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0화 (422/427)

너는 그저 있을 뿐인데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어스래빗 대기실로 돌아가는 길. 어스래빗 멤버들은 복도에서 퍼플아워 멤버들과 마주쳐 인사를 나눴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선배님.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찰나. 한율과 마주쳤던 진은수의 시선이 빠르게 그를 피해 유호를 향했다. 유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은수 넌? 다음 주에 온라인 콘서트 한다면서.”

“네, 열심히 준비하고 있어요.”

소문 때문에 일부러 시선을 피한 걸까.

한율은 무심코 그렇게 생각했으나, 이번엔 다른 생각이 뒤를 이었다. 지난번 각성자 연구소에서 만났을 때, 진은수가 수줍게 웃으며 했던 말.

『선배님이랑 이렇게 별일 아닌 일로 대화하는 게 오래간만인 것 같아서요.』

단둘만 있었던 그때도 진은수는 최대한 시선을 피했다. 훨씬 이전, 게이트 방어선에 가려는 걸 말리려고 계나리와 함께 만났던 사적인 자리에서도 그랬고.

‘…아.’

그제야 한율은 어렴풋이 깨달았다.

이젠 남의 시선이나 소문 때문이 아니라, 그를 향한 마음을 접었다고 알려주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

그때 루아가 한율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지난번엔 실례가 많았어요, 한율 씨. 그리고… 고마워요. 덕분에 정신을 좀 차렸어요.”

아주 잠깐.

한율은 마음속에 움트려는 상념을 밀어내고 미소 지었다.

“아니에요.”

“한율 선배님!”

퍼플아워의 송의연이 손을 번쩍 들며 활발하게 말했다.

“솔로 데뷔 축하드립니다!”

다른 퍼플아워 멤버들도 이어서 축하 인사를 건넸다.

“솔로 데뷔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진은수 역시 멤버들과 함께 그에게 꾸벅였다. 여전히 시선을 피하며, 잘 모르는 남처럼.

한율은 대외용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오후 6시. <2021 RMMA>가 뮤닷 채널과 너튜브를 통해 생중계로 시작되었다. 오프닝은 인기 아이돌그룹 메인 댄서들의 특별무대. 뒤이어 나온 MC들은 안전상의 문제로 모든 공연이 사전 녹화로 진행되었다며 양해를 구했다.

어스래빗 대기실.

TV를 보며 길우성이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몸이 심심하구려.”

“셀카라도 찍어.”

“넹.”

찰칵, 찰칵.

옆에서 길우성이 시끄럽게 셀카를 찍는 동안, 한율은 나기혁과 톡으로 대화를 나눴다.

-[크리스마스 이후로 드문드문 스케줄 있음. 자콘 녹화도 있고 광고 화보도 새로 찍어야 하고.]

[날짜는요?]

-[(이미지)]

[일단 각성자 등록부터 진행하죠. 공적인 일로 스케줄 조정하는 게 명분도 있고 좋잖아요.]

-[등록 꼭 해야 함? 무슨 능력인지 다 까발려야 하잖아]

[그건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여권 준비해두세요.]

-[여권은 왜?]

[그리고 내일 새벽에 숙소로 데리러 갈 테니까 일찍 일어나시고요.]

-[왜? 어디 가는데?]

한율은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나기혁이 따지듯이 톡을 보냈다.

-[야]

-[내일 각성자들 게이트 방어선에서 실험한다며?]

-[거기에 나 데리고 갈 셈이냐?]

-[야]

-[야]

-[서한율]

-[계속 읽씹하면 대기실로 쳐들어간다ㅡㅡ]

[바쁘니 내일 만나서 얘기해요, 선배님. 4시에 가겠습니다. :)]

-[4시???]

-[새벽???]

-[야]

-[산뜻한 이모티콘 쓰면 다냐? 야]

한율은 각성자 관리과 정상욱 중위에게 연락, 나기혁의 각성자 등록을 부탁했다. 내일 실험 이후 함께 스페인으로 갈 수 있도록 적절히 처리해달라고도.

한국 게이트 괴물 연구소장에게도 연락했다. 내일 괴물 관련 능력 각성자 한 명도 데려간다고.

‘직접 보면서 특징을 알아둬야, 나중에 꿈에서 변했을 때 어떤 괴물인지 확실히 알 수 있을 테니.’

RMMA 2부 중반. <남자 아이돌그룹 퍼포먼스상>을 받기 위해 잠깐 무대로 나갔던 어스래빗 멤버들은 다시 대기실에 얌전히 앉았다.

“한율이 첫 솔로 데뷔 무대 순서가 다가오는구나.”

“기분이 어떻습니까, 서한율 씨?”

박가람이 어스래빗 자체 콘텐츠 VJ의 카메라를 대신 들이대며 물었다. 한율은 TV를 보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첫 솔로 데뷔 무대여서 떨렸는데, 한편으론 관객도, 멤버들도 없이 혼자 녹화를 진행한 게 좀 아쉬웠던 것 같아요.”

