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1화 (423/427)

물어요

한율은 밖에 모인 각성자들을 돌아보았다.

“그나저나 리스트에 적힌 인원보다 적은 것 같은데. 취소한 사람이 많은 거예요?”

오늘 실험에 참여하겠다고 지원한 각성자는 125명. 그러나 지금 밖에 모인 인원은 90명 안팎에 불과했다.

정상욱이 낮췄던 몸을 일으키며 쓴웃음을 지었다.

“네. 아침에 여덟 명이 개인 사정을 이유로 불참하겠다고 연락했고, 세 명은 말없이 연락 두절, 열세 명은 통제구역과 게이트 방어선 길목에서 도저히 못 하겠다면서 포기하고 돌아갔습니다. 심한 불안증세를 일으켜 우리가 돌려보낸 사람도 있고요.”

전투기 소음이 가까이 들릴 때마다 어깨를 움츠리는 사람, 두 손을 모아 눈을 꼭 감고 기도하는 사람, 새하얗게 질린, ‘내가 왜 이곳에 왔을까?’ 후회 가득한 얼굴로 멍하니 선 사람 등.

게이트 방어선에 들어온 게 처음이니 당연했다. 안전한 곳에서 TV로 보는 참상과 직접 현장 한복판에서 생생한 냄새와 소음까지 온몸으로 느끼는 차이는 아주 크다.

한율은 고개를 돌리며 작게 한숨 쉬었다.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평소 게이트 방어선 일을 도와주던 각성자 대부분은 일찍 와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은수 씨도요.”

한율은 정상욱과 함께 각성자 관리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사무실에서 마주친 진은수는 이미 군복에다 보호 장비까지 모두 챙긴 상태였다. 어깨와 다리를 환히 노출했던 짧은 원피스에 진한 메이크업, 반짝거리는 액세서리를 했던 어제와는 180도 다른 수수한 모습.

“네, 안녕하세요. 군복이 멋있네요, 은수 씨.”

진은수가 마주쳤던 시선을 내리며 재차 꾸벅였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 케이지에 든 건….”

“오늘 실험에 함께할 쌍두 족제비 ‘장이’예요. 지금은 머리 하나를 숨긴 상태라 일반 족제비랑 비슷하게 보이지만요.”

“아….”

진은수의 표정이 흐려졌다.

“강아지랑 고양이, 군인까지 삼킨 그 괴물… 맞죠?”

“그거랑은 다른 개체지만, 이놈 역시 우리가 파악하지 못한 피해자가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해요.”

“네….”

삑삑. 장이가 진은수를 보며 닭 모양 장난감을 가볍게 물었다. 정상욱을 향해 허세 부리듯 꽉꽉 세게 물면서 시끄럽게 굴었던 것과 달리, 마치 자신과 놀자는 듯, 관심 가져달라는 듯.

“…….”

진은수는 고개를 돌려 장이를 외면했다.

…삐익.

정상욱이 시간을 확인했다.

“외국에서 온 손님들은 소장실에 있습니다. 옷 갈아입고 나서 올라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네.”

한율은 정상욱이 준비해준 옷으로 갈아입고 장비를 갖춘 뒤 소장실로 향했다. 그곳엔 오늘 실험을 직접 보러 온 미국과 이탈리아, 독일, 영국, 일본, 스페인 측 인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율과 반갑게 인사를 나눈 그들은 케이지에 갇힌 장이를 신기하게 살폈다. 몇몇은 직접 만져볼 수 있냐고 물었으나, 한율은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물어요.]

삐익, 꾸에엙. …삑삑.

장이는 남성에겐 강하게, 여성에겐 유순한 시선을 보내며 장난감을 물었다.

잠시 후. 한율은 각성자 관리과를 통해 미리 전달한 실험 내용을, 각성자들과 손님들에게 직접 다시 설명했다. 자신의 차 트렁크에서 가져온 커다란 토끼 인형의 머리를 툭툭 두드리며. 또한 이동 중이나 실험 중,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보호 결계 밖으로 벗어나거나 단독 행동을 해선 안 된다고 단단히 경고했다.

