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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님 댁에서 받은 돈입니다 (7/303)

과장님 댁에서 받은 돈입니다

“뭐야? 왜 멀쩡해?”

직원 휴게실 안.

인사부 김원호 차장은 망 과장을 데리러 나갔던 정현수 대리를 자기 쪽으로 붙게 만들어, 휴게실 안 다른 직원들이 듣지 못하게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까 전화로 상태가 많이 엉망이라며?”

정 대리는 조금 전 손 과장의 집에서 받은 100만 원권 수표 10장, 그게 현재 자신의 지갑 속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고민했다.

“술 깨게 만든다고 별짓을 다 했죠. 숙취 해소제 사 먹이고, 커피에 껌까지… 점심시간, 그 짧은 시간에 마셔 봤자 얼마나 마셨을 거고, 취하면 또 얼마나 취했겠습니까? 저도 처음에는 안 되겠다 싶었는데, 생각보다 금방 깨더라고요.”

“술을 처마셨으면 그냥 그 길로 퇴근을 할 것이지, 왜 평소 안 하던 짓을 해?”

정 대리는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최대한의 연기력을 선보였다.

“그걸 저라고 알겠습니까? 불러서 갔고, 갔는데 취해 있고, 뭐 때문인지는 몰라도 회사로 복귀는 해야 한다고 하고….”

“잠깐. 그럼 뭐야? 혹시 회장님이나 본사 상무님이 방문을 하시는 거 아냐?”

정 대리는 김원호 차장 입장에선 충분히 해 볼 만한 의심이라는 생각을 하며, 그저 자신은 지금부터 망 과장에게 받은 천만 원에 대한 돈값은 해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을 하고 있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닌 거 같습니다.”

“아냐?”

“네, 저한테도 정확하게 말은 안 해 주던데, 그냥 좀 챙겨야 하는 서류 같은 게 있는 거 같더라고요.”

잠시 뒤 김 차장은 정 대리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거리며 말했다.

“어쨌든 수고했어. 너무 X같다 생각하지 말자고. 어쩌겠어. 그래도 업무 시간에 X도 모르면서 업무 가지고 태클 걸고 그런 스타일은 아니잖아. 물론 업무 외적인 시간에 사람을 귀찮게 만든다는 게 더 큰 문제이지만, 벌써 6개월이나 참았잖아. 개차반이든 뭐든 회장 아들인데 언제까지고 본사도 아니고 모직 쪽 인사부에 있게 만들지는 않을 거 아니냐고.”

“…….”

“위에서도 다들 1년 정도 보여 주기식으로 내려보낸 거 같다고 하고, 내 생각도 그래. 조금만 더 참으면 거기가 본사가 됐든 어디가 됐든 딴 데로 갈 거니까,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고 우린 우리 일이나 하자고.”

“네, 그래야죠. 괜찮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이어지는 김 차장의 말에 정 대리는 뜨끔하며 오히려 자기가 더 김 차장과 같은 인사부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안하다.”

“…네? 뭐가요?”

“망 과장, 저 X새끼 관련해서 궂은일 대부분을 내가 정 대리한테 넘기고 있잖아.”

“…….”

“근데 내 입장에선 정말 어쩔 수가 없다. 어쨌거나 내가 차장인데, 차장이 과장 뒤치다꺼리를 직접 할 수도 없는 거고, 그렇다고 박 과장한테 시킬 수도 없는 거 아냐. 엄연히 박 과장은 HRD고 망 과장은 HRM인데, 망 과장이랑 같은 소속인 정 대리한테 내가 시킬 수밖에 없어.”

“네, 알고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X발, 욕을 하면서도 어쩔 수 없으니 해야 하는 거지.”

“…….”

“정 대리 이야기하는 거 아냐. 나도 그렇다는 거야, 나도. 정말 하루에 입에서 욕이 몇십 번은 더 망 과장 저 X새끼 때문에 나오는데, 그걸 참고 있는 거라고. 저 새끼 하나 때문에 내 밥줄을 놓을 수는 없는 거 아냐.”

