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2화 (424/427)

힘없는 척해야지

인기 걸그룹 퍼플아워 숙소 중 한 곳.

다른 숙소에서 지내던 송의연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 방 저 방을 살폈다.

“은수 언니 어디 갔어?”

퍼플아워는 바로 다음 주 온라인 콘서트를 앞두고 있어 상당히 바빴으나, RMMA 준비로 수고했다며 오늘은 오후부터 연습을 시작하기로 했다.

“기껏 회사 같이 가려고 왔더니.”

“은수 오늘 게이트 방어선에서 각성자 실험 참여한다고 나갔는데, 못 들었어? 그래서 오늘 새벽까지 혼자 연습하고, 세 시간만 자고 나갔는데.”

송의연은 미간을 구겼다.

“이 언니가 미쳤나. 그 위험한 곳에 제대로 쉬지도 않고, 잠도 제대로 안 잔 상태로 갔다고?”

그러면서 다시 진은수의 방으로 들어갔다. 면적이 넓은데도 물건과 옷이 상당히 많아, 무척 좁게 느껴지는 방이었다. 커다란 컴퓨터 책상과 게이밍 의자까지 공간을 차지하고 있어서 더더욱.

‘모니터는 왜 두 개씩이나 있는 거야? 그것도 왜 이렇게 커?’

풀썩. 침대에 걸터앉은 송의연은 벽에 걸린 모니터, 책상에도 놓인 커다란 모니터와 스피커와 헤드셋, 키보드와 마우스까지 살폈다. 따로 거치대에 놓인 노트북과 사과패드도.

‘나랑 같이 살 때보다 장비가 몇 배 더 업그레이드된 것 같은데.’

벽에는 퍼플아워 대형 포스터나 사진, 팬에게 선물 받은 그림 등이 걸려 있었다. 송의연은 두리번거리다, 책장 구석에 등 돌려 앉은 토끼 인형을 발견했다.

“……?”

토끼 인형 티셔츠엔 ‘I♡Earth’가 적혀 있었다. 의아해진 송의연은 다가가서 인형을 정면으로 돌렸다. 토끼 인형은 동그란 지구를 품에 안고 있었다.

어스래빗 굿즈 인형이었다.

예전에 아이돌 1130 증상자 회의를 위해 아림 엔터를 방문했던 어스래빗의 길우성과 서한율이, 호수와 진은수에게 굿즈를 선물로 줬다는 건 알고 있었다.

‘마음 접었다고, 일부러 돌려놓은 거야?’

우웅.

“네, 오빠.”

얼마 전, 인기 걸그롭 온더로즈 멤버의 생일날. 송의연은 그 자리에 초대받은 김에 진은수에게 남자를 소개하려 했었다. 본래 목표는 스카이러너의 용맹이었으나, 용맹과 함께 온 또 다른 남자 아이돌이 진은수에게 호감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외모나 키는 서한율보다 조금 못하지만, 성격이 괜찮은 것 같아 밀어주기로 마음먹고 연락처를 교환했다.

“…아아, 은수 언니요. 오늘 게이트 방어선에 실험하러 갔대요. 그래서 톡에 답이 없는 걸 거예요. …응? 용맹 선배님이 뭐라고 그랬다고요?”

소심하게 진은수의 안부를 물은 상대가 한숨을 쉬곤 말했다.

-[은수 씨한텐 은수 씨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강한 사람이 제격인 것 같다고, 나더러 마음 접으라더라고요. 그런데 그 말을 한 게….]

잠깐의 머뭇거림.

-[서한율한테 확인해보겠다고 말한 RMMA 사녹 날이라 왠지 신경 쓰여서요. 용맹은 서한율이 한 말이 아니라 자기 생각이라고 했지만요.]

하. 송의연은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강한 사람? 그거 서한율 본인 얘기 아냐? 우리 은수 걷어찰 땐 언제고.’

“상대방을 좋아하면 그 사람이 의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또 그렇게 변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그 말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오빠. 앞으로도 내가 많이 도와줄게요. 일단, 게임 하기에 좋은 최고급 사양 PC부터 삽시다. 공통된 대화 주제를 늘려야죠.”

* * *

게이트 방어선.

