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서 놀다가 들어올까요?
8시가 거의 다 되어 갈 즈음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정 대리를 집 안으로 들어오게 하긴 했는데, 마땅히 대접할 게 없었다.
오히려 대접을 내가 받는 꼴이 되어 버렸다.
“저기 커피 머신 있네요. 캡슐도 많네. 커피 드실 겁니까?”
“커피를 그걸로 만든다고요?”
“네, 마침 탕비실에 있는 거랑 같은 브랜드네요. 와 보세요. 제가 커피 내리는 법 알려 드릴게요.”
정 대리에게 커피 머신 쓰는 법을 배운 뒤, 각자의 커피를 들고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였다.
“저 어제 간밤에 한숨도 못 잤습니다, 과장님.”
“나도 그래요. 나도 몇 번이나 자다 깨다를 반복했는지 모르겠어요.”
“병원… 안 가 보셔도 되겠습니까? 제가 잘은 모르겠지만, 기억 상실이라는 게 결국은 뇌 쪽의 문제일 텐데, 방치해서 될 게 아닙니다.”
“네, 그건 조금만 더 상황을 지켜보고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건 뭐예요?”
언제 꺼냈는지, 거실 탁상 위로 책 한 권이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책 표지엔 같은 이북 출신이라는 이유로 우리 재경 쪽 사업에 큰 도움을 주셨던 정주형 회장님의 얼굴이 들어 있었다.
“정주형 자서전입니다. 제 아버지가 정주형 회장의 찐팬이시거든요. 제 아버지 책인데, 제가 몇 번이나 읽었던 책이기도 합니다.”
“……?”
“제 아버지도 그곳 자동차 쪽에서 인사부장까지 하시다가 결국 그렇게 바라시던 임원까지는 못 올라가시고 몇 년 전에 정년퇴직을 하셨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그 책을 왜…?”
“과장님께서 한번 읽어 보시면 좋을 거 같아서요.”
“제가요?”
어색하게 그 책의 표지를 쓰다듬다가, 이내 그 책을 내 앞으로 밀어 넣으며 정 대리가 말했다.
“어제 하루가 저에게는 개인적으로 아주 부끄러운 하루였습니다. 회사에서 월급을 받는 직장인으로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선택을 했으니까요.”
“저는 모르는 일인데, 무슨 선택을 하셨을까요?”
나 역시 크게 떳떳한 일은 아니었기에 그쯤에서 없었던 일로 덮어 두자는 의미로 모르는 척을 했다.
그랬더니 정 대리도 함께 미소를 지으며 숨을 한 번 몰아쉬었다.
“제 아버지는 정주형 회장의 팬이시지만, 저는 우리 재경 그룹의 창업주셨던 손중길 회장님의 찐팬입니다.”
“찐팬이라는 게 무슨 뜻입니까?”
“진짜 팬이라고요. 제가 재경모직을 선택했던 이유도 결국은 손중길 회장님에 대한 팬심이 어느 정도는 작용을 했을 겁니다.”
“……?”
“제가 이래 보여도 취업할 당시에 재경모직뿐 아니라 선경, 우성, 계림… 그렇게 국내 대기업 네 군데에 동시 합격을 했던 사람입니다. 물론 재경모직에 합격을 못 했더라면 다른 세 군데 중 한 곳을 선택했겠죠. 하지만 운이 좋게도 재경모직에 합격을 했고, 동시에 네 군데 합격을 한 상태였기에 아무 고민 없이, 계산 없이 바로 재경모직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그게… 손중길 회장님 때문이다?”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 어느 정도의 영향은 있었을 거란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지금이야 재경이 예전만 못한 상태이지만, 그래도 재경 그룹은 IMF가 터지기 전에는 재계 순위 6위까지 올라갔던 저력이 있는 기업입니다. 그리고 재경모직은 누가 뭐래도 그런 재경 그룹의 모태 기업이고요. 직원 대우가 크게 차이가 나는 거라면 모르겠지만, 다들 고만고만하고, 또 모직 쪽에선 재경의 대우가 좋으니까 고민을 할 이유가 없었던 거죠.”
“흠….”
“이 책 한번 읽어 보시겠습니까?”
