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같네요
내게 받았던 돈을 다시 내 앞으로 내밀며 정 대리가 말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순간 너무 큰돈을 주겠다 하셔서 그 이야기를 듣고 정상적인 판단을 못 했습니다.”
정현수 이 친구 이거….
“그리고 과장님 댁에서 돈을 받을 때도, 제가 잠시 미쳤던 거 같습니다. 천만 원이라는 돈에 제가 제 양심과 자존심을 너무 쉽게 팔아 버린 거 같습니다.”
“양심과 자존심? 나는 이 돈을 정 대리한테 주면서 분명 나쁜 짓을 부탁한 게 아니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요?”
어떻게든 억지로 그 봉투를 내 손에 쥐여 주며 정 대리가 말했다.
“네, 과장님께서 저한테 하신 부탁들은 분명 나쁜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부탁을 돈을 받고 들어드리는 건 분명 문제가 있는 겁니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을 텐데요. 저는 오늘 제가 정 대리에게 보여 줬던 모습, 그리고 저에게 문제가 생긴 내용을 다른 사람들이 몰랐음 한다고.”
“당연히 그렇게 할 겁니다. 저는 오늘 과장님의 다른 모습을 저만 알고 있을 것이고, 그걸 다른 사람들에게 절대 이야기하지 않을 겁니다.”
강단이 확실한 놈이다.
눈빛도 살아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오늘처럼 과장님께서 제게 뭘 물어보시거나, 도와 달라고 부탁을 하시면 최선을 다해 알려 드리고 또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이 돈은 왜 돌려주는 거예요?”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제가 그렇게 하고 싶은 건 이 돈과는 상관없이 제가 인사부 소속이기 때문이고, 과장님은 저의 부서 상사이시기 때문입니다.”
“…….”
“그리고 회사 직원들의 개인적인 사정, 비밀, 가족 관계 및 금전적 문제에 관한 내용을 비밀로 유지하는 건 바로 인사부의 책임이고, 또 인사부의 역할입니다.”
“흠….”
“저는 그 책임과 역할을 당연히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과장님도 회장님 아드님이신 걸 떠나 이젠 재경모직의 직원이시니까요. 그리고 전 인사부 HRM의 대리이고요. 제가 순간 잘못된 선택을 했습니다. 그 선택이 실수가 되고, 잘못이 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내가 오늘 실수를 참 여러 번 하네.”
“…네?”
그래, 태산이에게도 전화를 걸지 말았어야 했다.
그리고 호텔로 정 대리를 부른 것 역시, 내 실수였다.
그냥 원래대로 자연스럽게 돌아가길 기다리며, 눈을 감기 전 그렇게 해 보고 싶었던 담배도 한 대 피워 보고, 태화장 육개장에 소주 한잔하면서 차분하게 이 생을 마무리 지을 준비를 했어야 했는데, 뭐가 그리 이생에 미련이 남아, 재경 그룹에 걱정이 많아 호들갑을 떨었단 말인가.
“정현수 씨.”
“네, 과장님.”
“만약 내가 오늘 정 대리에게 보여 줬던 모습과 또 달라져 있다면, 원래의 내 모습으로 돌아와 있다면… 그런 나에게도 오늘 내가 정 대리 앞에서 보여 줬던 모습에 대해선 비밀로 해 줘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말했잖아요. 금방 원래대로 돌아갈 거 같다고. 그렇게 되어야 정상이니까.”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정 대리에게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한 후 몸을 돌렸다.
그런 내 등에 대고 정 대리가 말했다.
“저는 오늘 제가 본 과장님의 모습이 진짜 과장님의 모습이길 바랍니다.”
“……?”
뭔가 싶어 다시 몸을 돌려 정 대리를 바라봤다.
“원래대로 안 돌아가셨음 좋겠습니다.”
“큰일 날 소리. 방금 정 대리가 나한테 한 그 말 내가 원래대로 돌아가서도 다 기억하고 있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정 대리는 내가 농담처럼 던진 그 말이 사뭇 두려웠는지 주춤했다.
