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차분하고 쿨하다고?
오후. 대형 포털사이트 메인.
[서한율 소속사 WB래빗 엔터, 게이트 괴물 포획!]
[오늘 12일 새벽, 서한율의 소속사 WB래빗 엔터에서 결계가 없는 지하 주차장을 통해 침입한 괴물 두 마리가 생포되어 게이트 괴물 연구소로 인계되었다. WB래빗 엔터는 오전 내내 게이트 방어 지휘부와 게이트 괴물 연구소의 조사가 끝날 때까지 업무가 마비되었으나, 다친 아티스트나 직원은 없다고 전했다.]
-어쩐지 새벽에 갑자기 경찰 출동하고 게방부랑 괴물 연구소 차 왔다더니
-괴물들 ㅈㄴ 멍청하네ㅋㅋ 하고 많은 곳 중 하필이면 서한율 소속사ㅋㅋㅋㅋ
ㄴ일부러 들어간 것일지도 모르죠. 저기 항상 사람들 모여있는데 굳이 지하 주차장 통해서 내부로 들어간 거 보면
-지금은 직원들 평소처럼 들락거리고 있음
-직원들이 괴물들 직접 잡은 거?
기사엔 잡힌 괴물들이 쌍두 족제비로 추정된다는 내용이 빠졌다. 지금 알려봤자 사람들에게 불안과 혼란을 줄 수 있다는 게방부의 판단이었다. 게이트 괴물 연구소 역시 ‘장이’가 게이트 머리를 삼켰다는 정보를 협력 중인 나라의 연구소에만 공유하기로 했다. 잠깐 게이트를 감쪽같이 숨기고 있을 가능성도 있는 까닭이었다.
어스래빗 숙소. 한율은 자신의 방으로 찾아온 유호, 박가람과 이야기를 나눴다.
박가람이 중얼거렸다.
“그럼 우리 회사에서 잡힌 놈들도 이전엔 머리 하나가 더 달려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네?”
“그럴지도요. 어쨌든, 실험 결과를 기다려봐야 할 것 같아요.”
“그놈들한테서 게이트 소멸에 대한 단서, 꼭 얻었으면 좋겠다.”
“이참에 다른 게이트도 먹을 수 있는지 실험해보는 건? 그놈들, 날지 못해서 게이트에 닿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잖아. 홀릴 수 있는 동물도 다 네 발 달린 것들뿐이었고.”
“이미 게이트 앞에 데려가 본 적은 있지만.”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같은 종이면 실험체가 두 마리 더 늘어난 격이니까, 더 다양하게 실험해봐야죠.”
“그래. 한율이랑 연구소가 어련히 알아서 잘할까.”
“음, 음.”
“그나저나 어젠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못 물어봤는데, 형은 괜찮아요? 마나만으로 두 놈 제압하는 거 힘들었을 텐데.”
“놓치면 절대 안 된다는 생각에 집중했더니 어떻게든 되더라. 숙소 돌아와선 바로 곯아떨어졌지만.”
박가람이 유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음, 이제 하산할 때가 된 것 같군. 안 그러냐, 교장 쌤?”
마법 학교 인원 중 아직 마법을 배우지 못한 건 유호뿐이었다. 박가람은 이제 유호도 마법을 배울 시기가 아니냐는 얼굴로 바라보았고, 유호도 살짝 기대하는 눈으로 한율을 바라보았다.
한율은 살며시 미소 지으며 유호에게 말했다.
“RMMA랑 이런저런 실험 끝난 후에 스케줄 맞춰봐요, 형.”
유호가 환하게 웃었다.
“응. 최대한 한율이 너한테 맞출게.”
“그럼 전 좀 쉴게요. 밤을 새웠더니 아직도 피곤하네요.”
“그래.”
두 사람이 방을 나가며 문을 닫았다.
“하….”
한숨을 내쉬는 한율의 입가가 내려갔다.
사실 그는 러시아에서 돌아온 이후로 쭉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정확히는 게이트가 축소되었단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조금씩 신경이 곤두섰다.
모든 게이트가 사라지면 그의 고향 역시 지구인에게 침략당할 위험이 사라진다. 이대로 게이트를 없앨 방법을 찾는 게, 지구를 멸망시키는 것보단 덜 수고스럽고 덜 귀찮은 일이란 것도 아주 잘 안다.
이성적으론.
그러나 멀쩡히 있었던 게이트가 ‘무언가’의 의지에 따라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지는 모습을 봤더니 짜증이 울컥 일었다.
멸망에 이른 세상에서 도망칠 수 있도록 열린 노란색 게이트.
그의 고향에선 끝내 볼 수 없던 노란색 게이트가, 그의 앞에서 사라졌다는 것에.
‘꼭… 내가 있으니 필요 없다는 것처럼.’
지구인에게 도망칠 길을 열어주지 않아도 괜찮다는 게이트의 판단. 그 판단에 자신의 활약이 크게 한몫했을지도 모른다고 가정했더니, 처음 길우성을 마주쳤을 때 일어난 살의를 눌러 담고 ‘친구’가 되려 노력했을 적의 불쾌감이 새록새록 살아났다.