나는 그때까지도 도대체 정 대리가 왜 정 회장님의 자서전을 가지고 와서 이걸 내게 건네는 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제 할아버지의 자서전도 아니고, 남의 회사 창업주의 자서전을 제가 읽어서 뭐 하겠습니까?"
읽을 이유야 많지.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정 회장님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굳이 이런 걸 읽을 이유가 있을까.
“이 책에 우리 재경 그룹과 손중길 회장님에 관한 이야기가 꽤 많이 들어 있습니다.”
“정 회장님의 자서전에요?”
“네. 제가 몇 군데 접어 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부분들이 다 재경 그룹과 손중길 회장님에 대한 내용입니다.”
도대체 정 회장님이 왜 자기 자서전에 내 이야기를 담았단 말인가?
“어제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지금 제 앞에 계시는 과장님의 모습이 진짜 과장님의 모습이길 바랍니다.”
이 친구, 이거 지금 진심이다.
“어쨌거나 제 바로 위 상사이시고, 언제까지 같이 지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같이 지내는 동안에는 제가 과장님께 도움이 되는 부하 직원이길 바랍니다. 저 역시 그게 저의 진짜 모습이길 바랍니다.”
“…….”
“제가 그 책에 접어 놓은 부분을 읽어 보시면… 만약 과장님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신다고 해도 조금이나마 좋은 쪽으로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마음에서 가져와 봤습니다. 읽으시기에 불편한 내용도 분명 있을 겁니다. 가령 현재 회장님에 관한 내용이라든지, 그런 부분들은요. 하지만 그런 거 상관없이 정주형 회장님이 손중길 회장님과 우리 재경 그룹에 관해 언급을 조금이라도 한 부분은 다 접어 놓은 거니까, 그런 거 크게 신경 쓰지 말고 한번 읽어 보십시오.”
그 자리에서 바로 접혀 있는 부분을 펼쳐 봤다.
왕자의 난.
해당 부분의 내용을 요약하는 의미심장한 소제목이 눈에 띄었는데, 그 소제목이 바로 왕자의 난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내가 눈을 감은 이후, 재경 그룹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기업을 운영하는 경영인들 모두는 이를 반면교사 삼아야 할 것이다.
아주 의미심장한 문구로 시작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나와 있는 내용을 요약하자면 대충 이러했다.
당시 정 회장님의 눈에 비추어진 재경 그룹은 IMF를 효과적으로 극복해 낼 수 있었다.
재경이 가지고 있던 사업군 대부분이 건설과 식품을 필두로 한 몇몇 계열을 제외하고는 수입보다는 수출 위주의 사업군이었기에, 단단한 리더가 중심만 잡고 있었다면 오히려 그 위기를 기회로 잡았을 것이라는 게 정 회장님의 생각이었다.
―실제 그 당시 부도 신청을 했던 국내 기업들을 살펴보면 원자재를 수입해서 상품을 만들어 그걸 수출로 연결시키는 기업들보다, 건설이나 식품과 같은 원자재를 수입해서 국내 자체 소비를 일으키는 사업군들 위주로 줄도산이 일어났다.
정 회장님의 자서전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말 아까운 기업을 재경이라고 손에 꼽지 않을 수가 없다. 재경은 항공과 건설에 관한 애정이 남다른 기업이었지만, 실제 기업의 시작은 포목점, 원단 사업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재경의 시작은 모직이라고 봐야 한다. 중국과의 수교가 이뤄지고, 아직은 중국이 세계의 공장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던 당시, 국내 모직 사업에서 IMF는 분명 위기가 아닌 기회였다.
그렇지.
모든 위기라는 게 결국은 기회의 반대쪽 얼굴이다.
그리고 그때의 외환 위기는 수출 위주의 재경모직에겐 기회가 분명했을 것이다.
―아직은 한국의 모직 사업이 세계적인 반열에 오르지 못했던 당시, 외환 위기는 최소한 모직에 있어서만큼은 한국을 제조의 심장으로 만들 수 있는 특수 분야였다. 값싼 의류, 신발 등을 수출하기 시작한 많은 국내의 모직 기업들이 어느덧 한국을 넘어, 아시아, 글로벌한 모직 기업으로 성장을 해 있는 지금의 상황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재경은 그 기회를 살릴 수 있는 인프라가 어느 기업보다 완벽하게 갖춰진 기업이었다. 그럼에도 손중길 회장의 타계 이후, 두 형제간의 그룹 운영 의견이 좁혀지지 않았고, 결국은 막대한 외화를 확보할 기회를 스스로 놓친 꼴이 되어 버렸다.