차에 탑승하기 전. 나기혁이 불안한 얼굴로 한율을 잡아 사람들과 떨어진 곳으로 끌고 갔다.

“아니, 나는 실험 참여가 안 된다며. 아직 방법 찾는 중이라며. 설마, 데려가서 잠들라고 기절이라도 시킬 속셈은 아니지?”

“절 뭐로 보시고. 그런 짓 안 하니까 안심하고, 선배님은 괴물들 잘 관찰하세요. 포획에 실패해서 연구소에 없는 종이 더 많거든요.”

그러곤 어스래빗 굿즈 키링을 건넸다.

“이건 왜 줘?”

“보호 결계 아이템이에요. 여차하면 선배님 목숨 살려줄 수 있는 물건이니, 잃어버리지 않게 간수 잘하세요.”

나기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걸 나한테 준다는 건,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는….”

“싫으면 말고요.”

“아니, 누가 싫대?”

나기혁이 키링을 낚아채듯 잡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하….”

그러곤 겁에 질린 여성 각성자들을 달래는 진은수 쪽을 힐끗하더니, 제 머리카락을 거칠게 헝클었다. 같은 기획사 후배도 의젓하게 있는데, 선배가 되어서 겁먹은 티를 내는 건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

“두 눈 시퍼렇게 뜨고 괴물 하나하나 잘 살피면 된다는 거지? 나중에 무사히 끝나면, SNS에 사진 올려도 되냐?”

능력 밝히기 싫다며 각성자 등록도 안 하고 입 꾹 다물 땐 언제고. 막상 위험한 게이트 방어선에서 진행되는 실험에 참여하게 되자, 팬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모양.

“올리기 전에 중위님께 검토받으세요. 일반인이 봐선 안 되는 게 사진에 찍혔을 수도 있으니까.”

“알았어.”

각성자 대부분은 버스에 탑승했다. 평소 게이트 방어선 일을 돕던 각성자들도 버스나 군용 차량에 나눠 탔는데, 진은수와 나기혁은 이해원이 탄 군용 차량에 함께 탔다.

한율은 차량 지붕에 편히 자리 잡았다.

오늘 진행할 실험의 목적은 결계 유지가 아닌, 쌍두 족제비와 게이트의 축소 현상을 캐는 데에 있다. 겸사겸사 각성자 능력 에너지로 작동되는 마법 무기도 시험해보고.

휘이잉, 콰앙! 콰콰콰쾅! …끼에에엑! 커허엉!

각종 보호 장비를 썼는데도, 게이트와 가까워질수록 화약 냄새가 짙어지고 귀도 먹먹해졌다. 그러나 어느 지점을 지나, 더는 차로 가지 못하는 경계에 다다르자 오히려 조용해졌다.

군의 포격에 오히려 이쪽이 위험해질 수 있어, 잠시 전투 중지 명령이 내려온 까닭이었다.

무전기에서 정상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원 하차합니다!]

여기서부턴 걸어서 이동해야 한다. 버스 문이 열리고,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각성자들이 주춤주춤 내렸다. 개중엔 돌아가고 싶다고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도 있었다.

칙. 한율에게 개인 무전이 들어왔다.

[부탁드립니다, 한율 씨.]

“네.”

게이트 인근은 건물과 구조물이 모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초토화된 지 오래. 군데군데 땅이 움푹 꺼진 곳도 많았다. 이처럼 황량한 곳에 호위 병력까지 더해 백 명이 훌쩍 넘는 대인원이 나타났으니, 괴물들의 표적이 되기에 딱 좋다.

한율은 장이가 든 케이지를 나기혁에게 넘기곤, 이해원이 안고 있는 커다란 토끼 인형을 중심축 삼아 모두를 감쌀 넓은 보호 결계를 만들었다.

정상욱이 무전으로 사람들에게 당부했다.

