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3화 (425/427)

인간보다 괴물이 낫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이해원은 여전히 커다란 토끼 인형 머리에 손을 얹은 채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쌍두 족제비 장이가 머리 하나를 다시 꺼냈다. 놈이 게이트가 있는 아가리를 벌리자 사방에서 괴물들이 달려왔고, 이해원은 마법 무기로 놈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괴물들은 주춤거리는 기색 없이 결계를 에워쌌다.

그때 괴물들의 목표가 쌍두 족제비란 걸 알아차린 진은수가 케이지를 낚아채 카모플라쥬 능력을 전개, 보호 결계 밖으로 뛰쳐나갔다. 쌍두 족제비가 돌연 시야에서 사라지자 몇몇 괴물들은 당황했으나, 이내 진은수가 도망친 방향을 쫓았다.

곧 그들과 멀찍이 떨어진 진은수가 케이지를 던졌고, 서한율이 그녀 곁에 도착했다. 그때 땅속으로 이동하던 괴물이 지면을 무너뜨리며 등장, 한율은 돌아온 쌍두 족제비, 진은수를 결계로 감싼 뒤 괴물들을 모조리 썰어버렸다.

이후 힘이 떨어졌는지 그대로 무너진 지면 아래로 추락했다.

치직.

정상욱이 초조한 목소리로 서한율에게 무전 했다.

[한율 씨, 제 말 들립니까? 두 분 모두 괜찮은 겁니까?]

곧 진은수의 대답이 돌아왔다.

[네, 저희는 괜찮습니다. 현재 ○○교차로 인근 무너진 지하철 철로에 있으며….]

잠깐의 머뭇거림. 이어진 진은수의 말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노란색 게이트로 추정되는 미니 게이트를 발견했습니다. 서한율 님은 현재 힘을 소진한 상태라 자력으로 빠져나가는 건 힘들 것 같습니다.]

정상욱이 회신했다.

[바로 구조대 보내겠습니다.]

이번엔 한율이 대답했다.

[그리고 중위님, 오늘 각성자 실험은 중단하겠습니다. 다시 위험한 돌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으니, 일단 각성자분들 모두 안전하게 돌려보내 주십시오. 아, 나기혁 씨는 제외하고요.]

멍하니 무전을 듣던 나기혁이 펄쩍 뛰었다.

[나는 또 왜?!]

이해원은 보호 결계 주축 역할도 하는 토끼 인형 담당자인 터라, 나기혁을 제외한 각성자들을 버스가 있는 곳까지 호위했다.

차량에 있던 예비 케이지를 챙겨 한율과 진은수가 떨어졌던 현장으로 갔을 땐, 두 사람 모두 무사히 지상으로 올라온 뒤였다.

[은수 씨가 카모플라쥬 능력으로 감싸주지 않았다면, 지하에 있던 괴물 떼에게 공격당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한율의 말에 진은수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선배님. 오히려 선배님 덕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는걸요. 감사합니다.]

[쌍두 족제비의 사라졌던 머리가 다시 생겨난 거야 그렇다 쳐도, 지난번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괴물들이 이번엔 왜 갑자기…. 그것도 왜 숨었던 괴물들까지 이성을 잃은 것처럼 달려든 건지, 짐작 가는 바가 있습니까?]

실험을 직관하러 온 김관식 소장을 비롯해,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한율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저 밑에 있는 게 정말 노란색 게이트인 겁니까?]

[혹시 한율, 이런 일이 발생할 걸 예상했나요?]

한율은 고개를 젓곤 영어로 대답했다.

[전혀요. 조금 전 소장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전에 이 녀석을 데려왔을 땐 서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때와 오늘 다른 점이 있다면.]

한율의 시선이 이해원이 안고 있는 토끼 인형을 향했다.

[각성자의 능력 에너지로 괴물들을 공격한 것뿐입니다.]

[……!]

[설마….]

[이전에 진행한 화상 회의에서 한율이 그랬었죠. 게이트는 멸망 위기에 처한 세상의 생물체를 구해주기 위해 열린 초자연적 현상으로 추측된다고. 그렇기에, 괴물들이 나오자마자 재가 된 게이트만 축소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렇다면 숨겼던 머리를 다시 꺼낸 이유가….]

한국 게이트 괴물 연구소장이 한율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한율처럼 모두를 위해 영어로.

[각성자의 능력이 정말로 게이트 덕에 주어진 것이라면, 게이트가 살리려 했던 괴물들이 되레 게이트의 힘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모순이 발생한 것이겠죠. 그래서 지난번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거고요. 그때 괴물들은 인간이 만든 무기에 공격당하고 있었으니까.]

