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건 병원에 갈 일이 아니야
차장이라는 작자와 통화를 끝내고 다시 창가 앞으로 섰다.
더 이상 내가 알고 있는 서울이 아니다.
건물은 둘째 치고 도로를 달리고 있는 차들.
그 모양새 하나하나가 신비로울 지경이다.
“흐음….”
생각이 복잡해져 머리가 뜨거워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이건… 현실이 분명한데, 그렇다면 지금이 2022년이라고 했으니까, 3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그것도 내 손주의 몸에 내가 들어왔다는 말이 되는 건가?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될 거 같아 우선 찬물을 몸에 끼얹었다.
이 호텔 내부의 모든 집기, 시설은 항상 최고급만 취급해 왔던 내 눈에도 무척 세련되고 놀라울 정도였다.
특히 샤워기와 세면대는 기가 막혔다.
차가운 물이 몸에 닿는 순간 이건 절대 꿈일 수 없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렇다면 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이 몸의 주인인 내 손주 놈은 지금 어떻게 된 거란 말인가.
찬물에 몸을 씻고 다시 세면대 앞으로 서서 거울로 내 손주 놈의 얼굴을 쳐다봤다.
사내자식이 여자도 아니고 어쩜 이렇게 기생오라비처럼 곱상하게 생겼을까.
그러다 문뜩 이 얼굴과 닮은 얼굴이 떠올랐다.
그런데 그 얼굴이 원래라면 이 아이의 엄마여야 할 첫째 며느리가 아니라, 둘째 며느리의 얼굴이다.
“잠깐….”
그리고 불현듯, 그 끝을 알 수 없었던 빛의 무저갱 속에서 뉴스 앵커의 목소리로 들었던 기분 나쁜 내용이 다시금 귓가에 맴도는 기분이 들었다.
“손홍명 재경 그룹 총수가 오늘 오전 8시, 자택 침실에서 홀로 목을 맨 채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
아냐, 아냐.
절대 그럴 리가 없어.
홍명이가 스스로 목을 매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래, 자세히 보니 둘째 며느리가 아니라 내 얼굴이 더 많이 들어가 있네.
둘째 며느리의 얼굴은 이 녀석 얼굴에 전혀 없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이지.
홍명이가 뭐가 아쉬워서, 내가 다 일궈 놓고 모든 걸 다 물려주고 떠났는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했을까.
그런데 그놈 참….
사내자식이 어쩜 이렇게 여자처럼 예쁘장하게 생겼을꼬.
난 거울로 손주 녀석의 얼굴을 내 얼굴처럼 톡톡 건드려 봤다.
몇 살이나 됐을까?
눈을 감기 전 첫째 홍명이한테서는 정엽이, 둘째 홍준이한테서는 정태, 이렇게 각각 아들이 하나씩 있었다.
막내 여정이는 시집을 보내지 못했고.
역시 홍명이 놈이 내 말을 들어줬군.
아들 하나로는 부족하다고, 아들딸 상관하지 말고 하나만 더 만들어 보라고 내가 그렇게나 신신당부를 했었는데, 결국 하나를 더 만들었네.
잘했다.
그래, 세상에 가족만큼 든든한 내 편이 어디에 있을까.
갑자기 정엽이 놈이 어떻게 컸을지, 얼마나 어른이 되어 있을지가 궁금해진다.
2022년이라고 했으니까, 어디 보자….
어이쿠.
그 어린것이 벌써 서른다섯이나 됐겠구나.
정태 놈도 서른셋이나 됐겠네.
괘씸한 놈들.
명색이 형이라는 놈들이 동생 놈 관리를 이렇게밖에 못 해?
출근해서 잠시 짬을 내는 점심시간에 여자를 불러 호텔에서 낮잠을 자?
이런 얼빠진 놈.
이것도 핏줄이라고 내 눈감기 전 존재 자체도 몰랐던 손주 놈이지만, 괜히 더 곱상한 얼굴까지 밉게만 보였다.
띵동! 띵동!
벨 소리가 들렸다.
아차!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그래, 내가 사람을 불러 놓고 너무 한가했다.
얼른 눈에 보이는 대로 옷을 챙겨 입고 문을 열었다.
“과장님.”
“어… 네, 들어와요. 일단 안으로 잠깐만 들어와요.”
이 몸의 주인, 내 손주 놈보다 최소 네다섯 살은 더 많아 보이는 남자였다.
그런데 잠깐만.
