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을 왜 이렇게 많이 쓰는 겁니까?
정훈이 놈이 혼자 살고 있다는 마을에 도착했을 때였다.
마을이라는 표현이 맞는 거 같다.
무척 이국적이고, 내게는 너무 낯선 형태의 주거촌이었다.
우선 그 주거촌 입구에 경비 초소처럼 보이는, 마치 고속도로 톨게이트 정산소 같은 개념의 공간이 있었다.
그 앞으로 정 대리가 차를 바짝 붙였는데, 삐삑!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톨게이트 출입 차단기가 올라가며 입장을 허가했다.
“방금 그건 뭡니까?”
“뭐 말씀이십니까?”
“삐삑 하는 소리가 들렸잖아요. 그런 소리가 난 후에 저 차단기가 올라간 거 아니에요?”
“아, 그거요. 이겁니다, 이거.”
정 대리는 차 앞 유리에 붙어 있는 작은 스티커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게 일종의 열쇠 같은 겁니다. 아까 그 차단기가 이 스티커로 과장님 차가 이곳 타운 하우스 입주자라는 걸 증명한 거죠.”
“타운 하우스. 여기를 타운 하우스라고 부릅니까?”
“네, 아파트하고 개념이 조금 다르죠. 다들 개인 단독 주택처럼 되어 있는 곳이니까요.”
여긴 30년 전에 종강양행이 있던 자리다.
이 비싼 땅에 이런 주거촌이 들어설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나.
차마 정 대리에게 이런 집은 얼마나 하는지 아느냐고 물어볼 엄두가 안 났다.
더 이상의 박탈감을 줄 순 없는 노릇이니까.
하나같이 모두가 똑같이 생긴 3층짜리 주택들이 길게 펼쳐지고 있었다.
각 주택은 차고로 보이는 철문이 1층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어느 한 집 앞으로 정 대리가 차를 밀어 넣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번엔 차 운전석 차양 막에서 차 키와 비슷한 형태의 작은 기계를 찾아 꺼냈다.
그리고 그걸 텔레비전 리모컨처럼 차고 철문을 향해 단추를 눌렀는데, 차고 철문이 앞으로 눕듯 들어 올려지며 열리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열린 차고는 꽤 공간이 넓었는데, 그 안엔 호텔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길에서 볼 수 있었던 차들과는 확연히 다른, 그냥 딱 봐도 값비싸 보이는 차가 세 대나 더 들어가 있었다.
“이 건물은… 한집인 거죠.”
“네, 한 가구죠.”
“그럼 이제 이 차들이 다… 내 차라는 거고.”
“네.”
“그리고 난 이런 차들을 한 번씩 바꿔 타며 회사에 출근한 거네요?”
“…네.”
이쯤 되니까 이젠 정훈이 놈이나, 이놈의 애비 홍준이 놈에 대한 괘씸함, 노여움 같은 게 더는 생겨나지도 않았다.
만약 내가 살아 있는 상태에서, 내가 여전히 홍준이 놈의 애비인 상태에서 이런 충격을 받았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홍준이 놈을 내쳤을 거다.
이건 내가 아무리 이 세상을 모르고,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를 못 하는 입장이라도 자식 놈을 이런 식으로 키우는 게 잘못인 건 분명하다.
“비밀번호를… 기억 안 나시죠?”
현관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정 대리가 내게 물었다.
“비밀번호요? 무슨 비밀번호.”
“잠시만요. 아! 다행이네. 지문 인식도 되네요.”
지문 인식?
“과장님, 여기. 이쪽으로 엄지 좀 갖다 대 보세요.”
현관 문고리 앞에 꼭 무선 전화기처럼 숫자가 올라오는 기계가 붙어 있었는데, 그 밑 작은 홈으로 손가락을 대어 보라고 정 대리가 말했다.
시키는 대로 거기에 엄지를 갖다 대었더니 이번엔 띠리릭! 하는 소리가 나오면서 쇠가 부드럽게 긁히는 소리가 문고리 쪽에서 흘러나왔다.
“문은 이렇게 여시면 됩니다.”
“아… 이번엔 내 손가락이 열쇠군요.”
나 손중길이가 고작 이딴 신문물 앞에서 이렇게까지 버벅거린다는 게 은근히 자존심이 상할 지경.
“혹시 모르니까 제가 이거 비밀번호도 지금 변경을 해 드릴까요?”
“비밀번호 변경이요?”
