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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303)

프롤로그

@U

“회장님!”

“아버지!”

이런 기분이었단 말인가.

죽음.

내게 주어진 시간이 다 되어 간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몸이 편안하다.

약물 때문인가?

“회장님… 회장님!”

의식은 여전히 뚜렷한데 그 의식으로 몸을 움직일 여력이 남아 있지 않다.

“흐흐흑… 회장님….”

“호들갑들 하아… 떨지 마.”

의지대로 움직여 주는 건 눈과 입, 왼쪽 검지 하나가 전부였다.

“이보… 게. 태산이.”

“네, 회장님. 하아, 저 여기 있습니다. 장태산이 여기 있습니다아….”

“자네만 남고 다들 좀… 밖으로 물려.”

내 오랜 친구, 장태산이만 남기고 안사람과 자식들 모두를 병실 밖으로 물렸다.

“네, 회장님. 다 나갔습니다.”

울음이 섞여 갈라지고 있는 이 친구의 음성에, 그래도 인생 헛살지는 않았다는 일말의 안심.

그 안심은 저승 가는 길에 되새겨 볼 귀한 선물임이 틀림없다.

“가는 마당에 회장은 무슨. 태산이. 그… 동안 내 옆에서 고생이 많았어.”

“아닙니다, 아닙니다.”

“태산이.”

“네, 회장님.”

“편하게… 불러 봐. 옛날처럼.”

“….”

“어서.”

그나마 감각이 남아 있는 내 왼쪽 검지를 꼭 잡으며 내 오랜 친구가 말했다.

“그래, 이 친구야. 중길아.”

“내가 복이 많아 한 세상 잘… 즐기다 간다.”

“이이이익… 흐흐흐….”

“내가 복이 없어, 내 세상 온전히 즐겨 보지도 못하고… 자네와 내 부족한 자식들한테 너무 큰 숙제만… 남겨 놓고 이렇게 급하게 간다.”

쉰아홉.

평생을 내 세상 만드는 일에만 정신이 팔려 살아왔는데, 정작 내 세상 속에서 제대로 살아 보지도 못하고 가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췌장암 말기.

내가 근성과 의지로 다른 건 다 잡았는데, 내 몸에 퍼지고 있던 암세포는 잡지를 못했다.

지나온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전쟁 통에 가족들과 헤어져 작은아버지와 단둘이서만 떠밀려 내려왔던 남한.

내일이면 올라갈 수 있겠지, 다음 달이면 부모님을 뵐 수 있겠지, 내년이면 그래도 상황이 좀 나아지겠지… 하며 지내온 세월이 어느덧 40년이 지났다.

옥수수죽이라도 얻어먹기 위해 지리산 벌목장에서 나무를 하고, 스물이 되었을 땐 합당포 시장 포목점에서 옷감을 만지는 일을 배워 2년 만에 내 가게를 열었다.

그 가게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갈 즈음, 작은아버지의 중매로 지금의 안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다.

합당포 일대의 유지 집안이었던 처가에는 전쟁 통에 집안의 청년들을 모두 잃은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고, 그런 집안의 첫째 사위로 들어갔던 나는 안사람의 내조와 처가 쪽 어른들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사업을 빠르게 확장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미군 부대로 식자재를 납품하는 사업에 손을 얹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는데, 그게 바로 지금의 재경 그룹을 있게 만든 재경상회의 출발이었다.

재경상회로 큰 자금을 만들고, 거기에서 만들어진 인맥들을 통해 진문 대교를 사이에 두고 하루 세 번 합당포와 진문을 다니는 버스 회사를 인수하였다.

말이 버스 회사이지, 언제 퍼져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고물 버스 두 대가 전부인 회사였다.

그때 내 나이 서른이었다.