나기혁이 무전이 아닌 육성으로 떠드는 바람에 한율은 그의 외침을 듣지 못했다. 그러나 케이지를 멀리 떨어뜨리며 안절부절못하는 그 모습에, 이변을 알아차렸다.

정상욱의 무전.

[쌍두 족제비, 머리 하나가 다시 생겨났습니다!]

그오오. 크어엉…!

불길한 움직임이 곳곳에서 감지되었다. 조금 전 한율의 회오리에 휩쓸릴까 도망쳤던 괴물들, 무너진 건물이나 땅 밑으로 숨었던 괴물들이 슬금슬금 모습을 드러내는데, 하나같이 사람들이 모인 곳을 노려보고 있었다.

‘노란색 게이트의 기운을 읽은 건가?’

이곳의 레드 게이트는 ‘건너편’에선 옐로 게이트일 것이다. 그곳을 통과한 괴물들이기에, 자신들을 살려줄 또 다른 길이 저곳에 열렸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

‘하지만 지난번에 데려왔을 땐 서로 별다른 반응이 없었는데, 왜?’

어쨌든 금방이라도 일제히 달려들 것 같은 기세라, 한율은 일부 열어둔 결계를 수복하려 고개를 돌렸다. 괴물들이 떼로 달려들면 본능적으로 결계 밖으로 도망치는 사람들이 나올 수 있으므로 서둘러야 한다.

“중위님, 안전을 위해 쌍두 족제비 케이지를…. ……!”

말하던 한율은 눈을 크게 떴다. 시커먼 게이트 너머. 커다란 안광과 익숙한 실루엣이 아주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몇 달 전에 등장한 육눈박이와 같은 종으로 추정되지만, 그것보다 1.5배는 더 큰 놈이었다.

이전에 나온 놈의 파괴력도 상당했었기에, 한율은 말을 채 끝맺지 못하고 두 손에 마력을 집중했다.

크롸아아! 이윽고 대가리를 완전히 드러낸 육눈박이가 흉흉한 기세로 주둥이를 벌렸다. 날카롭고 큰 어금니가 결계가 처박혀 버둥거리던 또 다른 괴물들을 무자비하게 찢고 누르며 짓쳐 들었다.

키아악! 크어엉! 괴물들이 지르는 고통스러운 단말마가 방탄 헬멧과 헤드셋을 뚫고 들어왔다.

콰앙…! 아슬아슬하게 수복된 결계에 육눈박이의 주둥이가 부딪쳤다.

“후우.”

여섯 개의 부릅뜬 눈이 분노에 찬 채 뒤룩거린다. 쿠웅! 제 앞을 가로막은 결계를 다시 들이받는 육눈박이. 그러나 그 밑에 깔린 괴물들만 붉거나 푸른 체액을 내뿜으며 터질 뿐, 결계엔 금 하나 가지 않았다.

한율은 지상으로 내려가며 무전으로 말했다.

“중위님! 쌍두 족제비 멀리 던지세요!”

어느새 수십 마리의 괴물이 사람들이 모인 보호 결계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서부터 도로가 꿀렁거렸다. 지면 아래에 숨은 거대한 괴물이 이동하듯.

그때였다.

괴물들이 쌍두 족제비를 노린다는 걸 깨달은 건 한율뿐만이 아니었다. 보호 결계가 있으나, 사람들을 안전하게 지키려면 쌍두 족제비로 괴물들을 멀리 유인해야 한다는 것도.

실행에 옮긴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진은수였다.

이곳에선 아무리 힘껏 던져봤자 얼마 날아가지 못해 위험하다고 생각한 걸까. 나기혁의 손에서 케이지를 낚아챈 진은수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은수 씨!]

무전기에서 정상욱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결계를 둘러쌌던 괴물들, 다가오던 괴물들이 일순 어리둥절한 모습을 보이더니 이내 결계를 지나쳐 이동하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지 않게 되자 게이트의 기운을 더듬어 찾는 것. 둔감한 몇몇 개체들의 움직임은 굼떠졌으나, 멀리서부터 기운을 감지하고 달려온 것들은 여전히 거침이 없었다.

“은수 씨, 멀리 던져요!”

사람들이 모인 곳과 수백 미터 떨어진, 신호등이 구부러지거나 쓰러지고 군데군데 움푹 팬 교차로.

