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는 속도 없냐? (2/303)

너는 속도 없냐?

호텔방이 분명하다.

그리고 벽에 가려져 보이지 않고 있는 한쪽 공간에선 화장실 변기 물 내리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당혹스럽기보다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가 더 궁금할 뿐이다.

뭔가 이상하다.

아주 많이 이상하다.

몸을 더듬거리며, 팔다리는 잘 붙어 있는지를 살펴봤다.

몸이… 내 몸이 아니다.

“……!”

조금 전 변기 물 내리는 소리가 들렸던 곳에선 계속해서 사람 인기척이 들려오고 있었고, 난 얼른 손으로 나의 몸과 얼굴을 더듬거렸다.

분명히 이건 내 몸이 아니다.

피부가… 너무 젊다.

“알았어, 알았다고. 20분이면 도착해.”

곧 조금 전 변기 물 내리는 소리가 들렸던 곳에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냥 먼저 가 있어. 난 따로 출발할 테니까.”

난 낯선 여자의 목소리만 들으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호텔이 맞다.

여긴 호텔이다.

그것도 꽤 수준이 높은 고급 호텔의 스위트룸 정도는 되는 거 같다.

하지만 뭔가가 이질적이다.

그것도 상당히.

저게 텔레비전인가?

텔레비전이 맞는 거 같은데, 난생처음 보는 얇은 텔레비전, 그것도 벽에 붙어 있는 텔레비전이었다.

한참 동안 멍하니 호텔방 안의 이질적인 모습들을 확인하다 결국 현관 쪽에 붙어 있는 통거울 앞에 섰을 때였다.

도대체 이거….

“나, 나한테 지금 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이거 왜 이래?”

처음 보는 얼굴.

거울 안엔 젊어도 너무 젊은 남자가 들어가 있었는데, 그 거울 속 젊은 남자는 지금 내가 짓고 있는 표정을 똑같이 따라 짓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일어났어?”

아까부터 들려오던 여자 목소리의 주인.

그 여자가 아주 요상한 차림으로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자기 얼굴을 일부러 가리려는 듯, 검은 모자와 선글라스, 그리고 검은색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야밤에 길거리에서 만났다면 도둑으로 오해받기 딱 좋은 모습이었다.

“오빠는 회사 안 들어가 봐도 돼?”

“회사….”

“아까 오빠 잘 때 폰으로 전화 몇 통이나 왔어. 내가 일부러 오빠 자라고 안 깨웠어.”

“폰?”

폰? 뭘 말하는 거지?

“저기 놔뒀어. 충전해야 할 거 같아서. 한 시간 넘게 지났으니까 얼추 충전됐을 거야.”

여자가 손으로 가리킨 곳엔 지금 이 여자가 들고 있는 물건과 아주 비슷하게 생긴 검은 물건이 전선 같은 것에 연결되어 놓여 있었다.

잠시 후 여자가 들고 있는 물건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리며 불이 들어왔는데, 여자는 귀찮은 듯 그걸 귀에 대며 말했다.

“간다고, 가. 20분. 방금 매니저랑 20분 뒤에 숍에서 만나기로 했어. 그만 좀 재촉해. 끊어.”

휴대 전화기인가?

무전기?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얇고, 꼭 아이들 장난감처럼 작을 수가 있지?

“나 간다, 오빠.”

“…….”

“뭐야? 나 간다고. 또 연락해."

여자가 객실 문을 열려고 할 때였다.

“저기, 잠깐만.”

난 여자를 잡아 세웠다.

지금 이 상황 자체가 어떤 상황인지를 알아야 할 거 같았다.

여전히 마취액을 맞은 것처럼 모든 상황이 몽롱하게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분명 모든 게 뚜렷하고 선명한데,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왜?”

“내가….”

“나 저녁에 촬영 있다니까? 얼른 숍 가서 머리해야 해. 옷도 골라야 하고. 할 말 있음 빨리해.”

“내가 누구지?”

그 말에 여자는 코웃음을 쳤다.