당시 진문 대교는 엄밀히 말해 대교가 아닌 다리라고 불리었는데, 내게 여유가 되면 버스 회사를 인수하라고 정보를 흘려 준 처가 쪽 큰 어른의 말씀대로 이듬해에 도로 공사 확정이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진문 쪽으로 큰 상권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하루 세 번 합당포와 진문을 다녔던 버스는 하루 다섯 번, 일곱 번, 열한 번… 유동 인구수가 급속도로 증가를 하며 재경관광의 기반을 만들어 주었다.

곧 재경관광은 버스 사업을 기반으로 택시, 그리고 항운 사업으로까지 확장을 하게 되었는데, 마흔에 들어서면서 난 재경관광을 항공업의 중심으로 올려놓겠단 야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야심을 실현시키기 위해선 반드시 정권의 선택을 받아야만 했다.

경제 개발 프로젝트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당시 독재 정권에선 건설에 투자하겠다는 기업들 위주로 특혜를 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 특혜를 특권으로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재경식품으로 이름이 바뀐 재경상회와 재경관광에서 현금을 만들어 내면 그 현금을 곧바로 새롭게 가지를 친 재경건설 쪽으로 투입시켰고, 그렇게 재경건설이 8년간 정부의 요청으로 쌓아 올린 시영 아파트의 세대수만 2만 세대가 넘었다.

그리고 건설업의 기회는 곧, 당시 중동 건설 붐으로까지 이어져 재경의 그룹화를 가능케 해 주었다.

“이보시오, 손 회장.”

“네, 각하.”

“내가 왜 손 회장을 이렇게 공관 밖에서 따로 보자고 한 줄 아시오?”

“모르겠습니다, 각하.”

“내 손 회장의 도움이 필요할 거 같아, 이렇게 자리를 만들었소.”

1981년.

정확하게 10년 전이다.

전쟁 통에 쌀죽이 아니라 옥수수죽, 똥죽도 먹기 힘들었던 이 나라 대한민국에서 올림픽이라는 걸 개최해 보겠다고 재계 인사들을 하나하나 직접 만나 도움의 손길을 요청했던 당시 정권.

“정 회장이 앞장을 서서 모든 걸 기획하고 진행을 하겠다 약속을 해 주었소. 거기에 손 회장도 이 나라를 위해 조금의 성의를 보태어 도움을 주시면 고맙겠는데, 손 회장 생각은 어떻소?”

“성의만으로는 부족할 듯싶습니다.”

“…?”

“이런 애국에 일조할 기회를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각하. 저희 재경은 성의가 아니라 진심을 보이겠습니다.”

나보다 10년 이상 연배가 위였던 정 회장님이 같은 이북 출신이라는 이유로 날 정권에 다리를 놓아 주셨다.

난 그 다리를 실수 없이 건너야 하는 책임이 있었다.

“저희 재경이 항공 쪽으로 투자를 하겠습니다.”

“항공?”

“네, 각하. 지금의 제반 시설만으로는 올림픽 같은 큰 국제 행사를 준비하는 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어려움은 우리 자체적으로만 가지고 있는 어려움이어야지, 그 어려움이 개최지 선정에 지장을 주게 만들어선 안 될 일입니다.”

“흐음….”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가 않았습니다. 저희 재경이 올림픽 개최 성사 여부와 상관없이 지금부터라도 한국으로 들어오는, 한국이 세계로 나가는 항공편 확보에 총력을 기울여 보겠습니다.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확실히 정 회장이 사람 보는 눈이 있구만. 괜히 정 회장이 손 회장을 두고 자신을 긴장시키는 젊은 기업인이라는 표현을 쓴 게 아니었어.”

“그게 무슨….”

“내게 그러더군. 이 회장은 자신을 자극하고 욕심을 가지게 만들어 주는 파트너 같은 경쟁자라고 하면, 아직 큰 두각을 드러내지는 못하고 있지만, 재경의 손 회장은 자신을 긴장하게 만드는 존재라고. 아마 손 회장이 정 회장과 연배만 비슷했다고 하면 지금 정 회장은 이 회장이 아니라 손 회장하고 경쟁하고 있을 거라는 말을 한 적이 있지.”

“….”