“…….”

“아무튼, 고생했어. 나 먼저 올라가 볼 테니까, 정 대리는 천천히 커피 한잔하면서 담배도 한 대 피우고, 그렇게 천천히 올라와. 내가 심부름 좀 시켜 놨다고 할 테니까. 자, 카드 이거. 이걸로 커피 마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사 마실게요.”

“씁… 미안해서… 이러는 거야, 내가 미안해서. 이런 일 있을 때마다 번번이 제대로 커버도 못 쳐 주고, 계속 정 대리만 혹사시키는 거 같아 미안해서. 자, 받아. 비싼 거 마셔. 영수증은 좀 챙겨 주고.”

정현수 대리는 김 차장이 건넨 카드를 들고 따로 커피는 사지 않은 채 곧바로 흡연실로 올라갔다.

천만 원이라는 큰돈을 받아 버렸다.

그리고 그 돈을 받기 전 이미 자신은 손정훈 과장의 비밀을 지켜 주고 도움을 주겠다는 거래에 동의했다.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하지 말았어야 할 거래를 한 거 같고, 지갑에 든 돈이 찜찜하기만 했다.

그래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렇게 허무하게 팔려 버릴 자존심이었단 말인가.

이렇게 맥없이 팔려 나갈 양심이었단 말인가.

결국 나도 어쩔 수 없는 놈이네.

정현수는 타들어 가는 속 대신 담배를 태워 내며 아까의 상황을 다시 복기해 봤다.

만약 지금 이 기분으로 조금 전 손 과장의 집에서 수표를 받을 상황이 생긴다면 과연 난 어떻게 했을 것인가.

그때에도 아까처럼 이 돈을 받았을 것인가?

실수를 한 것 같다.

그것도 너무 큰 실수, 절대 해선 안 되는 실수를.

정 대리는 담배 한 대를 알뜰하게 피운 뒤 그 냄새를 최대한 없애고 다시 사무실로 내려갔다.

“저기, 정 대리.”

자리로 돌아오니 손 과장이 기다렸다는 듯, 몸을 최대한 정 대리 쪽으로 붙여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근데 이거 전화는 어떻게 거는 거예요?”

“네?”

“이거. 아까 정 대리가 장태산이… 아니, 장 회장님 연락처를 알려 줬잖아.”

“네, 아직 전화 안 하셨습니까?”

망 과장은 자신의 스마트폰을 정 대리 앞으로 흔들며 인상을 찡그렸다.

“이거, 뭐 어떻게 쓰는 건지를 모르니….”

정 대리는 여전히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손 과장이 지금 하고 있는 게 절대 장난이나 연기 같지는 않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다.

손 과장 본인의 주장대로 정말 기억이 없다면, 어떻게 이렇게 정상적일 수가 있지?

오히려 평상시보다 더 정상이고, 사람다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기억을 잃은 게 아니라 인격 자체가 바뀌어 버린 거 같다.

과연 정말 뭘까?

정 대리는 생각했다.

이게 만약 장난이라면, 자신을 상대로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는 거 아닌가.

“정 대리는 알죠? 이거 쓰는 법. 아까 알아봐 준 번호로 전화 좀 걸어 줘요.”

이건 절대 연기가 아니다.

만약 이게 연기라면 이건 그냥 능청스러운 게 아니라 배우를 해야 하는 재능인 것이다.

진심으로 스마트폰, 컴퓨터… 이건 걸 전혀 다룰 줄 모르고, 기능에 대해서도 모르는 사람이 분명하다.

“그럼 제가 괜찮으시면 과장님 폰을 좀 봐도 되겠습니까?”

여기에서 정 대리는 다시 한번 헷갈렸다.

연기일 리가 없다.