“또 시작이네, 또 시작이야. 저기요, 손정훈 씨.”

손정훈?

여자가 갑자기 쓰고 있던 검은색 마스크를 벗으며 내게 다가왔다.

천국인가?

여자의 외모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내가 가끔씩 이렇게 일탈처럼 오빠를 만나는 건 말 그대로 그냥 일탈이야.”

“일탈?”

“다른 스폰 필요한 애들처럼 오빠한테 뭔가를 바라고 만나는 게 아니라, 그냥 가벼운 일탈, 무슨 말인지 알아?”

아니, 전혀 모르겠다.

“오빠가 재경 그룹 둘째 아들이니, 뭐니 하는 거 따윈 하나도 관심 없다고. 그런 질문, 장난인 거 알지만 은근히 사람 불쾌하게 만드니까 앞으로는 조심 좀 하자.”

재경 그룹?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지금 내가… 설마… 나는 모르는 나의 손주가 되어 있단 소리인가?

얼른 고개를 돌려 창밖을 쳐다봤다.

저 멀리 남산 타워가 보이는 걸로 봐선 여긴 서울이 맞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서울이 아니다.

분명 있어야 할 자리에 내가 아는 건물들은 없고, 낯선 아주 높은 빌딩들이 빽빽하게 솟아나 있었다.

“스스로를 너무 대단하게 생각하는 거 아냐? 그런 것도 상대를 봐 가면서 해야지. 하긴, 이런 모습이 때론 귀엽기도 해서 지금까지 계속 받아 주고 있는 거긴 하지만. 아무튼, 나 간다. 얼른 폰 확인해.”

“잠깐만, 아가씨 잠깐만.”

“아가씨?! 야! 진짜 바쁘다니까 계속 장난칠래?”

“지금… 몇 년도지?”

“재미없다고 했어? 그만해. 이럼 오빠 매력 떨어진다?”

“그건 아가씨 사정인 거고, 지금이 몇 년도냐고!”

“뭐, 뭐야? 왜 이래?”

“지금 여기 몇 년도야?”

“몇 년도긴 2022년이지.”

“2022년?”

“아, 비켜. 갑자기 정색해서 깜놀했네, 이씨….”

여자는 결국 날 옆으로 밀쳐 내며 현관문을 열었고, 난 모든 게 너무 혼란스럽기만 했기에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버린 그 여자를 잡지도 못했다.

그저 내가 알고 있는 서울과 너무 다른 모습으로 마치 날 놀리고 있는 듯한 창밖 서울의 모습을 가만히 노려만 보고 있었다.

웅… 웅… 웅….

“이건 또 뭐야?”

어디선가 웅웅거리는 진동음 비슷한 소리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난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진동음의 진원지를 찾기 시작했다.

웅… 웅… 웅….

조금 전 여자가 ‘폰’이라고 알려 주었던 이름의 기계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그 진동음 역시 거기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

만져도 되는 건가?

참으로 요상했다.

차마 섣부르게 만지지는 못하고 가만히 살펴보니 화면처럼 보이는 곳에서 글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노예 3

‘노예 3’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고, 그 아래로는 초록색과 빨간색 불이 동시에 들어와 있는데, 초록색 불 밑엔 ‘통화’, 빨간색 불 밑엔 ‘종료’라고 쓰여 있었다.

휴대 전화?

이게 이 시대의 휴대 전화기인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아까 그 여자가 했던 것처럼 ‘통화’라고 적혀 있는 초록색 불을 손가락으로 눌러 귀에 붙여 봤다.

―여보세요? 과장님?

전화기가 맞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과장님? 여보세요?

내가 과장인가?

“여보세… 요?”

―네, 과장님. 어디세요?

노예 3.

날 과장이라고 부르는 걸로 봐선 아마도 회사 사람인 거 같은데, 난 이 노예 3이 회사에서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는 사람인지 알 방법이 없었다.

“누구세요?”

―네?

“누구십니까?”

―아, 저… 김원호 차장입니다.