한율이 무전으로 외치자, 아무도 없던 그곳에서 난데없이 케이지가 나타나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그리고 그 작은 케이지를 향해 일제히 달려드는 괴물들.

쿠웅!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카모플라쥬 능력을 전개한 채 수백 미터를 내달려서 체력이 바닥난 건지, 사라졌던 진은수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여기저기 찌그러진 차를 짚는 그녀의 몸이 휘청거렸다.

타악. 때맞춰 착지한 한율은 진은수를 부축했다.

“은수 씨, 괜찮아요?”

진은수가 거칠게 숨을 몰아 내쉬며 끄덕이더니, 자신이 던진 케이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십 마리의 크고 작은 괴물이 한 곳에 머리를 모은 채 꾸물거리고 있었다.

케이지는 분명히 박살이 났을 터. 저기에 파묻힌 쌍두 족제비는 어떻게 됐을까.

궁금했으나, 일단은 진은수를 데리고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게 급선무였다. 발밑의 진동이 점점 가까워지는 게 심상치 않았다.

“나 잡아요. 이동할게요.”

…끄덕. 머뭇거리던 진은수가 한율의 옷자락을 살며시 잡았다.

그 순간.

끼아앙!

“……!”

괴물들에게 파묻혔던 쌍두 족제비의 길쭉한 몸뚱이가 틈새로 쑥 빠져나왔다. 비정상적으로 크게 찢어지던 주둥이도 감당하지 못할 커다란 괴물 때문인지, 다른 주둥이로 비명을 지르면서 한율과 진은수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왜 이쪽으로 와?!’

꼭 살려달라고 오는 것만 같아 한율은 순간 당황했으나, 아직 여러 실험에 사용해야 할 실험체이기에 하는 수 없이 보호 결계를 쳤다. 콰앙! 쿵! 쌍두 족제비를 뒤따라오던 괴물들이 결계에 부딪히며 나뒹굴었다. 크허엉…!

몸을 날린 쌍두 족제비는 한율이 아닌, 진은수의 품에 덥석 안겼다.

“……?!”

엉겁결에 쌍두 족제비를 안은 진은수는 그대로 굳었다.

난리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콰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발밑이 꺼졌다.

“…하.”

한율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가, 놀라서 가뜩이나 큰 눈을 동그랗게 뜨는 진은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추락하는 그들의 결계 옆으로, 땅속으로 움직이던 거대한 괴물이 솟구쳐 올라왔다. 키에에엑!

‘이유를 파악하기 전에 정리부터 해야겠네.’

둥실. 바람의 마나로 결계를 에워싼 채 허공에 멈춘 한율은, 남은 한 손에 마력을 집중해 휘둘렀다. 무너진 지반 아래로 떨어지던 괴물들과 튀어나온 괴물 모두 높이 떠올랐다.

“눈 감아요, 은수 씨. 내가 뜨라고 할 때까지 절대 뜨면 안 돼요.”

꾸욱. 진은수는 순순히 두 눈을 질끈 감곤 고개를 숙였다.

괴물들을 바라보는 한율의 눈에 서린 푸른색이 짙어졌다. 휘잉! 순식간에 휘몰아친 날카로운 바람의 마나가 수십 마리의 괴물을 무참히 썰었다.

투둑, 툭. 괴물의 살점과 체액이 결계를 타고 흘러내렸다.

대중의 눈엔 상당한 잔인한 처리 방식이라 평소엔 지양했었으나, 사방의 지면이 불안정한 상태라 평소처럼 패대기칠 순 없었다.

‘…아.’

그때 불현듯이 떠오른 생각에 한율은 결계를 해제했다.

대중에게 각인한 적 있는, 최강의 각성자 서한율의 한계.

‘이쯤에서 힘이 다 된 척해야지.’

“……!”

갑자기 발밑이 허전해져서 그럴까. 한율의 옷을 잡은 진은수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러나 진은수는 한율이 간신히 착지하는 척 연기할 때까지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이제 눈 떠도 돼요, 은수 씨.”

…끔뻑.

한율이 말을 하고 나서야 눈을 뜨는 진은수. 비명 한 번 지르진 않았으나 무척 무서웠는지, 그녀는 가득 차올랐던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흐윽, 흑.”