[결계 밖으로 나가면 다신 못 들어오니, 그 점 주의해서 대열에서 이탈되지 않도록 이동합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던 군의 공격이 멈추자, 예상대로 괴물들이 그들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흐, 흐아악!”

“꺄악!”

각성자 몇 명이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탓. 가볍게 날아오른 한율은 흉측한 주둥이를 쩍 벌리며 달려오는 육중한 괴물, 그리고 날카로운 발톱을 세운 채 날아드는 괴물을 모조리 바람의 마나로 쓸었다. …키에에엑! 거센 회오리에 갇힌 괴물들이 괴성을 지르며 하늘 높이 빙글빙글 돌았다.

한율은 무전으로 말했다.

“접근하는 괴물 전부 제가 처리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계속 전진해주세요.”

그러곤 또 다른 괴물들도 가볍게 회오리에 가두며 제압했다.

저도 모르게 이해원의 팔을 덥석 잡았던 나기혁이 중얼거렸다.

“저놈 진짜 인간인가…?”

“…팔. 아픈데요, 나기혁 씨.”

“아, 미안.”

“…….”

진은수도 저도 모르게 잡았던 커다란 토끼 인형의 손을 놓았다. 그러나 시선은 한율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얼마나 익숙하시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TV로 그의 활약을 봤을 땐 솔직히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실제로 현장에 퍼진 짙은 화약 냄새 섞인 차가운 바람, 공포 혹은 당황해 비명을 지르는 괴물들을 보자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건물을 때려 부수고 인간을 쉽게 죽이던 괴물들이 서한율, 단 한 사람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비현실적인 광경. 그러나 현실이기에 더 넋을 놓은 사람이 많았다. 조금 전까지 돌아가고 싶다고 했던 각성자도 어느새 울음을 그치고 멍하니 그 광경을 보다, 이동하자는 정상욱 중위의 외침에 홀린 것처럼 걸음을 옮겼다.

괴물들 또한 위기감을 느꼈는지, 주춤거리거나 도망치기 시작했다.

각성자들이 감탄했다.

“와….”

“미쳤다, 진짜…. 이걸 내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될 줄이야….”

한율의 활약을 몇 번 봐서 익숙해진 군인들은, 대열에서 이탈하는 사람이 없도록 그들을 둘러싼 채 경계하며 이동했다.

이윽고 게이트와 불과 수백 미터 떨어진 실험 장소에 도착. 사람들은 여전히 입을 벌린 채 한율이 거대한 결계를 만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해원은 커다란 토끼 인형을 내려놓곤 살며시 마력을 불어넣었다. 사아아. 한율이 미리 설계해서 새겨놓은 내부의 마법진이 반응하며 발동, 새카맣던 두 눈알이 파란색으로 반짝거렸다. 인형 뒤통수에는 반투명한 원형 마법진이 떠올랐다.

이해원이 각성자 연구소 사람들과 정상욱을 향해 준비가 다 되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정상욱이 각성자들에게 알렸다.

“실험 시작하겠습니다, 준비해주세요!”

사전에 정한 순서대로 각성자들이 줄을 섰다. 첫 번째 순서를 자처한 황재은이 토끼 인형 옆에 선 이해원의 눈치를 살피며 무전으로 물었다.

“정말로… 이 인형에 대고 능력 사용하면 돼요?”

이해원도 무전으로 대답했다. 어차피 다른 각성자들에게도 재차 당부해야 할 말이니.

“네. 결계 10cm 이내로, 그러나 닿지 않도록 주의하며 능력을 사용하면 됩니다. 닿으면 기절할 수 있습니다.”

“네.”

연구소에서 각성 능력 에너지를 흡수했던 결계의 미니 버전인가? 황재은은 집중해서 능력을 사용했고, 타인으로 변하려던 그의 모습이 일렁거리다가 쑤욱, 능력에 담긴 마나를 토끼 인형에 빼앗기며 본래대로 돌아왔다.

