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9화 (421/427)

영업용 미소 나왔다

뮤닷 <2021 RMMA> 공연 사녹은 관객 없이 진행된 터라 음방에 비해 일찍 끝났다.

숙소로 돌아온 한율은 목욕 후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각성자 연구소에서 18일 게이트 방어선에서 실험에 참여할 각성자 리스트를 보냈다.

리스트를 훑은 한율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엔 안전한 연구소가 아닌, 위험한 게이트 방어선 한복판에서 실험한다는 사실 때문인지 참여율이 저조했다. 아니, 실험 이후 게이트 크기가 줄어들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그나마 이만큼 지원한 것일지도.

‘파란색과 빨간색 등급이 많이 참여할수록 좋지만, 강요할 권리가 없으니.’

작정하면 그런 권리를 가질 순 있겠으나, 그 과정까지 가는 게 귀찮다. 권리를 가지면 그에 상응하는 의무 또한 주어질 테고.

‘이번에도 역시.’

스크롤을 내리던 한율은 진은수의 본명인 ‘최은수’에서 잠시 멈췄다. 다음 주 크리스마스에 맞춰 퍼플아워 온라인 콘서트를 연다고 알고 있는데, 참 부지런도 하지.

다른 낯익은 이름도 보였다. 자신으로 둔갑해 펜션에 침입하려다 계나리에게 덜미가 잡혔던 황재은.

정상욱 중위 말에 따르면 황재은은 PC방 아니면 집에 틀어박혀 얌전히 지낸다고 했다. 실시간으로 위치가 추적되는 전자발찌를 착용한 것도 있지만, ‘감히’ 서한율로 둔갑했던 범죄자로 얼굴이 알려져 몸을 사리는 것 같다고.

꼬박꼬박 실험에 참여하는 걸 보면 갱생 이미지를 얻으려는 모양.

우웅. 게이트 괴물 연구소장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네, 서한율입니다.”

소장은 거두절미하고 중요한 용건부터 말했다.

-[지금 메일로 검사 결과 보냈습니다. 네 마리 모두 같은 종이 확실해요.]

“감사합니다. 그럼 18일 새벽에 제가 직접 데리러 갈게요.”

-[네. 그런데 정말… 나중에 한 마리를 해외로 데려갈 생각이십니까? 아무리 게이트 머리가 사라졌다곤 해도, 언제 다시 생길지 모르는데. 물론 한율 씨가 잘 관리할 거라 믿지만, 워낙 날쌘 놈들이기도 하고….]

스페인과 네팔 정부로부터 이미 반입 허가는 받았다. 레드 게이트에 결계를 쳐주는 조건으로.

“하지만 실험 중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잖아요. 그러니 우리나라에서 계속 쌍두 족제비를 가지고 실험하기엔….”

말하면서도 양심에 가책을 느끼는 척 연기하자, 소장이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잘랐다.

-[아뇨,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어쨌든 실험의 위험성은 스페인과 네팔 쪽도 알고서 받아들인 거니까,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건 한율 씨 잘못이 아닙니다. 너무 부담 갖지 말아요.]

한율은 살며시 미소 지었다.

“네, 감사합니다.”

* * *

다음 날인 2월 17일 오후, <2021 RMMA>가 열릴 뮤닷 방송국 스튜디오. 어스래빗 멤버들은 샵에서 헤어 메이크업을 받고, 몸에 맞는 정장까지 갖춰 입은 모습으로 어스래빗 단독 대기실에 들어갔다.

<락뮤닷> 때도 사용하던 친숙한 공간이었으나, 강보배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내부를 둘러보며 소파에 앉았다.

“RMMA인데 따로 입장 촬영도 없고, 내내 대기실에 있다가 상 받을 때만 나간다고 하니까 느낌 이상하다.”

“올해도 열어주는 것에 감지덕지해야 하는데, 음…. 많이 허전하기는 하네. 김도 조금 새고.”

길우성의 말에 차남석이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반쪽짜리 시상식이나 다름없으니까.”

올해 RMMA는 공연은 사녹으로, 시상만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터라 오늘 스튜디오까지 온 건 상을 받는 팀뿐이었다. 당연히 어떤 상을 받는지 또한 사전에 회사를 통해 전달되었다.

이번에 어스래빗이 받을 상은 과 작년에도 받았던 <남자 아이돌그룹 퍼포먼스상>.

은 전 세계 팬들의 투표로 받는 상이라, 평소였다면 대상 다음으로 값진 상이라며 무척 감격했을 것이다.

게이트 사태가 아니었다면.

아이돌그룹 어스래빗이 아닌, 최강의 각성자 한율의 인기로 받게 된 상이란 의심을 지울 수 없는 까닭이었다.