“네. 안에서는 변경이 가능하거든요.”
순간 생각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놔두세요.”
언제 이 몸을 떠날지도 모르는데, 내가 이 몸을 떠난 뒤 정훈이 놈이 혼란을 겪게 만들 순 없다.
아까처럼 엄지로도 얼마든지 이 문을 열 수 있다고 하는데 굳이 뭘 바꿀 이유가 있을까.
집은 겉에서 봤을 때와는 달리 정 대리 앞에서 민망함을 감추기 힘들 만큼 엉망진창이었다.
집만 크고 겉만 그럴싸하면 뭐할까.
이렇게 내부가 개판 오 분 전인데….
“하….”
나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다행히 식탁 위에 지갑이 놓여 있었다.
“……?”
지폐 모양도 다르네.
이건 뭐 장난감 돈이야, 뭐야?
무슨 지폐가 이렇게 작아?
그리고 5만 원권?
“이거, 돈 맞습니까?”
“그럼요. 하하하….”
“5만 원짜리가 있네요.”
물론 수표가 훨씬 더 빽빽하게 채워져 있는 지갑이었다.
참… 기가 막힌다, 기가 막혀.
지갑 안에 든 수표를 다 꺼내서 확인을 해 봤더니, 그 액수가 무려 1,155만 원이다.
“일단 집이 어딘지 알았으니, 이제 됐습니다. 시간도 벌써 3시가 넘었는데, 회사로 가죠.”
“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천천히 한번 둘러보시죠.”
“둘러보긴 뭘 둘러봅니까. 내가 집 구경 온 것도 아니고, 어딘지만 알면 됐지.”
“그래도 지금 차 시동도 어떻게 거는지, 현관문 여는 방법도 모르시는데 천천히 둘러보시면서 저한테 물어볼 게 있으면 물어보십시오.”
“아뇨, 그건 됐고. 일단 이거 받아요.”
난 정훈이 놈 지갑에서 100만 원권 수표를 모두 꺼내 한 장은 따로 빼놓고 10장을 약속대로 정 대리에게 건넸다.
“근데 이걸 진짜 받아도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받아요. 약속은 약속이니까.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지금 내 상태에 변화가 오기 전까지 난 정 대리님의 도움이 지속적으로 필요할 거 같으니까.”
“…….”
정 대리는 잠시 내가 내민 수표를 쳐다보다가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손을 뻗었다.
“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난 다시 한번 개판 오 분 전인 집 안 꼴을 천천히 둘러본 후 정 대리에게 말했다.
“우선 지금 회사로 가면, 아까 김원호 차장님이라고 했나요?”
“네.”
“그 양반부터 시작해서 내가 아는 척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 양반 얼굴을 내가 알아야 할 건데, 옆에서 다른 사람들이 눈치 못 채게끔 정 대리가 좀 알려 줘요.”
“굳이 아는 척을 안 하셔도 될 겁니다.”
“네? 그게 무슨 소립니까?”
“크게 신경 안 쓰실 겁니다. 신경을 안 쓴다고 하기보다는 과장님이 먼저 말을 걸기 전에 먼저 과장님께 말을 거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어째서요? 점심시간을 이런 식으로 초과를 해 버렸는데, 그게 말이 됩니까?”
“뭐… 그래도 오늘은 회사로 복귀를 하시지 않습니까?”
“뭐요?”
“바로 점심 나가셨다가 그 길로 퇴근을 하시는 경우가 워낙 많으셔서….”
“외근을 나가는 게 아니라 그냥 점심을 나갔다가 그 길로 마음대로 퇴근을 해 버린다고요?”
“…네.”
이런 썩을 놈들을 봤나.
정훈이 놈, 그리고 이놈 애비, 홍준이 놈!
피가 끓어오르고 있다.
살이 떨릴 정도로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내가 어떻게 만든 회사인데, 내가 어떻게 자리를 다져 놓은 회사인데,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도 안 사람 손을 포기하고, 정엽이 놈 얼굴 보는 걸 포기하고 장태산이만 곁에 두고 회사를 부탁했거늘, 그런 회사를 이놈들이 아예 말아먹겠다고 작정을 한 거구나!
“과장님. 과장님?”
“…네? 아, 네.”
“괜찮으십니까?”
안 괜찮다.
이젠 안 괜찮다.
더 이상 괜찮을 순 없을 거 같다.