그래서 난 다시 한번 피식하고 가볍게 웃어 주며 몸을 돌리려고 했다.
“이미 제 입 밖으로 내뱉은 말, 어떻게 주워 담겠습니까?”
“네?”
“그냥 제 마음이 그렇다는 겁니다. 오늘 과장님하고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호텔에서 과장님 댁까지 함께 다녀오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슨… 생각이요?”
“어제의 과장님과는 달리 오늘, 지금 제 앞에 계신 과장님은 비록 이상한 점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 이상한 점들보다 더 이상하게 어쩐지 꽤 상식적이시고, 또 정확한 분이실 거 같다는 생각이요.”
“…….”
“만약 그런 분이라면 제가 충분히 옆에서 잘 챙겨 드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노예가 아닙니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도대체 정훈이 이놈은 어떻게 사람을 노예라고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비록 내가 한 짓은 아니지만, 정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정 대리, 그건 이제….”
“저는 노예가 아닙니다. 돈을 벌기 위해 이 회사에 다니고 있는 건 맞지만, 돈에 저의 양심과 자존심 모든 걸 다 아무렇지도 않게 팔 수 있는 그런 노예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만약 그 돈을 돌려드릴 생각을 못 했다면 전 정말 노예가 되는 거겠죠.”
“그건 내가 진짜 미안합니다.”
“노예가 아니기 때문에 제 바로 위 상사가 지금의 과장님 같은 분이시길 바라는 겁니다. 진짜 회사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에요.”
“…….”
“그럼 퇴근하십시오. 내일 뵙겠습니다.”
이번엔 내가 정 대리를 불렀다.
“정현수 씨.”
“네.”
“…….”
불러 놓고 고민을 했다.
“말씀하십시오, 과장님.”
“이젠 회사에서는 담배를 못 피웁니까?”
“네?”
“내가 2시간 동안 사무실에 있으면서 가만히 지켜봤는데, 사무실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한 명도 없더라고요.”
“네, 당연히 사무실에선 담배를 못 피우죠.”
당연한 거라는 말을 듣는데, 도대체 그 당연함이 무엇인지 가늠을 할 수가 없었다.
우린 사무실에서 담배를 피우며 업무를 보는 게 당연한 사람들 아니었나.
그런데 이곳은 그 당연한 게 당연하지 못한 게 되어 있고, 또 다른 당연함이 자리를 잡고 있는 곳이 되어 버렸다.
“그럼 혹시 사무실에서 못 피우면 흡연실 같은 게 따로 있는 겁니까? 공항처럼?”
“네, 물론입니다.”
“정 대리 혹시 담배 피웁니까?”
“한 대 드립니까?”
“네, 괜찮으면 흡연실도 좀 알려 주세요. 담배 생각이… 많이 나네요.”
담배를 한 대 피우고 회사를 나왔다.
그리고 택시를 잡았다.
“어서 오세요.”
“기사님, 혹시 태화장이라고 아십니까?”
“태화장이요? 서울에서 택시 운전하는 사람이 태화장을 모른다고 해서야 그게 어디 말이 되겠습니까?”
많은 게 변해 있는 세상에서,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자신의 모습을 지키고 있는 게 있었다.
“태화장으로 가 주세요.”
“어디에 있는 태화장으로 가 드릴까요? 태화장이라고 하면 마포 본점도 있고, 잠실, 논현… 여러 군데 되잖아요.”
그리고 변하지 않았다고 여겼던 것들은 사람들이 눈치를 채지 못했다뿐이지, 조금씩 저마다의 성격대로 보이지 않는 변화가 생겨 있었다.
태화장의 분점이 여러 개 생겼나 보다.
“마포 태화장으로 부탁드립니다.”
“네, 그럽시다.”
이 시대 사람들은 모르는 것이겠지?
이 맛은 절대 30년 전 태화장 육개장 맛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니 이렇게 많은 사람이 육개장 한 그릇 먹겠다고 줄을 서서 기다린 거 아니겠나.