‘현재’를 사는 지구인은 그의 고향을 짓밟은 적이 없는데도.
한율은 재차 한숨을 쉬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믕…. 저 멀리 캣타워에 앉은 달냥이 한율을 바라보며 낮게 울었다.
까딱. 오라고 손짓하자, 폴짝 캣타워에서 뛰어내리곤 달려오는 달냥. 여전히 그에게서 나는 쌍두 족제비 냄새가 싫을 텐데, 가라앉은 기분을 달래주려는 것처럼 옆에 누워 시선을 맞춰 끔뻑거렸다.
한율은 천천히 달냥을 쓰다듬었다. 못생겼지만 참 귀여운 생물이었다. 끼웅. 어느새 구동도 다가와 한율의 팔에 밀착한 채 몸을 웅크렸다.
그렇게 작은 두 생명의 온기에 마음을 달랠 때였다.
똑똑, 벌컥.
“써한! 우리 회사에서 쌍두 족제비가 잡혔다는 게 사실이야?!”
“…….”
불청객의 소음에 미간이 왈칵 구겨졌다.
한율은 길우성을 노려보았다.
“넌 대답도 안 듣고 남의 방문을 벌컥벌컥 여냐?”
길우성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설픈 사투리를 썼다.
“마! 우리가 남이가?”
“꺼져. 그리고 쌍두 족제비 아니야.”
“엉, 알았어. 쉬어.”
달칵. 길우성이 문을 닫고 사라졌다.
한율은 깊은 곳에서 울컥 올라오는 짜증을 한숨으로 내뱉었다.
다음 날, WB래빗 엔터.
어제 그 난리가 났으나, 어스래빗을 담당하는 매니지 B팀의 오동식 팀장은 오늘도 정상 출근해서 일하고 있었다.
“어서 와, 한율아.”
참 어지간한 일벌레라고 생각하며, 한율은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RMMA가 끝난 후 제 개인 일정을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음, 편히 말해.”
“일단 우리나라 게이트에서 실험 하나를 진행하고 스페인으로 갈 생각이에요. 그곳에서 사흘 정도 머문 후에, 히말라야에 들렀다가 올게요.”
“…거기.”
탁상 달력에다 펜을 끼적거리던 오 팀장의 손이 멈췄다.
“너무 위험하지 않아?”
아무런 대비도 못 한 상황에서 최초로 게이트 사태를 맞이한 곳. 하물며 지형까지 상당히 험난해, UN군이 나서서 돕고 있음에도 꾸준히 큰 피해가 일어나는 곳이었다.
한율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저, 지구 최강의 각성자잖아요. 능력 회복 충분히 하고 갈 테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각성자 연구소는 18일 게이트 앞에서 직접 실험에 참여할 각성자들의 신청을 받는다는 공지를 내걸고, 각성자들에게 개별적으로도 참여 독려 메시지를 보냈다.
* * *
12월 16일. 경기도에 있는 거대한 실내 스튜디오 두 곳에선 어제에 이어 <2021 RMMA> 무대 공연 사전 녹화가 한창이었다.
올해는 게이트 사태 때문에 6월 이후 가요계가 완전히 죽어버린데다 안전상의 문제도 있어, 관객 없이 예년보다 작은 규모로 치러질 예정이었다. 내일 시상식은 이곳이 아닌, 뮤닷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생방송으로 진행하고.
그래도 이렇게 큰 공연이 열리는 건 7월 <게이트 피해 성금 마련 부산 K-POP 콘서트> 이후로 처음. 아이돌들은 한껏 들뜬 모습이었다. 그동안 눈치 보면서 재개되는 각종 방송 프로그램 혹은 자체 콘텐츠를 촬영한 팀도 있었으나, 아이돌로서의 아이덴티티를 확실히 드러낼 수 있는 곳은 역시 무대이기에.
“스카이러너 순서는 우리 다음이던데. 일찍 오셨네요, 선배님?”
대기실 복도. 막 어스래빗 멤버들과 함께 출근한 한율은 스카이러너의 용맹과 마주쳤다. 다른 멤버들과도 인사를 나눈 용맹은 벌써 진한 무대 메이크업에다 머리 세팅까지 마친 화려한 모습이었다.
“아침에 스페셜 무대 녹화 있었거든. 그때부터 쭉 여기 있었어. 그나저나 오래간만에 직접 얼굴 보니까 좋다. 한율이 네 솔로 무대 녹화는 몇 시야? 큐시트에 없던데.”
“어젯밤에 끝냈어요.”
“그래서 안 보였구나. 오늘은 사녹 끝나면 곧장 퇴근?”
“네.”
“그럼 오래간만에 같이 밥 먹을까? 저녁도 괜찮고, 밤도 괜찮고. 한율이 네 편한 시간에 맞출게.”
호의와 친밀감으로 가득한 시선. 한율은 미안한 미소를 지었다.
“어쩌죠. 곧 있을 여러 가지 실험에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아서 오늘은 곤란할 것 같아요.”
“아냐, 아냐. 미안해할 것 없어. 네가 아주 바쁜 거 잘 아는데. …음.”