“그렇게 합시다. 손 회장 말대로 올림픽 개최 성사 여부와는 상관없이 어차피 미래를 위해서라도 항공편 확대, 확보는 꼭 필요한 일이니, 그 일… 내 임자한테 한번 맡겨 보겠소.”

정부의 임명 지원으로 국내 첫 민영 항공사를 계획할 수 있었던 재경 그룹은 그 특혜를 관광 쪽으로 먼저 돌리지 않고 건설 쪽에서 먼저 활용해 신공항 건설 허가권을 따냈고, 다시 한번 그룹의 모든 유동 자금을 건설에 집중시켜 당시 한국과 올림픽 개최지 경쟁국이었던 일본의 금융권으로부터 한화 2,000억 원 상당의 차관을 끌어내는 데 성공을 했다.

재경 그룹이 국내 재계 서열 11위까지 단숨에 도약을 하는 순간이었다.

그 후로도 나는 합당포에서 포목점으로 첫 장사를 시작했던 것을 경험으로 당시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던 세한모직을 인수했고 그 이름을 재경모직으로 바꿔서 패션 의류, 잡화, 원단 수입으로까지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그렇게 10년이라는 세월이 더 흘러 지금의 국내 재계 서열 6위라는 재경 그룹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난 세월 내가 이뤄 놓은 모든 성공은 매번 내가 도박과 같은 결정, 쉽지 않은 판단의 갈림길 앞에 놓여 있을 때 내 오랜 친구 장태산이가 내 옆을 단단하게 지켜 주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태산이.”

꺼져 가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으며 친구를 불렀다.

“그래, 다 듣고 있어. 힘들 텐데 작게 말해도 돼. 작게 말해. 언제나처럼 내가 알아들으면 되니까.”

장태산이는 실제로도 그런 내 인생의 동반자였다.

내가 아무리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 주는 사람.

“내 자식 놈들이… 재경을 이끌어 가기엔… 아직 경험이 많이 부족해.”

“알겠네. 내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내 자식 놈들… 자네 자식인 듯 챙겨 주게.”

“알았어. 내 반드시 그렇게 할게.”

“자네가 내 형제인 듯 부탁하는 거야.”

코끝에 매운 냄새가 걸리기 시작했다.

매운데, 너무 편안한 냄새였다.

그리고 이내 난 이 냄새가… 죽음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한 냄새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눈을 감기 전 보고 싶었던 얼굴은 단연 안사람이었다.

눈을 감기 전 내 옆을 지키게 만들고 싶었던 얼굴은 단연 내 자식들이었다.

눈을 감기 전 꼭 한번 안아 보고 싶었던 건 손주, 정엽이였다.

하지만 마지막 내 말을 전달할 사람은 장태산이었고, 그게 내가 눈을 감기 전 반드시 해야 할, 회장으로서의 마지막 업무였다.

“중길이. 중길이! 회장님! 회, 회장니이이임!”

* * *

정말 이런 세계가 있긴 하구나….

공간이라는 개념을 초월해 버린 아주 요상한 곳에 도착을 했다.

방향을 알 수도 없고, 이곳이 실재인지조차 확신을 할 수 없는 아주 요상한 곳.

그곳엔 오로지 밝음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 밝음은 순수히 그것이 전부였는데, 나란 존재도 찾을 수가 없는 곳이었다.

분명 난 그 공간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난 방향도 확인할 수 없는 그 무한한 밝음 속에서 내 육신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과연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게 내 육신의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인지, 아님 요상한 이 세상과 그저 영혼으로 교감을 하고 있는 것인지조차 구분을 할 수가 없었다.

걸을 수도 없었다.

육신이라는 게 사라져 버렸기에.

하지만 느낄 수는 있었다.

개념을 완벽히 초월해 버린 이 공간이 날 중심으로 조금씩 앞으로 밀려 나가고 있다는 걸.

“다시 신홍기 잡았습니다. 고정운.”

뭐야? 이게 무슨 소리야?

