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걸로 뭘 찾는다는 거예요?
“제 이름은 정현수입니다, 과장님.”
“정현수 대리….”
“네.”
몇 마디 제대로 말을 섞어 보기도 전에 이 몸의 주인, 내 손주, 정훈이라는 놈이 그간 회사 직원들을 어떻게 대해 왔는지 대충 파악을 할 수 있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이놈을 어떻게 생각을 하고 있는지까지도.
정현수 대리는 내게 자신을 소개하면서도 내가 지금 자신을 상대로 장난을 치는 걸 수도 있다는 의심을 거두지 못한 채 조심스럽기만 했다.
“나는 몇 살입니까?”
“94년생이시죠.”
94년생… 그럼 몇 살이야?
곱상하니, 기생오라비처럼 생겨서 아무리 많이 먹어도 스물넷, 스물다섯 살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많네.
“그럼 나는 회사에 언제 입사를 한 겁니까?”
“6개월 조금 안 되십니다.”
공부가 길었나 보군.
그래, 맏이도 아니고 둘째라면 맏이를 받쳐 주기 위해서라도 공부를 단단하게 시켜 놓는 게 중요하지.
입사를 과장으로 시켰군.
그건 잘한 일이다.
내가 첫째 홍명이 놈을 재경에 입사시킬 때에도 그 시작을 본사 과장 자리에서 하게 만들었고, 홍준이 놈 역시 재경모직 전략기획부 과장으로 시작시키지 않았나.
“그런데 진짜 병원에 안 가보셔도 되겠습니까?”
“가 봐야겠죠.”
병원에 간다고 답이 나오겠나.
“근데 그 전에 몇 가지만 좀 물어봅시다. 내가 지금 너무 혼란스러워서 그래요.”
“…….”
“나는 정 대리가 나란 사람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이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
“그럼 다른 사람을 상대로 또 똑같이 이러지 않아도 될 거 아니에요. 나는 지금 나에게 이런 문제가 생겼다는 걸 가급적이면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하고 싶어요. 금방 원래대로 돌아갈 거예요. 내 기분이 그래. 그래서 지금 내 상태를 아는 사람은 대리님 한 분이면 충분하게끔 하고 싶다고. 그리고 되도록 대리님의 입도 막고 싶고.”
“…….”
“그렇게 해 줄 수 있겠어요?”
“네, 그건 크게 어렵지는 않을 거 같습니다. 회사에서 과장님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회장님의 둘째 아드님이시라는 거 외엔 과장님에 대해 회사 사람들이 아는 건 거의 없습니다. 우리 인사부 안에서도요.”
“인사부? 그럼 내가 인사부 소속이란 말이네요?”
“네.”
인사부.
나쁘지 않지.
어차피 정엽이 놈이 이끌어 갈 거니까, 둘째에겐 인사 쪽을 집중케 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입사한 지 6개월이나 됐다면서 어떻게 나에 대해 회사 사람들이 아는 게 거의 없을 수가 있지요?”
“그건… 제가 아니라 과장님 본인만 대답을 해 줄 수 있는 부분인 거 같습니다.”
“……?”
“출근만 하셨지, 부서 사람들과 소통이라는 걸 전혀 안 하셨으니까요. 근무 시간엔 말도 잘 안 섞으셨습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인사 일을 하는 사람이 근무 시간에 회사 사람들이랑 말을 안 섞으면 업무를 어떻게 봅니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정 대리가 말했다.
“정말 이상합니다.”
“또 뭐가요?”
“본인이 누구이신지, 나이조차 기억이 안 난다고 하시는 분이, 어떻게 직장 생활에 대해선 옳고 그름을 판단하실 수 있으십니까?”
역시 이 사람은 지금 날 안 믿고 있는구나….
“정현수 대리.”
“네, 과장님.”
“지금 회사에서 받고 있는 연봉이 어떻게 돼요?”
“5천 조금 안 되게 받고 있습니다.”
순간 대리 연봉이 왜 그렇게 높냐는 생각을 하다가, 이내 30년 세월을 생각하니 금방 이해가 갔다.
“대리 몇 년 차죠?”
“2년 차입니다.”
인사부 대리 2년 차에 연봉 5천이라….
30년이 지났는데도, 물가가 그렇게까지 크게 오르지는 않았나 보네.
우선 난 호텔 객실을 천천히 살펴보며, 정훈이 놈의 씀씀이 정도를 대충 파악해 봤다.
잠시의 쾌락을 위해 이 정도 객실을 이용할 정도라면 돈을 돈이 아니라 물처럼 쓰는 놈일 가능성이 크다.
괘씸한 놈.
“그럼 우리 이렇게 합시다.”
“뭘요?”
“내가 정 대리한테 수고비를 좀 줄게요.”
“수고비요? 왜요?”
“하기에 따라 지금 정 대리가 받는 연봉 정도 수준으로 수고비를 챙겨 줄 수도 있어요.”
정 대리가 미간 사이에 깊은 세로 주름을 만들어 내며 날 뚫어져라 쳐다봤다.
