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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조직도 좀 갖다주세요 (10/303)

회사 조직도 좀 갖다주세요

태산이….

조금만 기다리게.

어제 자네와 통화를 해 보니, 아직 괄괄하더구먼.

내 지금 당장이라도 자네를 만나 우리의 재경이 정확히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내 손주 놈 정엽이는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자네를 만날 게 아닌 거 같네.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게 좀 있겠어.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그러니 조금만 기다리게.

금방 찾아갈 테니….

인사부 안에 만들어져 있는 작은 상담실 안에서 정 대리와 함께 차준영이라는 친구와 마주 보고 앉았다.

“제가 어제 외근을 나가 있는 동안 다녀가셨더라고요?”

정 대리가 상담을 시작했다.

차준영의 사직서를 탁상 위로 올려놓고 퇴사의 이유를 묻기 위해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좀 더 가까워진 거리에서 차준영의 얼굴과 자세, 그리고 표정을 천천히 읽어 봤다.

“네, 그렇지 않아도 어제 난처했습니다. 대리님은 자리에 안 계신다고 하지, 홍 주임도 대리님이 오셔야 퇴사 상담이 가능하다고 그러지… 힘들게 찾아왔던 거거든요.”

목소리도 좋다.

적당히 낮은 저음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진정성을 느끼게 해 주고 있었다.

차준영의 말에 정 대리도 함께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셨겠죠. 저도 어제 외근 다녀와서 준영 씨 사직서가 접수된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바로 전화를 한번 해 볼까 하다가 시간이 너무 늦었더라고요. 뭐 때문에 그만두려고 하시는 거예요?”

차준영은 수차례 입맛만 다실 뿐, 바로 대답을 내놓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런 차준영을 정 대리는 말없이 기다려 주기만 했다.

“저희 과장님이 별말씀 없으셨나요?”

“아뇨, 실은 저도 아까 전화로 무슨 일인지 아느냐고 여쭤봤어요. 그런데 조금 예민한 부분일 수도 있을 거 같아서, 과장님이 말하는 건 좀 그렇고 그냥 준영 씨한테 직접 물어보는 게 좋을 거 같다는 대답만 하시더라고요.”

다시 또 차준영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침묵이 진행되고 있었고, 그 침묵 속에서 난 차준영이라는 친구의 신중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보통 이런 자리에선 당사자가 침묵을 못 견디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차준영은 자신의 상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말 한마디에도 신중을 담고 있었다.

그런 게 내 눈에는 보였다.

“혹시 다른 회사에서 좀 더 좋은 조건으로 오퍼가 들어온 건가요?”

정 대리의 물음에 차준영은 짧게 고개를 흔들었는데, 그 반응의 속도가 빠른 걸로 봐서 거짓말은 아닌 거 같았다.

하긴, 조금 전 정 대리가 그러지 않았나.

요즘 세상은 좀 더 나은 조건을 약속받고 이직을 하는 일 따위는 흔한 일이라고.

회사를 그만두겠다 결심까지 한 마당에 인사부 상담 자리에서 그런 걸 숨길 이유가 어디에 있겠나.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아니… 에요?”

“네, 아닙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의 문제도 아닐 거 아니에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준영 씨는 영업부뿐 아니라 관계 부서 사람들 모두가 좋아하잖아요.”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으음… 이유가 뭘까요? 정말 궁금하네.”

잠시 후 차준영이 힘든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 힘든 미소를 지을 때 생겨나는 입가의 팔자 주름이 다시 한번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그만하고 싶습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난 그 말의 숨은 뜻을 유추해 보기 위해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었는데, 옆에서 정 대리가 그 말을 똑같이 따라 하며 그게 무슨 뜻인지를 물었다.

“지금 제 상황이 그렇습니다. 계속 힘들게 물을 길어 와서 열심히 독을 채우고는 있는데, 막상 얼마나 찼나 궁금해서 안을 들여다보면 제가 힘들게 길어 온 물이 어딘가로 증발해 있습니다.”

결국 정 대리도 들고 있던 볼펜을 탁상 위로 올려놓고 상담이 아닌 대화에만 집중을 하기 시작했다.