장난일 리는 더더욱 없고.

어떻게 자기 스마트폰을 이렇게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 의심 없이 보여 줄 수 있다는 말인가.

아까 손 과장의 집에서는 경황이 없어서 이런 부분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지 못했지만, 회사에서 망 과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손 과장은 사생활뿐 아니라 모든 부분이 지저분한 인물이다.

그 지저분한 사생활을 정 대리가 직접 기사 노릇을 하며 본 것도 여러 번이고.

그런데 그런 사생활이 다 들어가 있을 수밖에 없는 스마트폰을 이렇게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주려 한다고?

이건 확실히 지금 손 과장은 정상이 아니라는 증거다.

손 과장은 아까 정 대리가 가르쳐 준 대로 화면에 자기 얼굴을 갖다 대며 안면 인식을 시킨 후 그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제가 그냥 폰에 장태산 회장님 번호를 저장시켜 드릴게요.”

“저장이요?”

“네, 이렇게 저장을 해 놓으면, 언제든 여기에서 이렇게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요.”

“잠시만요. 내가 다시 한번 해 볼게요. 여기에서 이렇게 들어가고… 그리고 이걸 눌러서, 이렇게….”

“네, 여기에서 바로 통화 버튼만 누르시면 됩니다.”

손 과장은 자신의 폰에 장태산 회장의 전화번호를 등록해 준 정 대리에게 혹시 몰라서 물었다.

“혹시 내 스마트폰에서 정 대리 스마트폰 번호도 저장이 되어 있을까요?”

“그렇겠죠?”

잠시 후 정 대리는 난처한 표정으로 다시 자신을 찾는 손 과장의 표정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정 대리 이름이 정현수죠? 현수 맞죠?”

“네.”

“안 뜨는데? 정 대리 번호는 여기에 저장이 안 되어 있는 거 같은데?”

정 대리는 그럴 리가 없다며 손 과장의 폰으로 자신의 이름을 검색해 봤지만, 정말로 뜨는 정보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자신의 이름 대신 정 대리를 검색해 보았다.

이번에도 아무런 정보가 검색되지 않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정 대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한번 손 과장의 폰을 만졌다.

가끔씩 술에 취해 자기 기사 노릇을 해 달라고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이다.

분명 다른 이름으로라도 저장이 되어 있을 것이다.

정 대리는 이번엔 그냥 키패드에 자신이 직접 자기 전화번호를 눌러 봤다.

그랬더니….

노예 4

자신의 번호는 저장이 되어 있었는데, 그 등록된 이름이 ‘노예 4’였다.

얼굴이 화끈거리며 알 수 없는 모멸감이 정 대리의 온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순간 정 대리는 손 과장의 집에서 받았던 100만 원권 수표 10장이 다시금 떠오르며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그리고 그런 정 대리를 바라보는 손 과장의 얼굴에도 무거운 안개가 잔뜩 끼어 있었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자신의 스마트폰에 정 대리의 전화번호가 정 대리의 이름이나 회사 직책이 아닌 ‘노예 4’로 저장이 되어 있고, 그걸 확인한 정 대리가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 정도는 손 과장도 눈치를 챌 수 있었기 때문이다.

* * *

난 우선 승강기 복도 쪽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통화해도 될지 분위기를 급하게 살핀 다음, 정 대리가 알려 준 대로 태산이와 통화를 하기 위해 초록색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갔고, 그때부터는 노예라는 표현으로 정 대리를 속상하게 만든 것과는 별개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미래금융? 태산이가 현재 그곳의 회장이라고?

계속 재경에 남아 주길 바랐던 건 나의 욕심이었을까?

상관없다.

이제 와 그런 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30년이 흘렀다면 그 친구는 이제 곧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일 텐데, 그 나이까지 살아 있다는 게 중요한 것 아니겠나.

잘했다.