“물론 한 번에 다 주지는 않을 거예요.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정 대리이지만, 나는 정 대리가 아닌 다른 대안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테니까. 혹시 또 모르죠. 내가 기대하는 만큼 정 대리를 통해 도움을 못 받을 수도. 그럴 땐 다른 대안을 찾아야죠. 안 그래요?”
“…….”
“일단 오늘 안으로 천만 원 정도 만들어서 선수금 삼아 먼저 줄게요. 그리고 나머지는 앞으로 내가 정 대리한테 큰 부탁을 하나씩 할 때마다 주는 거로. 난 그렇게 하고 싶은데, 정 대리 생각은 어떨지 모르겠네.”
“그야….”
“세상에 공짜가 어디에 있어요? 뭔가 부탁을 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지.”
“아뇨, 과장님. 저는….”
난 재빨리 손을 들어 정 대리의 말을 가로막았다.
“정 대리 입장에선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닐 거예요. 대신 나에겐 아주 큰 도움이 되는 일이겠지.”
“제가 무슨 도움을 드릴 수 있을까요?”
“궁금해하지 마요.”
“네?”
“일단 오늘 내가 천만 원을 주겠다는 건, 묻지 말고 의심도 하지 말란 의미로 미리 주는 선수금. 딱 그 정도로만 생각해 주면 고맙겠어. 혼자서 속으로 궁금해하는 거까지 내가 어떻게 말리겠어요. 안 그래요? 그런데 나한테 이유를 묻지는 마요.”
“…….”
“나도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단 말이지. 나도 이해가 안 되고 납득이 안 되는 이 상황을 정 대리까지 이해, 납득을 시켜 가며 뭔가를 할 수가 없을 거 같단 말이에요.”
“아….”
“나 지금 정 대리한테 장난치는 거 진짜 아닌데, 그렇다고 이게 장난이 아니라는 걸 무작정 믿으란 말도 못 하겠어. 그러니까 나 말고 돈 믿어요. 그리고 정 대리는 내가 주겠다는 돈 액수만큼의 믿음을 내게 줘요. 어때요? 할 수 있겠어요?”
잠시 고민을 하던 정 대리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뭘 그렇게 고민을 해? 내가 설마하니 도둑질을 부탁하겠어, 사람을 죽여 달라고 하겠어? 회사에 해 끼치는 거 전혀 없을 거고, 만약 내가 부탁을 하는 내용이 회사에 해가 될 수도 있을 거 같다고 정 대리 스스로 판단이 되면 나한테 말을 해요. 그럼 되잖아요.”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돈으로 정 대리를 단단하게 묶어 놓고 본격적으로 묻기 시작했다.
“지금 현재 재경 그룹의 위치가 어떻게 됩니까?”
“위치라면 정확하게 어떤 위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런 답답한 친구를 봤나.
“재계 순위가 어떻게 되느냐고요.”
나도 참… 나다.
이게 제일 궁금했다.
“업계별로 말씀을 드립니까, 아님 토털로 말씀을 드립니까?”
“둘 다 말해주세요.”
“재경 그룹 자체는 작년에 28위까지 올라오면서 다시 국내 30위 안에 들어섰습니다.”
올라와서 28위라고? 허, 허허허… 개탄을 할 노릇이다.
“항공은 여전히 1위로 10년 넘게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고, 우리 재경모직은 국내 업계 3위, 그리고 재경식품은 업계 6위. 그렇게 작년에 집계된 재계 순위, 그리고 업계별 순위입니다.”
결국 항공을 1위까지 올려놓았군.
잘했다.
그래, 정말 잘했다.
그런데….
“…….”
“……?”
뭐야? 왜 업계별 순위를 말을 하다가 말지?
“다른 거 더 물어보실 거 있으십니까?”
“그게 끝이에요?”
“네? 뭐가요?”
“항공, 모직, 식품. 그게 끝이냐고요.”
“네, 그렇습니다만….”
“계열이 그게 전부라고요?”
“네, 현재 항공, 모직, 식품… 이렇게 세 개가 전부입니다.”
불안한 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기분이다.
“오늘 재경 그룹은 항공과 식품, 모직만 남겨 두고 건설을 필두로 총 11개의 계열사를 빠르게 정리하여 조직 개편에 들어가겠다는 발표를 내놓았습니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만 한다… 그런데도 불길한 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럼 혹시….”
“네.”
“아니에요.”
아니라고 말을 해 놓고도 결국엔 물어보게 됐다.
“회장님, 그러니까 제 아버지의 존함은 어떻게 됩니까?”
“손홍준 회장님이십니다.”
다시 한번 빛의 무저갱 속에서 들려왔던 불길한 뉴스 앵커의 보도 소리가 들리는 착각이 들었다.
“손홍명 재경 그룹 총수가 오늘 오전 8시, 자택 침실에서 홀로 목을 맨 채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아니다. 아니어야 한다.
“잠깐만. 잠깐만요. 그럼…그…저한테 큰아버지가 한 분 계시는 거로 아는데….”
“아… 손홍명 전 그룹 회장님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맞아요.”
“그분은….”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하고 삼키게 됐다.