너무 부아가 치밀어 오르고 그 부아를 주체할 수가 없어 정말이지 어딘가에 대고 고함이라고 질러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나는… 저는 망나니입니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솔직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나, 손정훈이는 회사에서 망나니였습니까?”
“…….”
입술을 굳게 다물며 내 시선을 피해 버리는 정 대리의 모습이 대답을 대신해 주고 있었다.
“회사에는 정녕 그런 망나니인 날 혼내고 진심으로 이끌어 주는 인물이 한 명도 없었던 겁니까?”
“…….”
“한 명도요? 본사 상무도 제가 망나니처럼 회사를 다니는 걸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던 겁니까? 회장도요?”
“…….”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돌아가는 상황을 대충 알 것 같았으니까.
식탁 의자 등받이를 잡은 채, 내가 한참을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서 있자 정 대리가 한 걸음 다가와 말했다.
“인사부 회식 때 찍은 사진입니다.”
“네?”
인사부 회식 사진이라는 말에 고개를 들었는데, 사진은 없고 이번에도 정 대리는 스마트폰을 내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어디요?”
“여기요. 이거.”
스마트폰에 사진이 있다?
정말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스마트폰 안에 사진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진은 한 장이 아니라 정 대리가 화면에 대고 손가락을 옆으로 치울 때마다 계속해서 새로운 사진들이 나타났고, 더 신기했던 건 그 화면에 정 대리가 엄지와 검지를 붙여서 손가락을 벌렸다가 조일 때마다 사진의 크기가 커졌다가 다시 작아지기도 했다.
“여기 이분이 부장님이십니다. 그리고 이분이 차장님이시고, 여긴 저, 그리고 여긴 HRD의 박 과장님, 민 대리, 여긴 김 주임, 문현정 씨….”
그 사진을 보고 있자니, 역시나 이번에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인사부 전체 회식 사진입니까?”
“네, 보통 부장님은 전체 회식 때 말고는 잘 참석을 안 하십니다. 우리 HRM 자체 회식 때 찍은 사진은… 잠시만요. 어디 있을 건데….”
“그런데 왜 그 전체 회식 사진에 저는 없습니까?”
“…….”
“혹시 저는 부서 회식 자리에도 참석을 안 합니까?”
“저희가 안 모시려고 안 모시는 건 아닌데….”
“아니, 그러니까 제가 참석을 안 하는 거냐고요.”
“…네, 안 하십니다.”
아랫입술을 깨물며 다시 사진에 집중했다.
“이분이 부장님이시고, 이분이 차장님이다 이거네요?”
“네.”
“그런데 이분들도 상당히 젊으시네요. 부장님은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부장님이 올해… 네, 쉰하나 되실 겁니다.”
“쉰하나?”
뭐야? 뭔데 이렇게 다들 청년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젊어 보일 수 있지?
“그럼 차장님은요?”
“차장님은 마흔넷입니다.”
시대가 변하면서 의학이 발달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패션, 헤어스타일이 발전을 해서 그런 걸까, 내가 회사를 호령하며 현장을 누빌 당시 사무직 직원들의 모습과 비교를 하면 같은 나이인데도 다들 10살 이상씩은 젊어 보이는 거 같다.
“정 대리는 어디 가서 나이에 비해 어려 보인다는 소릴 듣는 편입니까?”
“저요? 아뇨, 제발 좀 그런 소릴 들어 봤으면 좋겠네요. 오히려 제 실제 나이보다 사람들이 서너 살씩은 더 봅니다.”
“그럼 저는 제 나이에 비해 얼굴이 어려 보이는 편입니까?”
“과장님은… 글쎄요? 그냥 딱 과장님 나이대로 보입니다. 오히려 과장님도 평소 하고 계시는 시계부터 신발, 차… 이런 것들 때문에 더 나이보다 많이 보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을 거고요.”
30년 전과는 달리 지금 이곳은 사람들의 평균적인 외모가 많이 젊어졌다고 이해해야 되는 거겠군.
무리도 아니다.
모든 게 다 이 정도로 내가 적응을 못 할 만큼 발전을 했는데, 사람들의 젊음도 당연히 발전을 해야지.
이거 하나는 마음에 드네.
“사진 보는 기능이 내 스마트폰에도 있는 겁니까?”
“그럼요. 다 있습니다. 사진 기능 없는 스마트폰은 없습니다.”
“어떻게 보는 겁니까?”
좀 봐야겠다.
