톢 귀한 힘 낭비하게 한 불법 주정차량 차주는 반성해라

“나중에 차 주인이 뭐라고 안 했어?”

“미안하다고 사과하시던데요?”

“차 무게가 얼마나 되지? 1t 조금 넘나?”

“한율인 나중에 게이트 없어지면 공사 현장에서 아르바이트해도 될 것 같다. 라고 이프림이.”

한율은 고개를 기울였다.

“게이트가 사라지면 능력도 사라지지 않을까요?”

“응? 아니, 그 전에.”

길우성이 눈을 부라리며 따졌다.

“게이트가 사라지면 아이돌에 다시 집중해야지, 어디 다른 일을 하려고!”

이프림이 단체로 반응했다.

-옳소!

-서한율은 본업에 집중해라!

-율톢 도망 못 감. 아무튼 못 감. 바짓가랑이 붙잡고 못 가게 늘어질 거임ㅇㅇ

* * *

3일 아침, 대형 포털사이트 메인.

[[속보] 서한율 실험 참여 러 게이트, 이번에도 크기 줄었다!]

[러시아 게이트 연구소가 지난달 31일, 서한율이 러시아 각성자의 힘으로 결계를 만들었던 레드 게이트 크기가 최초 발생 시점보다 약 6m 줄었다고 공식 발표했다.

러시아는…(중략).]

한율은 핸드폰으로 기사를 보면서, 한국 게이트 괴물 연구소 소장과 통화했다.

“전부 아니었단 말씀이시죠?”

한국이 움직이는 게이트, 쌍두 족제비 괴물의 존재를 알린 지 벌써 한 달이 훌쩍 지났다. 그동안 세계 곳곳에서 쌍두 족제비로 추정되는 괴물을 봤다는 목격담이 쏟아졌다. 각국은 포획하려 노력했으나, 애꿎은 족제비를 괴물로 착각한 경우가 다수였다. 아니면 비슷하게 생긴 괴물을 착각했거나.

또한 한국처럼 동물 집단 이상 행동이나 실종 현상도 벌어지지 않았다. 쌍두 족제비로 추정되는 괴물이 나타난 지역에서 사람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일도 있었지만, 조사해보니 범죄 피해자였다던가.

-[네. 펫펫바이오에 있었을 때 머리가 하나였던 점을 고려해, 아직 게이트를 열기 전 상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DNA 검사까지 진행해봤지만, 우리가 올린 데이터에 부합하는 개체가 없다고 합니다.]

“찾아내고도 숨길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그럴 가능성도 있겠죠. 어쨌든 한국엔 두 마리나 잡히지 않았습니까. 미국에서….]

소장이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한 마리를 미국으로 보내 달라고 요청해왔습니다. 자신들이 직접 연구해보고 싶다고요.]

“안 됩니다. …아니, 반대하고 싶네요.”

아무리 한국을 구한 영웅이라 떠받들어진다곤 해도, 한율에겐 국가 기관에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단호히 거부 의사를 표명했다가, 정정했다.

“아무리 미국의 기술이 뛰어나다곤 해도, 게이트는 전혀 다른 문제잖아요. 머리 하나가 더 늘어났던 것처럼 숨겨진 무언가가 더 있을지도 모르고요. 지금이야 두 마리 모두 얌전히 있지만, 사납게 날뛰면서 뭐든지 삼키려들 때 안전하게 제압할 수단이 있는지 걱정되기도 하고. 소장님도 아시다시피 그 녀석들, 보기보다 약하잖아요. 그것도 고작 둘밖에 없는데, 한 놈이라도 잘못되었다가는….”

-[그래서 제압할 수 있는 각성자들도 함께 데리고 와, 직접 살피고 싶다고 합니다. 만약을 위해 한율 씨에게도 협조를 부탁하고 싶다고요.]

쌍두 족제비의 게이트 너머에 고향이 없다고 장담할 수 없는 상황. 그러나 미국은 한국의 중요 동맹국이었다. 지난번처럼 도움을 주는 대가로 무기를 잔뜩 뜯어올 수 있는 나라이기도 하고.

한율은 잠시 망설이다가, 일단 떼를 쓰기로 했다.

“안 돼요. 바빠요.”

-[네?]

“당분간 협조는 바빠서 힘들 것 같아요.”

-[아….]

“아직 그 녀석들로 시도해보지 않은 실험도 많아요, 소장님. 그러니 지금 미국으로 보내는 건 너무 이른 것 같아요.”

-[음…. 그럼 제가 미국 측에 잘 설명해보겠습니다. 실험은 언제 재개할 수 있겠습니까? 그쪽에서, 쌍두 족제비는 못 데려가게 되더라도 실험하는 걸 직접 보고 싶다고 해서 말입니다. 미국뿐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요청을 해왔고요.]

한율은 달력을 보며 대답했다.

“12월 17일 이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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