내가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날 불안하게 만들었던 게 바로 이 부분이었다.
둘째 홍준이 놈과는 달리, 첫째 홍명이 놈에겐 내가 죽은 이후 비빌 언덕이 없다는 것.
―만약 손중길 회장이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그래서 IMF 시절의 재경 중심에 고 손홍명 회장이 아닌 반도체 사업과 정보 통신 사업의 중요성을 항상 입에 달고 살았던 고 손중길 회장이 있었더라면 아마도 대한민국 경제는 지금보다 최소 30년은 더 앞에서 달리고 있었을 것이다.
난 그 내용을 끝으로 정 회장님의 자서전을 덮었다.
그리고 커피 잔을 들고 베란다로 나갔다.
정 대리는 그런 날 따라오지 않았다.
“…….”
생각이 다시 또 많아진다.
홍준이 놈은 워낙에 수가 많고 계산이 빠른 놈이었다.
그래서 배우자감을 고를 때에도 내가 연결을 시켜 준, 화학을 필두로 한 부경 그룹의 차녀와 군말 없이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었다.
반면에 맏이, 홍명이 놈은 크게 고집이 센 놈도 아닌데 배우자감 선택에 있어서만큼은 내 말을 좀처럼 듣지를 않았다.
교제 중인 아가씨가 있다며, 아무런 집안 배경이 없는 교직 공무원의 딸을 집으로 데리고 왔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아비로서 홍명이 놈에게 이기는 법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
그 상대가 비록 나일지언정,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꼭 갖고자 하는 걸 가질 수 있게끔….
이 아비의 뜻을 거스를 수 있는 용기를 보고 싶었다.
자기 뜻을 굽히지 않고 고집할 수 있는 소신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홍명이 놈은 결국 날 실망시키지 않고, 그런 모습을 내게 보여 주었다.
졌지만 이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졌지만, 패배가 아닌 승리를 한 기분이었다.
지나치게 기우는 결혼은 분명했지만, 사업 쪽으로 우리 재경에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는 집안이었지만 난 홍명이 놈을 믿기로 했다.
내 뜻을 꺾었다면, 어느 누구와 붙어도 꺾이지 않을 거라 믿었던 것이다.
반면에 둘째 홍준이의 처가는 분명 여러모로 홍준이에게 큰 언덕이 되어 줄 수 있는 집안이었다.
재경 그룹은 손대지 못하고 있었던 화학을 필두로 정보 통신 쪽으로도 사업을 확장해 나가고 있었고, 정계 쪽 인맥이 무척 단단한 부경 그룹의 차녀.
내가 없는 상황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국가 전체를 뒤흔들었다던 IMF라는 경제의 적을 만난 홍명이 놈.
그리고 그걸 기회로 만들어 낸 홍준이 놈.
과연 이런 결과에 난 홍준이 놈을 탓해야 하는 것일까, 아님 잘했다고 칭찬을 해 줘야 하는 것일까?
혼란스러웠다.
“그래, 이미 엎어진 물을 무슨 수로 주워 담겠나.”
난 아랫입술을 잘게 깨물며 다짐했다.
홍준아, 이놈아.
어쩔 수 없이 나는 이 꼴을 보고도 재경을 지키고 있는 널 인정할 수밖에 없구나.
그런데 지금부터는 긴장을 좀 해야 할 거다.
이 아비가 네 아들놈 몸에서 좀 더 살아 보고 싶단 욕심이 생겨 버렸거든.
그리고 나는 네가 바꿔 놓은 나의 재경을 다시 내가 원하는 재경으로 되돌려 놓아야 직성이 풀릴 것 같구나.
지금부터 이 아비가 하나하나, 제대로 검사를 해 주마.
과연 네 형과 조카까지 내치면서 이끌어 온 너의 재경이 나로 하여금 이해를 받을 수 있을 만한 것인지, 아닌 것인지를….