도대체 정훈이 이놈이 어떤 놈인지, 어떤 것들을 기록하며 사는 놈인지를 좀 알아야겠다.
사진첩 보는 방법만 급하게 배웠다.
우선 시간이 너무 지나서 정훈이 놈의 사생활은 나중에 퇴근 후 시간이 있을 때 확인을 하는 걸로 하고, 우선은 회사로 향했다.
결국 회사로 갈 때 역시 운전대는 정 대리가 잡았다.
3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다행히 재경모직 본사 건물은 원래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자리만 그대로이고, 건물은 아예 전체적으로 손을 크게 봤다.
그리고 그 내부는 전혀 내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 있었다.
특히 사무실 안의 모습은 전혀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다른 세상이 맞지.
맞는데, 맞는다는 걸 인정을 하면서도 적응이 안 될 정도였다.
우선 사무실에 담배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그리고 업무를 보며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저마다 자신의 책상 위로 텔레비전을 하나씩 가지고 있던데, 난 그게 정 대리를 통해 컴퓨터라는 이야기를 듣기 전엔 텔레비전인 줄만 알았지 컴퓨터 모니터일 거란 생각을 전혀 못 하고 있었다.
* * *
놀랍게도 정 대리의 말이 맞았다.
점심시간을 이렇게까지 마음대로 쓰고 4시가 훌쩍 넘어서 회사에 복귀했다.
그런데도 날, 아니지… 이건 내가 한 게 아니니까. 그런데도 정훈이 놈에게 다가와서 따끔하게 혼을 내고 지적을 하는 부서 상사가 아무도 없었다.
지적은커녕 이유를 물어보는 사람도 없었다.
그저 왔냐는 식의 눈인사 정도?
그것도 어쩔 수 없이 하는 수준이 분명했다.
“대리님.”
내가 정 대리 옆에서 사무실 안의 분위기를 살피고 있는데, 여직원 하나가 내 눈치를 살피며 정 대리 앞으로 섰다.
나는 정 대리와 그녀의 짧은 대화 내용을 통해, 그 여직원이 인사부 HRM의 홍재희 주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대리님이 잠시 자리 비우시는 동안 영업부 차준영 책임이 다녀갔어요.”
“준영 씨가? 준영 씨가 왜요?”
“퇴직금 정산에 대해 묻고 갔습니다.”
“퇴직금은 왜….”
“이거….”
정 대리는 홍 주임이 건넨 봉투를 받아 들고 입이 반쯤 열린 상태로 눈만 깜빡거렸다.
“마침 조윤우 책임도 자리에 없는 상태여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일단 받아만 놓고 대리님이 오시면 전달하겠다는 정도로 다시 돌려보냈어요.”
“아무 문제 없던 준영 씨가 갑자기 왜?”
“저도 모르죠. 저도 그게 궁금해서 상담을 해 볼까도 했는데, 대리님이랑 조윤우 책임도 없는 상태에서 제가 퇴사 상담을 해 버리면 안 될 거 같아서 그냥 이거만 받아 놨습니다.”
“잘했네. 잘했어요. 진짜 오늘 무슨 날이야? 왜 이렇게 뭐가 계속 터져?”
정 대리는 그 말을 하고 나서 곧바로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자신의 속마음을 내게 들킨 게 민망해서였는지 크흠… 하며 괜히 목을 한 번 풀었다.
잠시 후 홍재희 주임이 자리로 돌아갔고, 나는 힘 빠진 모습으로 누군가의 사직서를 들고 있는 정 대리를 쳐다보면 물었다.
“왜요? 누군데 그래요?”
얼른 정신을 차리며 정 대리가 말했다.
“차준영 씨라고, 입사 3년 차 책임입니다. 평판도 좋고, 실제 개인 실적도 꽤 잘 나오고 있는 직원인데 정말 아깝네요. 인사 고과 점수도 좋고, 어쩌면 대리 승진도 입사 동기 중에 제일 빨리할 수 있지 않을까, 저 개인적으로 기대를 하고 있었던 직원이었는데….”
내가 알고 있는 재경 그룹의 인사 체계와 확실히 많은 부분이 변해 있었다.
나는 책임이라는 직책에 대해 방금 처음 들어 봤다.
30년 전에는 없던 직책이다.
그게 도대체 무슨 직책이냐고 물어봤더니 주임에서 대리 승진을 하기 전 그 중간에 거쳐가는 직책이라는 설명을 정 대리를 통해 듣게 됐다.