소리의 방향을 전혀 확인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이럴 땐 외곽으로 내어서 이… 오! 홍명보! 다시 오른쪽으로 서정원! 서정원! 슛! 네, 골이에요! 골! 네, 서정원 선수네요. 45분, 후반 45분! 정말 극적인 골입니다. 2 대 2! 피파 랭킹 41위 한국이 세계 5위 스페인을 상대로 후반 45분 극적인 동점 골을 기록했습니다!”

축구?

그런데 도대체 이건 어디에서 들리는 소리야?!

“네, 최악의 붕괴 사고가 난 오늘 성수 대교 주변에는 구조대원들이 단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서 치열한 구조 활동을 벌였습니다마는, 시민들은 구조대가 너무 늦게 도착했다면서 당국을 원망했습니다. 오늘 사고 현장을 김동원 기자가 헬기를 타고 돌아봤습니다.”

성수 대교가 무너져?

어떻게 그런 일이….

아니, 그걸 떠나서 왜 이런 게 나에게 들리는 거지?

도대체 이건 뭐야? 왜 이러는 거야?

“삼풍 백화점이 붕괴된 지 정확히 7분 만에 그 참사 현장을 촬영한 8㎜ 비디오테이프가 오늘 공개되었습니다.”

이번엔 또 삼풍 백화점?

아무것도 볼 수 없고, 과연 이것이 실체인가 싶은 무한한 밝음의 세상.

마치 이 세상이 아무런 실체 없는 날 한곳에 묶어 두고 제멋대로 휙! 휙! 하고 밀려 앞으로 나가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고 있었다.

꼭 파도에 밀려가는 느낌이다.

“그동안 심각한 자금난을 겪어 오던 한보철강이 오늘 끝내 부도로 쓰러졌습니다. 세계 제5위의 제철소 완공을 눈앞에 두고 한보철강이 이렇게 맥없이 쓰러짐에 따라서 그렇지 않아도 불황에 시달리던 우리 경기에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죽어서도 꿈을 꾸는구나.

한보가 쓰러진다고?

이런 재미없는 꿈을 봤나.

“재계 26위인 삼미 그룹이 결국 자금난을 견뎌 내지 못하고 쓰러졌습니다.”

“우리나라의 제빵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삼립식품이 자금난으로 끝내 부도를 내고 쓰러졌습니다.”

“재계 서열 8위인 기아 그룹이 부도 방지 협약 대상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쌍방울개발과 주식회사 쌍방울이 최종 부도 처리 되었습니다.”

“결국, 종합 주가 지수 500선마저 붕괴되었습니다.”

“해태 그룹이 끝내 부도 신청을 냈습니다.”

“원화 1달러가 사상 처음으로 1,000원을 넘었습니다.”

도, 도대체 이거 뭐야?

왜 이러는 거야?

왜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들이 내게 들리는 거야?

“정부가 결국 국제 통화 기금 IMF에 구제 금융을 신청하기로 했습니다. 경제 우등생 한국이 마침내 그간 이뤄 낸 신화를 뒤로하고 사실상 국가 부도를 인정하고 말았습니다.”

국제 통화 기금 IMF?

“금융 기관으로서는 처음으로 고려증권이 오늘 부도를 냈습니다. 금융 기관은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대마불사의 신화가 깨어졌습니다.”

“어제 고려증권에 이어 오늘은 재계 12위인 한라 그룹이 부도를 냈습니다. 이어 대우 그룹의 쌍용 자동차 인수로 우리 자동차 업계의 구조 개편이 시작될 전망입니다.”

“동서증권이 오늘 최종 부도 처리되었습니다.”

“재계 순위 31위인 극동건설이 오늘 화의를 신청했습니다.”

“삼양식품이 오늘 4개 계열사에 대해 화의 신청을 하기로 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오늘은 국내에 고급 우유 바람을 불러일으켰던 파스퇴르유업이 1차 부도를 내고 화의를 신청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국내 재계 순위 6위인 재경 그룹마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눈을 감기 전까지 날 괴롭혔던 나의 걱정과 근심이 이렇듯 환청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걸.