아까 차장이라는 사람이 대리를 보내 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대리인데 왜 이렇게 젊어?
“괜찮으십니까, 과장님.”
“지금 회사 많이 바빠요?”
“뭐, 지금 이 시간이야 그나마 좀 한가한 시간대이죠.”
“그럼 나가기 전에 우선 나하고 이야기를 좀 합시다.”
상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나한테 문제가 좀 생겼어요.”
“문제라면…?”
객실의 상황을 살펴보더니,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투로 상대가 말했다.
“진짜 괜찮으신 거 맞죠?”
“음… 아니요, 지금 상황이 많이 안 좋습니다. 일단 이쪽으로 잠깐만 좀 앉아 봅시다.”
소파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당연히 현재 내 상황을 있는 그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칫 나중에 내가 이 몸에서 빠져나갔을 때, 내 손주 놈이 회사 사람들로부터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니까.
그렇다고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세상인지도 모르겠고,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현 상황을 모두 숨긴다는 건 더 말도 안 되는 거고.
“저기….”
“네, 과장님.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뭔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처리하고 회사 복귀해야죠.”
“혹시 나하고 같이 일을 하는 분입니까?”
내가 묻자 상대는 갑자기 자기와 나 말고는 아무도 없는 객실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자기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요?”
“여기 그쪽이랑 나 말고 누가 있어요?”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내가 참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장님, 갑자기 왜 그러세요?”
“내 이름이 손정훈이 맞습니까?”
“…….”
“혹시 내가 몇 살입니까?”
아무리 객실 안을 뒤져 봐도 이 녀석의 지갑을 찾을 수가 없었다.
지갑이라도 있음 그 안에서 주민 등록증 같은 걸로 확인이라도 미리 해 봤을 텐데, 휴대 전화기와 시계, 차 키로 짐작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과장님.”
“네.”
“정도라는 게 있습니다.”
갑자기 말투가 바뀌었다.
“뭐라고요?”
“정도라는 게 있다고요.”
상대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미 귀 옆부터 시작해서 목 근처는 터질 듯 붉어져 있었다.
“감히 용기 내어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과장님?”
“…해 봐요.”
“저희도 사람입니다.”
“……!”
“과장님은 물론 저희와 다르시겠지만, 저 포함해서 김 차장님, 고 부장님… 저희 모두 저희 삶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출근을 하는 겁니다.”
“…….”
“하지만 이건 아닙니다. 어지간하면 참겠는데, 이건 정말 아닌 겁니다, 과장님. 전 과장님이 많이 취하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모시러 왔던 겁니다. 그런데 아니네요.”
“…….”
“적당히 좀 해 주시면 안 됩니까?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만 하는 겁니까? 저희는 돈을 벌기 위해 회사에 나오는 거지, 그 돈을 벌기 위한 대가로 일하기 위해 회사에 나오는 거지, 과장님의 장난, 재미의 상대가 되어 드리기 위해 출근을 하는 게 아닙니다.”
“잠깐만. 잠깐만요.”
이런 반응이 나올 줄 알고 호텔로 사람을 보내 달라고 했던 거다.
이런 상황을 회사 안에서 벌어지게 만들 순 없는 거니까.
“내가 평소에도 이런 일들을 자주 시켰습니까?”
“네?”
“장난하는 거 아니고, 대리님 놀리겠다고 이러는 건 더더욱 아닙니다. 내가 말했지요? 지금 내 상황이 많이 안 좋다고.”
이 어린 친구를 상대로 어쩔 수 없이 다른 재계 경영인들을 상대할 때에나 지어 보이던 눈빛을 만들어 냈다.
“기억이 안 나.”
“……?”
“내가 누군지, 내가 왜 이 호텔방에 있는 건지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고요.”
“과장님….”
“장난이 아니라니까. 내가 왜 이런 장난을 당신한테 하나?”
“…….”
“설마 내 주위에 그렇게까지 사람이 없나? 이런 장난 하나 받아 줄 사람이 없어서 부하 직원을 그것도 근무 시간에 호텔방으로 불러다 칠 정도로?”
“…….”
“아니라고. 그런 게 아니라 지금 내가 상황이 정말 많이 안 좋다고. 그래서 묻는 거라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진짜… 기억이 안 나십니까? 과장님이 누구신지도 기억이 안 나신다고요?”
여전히 내 말을 완전히 신뢰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입장을 바꿔 놓고 내가 이 친구라도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정도로 치부하고 말았을 거다.