“회사마다 다 조금씩 다르죠.”
그야 당연하겠지.
“우리처럼 책임이라는 직책을 주임에서 대리 사이에 끼워 넣는 회사도 있고, 대리에서 과장 사이에 끼워 넣는 회사도 있습니다.”
“왜 그런 직책을 중간에 끼워 넣는 겁니까?”
“회사의 인력이 가장 집중되어 있는 구간이라서 그런 거죠.”
“인력이 가장 집중되어 있는 구간이다?”
“네, 신입 사원에서부터 과장 사이. 딱 그 구간이 회사의 인력이 가장 집중되어 있는 구간입니다.”
설명을 듣고 나니까 더 이해가 안 된다.
그 구간에 인력이 집중되어 있다면, 오히려 더 직급을 간소화해서 위로 빨리 올려 줘야 정상 아닌가?
따지고 보면 주임이라는 직책도 큰 의미가 없는 직책이다.
다 말장난일 뿐이지.
회사의 규모가 있다 보니 주임 정도는 부서의 전문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둔다 치더라도, 그 주임과 대리 사이에 다시 책임이라는 말장난 같은 직책을 새로 만들어 끼워 넣는다?
난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30년이라는 세월.
내가 알지 못하는 그 세월 동안 세상이 이렇게 천지가 개벽할 정도로 바뀌어 있는데, 회사라고 오죽할까.
당연히 내가 모르는 이유와 사정이 있을 것이다.
그 부분에 대해서 더는 묻지 않고, 차준영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만 몇 가지 더 물어봤다.
“일을 잘하는 직원이었습니까?”
“개인 실적이 좋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업2팀은 작년에 영업부 안에서 팀 성과급을 가장 많이 가져간 팀이고요. 그 안에서도 차준영 씨는 영업부 자체 내의 평판이 좋은 직원입니다. 다른 부서 사람들과의 관계도 아주 원만한 것으로 보이고요. 이달의 우수 사원상도 받았거든요.”
“우수 사원상이요?”
해야지.
이건 30년 전에도 했던 일이다.
“네, 매달 부서별로 추천 직원을 받아서 한 명을 선발합니다. 이달의 우수 사원이 된 직원에게는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특급 호텔 1박 숙박권과 20만 원 상당의 백화점 상품권을 선물로 주는 이벤트입니다. 이게 그저 업무 능력만 좋다고 받을 수 있는 상은 아니거든요. 오히려 다른 부서 사람들의 인정이 훨씬 더 크게 작용을 합니다.”
“그렇겠죠. 결국은 유관 부서 업무 동조 능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만든 상일 테니까요.”
“유관 부서요? 그게 뭡니까? 아, 혹시 관계 부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업무차 협력을 자주 해야 하는 부서?”
난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유관 부서라고 했던 나의 표현을 관계 부서로 바꿔 주었다.
맞고 틀림이 어디에 있을까.
지금 이 시대 사람들이 유관 부서를 관계 부서라고 쓴다면 그냥 그렇게 써 주면 되는 것이지.
“네, 그렇죠, 관계 부서. 제가 잘못 알고 있었네요.”
“네, 맞습니다. 과장님 말씀대로 관계 부서와의 업무 동조 능력도 중요한 부분이니까요.”
“그런 걸 아까 차준영이라는 직원이 잘하는 편이었단 말이네요.”
“네, 이달의 우수 사원을 두 번이나 받은 직원입니다.”
“두 번이요?”
“네. 한 번은 받을 만하니까 받은 거라고 치면, 책임 승진 후 받은 이달의 우수 사원상은 아마 영업부장님의 지원 사격이 있었다고 봐야 할 겁니다.”
“그건 또 무슨 뜻입니까?”
“보통 그런 상을 한 번 받은 직원을 부서장이 다시 추천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봐야죠.”
그건 그렇지.
한 번도 못 받은 직원들이 훨씬 더 많을 건데, 부서장이라면 그런 기회를 고루 나눠 줄 수 있어야 정상이지.
이달의 우수 사원상이라는 게 큰 포상이 뒤따르는 상도 아니고, 결국은 기분의 문제다.
그런 동기 부여를 어느 한 직원에게만 두 번에 걸쳐 준다는 건 뭔가 그 직원에게 특별함이 있는 거라고 봐야 한다.
“최대한 책임을 빨리 거치고, 대리 승진을 시키시려고 하셨던 거 같아요. 영업부 부장님이요.”