차장?

날 과장이라고 불렀으니, 당연히 내 상사란 말인데 어째 이리 날 어렵게 대하지?

내가 들어와 있는 이 몸의 주인이 내 손주이기 때문에? 우리 집안의 자식이기 때문에?

하긴, 그럴 수도 있지.

―혹시 어디십니까, 과장님.

“저요?”

―네, 점심시간이 지났는데도 오시질 않아서 부장님이 전화 한 통 해 보라고 하시네요. 혹시 오늘도 바로 밖에서 퇴근을 하시는지, 아님 들어오실 건지 여쭤보라고도 하셨고.

“김원호 차장님?”

―네, 과장님.

“지금 나한테 아니, 저한테 문제가 좀 생겼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부장님께는 밖에서 바로 퇴근을 하신다고 전달해 놓겠습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 친구가!

“아니,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네?

“지금 저한테 문제가 생긴 거 같다니까요?”

―그럼 혹시 제가 지금 바로 본사 전략 기획 본부에 전화를 넣어야 할까요?

“거긴 왜?”

―혹시 이번에도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리신 건가 해서요.

조금씩 이성적인 사고가 가능해지고 있었다.

본사 전략 기획 본부.

상대의 말을 통해 현재 손정훈이라는 내 손주 놈은 그룹 본사가 아니라 계열사 한 곳에서 회사 일을 배우는 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만한 일에 상대가 아주 자연스럽게 본사 전략 기획 본부를 입에 담는 걸로 봐선 그곳의 도움을 여러 번 받은 거 같고.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원래 재경의 본사 전략 기획 본부는 그룹과 집안의 은밀한 비밀들을 감추고 덮어 오는 일을 도맡아 하는 곳.

그리고 근무 시간 중에, 아무리 그게 점심시간이라고 해도 이 시간에 호텔방을 다닐 정도라면, 그리고 이렇게 점심시간을 자기 마음대로 쓰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면, 회사 동료를 노예라고 표현을 할 정도라면… 아무리 내 핏줄이라도 문제가 많은 놈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것 따윈 지금 내게 크게 중요한 게 아니다.

지금 나는 내게 일어나고 있는 이 모든 것이 도대체 뭔지를 알아야겠고, 그와 동시에 이 세상에 대한 이해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여보세요? 과장님? 괜찮으세요?

“괜찮은 거 같은데… 그래도 지금 분명 문제가 있어요.”

―제가 지금 바로 본사 전략 기획 본부에 전화를 넣겠습니다.

“아니,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요?

“내가 지금 보니까, 여기가….”

객실 한쪽에 고급스러운 사무 책상이 위치해 있었는데, 그 책상 위로 붙어 있는 사무 패드에 호텔의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처음 보는 호텔 브랜드다.

알파벳 발음대로 하자면 이건 이탈리아 쪽 호텔 브랜드인 거 같은데, 한국에 유럽 브랜드 호텔이 들어와 있다는 게 놀라웠다.

“록킨스 호텔인데요.”

―록킨스 호텔이요?

이탈리아 브랜드가 맞는구나.

“네… 뭐 여기에서 남산 타워도 보이고 그러네요.”

* * *

재경모직의 인사부 차장 김원호는 아랫입술을 꼬옥 깨물며 억지로 통화를 이어 나갔다.

그의 이마 위로 그가 현재 하고 있는 인내를 증명하듯 굵은 핏줄이 여러 갈래로 생겨나 있었다.

“그러시군요.”

김원호의 통화 내용을 모두 듣고 있었던 인사부 직원들 역시 하나같이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거나, 아랫입술을 깨물며 소리 없이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는 등 각자의 방식대로 불만을 표출하고 있었다.

―제가 사정은 나중에 따로 설명을 할 테니까, 누가 날 좀, 아니… 좀 믿을 만한 사람, 입이 무거운 사람으로 해서 사람 좀 보내 주시면 고맙겠어요.

“록킨스 호텔로요?”