“왜 그럴까 보니까, 독의 밑이 빠져 있다는 걸 뒤늦게 눈치챘습니다. 때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 안으로 계속 물을 길어서 채울 수도 없는 상황에 빠져 버렸습니다.”

“현재 준영 씨의 갑갑함이 어떤 느낌인지 대충은 알겠는데, 정확하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는 전혀 모르겠어요. 조금만 쉽게 이야기를 해 주면 안 될까요?”

탁상 위로 깍지를 끼며 정 대리가 물었다.

“이번에 제 여동생이 대학 졸업반인데, 1년 정도 휴학을 하고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다녀오고 싶다고 그럽니다.”

나는 그게 어째서 퇴사의 사유가 되는 건지 감을 못 잡고 있었는데, 정 대리는 어느 정도 느낌이 왔던 모양이다.

약하게 인상을 찡그리며 정 대리가 물었다.

“그… 어학연수 비용을 준영 씨가 도와야 하는 거예요?”

“현재 집안 분위기가 그렇게 돌아가고 있네요. 정말이지 질식이 될 정도로 숨이 안 쉬어지고 있습니다.”

“…….”

“제가 힘들게 길어 온 물인데, 저는 목이 말라도 그 물을 구경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준영 씨, 잠깐만요. 과장님이 준영 씨 상황에 대해 정확하게 모르고 계세요. 괜찮으시면 제가 준영 씨 상황을 짧게 과장님께 전달을 해 드려도 될까요?”

“제가 하겠습니다. 어차피 인사부에 제 사정에 대해 모르는 분들도 거의 없을 거 아닙니까.”

혀끝으로 입술을 살짝 적신 후 차준영이 말했다.

“저는 삼 남매 중에 둘쨉니다. 위로는 두 살 많은 형이 하나 있고, 밑으로는 일곱 살 어린 여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형은 대학 졸업을 하고 취업이 안 돼서 2년 정도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가, 그것 역시 뜻대로 안 되어서 접고 작년에 친한 친구 한 명과 동업으로 디저트 전문점을 오픈했습니다.”

“그때 준영 씨가 인사부를 통해서 회사 대출을 냈습니다.”

옆에서 필요할 때마다 내가 이해하기 쉽게 끼어들어 주는 정 대리 덕에 차준영의 상황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 형님께서 준비한 사업의 자금을 준영 씨가 마련해 줬다는 거예요?”

나의 말에 차준영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고, 정 대리는 할 말은 있지만 차마 하지 못하겠다는 듯 입을 꼭 다물었다.

“네, 저희 집에서 저 말고는 딱히 돈 나올 구멍이 없으니까요. 원래라면 제가 독립을 할 때 전세금 대출을 회사 통해 받으려고 했는데, 그걸 썼던 거죠.”

“그런데 그게 잘 안됐던 거 같네요.”

“그렇죠. 원금 회수도 전혀 못 하고 오히려 빚만 더 만들어서 왔어요.”

“그런데 준영 씨의 여동생은 캐나다로 유학을 가고 싶다고 하는 거고? 그것도 준영 씨가 도움을 줘야만 갈 수 있는 거 같고.”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요즘 시대에 어학연수 한 번 갔다 오는 게 대단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요즘은 어학연수를 갔다 오는 게 플러스 요인이 되는 게 아니라 경험이 없으면 마이너스 요인이 되지 않습니까.”

난 재빨리 차준영의 이력서를 훑어봤다.

“그런데 준영 씨는 어학연수의 경험이 없네요?”

“…네.”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다시 정 대리에게 이 자리의 주도권을 넘겨주며 한발 뒤로 물러섰다.

“그 독을 그냥 깨어 버리는 게 맞는 거 같습니다. 지금 그 독을 안 깨어 버리면 아마 전 평생, 제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계속 지금처럼 살아야 할 거 같습니다.”

“…….”

“저희 집 분위기가 그렇습니다. 회사에서와는 달리 제가 집에선 말을 잘 듣는 착한 아들이거든요.”