“오늘 재경 그룹은 항공과 식품, 모직만 남겨 두고 건설을 필두로 총 11개의 계열사를 빠르게 정리하여 조직 개편에 들어가겠다는 발표를 내어놓았습니다.”

도대체 이게 뭐냐고!

“속보입니다. 손홍명 재경 그룹 총수가 오늘 오전 8시, 자택 침실에서 홀로 목을 맨 채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만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 그만하라고!

“손홍명 재경 그룹 회장은 고 손중길 회장, 재경 그룹 창업주의 장남으로 1993년 6월, 고 손중길 회장의 별세 이후 그룹 회장직을 역임. 지난 5년간 재경 그룹을 이끌어 왔습니다. 정부가 국제 통화 기금 IMF에 구제 금융을 신청한 이후 급속도로 재정 사정이 악화됨에 따라 부득이하게 대대적인 구조 조정을 강행하면서, 결국 계열사 분리, 매각을 결정하는 과정에 책임을 통감하고 극단적인 결정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차기 재경 그룹 회장 자리에 과연 누가 올라서게 될지에 관해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얼마나 더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실력 없는 소설가의 공상 소설 같은 이야기들을 듣고 있었을까?

미국에서 항공기 두 대가 납치가 되어 뉴욕의 110층짜리 세계 무역 센터 빌딩을 갖다 박은 테러가 벌어졌다는 소리에는 실소가 나올 지경이었다.

언제 끝날지 모를 이 무한한 밝음, 그리고 가늠할 수 없는 공간.

이 속에서 도대체 얼마나 더 있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이 말 같지도 않은 소리들이 멈추길 바랄 때였다.

난 저승으로 안 가나?

아님 여기가 저승인가?

그러던 그때….

알 수 없는 방향에서 들려오던 뉴스 소리, 다양한 앵커들의 방송 목소리가 조금씩 빨라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확실히 빨라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공간의 개념이 아예 없던 그곳의 흐름까지도 빨라지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미지의 힘에 의해 조금씩 앞으로 밀려가고 있다는 건 아까부터 알고 있었는데, 그 밀려가는 저항의 힘이 갑자기 강해지고 있었던 거다.

그러다 저 멀리에서 점 같은 물체가 나타났다.

드디어 이 미지의 영역에서 방향이라는 게 생겼다.

아니나 다를까 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방향 쪽으로 계속해서 가까워지고 있었고, 빨라진 음성의 앵커들이 알려 주는 뉴스는 2003년, 2004년, 2005년… 2012년, 2014년, 2016년… 계속해서 눈을 감기 전 내가 봤던 주마등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점의 크기가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그만큼 내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그 점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처음엔 작은 점으로만 보이던 것이, 점차 내가 있는 이 무한한 밝음의 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넘어가는 영역의 문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저곳인가, 저승이라는 곳이….

본능적으로 난 저 영역의 문을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건너가겠다는 걸 알 수 있었고, 그 순간 난 두려움보다는 저 문을 통과하는 순간 아직까지 가지고 있는 나의 의식이 여전히 저 밖에서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님 아예 사라져 버릴 것인지에 대한 공포스러운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다.

어차피 누구나 한 번씩은 경험해야 하는 죽음.

그 죽음이 다소 빨랐기에 아쉬움은 남지만, 그렇다고 운명을 거스르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그동안 여기까지 날 밀고 왔던 형체 없는 밀림의 압박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힘이 날 다른 세상으로 넘어가는 영역의 문 쪽으로 빨아당기기 시작했다.

* * *

“헉! 헉! 헉!”

찰나였다.

너무 강렬한 빛이 날 덮치기 시작해서 눈을 감아 버렸고, 그 눈을 감자마자 감각이라는 게 생겨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난….

마치 다시 살아난 것처럼 낯선 공간, 꼭 고급 호텔방처럼 보이는 곳에 혼자 누워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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