고개를 흔든 용맹이 잠시 머뭇거렸다. 무언가 따로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던 걸까.
유호가 슬쩍 끼어들었다.
“한율이 메이크업 순서 마지막.”
한율은 유호에게 고맙다는 미소를 짓곤 용맹에게 말했다.
“마침 지금 20분 정도 시간이 났네요.”
용맹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한율은 따뜻한 레몬 생강차가 든 텀블러를 챙기고 용맹과 스카이러너 대기실로 향했다. 스카이러너 멤버들은 아직 출근 전이라 휑했다.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도 눈치껏 자리를 피해주어, 대기실엔 한율과 용맹만 남았다.
한율이 나눠준 레몬 생강차를 한 모금 마신 용맹이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네 차도 정말 오래간만에 얻어 마신다. 이젠 서로 마주칠 만한 음방도… 언제 다 정상 재개될지 모르니.”
“재개되어도 예전처럼 자주 마주치기는 어려울 것 같지만요.”
“인기가 많을수록 국내 음방 활동도 고작 일주일만 하고 끝내는 경우가 많으니까. 하하, 이러니까 잘난 체하는 것 같다.”
“스카이러너는 그래도 되잖아요.”
“어스래빗도 그렇고.”
장난스럽게 받아친 용맹은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러곤 한율이 입가에서 컵을 떼는 타이밍에 맞춰 말했다.
“있잖아, 한율아. 나 물어볼 거 있는데.”
“네.”
“퍼플아워 은수 씨랑… 정말 아무 사이 아닌 거지?”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구나….”
표정을 보아, 이성적인 관심이 있어 물어보는 것 같진 않다.
용맹이 곧이어 이유를 술술 말했다.
“지난 주말에 온더로즈 SE 선배님 생일파티에 친구랑 갔다가 은수 씨랑 마주쳤거든. 우리랑 마주치자마자 굉장히 당황해하던 걸로 봐선, 남돌이 올 줄 모르고 의연 씨한테 끌려온 것 같았지만… 어쨌든, 친구가 은수 씨랑 가까워지고 싶다고 해서 혹시나 하고. 아이돌이라 당장 연애는 힘들지만, 친한 오빠 동생 사이라도 되고 싶다나.”
“아아.”
이해되었다. 여러모로 서툴기는 해도 귀엽고 성실한 아이니. 하물며 게이트 방어선에서 사람들을 돕기 위해 군사 기초 훈련까지 받고, 정말로 위험한 전장에 발을 디디는 용감한 마음도 지녔으니 이성에게 인기가 많을 수밖에.
“너랑 은수 씨 사이의 소문을 믿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봤어. 그나저나 은수 씨.”
용맹이 안심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방송에서의 모습이나 사람들이 말하는 이미지랑 다르게 차분하고 어른스럽더라. 쿨한 부분도 있고.”
“……?”
차를 마시려던 한율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용맹을 바라보았다.
“누가요?”
용맹도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이며 대답했다.
“은수 씨.”
진은수가 차분하고 쿨하다고?
한율이 대충 이런 눈으로 바라보자 용맹이 목 뒤를 긁적였다.
“…아니, 어…. 내가 봤을 땐 그렇던데? 술에 취하니까 조금 잘 웃기는 하던데, 그래도 게임 할 때 인정사정 안 봐주고 올킬해버리는 것도 멋있고.”
“술도 마셨어요?”
“응. 은수 씨도 성인이잖아. …한율이 너 설마 은수 씨 나이 몰랐던 건 아니지?”
“아뇨, 알고는 있는데.”
한율과 고작 한 살 차이인 스물한 살. 당연히 음주가 허용되는 나이이지만, 처음 만났을 때 진은수의 나이가 열일곱 살이었다. 당시의 앳된 모습, 잘하고 싶은데 잘되지 않아 죄송함에 눈물을 뚝뚝 흘리던 모습이 인상 깊게 새겨져서 그럴까.
“술 마시는 모습이 상상이 안 가서요.”
“하긴, 그럴 만도 하겠다. 너랑 은수 씨, 고등학생 때부터 봤으니까. 지금도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앳되기도 하고.”
“은수 씨한테 관심 있다는 친구는, 괜찮은 사람이에요?”
용맹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 친구라서가 아니라, 남자가 봐도 괜찮은 놈이야.”
“네….”
겉으론 괜찮아 보여도, 괴물과의 전투가 벌어지는 곳을 들락거린 아이다. 바로 눈앞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비롯해 온갖 참혹한 광경을 마주했을 터. 게이트 사태 전엔 괴물보다 악랄한 세 치 혀를 놀리는 악플러들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고.
‘나도 본의 아니게 상처를 줬겠지.’
한율은 차를 마시기 전, 조용히 말했다.
“중요한 건 은수 씨 본인 마음이겠지만, 은수 씨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강한 사람이면 좋겠네요.”
“어….”
맞은편 거울. 용맹은 조심스럽게 한율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 친구한테 전해줄게.”
잠시 후. 한율이 떠나고 대기실에 혼자 남은 용맹은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접어. 넌 안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