몸을 돌려 집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 대리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 정 대리에게 물었다.
“신문은 어디에서 살 수 있습니까?”
“신문이요?”
“네, 세상 돌아가는 걸 좀 보려고 해도 신문을 살 곳이 전혀 없네요.”
정 대리는 눈알을 천장으로 돌려 곰곰이 생각하는 척을 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렇네요. 저도 요즘엔… 신문을 파는 곳을 잘 못 본 거 같습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신문을 아예 안 보는 겁니까?”
“아예 안 보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 역시 스마트폰이 대체를 해 버렸죠.”
“이게요?”
“네, 죄다 스마트폰에 뜬 인기 뉴스들만 보지, 옛날처럼 종이 신문을 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신문을 좀 구독하고 싶은데, 정 대리가 도와줄 수 있을까요?”
“그런 거야 금방 하는 거니까요. 어떤 신문을 신청해 드릴까요?”
“기본적으로 현재 유명한 대표 신문사 서너 개 정도?”
“그렇게나 많이요?”
“신문사마다 성향이 다 다르니까요. 여러 개를 동시에 봐야 세상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죠.”
* * *
정 대리와 함께 출근했다.
역시 내게 살가운 사람은 사무실에 아무도 없었다.
부장, 차장 모두 형식적인 눈인사 정도만 먼저 보내올 뿐, 회장 둘째 아들에게 할 업무 지시 같은 건 아예 손을 놓고 있는 모습이었다.
“과장님.”
사무실 분위기를 확인하는 날 곁눈질로 지켜보던 정 대리가 조용히 말했다.
“네.”
“저는 오늘 봐야 하는 업무가 좀 많습니다. 실은 그래서 아침에 과장님 댁으로 갔던 겁니다. 출근을 하면 더는 어제처럼 따로 시간을 내어서 뭔가를 알려 드릴 수가 없을 거 같아서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저 신경 쓰지 말고 봐야 한다는 업무부터 보세요.”
“네. 그래도 궁금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 물어보십시오.”
“네, 그렇게 할게요.”
10시가 지났을까?
부하 직원들을 데리고 오전 회의를 마친 정 대리가 자리로 돌아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보아하니, 그동안 과장인 내가 해야 할 역할을 정 대리가 다 해 오고 있었던 거 같다.
과장은 아무것도 안 하고 자리에 앉아만 있었는데, 부하 직원들을 데리고 오전 회의를 하며 업무를 나눠 주고 돌아오는 그 모습이 꽤 익숙해 보였다.
그런 사무실 분위기에 다른 팀 직원들 역시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을 하는 눈치였고.
“네, 오 과장님. 저 인사부 정현수 대립니다.”
난 마땅히 할 게 없었기에 전체적인 사무실 업무 분위기를 파악했고, 또 바로 옆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정 대리에게 집중을 하고 있었다.
“어제는 제가 중간에 잠시 외근을 해야 하는 일이 생겨서, 제대로 못 챙겼습니다. 네, 죄송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 외근 다녀오니까 홍 주임이 준영 씨 사직서를 받아 놓고 절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아, 어제 말했던 그 친구 건이구나.
입사 3년 차에 영업2팀의 책임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고 이달의 우수 사원상도 벌써 두 번이나 받았다는 친구.
“준영 씨는 제가 따로 퇴사 상담을 할 건데, 그 전에 혹시 무슨 일로 퇴사를 희망하는 건지 과장님은 알고 계시는 게 있을까 해서요.”
정현수.
보면 볼수록 업무 처리 능력이 매끄럽다.
그렇지.
이럴 땐 해당 직원을 먼저 불러서 퇴사 사유를 물어볼 게 아니라, 같은 부서 동료 직원들을 통해 대략적인 상황을 먼저 체크하는 게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다.
동료들과 불화가 잦은 직원이라면 모르겠지만, 해당 직원은 부서장이 대리 승진을 조금이라도 빨리 시켜 주기 위해 이달의 우수 사원상 후보에 다시 올려줬을 정도로 인정을 받고 있는 직원.
그리고 요즘 말로 관계 부서와도 원만히 잘 지내고 있는 직원이라고 했다.