비단 이곳 태화장의 변화는 육개장 맛뿐이 아니었다.
이게 과연 물인지, 소주인지 분간이 안 되는 맨숭맨숭한 소주.
“소주가 혹시, 이거 말고 좀 더 독한 건 없습니까?”
“독한 거요? 그럼 제주 소주 한번 드셔 보시겠습니까?”
“그건 몇 도나 합니까?”
“그건 그래도 23도, 24도… 그 정도는 합니다.”
“그럼 그거 한 병 새로 갖다주세요.”
그래도 여전히 내 입엔 그 23도, 24도짜리 소주가 물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도대체 난 여기에서 왜 이러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다시 눈을 감을 수 있는 것일까?
내가 원해서 여기에 있는 건 아니지만, 정말 괜히 왔다.
그냥 편히 눈을 감았음 좋았을 것을, 어쩌다 이곳에 와서 안 해도 될 근심을 가지게 된 것일까?
그래, 담배 한 대 피워 봤음 됐다, 어설프나마 그렇게 절실했던 육개장 한 그릇에 밥 한 공기를 뚝딱 말아 땀을 흘리며 시원하게 먹어 봤음 됐다.
아직 해가 지기도 전이었다.
그런데 나는 더 이상 이곳, 이 세상에 있고 싶지가 않았다.
적응이 되고 안 되고의 문제가 아니다.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확신.
이 몸은 내가 함부로 써선 안 되는 몸이라는 생각.
비록 다시 눈을 감는 게 두렵지만, 그래도 난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가야겠다.
한숨 푹 잔다는 생각으로 눈을 감으면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와 있겠지.
택시를 타고 손주 놈의 집으로 돌아와서, 어쨌거나 이것 역시 이생에선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거기에 시원하게 목욕을 한 번 했다.
밥도 먹었고, 술도 한잔했으니까, 마지막으로 목욕 한번 개운하게 하고 잠에 들자.
그럼 모든 게 다 끝나 있겠지.
하지만 이게 웬걸.
목욕을 하고 잠을 청해 봤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정훈이 놈의 스마트폰을 찾아 꺼냈다.
갑자기 낮에 정 대리에게 들었던 사진첩이라는 기능이 궁금해졌다.
도대체 정훈이 이놈은 과연 어떻게 생겨 먹은 놈일지, 그래도 내 핏줄이기에 이놈의 평상시 관심거리나 주위 친구들, 함께 어울리는 인맥들이 궁금했다.
그리고 혹시 또 모를 일 아닌가.
이놈의 사진첩을 보다 보면 이제는 재경을 이끌고 있는 홍준이 놈, 내가 눈을 감기 전보다 이젠 더 많은 나이를 먹었을 아들 내외의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정태 녀석도 결혼을 했다고 하니까 어떤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꾸렸는지, 그것 역시 조금은 궁금했던 게 사실이다.
그렇게 스마트폰 화면에 내 얼굴을 갖다 대어 정 대리에게 배운 대로 안면 인식을 시킨 다음 사진첩을 눌렀다.
그리고….
“이, 이… 이런 얼빠진 놈을 봤나!”
사진첩 가득 담겨 있는, 차마 눈을 뜨고는 보기가 힘든 음란한 영상들에 난 조금 전까지 또 다른 죽음을 기다렸던 마음이 싹! 하고 사라져 버렸다.
“도대체 이게….”
손이 떨리고 있었다.
심장은 참으로 오랜만에 터질 듯이 뛰고 있었고.
도대체 홍준이 놈은… 어떻게 이런 괴물 같은 놈을 만들어 냈단 말인가!
잠자리 상대가 한둘이 아니었다.
이 많은 여자와의 잠자리를… 도대체 왜?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기록으로 남겨 놓은 거지?
온통 그런 영상들뿐이다.
가족사진은커녕, 자기 얼굴이 온전하게 나온 사진조차 하나 없다.
“하….”
정말 내 피에서 괴물이 태어났구나.
결국, 난 침실에서 내려와 1층 거실로 내려갔다.