“아….”
“그런 상이 인사 고과에 직접적으로 반영이 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혀 반영이 안 되는 건 아니죠.”
“그렇겠죠.”
“거기다 차준영 씨는 개인 실적도 좋고, 영업부 실적 1위를 하고 있는 영업2팀에서 팀 기여도도 무척 높은 직원이니까요.”
뭔가 확인을 해 보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너무 변해 있는 회사의 조직 문화와 상태.
“지금 이 회사에 직원이 총 몇 명이나 됩니까?”
“본사 직원들만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룹 본사 말고, 재경모직의 직원들만요.”
“네, 그러니까 재경모직의 본사 직원들만 말씀을 하시는 거냐고 물은 겁니다.”
그룹 본사가 엄연히 있는데, 여기에서 다시 계열에 본사를 두고 있다?
“아뇨, 생산직까지 다 포함을 해서 몇 명이나 됩니까?”
“비정규직도 다 포함을 해서요?”
“비정규직이 뭐 얼마나 된다고… 그냥 대략적으로 몇 명 정도다 하는 것만 말해 주면 됩니다.”
“그 범위를 정확하게 알아야 대답을 해 드리죠.”
이건 또 무슨 자다가 남의 다리 긁는 소리야?
“정규직만 하면 2천 명이 조금 넘습니다.”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2천 명?
그 많던 계열사를 다 정리했다기에, 한심하단 생각만 했는데 모직은 또 엄청 크게 키워 놨네.
계열사를 줄이고 특정 사업에만 집중을 하고 있다는 뜻인가?
2천 명이면 30년 전과 비교해 직원 수가 두 배 가까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비정규직까지 다 포함을 하면 3천 명 조금 안 됩니다.”
“며, 몇 명이요?”
“3천 명 조금 안 됩니다.”
뭔 소리야, 이건 또?
2천 명도 회사가 엄청 커진 거라는 걸 알 수 있겠는데, 3천 명이 조금 안 된다고?
그런데 지금 정 대리가 하는 말만 들어선 비정규직 직원의 수가 천 명 가까이는 된다는 말 아닌가.
어떻게 비정규직 직원의 수가 정규직 직원 수의 절반 가까이나 될 수가 있다는 말이지.
비정규직, 즉 계약직은 임원들에 한해, 그리고 특이 부서, 특수 부서에 한해 모집을 하는 게 정상이다.
어떻게 회사 전체 직원 중, 정규직 직원의 절반에 가까운 수가 비정규직일 수가 있는 거지?
그리고 이 정도 고용 규모를 갖추고 있는데, 고작 업계 3위라고?
“왜… 그러십니까?”
“이게 정상입니까?”
“뭐가 말씀이십니까?”
“지금 정 대리 말대로 하자면 정규직 2천에 비정규직이 천 명 가까이는 된다는 말 아닙니까?”
“비정규직 고용 퍼센티지가 법적으로 전체 채용인원의 40퍼센트까지는 올라갔으니까요. 물론 많기는 하지만, 생산 라인을 가지고 있는 회사치고 또 이 정도 비율이 아닌 회사도 없으니, 크게 문제가 될 건 없죠.”
“아니, 잠깐만. 그러면 재경모직만 그런 게 아니라 생산 라인을 가지고 있는 기업들은 거의 다 이 정도 비율이란 말이에요?”
“더 심한 곳들도 많죠. 아예 비정규직 비율 때문에 생산 라인의 업체명을 따로 쓰는 기업들도 많으니까요.”
“비정규직을 왜 이렇게 많이 쓰는 겁니까?”
나는 지금 정 대리 이 친구가 하는 말이 도통 이해가 안 되고 있는데, 반대로 정 대리는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답답한 모양이었다.
“그야 당연히 크게는 인건비에 대한 부담 때문이죠. 물론 세부 내용까지 파고들어 가면 그 외적인 이유가 더 많지만 말이죠.”
이건 지금 내가 정 대리와 대화를 나눈다고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닌 게 분명했다.
“흠… 일단은… 네, 뭐 일단은 알겠습니다. 지금 이건 내가 정 대리한테 설명을 듣는다고 단번에 이해할 수 있는 내용도 아닌 거 같고, 이해한다고 해도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 거 같으니까. 아까 제가 오면서 부탁했던 거 있죠?”
“미래금융의 장태산 회장님 연락처요?”
“네, 그거 좀 알아봐 주세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