이럴 땐 주위 사람들을 통해 먼저 대략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게 좋다.
“과장님도 모르신다고요? 아예 말을 안 하던가요? 흠… 그럼 준영 씨 퇴사 이유를 알 만한 다른 영업부 직원은 없을까요? 그렇군요. 어쩔 수 없죠. 제가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난 정 대리가 통화를 끊기만을 기다렸다가 물었다.
“왜요? 거기 과장이라는 사람도 어제 그 친구가 왜 퇴사를 하려고 하는지 이유를 모른답니까?”
“네, 그렇다네요. 확실히 팀원들 간에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닌 거 같고… 이럴 땐 의심을 해 볼 만한 내용이 스카우트가 유일한데….”
“스카우트요?”
“네. 연차는 3년이지만, 아직 대리를 달기 전이니까 쉽게 잘 팔릴 조건이긴 하죠.”
“여기에서 인정받고 일 잘하고 있는 직원을 다른 회사에서 데리고 간다는 뜻입니까?”
“뭐, 요즘 세상에 그런 걸 문제 삼을 순 없으니까요.”
그런 걸 문제 삼을 수가 없다고?
“같은 업계인데도요?”
“…네, 조건 따라 회사 옮겨 다니는 이직은… 흔한 일이니까요.”
조건 따라 회사를 옮겨 다니는 이직이 흔한 일이다?
적응이 좀 될 만하면, 적응이 안 되는 소리가 들려오니 이거 원….
“그런데 확실한 내용도 아닌데, 넘겨짚을 필요는 없을 거 같고, 어차피 사직서는 받았지만, 상담은 안 했으니까 제가 불러서 상담을 한번 해 보면 알겠죠.”
30분 뒤에 차준영이라는 영업부 직원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부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나 손중길.
합당포의 작은 포목점에서 내 장사를 시작해, 그 작은 포목점을 눈을 감기 전까지 재경 그룹이라는 이름으로 국내 재계 서열 6위까지 올려놓은 사람이다.
운도 내 편이었고, 기회, 시기도 좋았지만, 그 모든 걸 다 차치하더라도 나는 특히 사람을 보는 안목이 뛰어났다.
이건 나 스스로도 자부를 하는 부분이다.
사람을 알아보는 정확한 눈과 반드시 나와 회사에 필요한 인물이라고 판단될 경우 어떻게든 내 사람으로 만들어 내고야 마는 집요함.
그게 전부였다.
인사가 만사.
차준영이라고 했나?
이미 사직서를 인사부에 냈다는 거 자체가 결심이 섰다는 뜻인데, 저런 상담을 한다고 바뀌는 게 뭐가 있을까?
그런데 관상이 참 좋아서 아까운 친구인 건 확실하다.
영업부라고 했지?
영업을 잘할 친구인 건 확실하다.
걸어 들어오는 걸음걸이만 봐도 알지.
보폭은 큰데, 결코 성급한 걸음은 아니다.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제대로 알고 있으니, 저렇게 크게 걸을 수 있는 것이지.
정 대리가 차준영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할 때였다.
난 재빨리 정 대리의 손목을 잡았다.
“왜… 요?”
“보통 회사 직원들이 사직서를 제출하면 모든 상담을 정 대리가 직접 합니까?”
“원래라면… 제가 아니라 과장님이 하셔야 하는 거죠.”
“그런데 그동안은 정 대리가 제 역할까지 다 해 왔던 거고?”
“…네.”
“차준영 씨는 저랑 같이합시다.”
“네?”
“정 대리 차준영 씨랑은 잘 아는 사이예요?”
“개인적으로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회사 안에서는 서로 좋은 관계로 지내는 편이었죠.”
“잘됐네. 왜 그만두려고 하는지, 저랑 같이 들어 봅시다.”
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정 대리에게 싱긋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나 어차피 지금 할 거 없잖아요. 나 그냥 평소 하던 대로 내 맘대로 나가서 놀다가 들어올까요?”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나가긴 또 어딜 나가겠단 말입니까? 제가 아침에 몇 시부터 일어나서 과장님 댁을 찾아간 거였는데.”
“그럼 같이 들어 봅시다. 나도 뭐라도 할 게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