당사자들도 이런 생각이 드는데, 다른 아이돌과 그들의 팬덤은 오죽할까. 이미 오늘 RMMA 생방송에 출연하는 팀의 정보가 새어 나가면서, 사람들 또한 어떤 팀이 상을 받는지 추론을 끝낸 상태였다.

-어스래빗 올해 한국에서 낸 앨범 딱 하나고 음악 방송 활동 1일 차에 게이트 터졌는데 서한율 인기로 상 하나 날로 먹네ㅋㅋㅋ

-서한율 님 각성자로서 우리나라 구해주고 활약해주신 거 너무 감사한데, 아이돌 성적은 별개로 쳐야 하는 거 아닌가요? ㅠㅠ 한국 아이돌에 관심 없는 사람들이 서한율 님 좋다고 우르르 몰려와서 투표할 거란 걸 뮤닷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리 없을 텐데요;

그나마 같은 상을 남자 아이돌그룹 세 팀, 여자 아이돌그룹 세 팀 해서 총 여섯 팀에게 뿌리기로 해서 망정이지, 어스래빗 한 팀만 받게 되었다면 분명히 더 시끄러워졌을 것이다.

“앨범 판매 점수집계 기간도 발매 직후까지로만 잡아서 다행이었지, 만약 더 길게 집계돼서 앨범상까지 받게 됐다면.”

이건우가 상상만 해도 무섭다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진짜 그 상 주인에게 미안해서 고개 제대로 못 들고 다녔을 것 같다.”

한율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이번에 인기상 받게 된 건, 게이트 사태가 아니었더라도 받았을 가능성이 있었으니 사과 안 할래요. 3월에 미국에서 [STEP] 앨범 쇼케이스 순회했던 거, 다들 잊은 거 아니죠?”

“당연히 안 잊었지.”

유호가 맞장구치면서 멤버들을 돌아보았다.

“얘들아, 너무 눈치 보지 마. 우리 작년에 월드투어 하면서 만난 관객이 수십만 명이야. 6월에 발매한 앨범도 미국 음악 앨범 차트 5위 안에 들어갔고.”

“그건 팬들이 대량으로 사서….”

“어쨌든, 상에 걸맞은 팀다워 보이도록 어제 무대 위해서 정말 빡세게 연습하고, 녹화 잘 마쳤잖아. 자신감 갖고 당당하게 나가자.”

“응. 우리가 하뉼 인지도 덕 본 게 어디 하루 이틀도 아니고.”

“…라욘 형, 은근 뼈 때리네.”

“흐.”

<2021 RMMA> 생방송 한 시간 전.

어스래빗 멤버들은 오늘 상을 받으러 온 팀 중, 그들보다 연차가 높은 선배 팀의 대기실로 찾아가 인사하기로 했다. 따로 대기실이 분리된 시상자들을 제외하곤 고작 네 팀뿐이었다.

김우재, 히아신스, 스카이러너, 원카운트.

대한민국 대표 발라더 타이틀을 가진 김우재는 어스래빗 멤버들과 이런저런 공연에서 마주친 적이 있어,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저 아직도 그때 한율 씨가 준 미니 선풍기 갖고 있어요.”

“그거 아직도 작동돼요?”

3년 전 무더웠던 여름, 소리구름 어워즈 공연 리허설 순서를 기다리던 중. 한율은 앞에 앉은 김우재가 땀에 절어 녹는 걸 보곤 그에게 미니 선풍기와 음료수를 건넸다. 이후 김우재는 라디오에 출연해, 당시 일을 언급하며 한율을 생명의 은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우재가 머쓱하게 웃었다.

“오늘 들어가서 한번 작동시켜 볼게요. 사람들이 집에 놀러 올 때마다 자랑하려고 장식으로 쓰고 있거든요.”

그러면서 그는 사진을 보여주었다. 정말로 한율이 준 토끼 미니 선풍기가, 지금껏 그가 받은 각종 트로피와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별생각 없이 건넨 미니 선풍기가 뭐 대단한 물건이라고 이렇게까지. 뭐라고 반응해야 좋을지 고민하는 한율을 향해 김우재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팬입니다, 한율 씨. 대한민국을 지켜줘서 고마워요.”

“하하…. 네.”

히아신스 대기실로 인사를 갔을 땐, 히아신스 멤버들뿐만이 아니라 스태프들까지 한율에게 사진을 요청했다.

박가람이 고등학교 동창인 히아신스 호수에게 슬쩍 물었다.

“우리 팀 서한율. 대한민국 영웅이기 이전에 같은 아이돌이란 사실, 잊은 건 아니지?”