지금도 충분히 착해 보이는데?

“제가 만든 가정도 아닌데, 아버지와 함께 집안의 가장 생활을 너무 오래 했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나중에 부모님도 제가 모셔야겠죠.”

“흠….”

“죄송합니다. 재미없는 제 집안 이야기를 늘어놔서. 근데 그게 퇴사를 하려고 하는 이유입니다.”

“더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혼자서만 다 짊어지지 않겠다는 거죠?”

정 대리가 조심스럽게 차준영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고, 차준영은 아주 단단히 선 결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없으시죠? 그런 이유로 잘 다니고 있던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하는 게.”

“요즘 같은 시대에 준영 씨처럼 집안에 호구 잡혀 사는 사람들… 많지 않죠.”

이건 또 뭔 소리야?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이유로 어렵게 들어온 회사를, 그것도 인정까지 받아 가며 잘 다니고 있는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하는데 말리지는 못할망정 공감을 해 줘?

하지만 이어지는 정 대리의 더 깊은 공감에 난 이게 이 시대의 시대상이구나… 하는 걸 얼핏 눈치챌 수 있었다.

“열심히 살고 있는 거에 비해 남인 제가 봐도 준영 씨는 준영 씨 본인을 위해 해 주는 게 너무 없는 거 같다는 기분이 자주 들었어요. 물론 그때 그 대출에 필요한 서류를 제가 준비를 해 주면서 준영 씨 사정을 들어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지도 몰라요. 아무튼, 저도 갑갑했는데 본인은 오죽했겠어요?”

“…….”

“그런데 준영 씨. 그냥 나는 조금 걱정이 되네요. 회사를 그만두고 뭘 하려고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꼭 잘 다니고 있는 회사, 그것도 대리 승진이 코앞에 와 있는데, 회사를 그만두면서까지 해야 하는 거예요? 그냥 계속 회사는 다니면서 조금씩 주변을 바꿔 나가 보는 건 어때요?”

“한 두세 달 정도… 모든 걸 다 버리고 유럽 여행을 한번 다녀와 볼 계획입니다. 다른 회사에서 들어온 오퍼에 응한 건 아니지만, 오퍼가 들어온 회사가 몇 군데 있긴 합니다. 유럽 여행 한번 다녀와서 재취업을 준비해 볼 생각이에요."

나는 정말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서 한숨도 안 쉬어지던데, 역시나 이번에도 정 대리는 고개까지 끄덕여 가며 차준영의 선택에 공감하고 있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진짜 해 보고 싶었던 거거든요. 저는 어학연수나 그런 거보다는 대학 졸업하기 전에 유럽 여행을 찐하게 한번 해 보는 게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군대에서 월급도 꽤 모아서 나왔고, 복학해서 학교에 다니면서도 틈틈이 알바를 하면서 돈도 모았죠. 그거까지도 결국엔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다 밑 빠진 독 안으로 들어가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는 게 문제였지만. 좀 늦어지긴 했지만, 지금이라도 유럽 여행 한번 하면서 갑갑한 제 삶으로부터 잠시 도망을 쳐 보고 싶습니다.”

“…….”

“지금 당장은 저에게도 뭔가 선물을 좀 줘야 할 거 같거든요. 계속 집안의 호구처럼 살다 보니까, 어느 순간 저 스스로가 너무 애틋해지는 겁니다. 미안하기도 하고.”

그 말에는 나도 어느 정도 공감이 되고 있었다.

“가족들을 챙기는 걸 행복이라고 저 스스로를 세뇌시켜 왔던 거 같아요. 그래서 결국엔 제가 저 스스로 이런 역할을 해야만 하게 만들었던 거 같고. 제가 확실히 선을 그어 주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은데, 이참에 저도 그동안 저에게 못 해 줬던 선물도 해 줄 겸, 제 가족들이 더는 저에게 뭔가를 기대하지 못하게끔 확실한 제로 세팅을 해 볼까 합니다.”

“제로 세팅이 뭡니까?”