비록 나는 그렇게 못 했지만, 건강을 챙겨 가며 지금 이 세월까지 참 잘살아 주었다.

자네마저 나처럼, 내 안사람처럼 이 좋은 세상 구경도 못 하고 일찍 눈을 감았다면, 그래서 지금 이 세상에 자네마저 남아 있지 않았다면 지금 난 도대체 누구에게 연락해서 현 재경의 상태가 이렇게까지 엉망이 되어 버린 건지를 물어볼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걱정은 하지 말게.

내 옛날처럼 책망하진 않을 테니.

지금 난 잠시 내 손주의 몸을 빌려 나의 재경 어떻게 변해 있는지를 살펴볼 뿐이고, 이건 내 의지가 아닌 수수께끼 같은 현상이기에 언제 다시 손주 놈에게 이 몸을 돌려주고 원래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야 할지 모르니 말이다.

그저 난 지금의 태산이 자네가 궁금할 뿐이네.

그리고 만약 할 수만 있다면 자네와 우리가 항상 즐겨 찾았던 태화장 식당에서 얼큰한 육개장에 대포 한잔 시원하게 걸치고 싶을 뿐이라네.

그게 전부라네.

그 대포 안주로 그간의 내 자식 놈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잘 살아왔는지만 들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네.

―여보세요.

분명 세월이 많이 붙어 있었지만, 내 친구 태산이의 목소리가 맞았다.

“장태산 회장님 되십니까?”

―그렇소만, 누구신가? 누구신데 내 번호를 알고 전화를 주셨을까?

“회장님. 저….”

그래, 나이 든 친구 놀라게 하는 일을 가급적 삼가자.

“손가 정훈입니다.”

―손가 정훈이? 손 회장 둘째 아들 정훈이 말인가?

“네, 맞습니다.”

―손 회장 둘째 아들? 자네가 어쩐 일로 내게 전화를 다 걸었을까?

이 친구가 내 손주 놈에게 왜 이렇게 거리를 두는 표현을 사용하는 거지?

“건강하셨습니까?”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

―내 오래 살긴 오래 산 모양이야. 내가 손 회장 아들내미한테 건강에 관한 안부 인사도 다 받고 말이지.

이 정도면 태산이 이 친구가 정훈이 이놈을 꾸짖는 거라고 봐야 하나?

평소 홍준이 놈도 그렇고, 그 아들놈들이 태산이와 사이가 소원했던 것일까?

어째서? 어떻게?

“제가 그간 안부를 여쭙는 게 많이 뜸했던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 난 자네한테 이렇게 직접 전화를 받은 게 아마 오늘이 처음이지 싶은데? 그렇지. 당연히 처음이지. 이 번호는 어떻게 알고 전화를 걸었나?

“…….”

―그래, 번호야 어떻게든 알려고만 하면 금방 알 수 있는 거였을 테고, 무슨 일인가?

차갑다.

태산이 이 친구가 상대가 누구이건 결코 이렇게 차갑게 대하는 법이 없는 친구인데, 그런 단단하지 못한 모습 때문에 내게 혼도 많이 났던 친구인데, 어째서 내 손주 놈에겐 남보다 더 차갑게 구는 것일까.

그리고 할아비의 가장 친한 벗인데, 그런 어른이 아흔이 넘는 나이까지 살아 있는데 그간 살면서 한 번도 안부를 물은 적이 없다?

그것도 태산이 이 친구는 현재 재경모직의 대주주 중 한 명인데?

“제가 회장님을 직접 좀 찾아뵙고 인사도 드릴 겸, 여쭙고 싶은 내용도 좀 있어서….”

―하!

이건 설마 웃음인가?

―뭐라고? 방금 자네 뭐라고 했나?

“……?”

―자네가 날 찾아와? 그래서 인사를 해?

“네,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노여워하시는 겁니까? 혹시 제가….”

―그 시커먼 속 다 보인다, 이 사람아.

시커먼 속?