“괜찮아, 팬들도 다 이해해주실 거야. 한율 씨니까.”

옆에서 길우성이 탄산을 마신 것처럼 두 눈을 찡그렸다.

“크, 아이돌의 아이돌. 저놈이 내 친구입니다, 선배님.”

이후 찾아간 스카이러너 대기실에서도, 원카운트 대기실에서도 한율은 사진 요청을 받았다.

“야, 서한율. 잠깐 얘기 좀 하자.”

원카운트 대기실을 나가기 전.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나기혁이 기다렸다는 듯 한율을 구석으로 데려갔다. 그러곤 다른 사람이 가까이 오진 않는지 경계하다가 속닥거리듯 물었다.

“네가 하는 실험에 참여하면 정말로 한동안 능력 사용, 안 되는 거 맞지?”

지난번처럼 퍼플아워 루아에 관해 물어볼 줄 알았더니.

“네. 그런데 선배님은 잘 때 멋대로 능력이 발현되는 거라, 에너지 흡수가 힘들어요.”

“그 말은… 실험 참여 자체가, 안 된다는 소리야?”

“네.”

나기혁이 크게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가 잠에 빠져 능력이 발현되는 순간 에너지를 흡수하면 되지만, 그러려면 그가 잘 때 곁에 있어야 한다. 그건 싫었다. 그런 수고를 들여야 할 정도로 양질의 많은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나기혁이 짜증이 깃든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일상생활에 지장 줄 만큼 불편해요?”

단순히 괴물이 나오는 꿈을 꾸는 거 아닌가?

“그게….”

한율이 의아하게 묻자, 나기혁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가 목소리를 더 낮췄다.

“사실은 단순한 꿈이 아니라….”

다시 머뭇거리던 나기혁이 재차 한숨을 쉬었다.

“아니, 단순한 꿈이기는 하지만 가끔 끔찍한 것도 봐서 그래. 꼭 내가 꿈속 괴물이 된 것처럼 생생하게 이것저것 느껴진다니까?”

“네….”

한율이 싱겁게 반응하자, 나기혁이 살짝 울컥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하루는 괴물이 된 꿈에서 시체를 봤는데, 존나 소름 돋는 게 뭔 줄 알아? 생각할수록 찝찝해서 익명으로 신고했더니, 실제였어. 정말로 그 집에 시체가 있었다고.”

“위치가 어디였는데요?”

나기혁은 핸드폰을 꺼내 지도 앱을 실행했다.

“여기가 우리 숙소, 내가 꿈에서 시체 본 곳은 여기. 그리고…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야. 괴물이 되는 꿈을 꾸면 장소가 늘, 내가 있는 곳 반경 1km 내외더라고. 씨발, 하루는 괴물 새끼가 강아지를 잡아먹는 꿈을 꿨는데….”

나기혁이 입을 틀어막으며 고개를 돌렸다.

“차라리 일반적인 꿈처럼 기억이라도 잘 안 나면 몰라….”

듣다 보니 약간 흥미가 생긴다. 한율은 ‘무슨 이야기를 저렇게 오래 하나’란 얼굴로 이쪽을 보는 멤버들을 힐끗하곤 나기혁에게 물었다.

“조종도 해봤어요?”

“자각몽처럼? 어. 그런데 꿈이란 게 인지돼도 내 마음대로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고 그래.”

한율은 살며시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꿈속에서 괴물의… 컨트롤이 가능했다고요?”

“어. 아주 가끔이지만.”

“…….”

“어떻게 안 되겠냐? 나 이대로 가다간 제정신으로 못 살 것 같다. 강아지를 생채로 씹어먹었을 때 느껴진, 그, 하…. 존나 끔찍해.”

나기혁은 진저리치고 있었지만, 한율은 저도 모르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붙잡았다.

권한정이 나기혁에게서 희귀한 아우라가 반짝거린다며, 각성자 등록을 꼭 설득하고 싶다고 말했다더니.

한율은 나기혁의 팔을 잡으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하세요, 선배님. 진작 말해줬다면 어떻게든 도와드렸을 텐데.”

“하지만… 방금 네 입으로 말했잖아. 잘 때만 멋대로 사용되는 능력이라 실험 참여 자체가 안 된다고. 어쨌든 서한율 너니까 솔직히 말하는 거야. 다른 사람한텐 진짜 비밀이다.”

“네, 비밀로 할게요. 그리고 방법이야 찾으면 되는 거니까.”

한율은 빙긋 웃었다.

“언제 시간 되세요?”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한율을 기다리던 길우성이 박가람에게 속닥거렸다.

“써한 무슨 일 꾸미나 봐. 영업용 미소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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