―네, 부탁 좀 할게요.

김원호 차장은 잠시 스마트폰 마이크 부분을 손가락으로 막아 놓고 입술만 움직여 “X바 새끼가 진짜….”라는 울분을 토해 놓은 뒤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과장님.”

―네.

“누가 가야 될까요?”

또 무슨 사고를 어떻게 쳤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수습을 하러 오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본사 전략 기획 본부에는 알리지 말란 말은 큰 문제는 아니라는 뜻일 거고.

김원호는 부장님을 보내거나 자기가 직접 가야 하는 것인지, 아님 그냥 아무나 보내도 되는 것인지를 확실히 알고 싶었다.

―말했잖아요. 믿을 만한 사람. 입이 무거운 사람으로 보내 달라고.

장난하나….

김원호 차장은 속으로만 화를 내며 침착하게 통화를 이어 갔다.

“실례가 안 된다면 과장님. 혹시 호텔 측과 문제가 생기신 겁니까?”

―아니이이이!

김원호 차장은 갑자기 들려오는 짜증 섞인 고성에 잠시 스마트폰을 귀에서 떼어 내고 한숨을 깊게 내뱉었다.

이 개새끼가 또 짖기 시작하네.

―그냥 좀….

“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보내겠습니다. 어디, 로비에서 기다리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로비 말고… 여기가 지금 1103호거든요.

객실로 올라오란 말인가?

―혼자 밖으로 나갈 엄두가 안 나요. 누가 와서 좀 도와줘야겠어요. 1103호. 객실로 좀 누가 와 줬으면 좋겠는데… 부탁 좀 할게요.

X새끼….

이젠 하다 하다 애인이랑 같이 뒹군 호텔방으로까지 사람을 보내 달라고 해?

정말 X새끼네.

“도착까지 길어 봤자 10분이면 될 겁니다. 바로 앞이지 않습니까.”

―10분요?

“아! 과장님. 잠시만요.”

―왜요?

“과장님 혹시 술 드셨습니까?”

―아뇨, 그런 거 같지는 않아요.

김원호는 다시 한번 속으로 생각했다.

X새끼라고.

누굴 놀리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술을 처마셨는지 안 마셨는지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나.

“차 가지고 가셨죠? 제가 정 대리한테 택시 타고 가라고 하는 게 더 나을 거 같네요.”

―어떻게 하든, 그건 알아서 하시고 사람 좀 빨리 보내 줘 봐요.

망 과장.

재경모직의 인사부 사람들은 재경의 둘째 아들 손정훈을 ‘망나니 과장’이라는 뜻으로 그의 뒤에선 망 과장이라고 불렀다.

망 과장과의 통화를 끝낸 김원호 차장은 자기 휴대폰을 신경질적으로 책상 위로 던져 놓고 정현수 대리를 불렀다.

“정 대리.”

“네, 차장님.”

“통화하는 거 다 들었지?”

정 대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 책상 의자에 걸어 놓은 자신의 재킷을 챙겨 들었다.

“네, 록킨스 호텔 맞죠?”

김원호 차장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객실로 오란다.”

“객실요?”

“하아, X바… 끄.”

“흥분하지 마세요. 한두 번 있는 일입니까? 몇 호랍니까?”

“1103호.”

“1103호. 네, 알겠습니다. 제가 가서 얼른 모시고 오겠습니다.”

“택시 타고 가.”

“네! 진정하세요, 차장님.”

“사표 마렵네, 진짜. 도대체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되는 거야?”

“다른 사람들 듣습니다. 진정하고 화 삭이고 계세요. 금방 가서 모시고 올게요.”

“X발 새끼가 술을 처마셨음 대리를 부르면 되지, 우리가 지 기사야, 뭐야?”

“그래서 대리인 제가 가는 거 아닙니까. 하하하.”

“웃음이 나와? 너는 속도 없냐?”

“그게 있으면 직장 생활 하는 데 좀 도움이 될까요?”

“…….”

“다녀오겠습니다.”

* *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