―손 회장이 시키던가?

“뭘 말씀이십니까?”

―뭐긴 뭐야? 내 지분 관련된 내용이지. 내 분명 손 회장한테 안 판다고 단단히 말을 했어.

“…….”

―이젠 하다 하다 철부지, 멋모르는 작은 아들놈을 시켜서 이런 꾀를 낸다? 참 우리 손중길 큰 회장님이 가엽다, 가여워. 이런 것도 자식이라고, 큰자식이 당신을 급하게 뒤따라간 것도 통탄할 노릇인데, 당신의 젊음, 인생을 모두 바쳐 이뤄 놓으신 재경을 현재 이끌고 있는 회장의 그릇이 이것밖에 안 되는 줄 아시면 어찌 땅속에서 눈이나 편하게 감으실까. 땅을 치고 곡을 하실 노릇이야!

“…….”

―두 번 다시는 이런 일로 나한테 전화를 걸지 말게. 아니, 그냥 전화를 걸지 마. 난 자네들한테 할 말이 없어. 사업 관련된 일이라면 모를까, 내가 자네들과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더 있겠나.

“그럼 혹시 정엽이!”

―……?

“아니, 정엽이 형님 소식은 좀… 알고 계십니까?”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던 걸까?

홍준이 놈도 아닌 홍준이 놈의 아들까지 이렇게 밀어내고 있는 태산이인데, 그런 태산이에게 첫째 홍명이 놈의 아들 정엽이의 소식을 묻는 건 아무래도 내가 너무 이기적인 거겠지?

하지만 난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홍준이나 정태 녀석을 통해 정엽이 녀석의 정확한 소식을 들을 수는 없을 거 같았다.

만약 그 소식을 알고 있다면, 혹은 입에 담을 수 있다면 어째서 정엽이를 따로 안 챙기고 있는 거겠나.

―정훈이.

“네, 회장님.”

―내 물론 자네를 탓할 마음은 없어. 나에겐 그럴 자격도 없고. 어쨌든 자네 집안일이고, 또 집안 사정 아니겠어?

“…….”

―하지만 자네 입에서 정엽이 이름이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나오는 건 참 부끄러운 일이야. 그걸 알아야 해, 자네가.

“…….”

―알아도 내가 자네한테 정엽이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또 언제 어떻게 찾아가서 괴롭힐 줄 누가 알고?

괴롭혀? 내가? 아니 정훈이 놈이?

―사람들이 염치가 있어야지 말이야. 됐네. 내 오늘 자네 전화 안 받은 걸로 해 줄 테니까, 그만 전화 끊게.

알았다는 대답, 조금만 더 이야기를 나누자는 부탁조차 하지 못했다.

태산이 이 친구가 뭐에 이렇게까지 홍준이 놈과 그 자식 놈들에게 화가 나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딱 자기 할 말만 하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린 탓에….

* * *

혹시 내가 지금 벌을 받고 있는 걸까?

살아생전 지독하게 돈과 성공, 그리고 사업만을 생각하며 살아오는 과정에서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가정, 그리고 모든 걸 내 위주로만 굴러가게 만들었던 인간관계… 그 모든 것에 대한 벌을 받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 그럴 수 있겠다.

그런 게 아니라면 어떻게 그 빛의 무저갱 속에서 스치듯 내게 전해졌던 무서운 정보들이, 그것도 찰나의 시간이었던 것 같은데 30년 세월을 거짓말처럼 훌쩍 뛰어넘어 이렇게 내 눈앞에 현실처럼 펼쳐질 수 있단 말인가.

아마도 내가 뿌려 싹을 틔운 재경의 미래를 이렇게 직접 내게 보여 줌으로써, 내가 걸어온 지난 흔적들을 곱씹어 보고 반성을 하라는 하늘의 뜻인 것만 같다.

그래도 감사하다.