미국 인사가 추론을 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각성자의 에너지로 공격당하자, 그 모순을 지우기 위해 괴물들을 구해주려 머리를 다시 꺼낸 것이다?]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괴물들은 살기 위해 이미 ‘저쪽 세상’에서 게이트를 한 번 건넜습니다. 그래서 쌍두 족제비의 노란색 게이트를 감지하고, 살기 위해 다시 몰려든 것이죠. 하지만.]

장비에 부착했던 액션캠 메모리를 기기에 넣어 재생했다.

[이게 쌍두 족제비에게 달려들었던 괴물들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제가 허공에 띄워 처치하기 직전.]

날카로운 바람의 마나로 인해 잘게 토막 나는 괴물들. 웁. 아무리 괴물이라 할지라도 상당히 끔찍한 장면이기에, 몇몇 사람이 뒷걸음질 치며 물러났다.

한율은 몇 초 전, 허공 높이 뜬 괴물들이 담긴 장면으로 영상을 돌렸다.

[쌍두 족제비가 삼킬 수 있는 크기의 괴물 몇 마리가 이미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이후,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큰 괴물들까지 강제로 들어오려 하자 우리 쪽으로 도망친 거고요. 그리고 조금 전, 아주 중요한 현상을 목격했습니다.]

무너진 지반 아래, 달려가는 쌍두 족제비를 쫓다가 어둑한 지하철 철로에 생긴 게이트를 발견한 영상. 한율이 게이트를 향해 던진 작은 돌멩이가 튕겨 나온다.

그때 작은 괴물 떼가 몰려왔고, 한율은 진은수의 카모플라쥬 능력 덕에 놈들의 시야에서 숨을 수 있었다.

모두를 경악하게 만든 건 이후 벌어진 일.

쌍두 족제비가 다물었던 게이트 머리를 쩍 벌린 순간, 가장자리가 잔잔하게 일렁거리던 미니 게이트가 크게 요동쳤다. 몰려왔던 작은 괴물들이 홀린 듯이 해당 게이트로 몸을 던지며 사라졌다.

[아니, 조금 전 다른 괴물들은 쌍두 족제비를 노리고 달려들었는데 왜 이번엔 다른 게이트로….]

[쌍두 족제비에게 네 발 달린 동물뿐만이 아니라, 괴물들을 조종하는 능력도 있었던 걸까요?]

한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괴물들은 본능적으로 자신들이 살 수 있는 게이트가 ‘생기자’ 뛰어든 것입니다. 쌍두 족제비 역시 은수 씨의 카모플라쥬 영역에 포함되어 놈들 눈엔 보이지 않았거든요. 감각으로 좇아야 하는 게이트 대신, 바로 옆에 또렷이 보이는 게이트를 선택한 거죠.]

괴물 떼가 사라지고 적막이 내려앉은 어둑한 철로. 영상 속 한율의 손이 다시 돌멩이를 집어 게이트로 던졌다. 돌멩이는 조금 전과 달리 튕기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

게이트와 괴물들을 연구하던 사람들은 곧 이 변화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세상에….]

[막혔던 게이트가….]

사람들의 시선이 새로운 케이지에 얌전히 들어간 쌍두 족제비를 향했다. 두 개의 머리가 나란히 케이지 문 너머 인간들을 바라본다.

한율은 추측을 입에 담았다.

[쌍두 족제비는 회색 게이트를 노란색 게이트로 바꾸는 힘을 갖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슥. 멍하니 쌍두 족제비에게서 한율에게로 시선을 옮겼던 사람들이, 이번엔 그의 시선을 따라 하늘 위에 뜬 거대한 레드 게이트로 향했다. 결계에 처박혀 짓눌린 괴물들이 지상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어서 또 다른 실험을 진행해보려 합니다.]

[설마 돔구장 위에 뜬 회색 게이트….]

이해원의 중얼거림에, 한율은 그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쌍두 족제비가 회색 게이트를 노란색 게이트로 바꿀 수 있고 또 그렇게 만든다면… 우리는 더는 괴물들을 직접 상대할 필요 없이, 놈들을 모조리 다른 세상으로 보낼 수 있게 될 겁니다.]

……!

모두가 놀란, 그러나 상기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그렇게만 된다면 이는 무척 기쁜 일이었으므로.

[형, 아직 에너지 남았죠?]

이해원이 토끼 인형 머리를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 정돈.]

한율은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실험은 제가 레드 게이트에 친 결계가 깨지면 그때 시작하겠습니다.]

* * *

몇 시간 후, 레드 게이트와 멀지 않은 빌딩 꼭대기 층.

깨진 창을 결계로 막았으나, 전기가 끊긴 지 오래된 사무실은 무척이나 싸늘했다. 여기에 곳곳에 밴 화약 냄새.

툭툭. 한율은 의자에 쌓인 먼지를 대충 치우곤 앉았다.