“벌써 20년도 더 전에… IMF 터졌을 당시에… 그… 씁, 극단적인 선택을 하셨던 걸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었죠.”
“……!”
“괘, 괜찮으십니까, 과장님.”
그럼 그 빛의 무저갱 속에서 들었던 뉴스 앵커가 이야기하던 모든 소식이 모두 사실이었단 말인가?
그럼 내 아들, 홍명이 놈이 정말로 그 어리석은 짓을 했단 말인가?
도대체 왜!
췌장암 말기를 선고받았을 당시보다 백 배, 천 배, 백만 배는 더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다.
“과장님? 과장님!”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누군가의 뾰족한 구둣발에 명치를 강하게 얻어맞은 듯, 숨을 삼킬 수가 없었다.
“과장님! 물, 물… 잠시만요. 가만히 계세요!”
정 대리가 가져다준 호텔 생수를 한 모금 마시고 나니 조금은 진정이 되는 듯했고, 그럼에도 홍명이 놈의 바보 같은 결정에 의한 충격은 여전히 날 비통함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럼 지금 재경 그룹의 회장은 손홍명이가 아니라 손홍준이고, 나는 지금 그 손홍준의 둘째 아들이다 그 말인 거네요? 맞습니까?”
“네, 맞긴 맞는데… 아무리 그래도 회장님이고 또 과장님 아버지 되시는 분 성함을 그렇게 함부로….”
“정태는요?”
“본사 상무님 말씀하시는 겁니까?”
“정태가 지금 본사 상무로 있습니까? 지금 정태 나이가 어디 보자… 91년생이니까… 벌써 본사 상무에 앉히기는 너무 어린 나이 아닌가? 언제부터 회사 생활을 시작했는데요?”
“죄송합니다. 저도 거기까지는… 지금 바로 확인해 볼까요?”
“아니,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고. 그럼 정엽이는요?”
“누구요?”
“정엽이. 손정엽이. 손홍명이 첫째 아들 손정엽이요.”
불길하다….
“죄송하지만, 저는 처음 들어 보는 이름입니다. 혹시 그분이 전 그룹 회장님의 아드님입니까?”
“맞아요. 네. 그래요.”
“아, 그렇군요. 네. 전 회장님께 아들이 한 분 계시다는 소린 저도 어디선가 들었던 기억이 있긴 합니다만, 현재 저희 회사하고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이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멍하니 가만히 있었을까.
얼른 정신을 챙겨서 다시 물어봤다.
“그럼 그… 지금 회장님이 전 회장님의 가족들을 따로 챙기거나 살 자리를 마련해 준 게 없단 말입니까?”
“그 부분에 대해선 전 잘 모르겠습니다. 저 같은 일반 사원들이 그런 집안의 예민한 부분까지 다 알 수는 없죠.”
“좀 알아봐 주실 수 있습니까?”
“어떤 걸요?”
“정엽이. 손정엽이에 대해서.”
정 대리는 고개를 신중하게 끄덕였다.
“최대한 조심히 알아보겠습니다. 하지만 음… 네, 어떻게든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 전에.”
“네.”
“혹시 장태산이라는 분은 아세요?”
“그럼요. 미래금융 장 회장님이야 우리 재경모직의 대주주 중 한 분이신데, 당연히 알죠. 손중길 회장님과 함께 재경의 기반을 만드신 분 아닙니까.”
숨통이 조금은 트이는 기분이다.
“그럼 장태산… 그분은 살아 계십니까?”
30년 전에 쉰아홉이었다.
살아 있다면 아흔이다.
기대를 하면서도 기대를 할 수 없는 상황.
“그럼요. 아직 정정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정말입니까?”
“네,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하여간 신통한 친구라니까.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것도 대단한데, 그 와중에 정정하기까지 하다?
됐다.
그 친구만 살아 있다면 모든 게 해결된다.
장태산이라면 정엽이와 큰며느리의 행방을 알고 있으리라.
“그럼 손정엽이에 대해선 정 대리가 힘들게 알아볼 필요 없을 거 같네요.”
하지만 여전히 괘씸하다.
홍준이 놈.
하나밖에 없는 형이 그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해서 세상을 떠났음, 동생 된 도리로 형수와 조카는 자기가 책임을 지고 따로 살폈어야 할 게 아니냔 말이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위해 재경을 만들어 일으켰는데, 무엇을 위해 내 젊음과 건강 모든 것들을 재경에 갈아 넣었는데!
“하나 더.”
“네.”
“문주란.”
내 안 사람.
“아, 문주란 여사님이요? 돌아가신 지가 꽤 됩니다.”
그래, 그렇겠지….
그럴 수 있다고, 침착하게 수긍을 하려고 하던 그때.
“문주란 여사님은… 손홍명 전 그룹 회장님이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잘은 모르지만, 자식을 앞세우는 고통만큼 가슴 찢어지는 고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불쌍한 사람.
평생을 욕심 많은 남편 만난 덕에 사랑 한번 제대로 못 받고, 그 남편 내조한답시고 고생만 하다가, 말년엔 아들놈 앞세우는 고통까지 다 겪고 눈을 감았으니 어찌 눈을 감는 그 순간이 편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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