“갑자기 눈을 떴는데 내가 처음 보는 여자랑 이 방에 같이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내가 누군지를 모르겠고.”
“어떻게 그럴 수가….”
“걱정하지 말아요. 나도 내가 지금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 봐야 한다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으니까. 아무튼, 그러고 있는데 전화가 왔어. 자기를 김원호 차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급한 마음에 내가 부탁을 한 거예요. 나는 지금 여기가 대한민국 서울이라는 건 알겠는데, 지금 내가 하는 말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난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누가 날 좀 데리러 와 줬으면 좋겠다고 부탁을 한 거라고.”
“과장님….”
“장난하는 거 아니라니까. 내가 왜 이런 장난을 치겠냐고. 그것도 우리 회사에 돈 벌어다 주는 귀한 직원을 근무 시간에 호텔방으로 불러내서….”
그러자 상대는 날 유심히 쳐다보다가 “확실히 말투가… 평소와 많이 다르시긴 하네요.”라고 말했다.
“혹시 주무시다가 머리를 어디에 부딪치신 건 아니세요?”
“…….”
“같이 계셨다던 여자분한테 물어보셨습니까?”
“지금처럼 이성적인 생각을 해 볼 겨를이 없었죠. 눈뜨자마자 이렇게 되어 있었으니까. 그냥 내 이름 정도만 알아냈어요.”
“잠시만요, 과장님. 지금 이게….”
갑자기 바지 주머니를 뒤지더니, 그 안에서 내가 사용해 봤던 것과 비슷하게 생긴 휴대 전화를 꺼내는 게 아닌가.
도대체 세상이 얼마나 많이 변했길래, 휴대 전화를 일반 대리까지 다 들고 다니는 거지?
“왜? 뭐 하려고요?”
“차장님한테 전화를 드리려고요.”
“아까 나한테 전화하셨던 김원호 차장님?”
그 말에 상대는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왜 그렇게 봐요?”
“이거 진짜 연기 아니죠?”
“아니라니까 거참 진짜….”
“네, 아닌 거 같아서 확인해 본 겁니다.”
“뭐요?”
“제가 아는 과장님은… 저나 다른 직원들 앞에서 차장님 이야기를 하실 때 ‘전화를 하셨던’이라는 식의 표현을 안 쓰시는 분이시거든요.”
“알았어요. 무슨 말인지 알겠으니까, 일단 전화는 하지 맙시다. 지금 내 상황이 이렇다는 걸 그쪽만 알고 있고, 다른 회사 사람들한테는 알리지 맙시다.”
어쨌거나 이 몸을 얼른 손주 놈한테 돌려줘야지.
어떻게 하는지 지금 당장은 모르겠지만, 어떻게 내 손주 놈 몸을 내 것처럼 쓰겠나.
다시 살고 있다는 게 무척 기쁜 일이긴 하지만, 그걸 내 손주 놈의 몸을 빌려서 하고 싶지는 않다.
잠깐이면 된다.
아주 잠깐.
그러니 내가 이 몸을 떠나, 다시 손주 놈에게 이 몸이 돌아갔을 때, 나로 하여금 손주 놈의 생활에 문제가 생겨선 안 될 것이다.
“아뇨, 그게 아니라 지금 바로 회사로 모시고 가면 안 될 거 같아서 차장님께 보고하려고 하는 겁니다.”
“……?”
“지금 차장님은 과장님이 술에 취해 계신 줄 아세요.”
“아….”
“그래서 넘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호텔에 계시면서 사람을 보내 달라고 했다고 오해를 하고 계세요. 잠시만요, 과장님.”
이 친구.
순발력이 꽤 괜찮은데?
“네, 차장님. 접니다.”
상대는 내 눈치를 살펴 가며 통화를 시작했다.
“지금 과장님 만났는데, 상태가 좀 안 좋은데요? 네, 많이 취하셨어요. 지금 바로 모시고 회사에 들어가면 보는 눈도 있고 문제가 될 거 같은데, 어떻게 합니까? 아뇨, 주무시는 건 아닌데, 네, 지금 제 옆에 계십니다. 네, 네.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최대한 빨리 정신을 차리시게끔 해서 함께 복귀하겠습니다. 네!”
전화를 끊고 나서 상대가 날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저랑 지금 같이 병원에 가 보시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하는 게 맞는 거 같거든요.”
이 친구야, 이건 지금 병원에 갈 일이 아니야.
내가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가야 할 곳이 있다면 그곳은 병원이 아니라 무당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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