‘이 느낌은, 언제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네.’

황재은은 비틀거리며 자리를 비켰다. 다음 각성자 또한 황재은이 그랬던 것처럼 토끼 인형 뒤통수에 생긴 마법진 앞에서 능력을 사용한 뒤 빠졌다.

나기혁은 장이가 든 케이지를 품에 안은 채 그 모습을 보다가 진은수를 돌아보았다.

“저 토끼 인형 눈, 한쪽이 점점 빨갛게 변하는데?”

“……?”

청력 보호 헤드셋이 장착된 방탄 헬멧을 쓴 터라, 진은수는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나기혁은 무전을 통해 재차 말했다가, 정상욱으로부터 모두가 사용하는 채널에서 잡담하지 말라며 혼났다.

각성자 50여 명째. 토끼 인형의 두 눈알이 모두 새빨갛게 변했다. 원형 마법진도 사라졌다.

[충전 완료.]

그동안 결계로 게이트를 감싼 채 대기하던 한율은 이해원의 무전에, 결계에 갇혀 버둥거리는 괴물들을 돌아보았다.

“한 마리 내려보낼게요.”

결계 일부를 살며시 걷어내자, 벗어나려 발버둥 치던 괴물 하나가 괴성을 지르며 지상으로 낙하했다. 쿠웅! 떨어진 충격으로 다리 한쪽이 부러진 듯했으나, 괴물은 수십 개의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며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돌진했다.

쿵쿵쿵!

[발사합니다.]

이해원은 토끼 인형 머리에 손을 얹고선 괴물을 향해 꾹 눌렀다. 화악! 각성자 능력에서 흡수한 마나가 마력으로 변환, 공격 마법의 원동력이 되어 괴물을 향해 발사되었다.

옆에서 봤을 땐 토끼 인형이 앙증맞게 벌린 입에서 시뻘건 레이저를 발사하는 기괴한 광경이었다.

쿠콰쾅!

“……!”

[…이런 미친!]

실험을 참관하러 온 외국인들을 포함, 능력 에너지를 보탠 각성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절뚝거리며 달려오던 집채만 한 괴물이, 토끼 인형의 공격에 몸통 한가운데가 뻥 뚫린 채 굳었다가 힘없이 널브러졌다.

…털썩.

“우, 우와아…!”

누군가가 환호성을 지르자, 다른 사람들 또한 놀라워하면서도 이내 소리를 질렀다.

와아아!

사실 이곳에 모인 각성자 대부분은 공격에 특화된 능력이 아니었다. 그러나 모두의 능력 에너지가 모여 무시무시한 괴물을 쓰러뜨리자 그에 감격한 것.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니었다.

뒤이어 게이트에서 떨어진 괴물도, 그다음 괴물도 토끼 인형이 내뿜는 레이저를 맞고 머리가 박살 나거나 상반신이 날아가며 쓰러졌다.

끔찍한 걸 잘 보지 못하는 몇몇 사람만 움찔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이변이 일어난 건 그때였다.

툭. …크릉, 크르릉….

케이지 안에서 괴물들이 맥없이 당하는 광경을 지켜보던 장이가 물고 있던 장난감을 떨어뜨렸다. 점점 거칠게 숨을 몰아 내쉬며 빙글빙글 돌았다.

“어? 어어?”

나기혁은 들썩거리는 케이지를 들여다보았다. 헉. 그러곤 팔을 쭉 뻗어 몸에서 케이지를 떨어뜨렸다. 그러나 손잡이를 놓치진 않았다.

“이거 왜 이래!”

장이의 꼬리와 엉덩이가 울룩불룩 부풀더니 서서히 머리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야, 이거 어떡해! 서한율! 이거 머리! 머리!”

다시 생긴 또 다른 머리가 주둥이를 쩌억 벌리며 게이트를 드러냈다. 동시에, 두려움에 떨며 저 멀리 도망치거나 숨었던 괴물들이 일제히 쌍두 족제비가 있는 그쪽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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