취하지 않으면 잠에 들 수 없겠다는 생각에, 좀 독한 술을 찾을 수 있음 좋을 거 같았다.
다행히 이놈도 입은 고급인지, 거실 진열장에 살아생전 내가 즐겨 마셨던 위스키가 들어 있는 게 눈에 띄었다.
한 잔 가득 따라서 절반쯤은 단숨에 비워 냈다.
아주 오랜만에 느껴 보는 불길이 식도를 타고 밑으로 내려갔다 다시 거슬러 올라오는 느낌이다.
다시 남은 반 잔을 마저 입속으로 털어 넣고 한 잔을 새로 따랐다.
그 술을 따르고 있는데, 불현듯 퇴근 전 정 대리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퇴근하십시오, 내일 뵙겠습니다.”
내일?
만약 이렇게 술기운을 빌어 눈을 감았는데, 다시 내일 아침에 이 상태, 정훈이 몸에 든 상태로 눈을 떠 버리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리고 만약 이 상태에서 변화가 오지 않고, 계속 이대로 쭉 가는 거면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다시 한번 정 대리의 음성이 귓가에 울리고 있었다.
급하게 마신 독주였던 만큼, 취기도 급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저는 오늘 제가 본 과장님의 모습이 진짜 과장님의 모습이길 바랍니다.”
나도 그렇다, 나도.
나도 내 손주 놈이 내가 바라는 모습으로 회사 사람들을 대하고, 제 아비와 형을 도와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놈이길 진심으로 바란다.
술이 취하는 건가?
갑자기 살고 싶다는 생각이 올라온다.
이렇게 내가 잘 모르는 세상이라도 좋으니까, 조금만 더 오래 살았음 좋겠다는 생각이, 내 진심이 스멀스멀 술기운과 함께 올라오고 있었다.
살고 싶다.
조금만 더 살고 싶다.
조금만 더 살아서 정엽이 놈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확인을 하고 싶고, 내 친구 태산이의 늙은 모습도 보고 가능만 하다면 함께 술도 한잔하고 싶다.
살고 싶다.
조금만 더 살고 싶다.
조금만 더 살아서… 지금 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나의 삶, 나의 인생이었던 재경 그룹을 다시 반열 위로 올려놓고 싶다.
* * *
그냥 이대로 모든 게 끝이 났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다시 살고 싶다는 진심이 뒤섞인 잠자리였다.
중간에 몇 번이나 잠이 들 만하면 다시 깨고, 또 잠이 들었다가 놀라서 깨었는지 모른다.
7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전화가 걸려 왔다.
정 대리였다.
“여보세요?”
―과장님. 저 정 대립니다.
“네.”
―혹시 괜찮으십니까? 걱정이 되어서 출근 전에 전화를 드려 봤습니다.
여전히 난 정훈이 놈의 몸이었다.
“그렇… 네요. 이게 괜찮은 건지, 안 괜찮은 건지 헷갈리는데… 어제와 같네요.”
―주무시고 계셨던 거 같은데, 아침부터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걱정해 주는 사람한테 고맙다는 말은 못 할망정 사과를 받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지. 마침 잘됐네. 어제 내가 급하게 퇴근을 하느라 못 물어봤는데, 출근이 몇 시까지입니까?”
―출근은 9시까지입니다. 그런데 과장님, 괜찮으시면 제가 지금 과장님 댁으로 모시러 가도 되겠습니까?
“이쪽으로요? 왜요?”
―제가 과장님께 꼭 보여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실은 저 간밤에 한숨도 못 잤습니다.
“왜요?”
―만나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어제 회사에 차 놔두고 가셨지 않습니까? 다른 차도 있으시지만, 그냥 오늘은 제가 모시러 갈 테니까, 저랑 같이 출근하시죠. 꼭 보여 드리고, 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야… 그래 주면 고맙죠. 그래요, 그렇게 합시다. 천천히 준비하고 있을 테니까, 정 대리도 천천히 와요.”
―출근 준비 다 끝내 놓고 전화 드린 겁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