죽음의 문턱에서 이렇듯 미래의 현실을 생각해 볼 수 있고, 또 어쩌면 눈을 감기 전 식욕이 없는 상태에서도 그렇게나 한 숟갈 뜨고 갔음 싶었던 육개장 한 그릇 정도는 맛보고 영원히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을는지도 모르니.

오후 5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태산이가 내 전화를 받고 날 안 만나 준 게 어쩌면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 즈음이었다.

그래, 지금의 내가 태산이를 만나서 뭘 어쩌겠단 말인가.

뭘 물어보고, 또 뭘 알아내겠단 말인가.

궁금한 정엽이 소식을 알아낸들, 지금의 내가 뭘 할 수 있겠나.

언제 다시 정훈이 놈에게 이 몸이 돌아갈지도 모르는 것이고, 사실상 당장이라도 난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정훈이 놈은 이 몸에 들어와야 맞는 이치.

그냥 따끈한 육개장 한 그릇으로 이생에 대한 모든 미련을 털어 내고, 이것도 어쩌면 더 이상의 미련을 두지 말란 하늘의 뜻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에 홍준이 놈을 만나 봐야겠단 마음도 사그라들고 있었다.

조용히 가자, 조용히.

그래서 정훈이 놈이 다시 이 몸에 들어왔을 때, 더 큰 혼란이 안 생기게끔….

“저기, 차장님.”

아무도 내게 뭘 시키거나 일을 물어 오는 게 없었다.

두 시간 정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책상에 앉아만 있었더니, 내가 이 아까운 시간을 여기에서 왜 이렇게 허비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정훈이 놈은 회사에서 망나니였던 거 같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 모두가 정훈이 놈은 없는 사람 취급을 해 왔던 거 같은데, 나 역시 지금 이 순간이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시간일지도 모르니 그냥 회사를 내 발로 나가야겠단 마음이 들었다.

“네, 과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저 먼저 퇴근 좀 해 봐도 되겠습니까?”

“퇴근이요?”

“네, 할 거도 없는 거 같고… 좀 피곤한데 먼저 좀 가 보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역시.

화내지 말자, 흥분하지 말자.

지금 이 세상은 나의 세상이 아니다.

흥분할 이유도, 답답해할 이유도 없다.

그러면 뭐 하나.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따끔하게 혼을 내고 싶은 대상, 정훈이 놈은 나로 인해 이 몸에 있지도 않은 상태인데.

김원호 차장에게 허락을 받고 사무실을 나서려고 할 때였다.

“과장님!”

정 대리가 날 따라 나왔다.

“지금 퇴근하시는 겁니까?”

“네, 보니까 제가 할 일도 없는 거 같고… 그래서 먼저 가 볼까 합니다.

“저기, 과장님. 그럼 잠깐, 진짜 잠깐이면 되는데, 이야기 좀 할 수 있겠습니까?”

안 될 이유가 뭐가 있겠나.

오히려 난 고맙지.

분명 이곳 재경은 내가 만든 세상인데, 더 이상 이곳엔 내가 있을 곳이 없다.

이것만큼 비참하고 속이 쓰릴 수도 없는 거고.

“지하 주차장으로 가실 거죠?”

“아뇨. 그냥 잠시 좀 걷고 싶기도 하고… 차는 두고 움직일 겁니다.”

“그럼 2층 미팅실로 잠깐만 좀 같이 가 주시겠습니까?”

“……?”

“다른 사람들 보는 데서 하기보단 과장님과 단둘만 있는 자리가 좋을 거 같습니다.”

“그럽시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2층이든, 3층이든 같이 가 봅시다.”

전체 창으로 건물 밖, 서울의 풍경이 한눈에 다 들어오는 아주 세련되고 근사한 회의실이었다.

그곳에서 정 대리가 내게 흰 봉투를 하나 건넸다.

“이건 뭡니까?”

“아까 과장님 댁에서 받은 돈입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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