“다 같이 사녹 보고 싶다고 했는데, 한율 씨가 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푹 자면서 컨디션 챙기라고.”

“네, 제가 이렇게 배려심이 넘칩니다. 멤버들이 좀 알아줬으면 좋겠네요.”

“아이, 뻔뻔해라.”

“본인의 좋은 점을 스스로 드러내는 시대잖아요.”

2부 마지막, 한율의 첫 솔로 데뷔 무대가 시작되기 전. 지난달에 촬영한 앨범 재킷 이미지 VCR이 흘러나왔다.

뮤닷 <2021 RMMA> 톡창.

-오후 1시에 음원 공개됐을 때부터 계속 듣고 있는데 노래 정말 좋아요!

-서한율 사랑해♡♡♡♡♡

-발라드던데ㅋ 그냥 생방 무대로 해도 되지 않나?

-드디어

-♡♡♡서한율♡♡♡

“시작한다.”

아름다운 밤하늘 아래 새하얗게 쌓인 눈밭. 작게 피어난 꽃을 든 채 미소 짓는 한율의 모습이 사라지고, 영상은 무대로 전환된다. 조금 전 영상에서 한율이 들었던 작은 꽃, 점점 멀어지는 포커스.

왼쪽 가슴 주머니에 꽃을 장식한 한율이 마이크를 들었다.

곡명은 .

이건우가 TV를 보며 감탄했다.

“우리 한율이 피부 봐.”

“쉿.”

조용해진 대기실. 한율의 감미로운 노래가 흘렀다.

[사랑하자고 말해, 나를 품은 세상을]

[사랑한다고 말해, 내가 품은 세상이]

[사실 그저 있을 뿐인데, 우리 모두 그러기를 원해]

한율은 TV 속 자신을 보며 작게 노래를 따라 불렀다.

[“나의 세상, 나의 하늘”]

이 노래가 A&R팀에 들어왔을 때부터 지켜본 유호도 흥얼거렸다.

[내 것이 아닌 걸 알면서도, We were all.]

[너는 그저 있을 뿐인데.]

[My world.]

* * *

뮤닷 <2021 RMMA>가 끝난 건 밤 9시가 넘어갈 무렵. tv Mu에선 지난주에 이어서 2회가 방송되고 있었다. 그러나 숙소에 돌아왔을 땐 방송이 끝나, 멤버들은 오늘 서로 수고했다며 방으로 흩어졌다.

한율은 내일 새벽 일찍 일어나야 해서, 씻고 곧장 침대에 누웠다. 습관적으로 핸드폰으로 인터넷에 접속했더니 실검에 자신의 이름이 올라와 있었다.

[서한율 RMMA], [서한율 Earth]

음원과 함께 공개된 M/V 반응은, 한율의 새하얗고 깨끗한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는 호평으로 가득했다. 노래도 정말 좋다고.

한율은 팬덤 플랫폼과 개인 SNS에 대기실에서 찍었던 셀카를 올렸다.

[데뷔 첫 솔로 무대를 RMMA에서 선보일 수 있어서 정말 자랑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솔로 데뷔를 축하하는 지인들의 메시지에도 일일이 고맙다는 답장을 보낸 후에야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다음 날 새벽, 원카운트 숙소 앞.

나기혁이 퉁퉁 부은 얼굴로 차에 올라탔다.

“너 진짜 일사천리로 진행했더라?”

“각성자 관리과 전화 받으셨죠?”

“전화도 오고, 사람도 직접 왔다 갔다. 그것 때문에 멤버들이랑 회사가 얼마나 시끄럽게 굴었는지 아냐?”

“그래서 안 하시겠다고요?”

“안 할 거면 오늘 나왔겠냐? 야, 그런데 차 좋다? 얼마야?”

“선물 받은 거라 잘 모르겠네요. 어젯밤에 꿈은 꿨어요?”

“아니. 오늘 어디 가는 거냐니까?”

철컥. 한율은 차 문을 잠그며 대답했다.

“게이트 괴물 연구소요.”

나기혁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야, 문 열어. 나 안 해. 안 가. 못 가!”

잠시 후, 한국 게이트 괴물 연구소.

괴물 소리에 질색하던 나기혁은, 원카운트의 팬이라며 호들갑 떠는 연구소 직원과 마주하자마자 언제 징징거렸냐는 듯 활짝 웃었다.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정말 멋있으세요. 무서운 게이트 괴물들을 가까이에서 살피고 연구하다니, 저 같은 겁쟁이는 꿈도 못 꿀 일이에요. 존경합니다.”

“아이, 겸손도. 원카운트 콘텐츠 보니까 기혁 씨도 용감하시던데요? 실제로 괴물 발견하고 포획해서 신고한 적도 있으시고.”