킁킁. 장이가 진은수의 눈물을 핥으려 혀를 날름거렸다. 한율은 그런 녀석의 뒷덜미를 잡아떼어내곤, 다른 손으로 진은수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키앙! 키앙! 장이가 난폭하게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고생했어요, 은수 씨. 만약 은수 씨가 이놈을 데리고 도망치지 않았다면, 조금 전 발밑에서 올라온 놈 때문에 사람들 모두 지면 아래로 떨어졌을 거예요. 하지만…. 은수 씨 자신에겐 굉장히 위험했던 일이란 거 알죠?”

치직.

[네…. 죄송해요….]

“나한테 사과할 일은… 맞네요. 날 걱정하게 했으니까.”

웃음기를 섞어 농담처럼 말하자, 그제야 진은수가 고개를 들어 한율을 바라보았다.

한율은 쓴웃음을 지었다.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하죠. 힘이 남았으면 안전한 곳에 무사히 착지했을 텐데.”

진은수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선배님. 아까 달려들던 괴물들, 선배님이 모두 물리치신 거잖아요. 그런데요, 선배님.]

“네?”

진은수가 한율 너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기, 저거… 뭘까요?]

“……?”

한율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지하철 야광 조명 너머로 새카만 안개 같은 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콱!

“아.”

발버둥 치던 장이가 다른 주둥이로 한율의 손을 세게 물었다. 깜짝 놀란 한율의 손에서 떨어진 장이가 쏜살같이 그림자 쪽으로 달려갔다.

“은수 씨는 위험하니까 여기에 있어요!”

“네? …선배님!”

한율은 장이를 쫓으며 바람의 마나로 녀석을 낚아챘다. 키앙?! 장이가 허공에서 발버둥 치고, 한율은 일렁거리던 그림자를 가까이서 확인했다.

‘이건….’

게이트였다.

하늘 높이 뜬 거대한 게이트의 기운에 가려, 지금까지 미처 감지하지 못했던 미니 게이트. 그러나 주변엔 무언가가 나온 흔적도, 들어간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시험 삼아 근처에 떨어진 돌멩이를 주워서 던져보았다. 팅. 돌멩이는 게이트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대로 튕겨 나왔다.

회색 게이트인가.

작게 한숨을 쉬는데, 이번엔 반대편에서 이쪽으로 달려오는 작은 괴물 떼가 보였다. 두두두.

장이는 게이트가 있는 주둥이를 꾹 다문 상태. 저놈들은 게이트의 기운을 느끼고 몰려오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한 불청객을 물리치고자 몰려오는 것이었다.

[선배님!]

그때 아무도 없던 곳에서 목소리가 들리더니 덥석, 한율의 팔을 잡으며 진은수가 나타났다.

크륵?! 동시에 달려오던 작은 괴물 떼도 일제히 움직임을 멈췄다. 불청객이 순식간에 사라지자 적잖이 당황했는지, 두 발로 서선 두리번거린다.

본래 괴물이든 동물이든 땅속에 살면 시각 대신 청각과 후각이 예민하게 발달하기 마련이지만, 지상의 강한 괴물들과 군을 피해 어쩔 수 없이 지하에 터를 잡은 놈들 같았다.

진은수가 속닥거리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힘이 다했다고 해서 걱정되는 마음에 따라온 걸까.

“네, 전 괜찮아요.”

크릉, 크르릉!

그때, 허공에 둥둥 뜬 장이가 콧바람을 세게 불면서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설마.’

게이트가 있는 주둥이를 쩌억 벌리는 장이.

한율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욕을 지껄였다.

‘저 새끼가?’

그러나 장이의 목적은 지금 몰려온 괴물 떼를 게이트 너머로 삼키기 위함이 아니었다.

기이잉.

“……?!”

한율과 진은수는 놀란 눈으로 미니 게이트를 돌아보았다.

잔잔하게 일렁거리던 게이트의 가장자리가 불꽃처럼 크게 흔들린 순간, 목표물을 잃고 어리둥절하던 괴물들이 홀린 듯이 그 안으로 폴짝폴짝 뛰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

한율은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회색 게이트가, 노란색이 됐어?’

버둥거리던 장이가 주둥이를 옆으로 찢으며 웃었다.

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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