난 최대한 목소리를 줄여 정 대리에게 물어봤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차준영이 다시 말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려 일하는 게 힘들기도 했고요. 종합적으로 봤을 때 지금 제 상태는 리프레시가 필요한 상태인 거 같습니다.”

“삼육구라고 하잖아요. 다들 입사 3년 차, 6년 차….”

정 대리가 설득을 시작하려 할 때 내가 탁상 아래에서 정 대리의 허벅지 위로 손을 올렸다.

정 대리는 고개만 살짝 돌려 날 쳐다봤고, 난 모르는 척 차준영에게 말했다.

“차준영 씨.”

“네, 과장님.”

“차준영 씨는 말을 좀… 잘할 필요가 있겠네.”

“네?”

내가 말했다.

“영업하는 사람들에게 지금처럼 결정적인 순간은 말이 전부 아니에요?”

“그게 무슨….”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 거겠지만, 단어 선택이 많이 어설프네요. 이럴 땐 도망이라는 표현은 안 어울리는 표현인 거죠.”

“……?”

“준영 씨가 뭘 잘못한 게 아니잖아요. 누가 준영 씨를 잡으러 오는 것도 아니고. 준영 씨가 용기를 내어서 선택을 한 거예요. 그 선택에 대한 책임도 오로지 준영 씨의 몫인 거고. 그런 대단한 결심으로 지금과 다른 삶을 살아 보겠다는 선택을 한 건데, 그걸 왜 도망이라고 표현을 하는 거죠? 난 이해가 잘 안 되네?”

정 대리도 두 눈을 깜빡거리며 날 쳐다보고 있었다.

“대충 준영 씨 상황을 알겠어요. 이번 달 말까지 하겠다고요? 아, 그렇구나. 그렇네. 이번 달 말이 딱 3년이네. 그렇지. 할 거면 퇴직금을 다 챙겨 가야지.”

정 대리는 내가 뭔가 지나치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지만, 난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차준영에게 말했다.

“그런데 나중에 나하고 단둘이서 면담을 한 번 더 합시다. 그 전에 내가 뭘 좀 확인해 봐야 할 게 있을 거 같으니까.”

“…….”

“걱정하지 마요. 잡겠다는 게 아니라, 이달의 우수 사원상을 두 번이나 받은 회사의 인재를 너무 맥없이 놓아주는 게 아쉬워서 그러는 거니까. 정 대리.”

“네, 과장님.”

“차준영 씨 퇴사 희망 건은 지금부터 제가 직접 챙기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직접 챙기겠습니다.”

“…네.”

“준영 씨는 시간 내주셔서 감사하고, 올라가서 업무 보시면 될 거 같습니다.”

“네.”

차준영이 면담실을 나갔을 때 정 대리에게 지시했다.

“정 대리는 아까 누구라고 했죠? 오 과장님이라고 했나요?”

“네, 오필교 영업2팀 과장님이십니다.”

“내가 그분이랑도 이야기를 좀 해 봐야 할 거 같으니까, 자리 좀 만들어 주세요.”

“어쩌시려고요?”

“어쩌긴 뭘 어째요? 차준영 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야기나 좀 들어 보려고 하는 거지.”

“…….”

“내가 정 대리는 믿지만, 그렇다고 정 대리의 사람 보는 눈까지 객관적일 거라고는 믿을 수 없는 거 아닙니까. 다른 사람 말도 들어 봐야죠.”

“과장님, 괜찮으신 거 맞죠?”

“그럼요. 왜요?”

“어제오늘 정말 사람 헷갈리게 만드시네요.”

“그러니까 뭐가?”

“이게 어떻게 기억을 잃은 사람입니까?”

“원래대로 돌아가 달란 말처럼 들리네?”

“아뇨! 아니라고요, 그런 거!”

“놀래라! 고함을 지르고 있어?”

“…죄송합니다.”

“얼른 오 과장하고 자리 좀 만들어 주세요… 그리고 하나 더.”

“뭐요?”

“회사 조직도 좀 갖다주세요.”

“조직도요?”

“네, 현재 이곳 재경모직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그걸 좀 봐야겠네요.”

“…….”

“뭐 합니까? 얼른 준비해 주세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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