“신고요? …아, 양평에서 했던 거요?”

“네. 그때 잡힌 괴물도 여기에 있어요. 곧 보여드릴게요.”

“네? 아니, 괜찮….”

“이미 이야기 들었어요. 여기 있는 괴물 전부 살펴보기로 하셨다고. 각성 능력이 그쪽이라면서요? 너무 멋있다…!”

“네? 어, 저기…. 하하….”

직원이 눈을 반짝거리며 감탄하자, 나기혁은 어설프게 웃으면서 한율을 살짝 째려보았다. 한율은 어깨를 으쓱이며, 소장에게 미리 직원 중에 아이돌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평판과 이미지에 퍽 신경 쓰는 아이돌이므로.

한율은 소장에게 물었다.

“쌍두 족제비 녀석들은 잘 있죠? 그놈들부터 보러 갈게요.”

연구소에서 나온 건 그로부터 몇 시간 후.

다시 한율의 차에 올라탄 나기혁은 불안한 눈으로 뒷자리를 살폈다.

“저것도 진짜 게이트에 데려가는 거야?”

결계로 감싼 케이지 안엔 쌍두‘였던’ 장이가 들어있었다. 장이는 연구소 직원이 넣어준 닭 모양 장난감을 질겅질겅 물었다. 삑, 꿱. 장난감에서 해괴한 소리가 나왔다.

“네. 앞으로 종종 보게 될 테니까 잘 관찰해 두세요, 선배님.”

다행히 나기혁은 그렇게 눈치가 없는 편이 아니었다.

“꿈에서 저놈이 되면 바로 알아차리라고?”

“네. 가는 동안엔 자각몽에 대한 너튜브 영상이라도 보세요.”

“하아….”

나기혁은 한숨을 푹 내쉬며 핸드폰을 꺼냈다.

서울로 향하는 한율의 차 주변엔 게방부에서 나온 차가 호위처럼 따라붙었다. 차 안에는 장이가 갖고 노는 장난감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삐익… 꾸웨엙.

이어폰을 끼고 너튜브를 보던 나기혁이 짜증스럽게 돌아봤다.

“진짜 시끄럽네. 그런데… 저거 왜 귀엽게 생겼냐?”

“글쎄요. 그런데 저거랑 같은 종류 괴물, 동물은 물론이고 사람도 잡아먹은 적 있으니까 남들 앞에선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쯧. 나기혁이 혀를 차며 다시 앞으로 몸을 돌렸다.

“빌어먹을 괴물 새끼. 괴물들 전부 다른 세상이랑 연결됐다는 노란색 게이트로 던져버리면 안 되냐?”

“그럴 수 있다면 그러고야 싶지만.”

한율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다물자, 나기혁도 한숨을 쉬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게이트 방어선에 도착한 건 정오가 될 무렵. 본부 앞에는 오늘 실험에 참여하기로 한 각성자들이 타고 온 버스가 줄줄이 세워져 있었다.

전투기와 헬기 등 각종 소음으로 시끄러운 곳이라, 앞에 나와 기다리던 정상욱 중위가 큰 소리로 인사했다.

“어서 와요, 한율 씨! 어제 TV 잘 봤어요! 노래 좋던데요?”

“감사합니다!”

“어젠 실례가 많았습니다! 잘 오셨어요!”

정상욱이 나기혁에게 악수를 청했다. 나기혁은 들고 있던 케이지를 한율에게 넘기곤 예의 바른 태도로 악수에 응했다.

“네, 안녕하십니까!”

각성자들은 이미 군복에다 보호 장비까지 다 갖춘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나기혁과 장이가 든 케이지를 멀리서 살폈다.

“가지고 온 저거, 혹시 쌍두 족제비 아니에요?”

“머리가 하나인 것 같은데요?”

“같이 온 사람도 연예인인가? 잘생겼네….”

“아아, 그 사람이잖아요. 1130 증상자 아이돌. 작년에 생방송으로 쓰러졌던 사람이요. 그런데 각성했단 이야긴 못 들은 것 같은데….”

두 사람은 눈이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꾸벅꾸벅 인사하며 정상욱과 건물로 들어갔다. 로비에 있던 이해원이 한율에게 눈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가 나기혁에게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나기혁 씨. 가기 전에 보호 장비 착용해야 하니까 따라오세요.”

“어? 어. …아니, 네.”

나기혁이 잠깐 양평 펜션에서 지낼 때 마주친 적이 있는 데다 또 동갑이었으나, 둘은 어색한 공기를 흘리며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한율이 든 케이지에서 나는 장난감 소리가 로비에 울렸다. 삐익, 꿹꾸웅.

정상욱이 케이지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전에도 왔던 그놈이죠? 정말로 머리가 하나 사라졌네요.”

쌍두 족제비도 정상욱을 바라보며 장난감을 세게 물었다.

삐익, …꾸에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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