통창 앞에서 게이트를 바라보던 이해원이 한숨을 쉬었다.

“아무것도 오갈 수 없던 꽉 막힌 회색 게이트가 갑자기 열릴 수 있단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그나저나 이건 소소한 의문인데.”

이해원이 한율을 돌아보며 물었다. 함께 있는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며.

“각성자 대부분 회색 게이트가 생긴 뒤로 각성하기 시작했잖아. 만약 돔구장의 게이트가 노란색으로 바뀐다면, 각성자들의 능력은 어떻게 될까?”

“다른 나라 사례지만, 한 각성자가 반경 수백 킬로미터 내에 게이트가 없는 지역으로 갔었는데 능력에 변화가 없었대요. 그걸 봐선… 그대로 있을 것 같은데요?”

“지구상의 모든 게이트가 사라져도?”

“글쎄요.”

“그런데 나는 괴물을 관찰해야 하니 그렇다 쳐도.”

뚱한 얼굴로 책상에 걸터앉아있던 나기혁이 진은수를 가리켰다.

“은수는 왜 계속 여기에 있어야 하는 거야? 정말로 괴물들을 돔구장 게이트까지 유인할 생각이라면 저 엄청나게 머리 큰 괴물도 따라올 거라는 소린데, 너무 위험하잖아. 아까 은수가 쌍두 족제비 케이지 들고 도망쳤을 때도 괴물들, 보이지 않는데도 잘만 쫓아가던데.”

정상욱이 챙겨준 빵을 만지작거리던 진은수가 대답했다.

“제가 자원했어요, 선배님.”

“뭐? 왜?”

“한율 선배님, 지하에 생긴 미니 게이트에도 결계를 치면서 힘을 많이 쓰셨잖아요. 괴물들이 게이트의 기운보다 앞에 보이는 사람을 공격하지 말란 법도 없고요.”

나기혁이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은수 네가 서한율을 지키겠다고? 정말로 돔구장 게이트가 열리고, 저기 약이 바짝 오른 수백 마리의 괴물이 그 안으로 얌전히 들어갈 거란 보장도 없는데? 미쳤어? 너 죽을 수도 있어, 은수야. 네 말처럼 이 녀석, 힘이 거의 다 떨어진 상태라 보호 결계도….”

말을 하던 나기혁이 돌연 한율과 진은수를 번갈아 보더니 하, 짧게 웃었다.

“은수 너 진짜로 서한율 좋아해서 그래?”

힐끗. 조용히 통신 장비와 무기를 점검하던 정상욱 중위, 그리고 다른 군인들이 슬며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당사자인 진은수는 덤덤한 얼굴로 또박또박 대답했다.

“아니요. 실험을 주체하는 사람이 한율 선배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전 남았을 거예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그리고.”

진은수의 시선이 한율을 향했다. 마주친 두 사람의 눈. 진은수가 입가를 올리더니 다시 나기혁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 선배님한테 차인 지 오래라, 이성적인 관심도 떠난 지 오래됐어요.”

“…….”

“…아, 그래?”

나기혁이 머리를 긁적였다.

“미안하다. 조금 전 말은 내가 선 넘었다. 대신 이거 줄게.”

나기혁이 주머니에서 어스래빗 굿즈 키링을 꺼내더니 한율에게 물었다.

“지금은 나보다 은수가 더 위험할 수 있으니까, 넘겨도 되지?”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보호 결계 아이템이래. 네가 갖고 있어.”

“하지만 한율 선배님이 선배님께 준 귀한 물건인데….”

“선배가 주면 ‘감사합니다’하고 그냥 받아.”

덥석. 나기혁이 진은수의 손에 억지로 키링을 쥐여주었다. 진은수는 당황한 얼굴로 손에 놓인 키링과 나기혁, 한율을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꾸벅였다.

“감사합니다….”

치직.

통신 장비 스피커를 통해 무전이 울렸다.

[레드 게이트 결계 이상 징후 포착. 곧 깨질 것 같습니다.]

한율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느슨해졌던 분위기가 긴장으로 팽팽해지며, 각성자들을 비롯한 군인들 모두 무장을 갖추고 점검했다. 청력 보호 헤드셋이 장착된 방탄 헬멧을 쓴 터라, 정상욱 중위가 무전으로 말했다.

[전원 작전 위치로.]

한율은 한쪽 팔엔 커다란 토끼 인형을, 다른 손엔 쌍두 족제비 장이가 든 케이지를 들었다.

사실 돔구장의 게이트가 그의 고향과 연결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다. 그러나 괜찮다. 설령 육눈박이 열 마리가 몰려가도, 제국의 마법사 부대라면 마땅히 물리칠 수 있을 테니.

지구인보단 괴물이 훨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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