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 중요하죠
난 면담실을 나가지 않았다.
거기에서 영업2팀 오 과장이라는 사람이 내려올 때까지 정 대리가 가져다준 재경모직의 조직도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뭡니까?”
정 대리가 나가기 전 얼른 물어봤다.
“어떤 거 말씀이십니까?”
“생뚜앙 지사.”
“아, 파리 지사요? 저도 아직 한 번도 못 가 봤는데, 프랑스 파리에 재경모직의 해외 지사가 있습니다. 그게 조직도에는 생뚜앙 지사라고 표기되어 있네요.”
“주로 여기 생뚜앙 지사에서는 무슨 업무를 합니까?”
“MD 업무죠. 현재 재경모직에서 취급하고 있는 수입 브랜드들을 관리하고, 그곳 브랜드 본사 쪽과 주문, 계약, 관계 유지에 관한 업무를 봅니다.”
“파리에만 있나요?”
해외 지사.
내가 처음 만든 거다.
그런데 내가 만든 해외 지사는 파리가 아니라 밀라노였다.
그 밀라노 크리온테 지사가 이 조직도에 보이지가 않았다.
“제가 입사를 하기 전에는 파리하고 밀라노에 하나씩 지사를 뒀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그렇지.
“그런데 생뚜앙으로 지사를 확대, 통합시켰습니다. 해외 지사라는 게 결국은 현지 고용도 이뤄져야 하지만, 실질적으로 본사와 업무를 나누는 인원들은 다들 주재원, 파견직이다 보니 인건비부터 시작해서 유지비가 만만치 않게 들어가거든요.”
“그렇겠네요.”
“생뚜앙 지사가 이젠 자리가 잡혀서 밀라노뿐 아니라 런던까지 다 커버를 치고 있습니다.”
“잘 굴러가고 있단 말이죠?”
“그렇죠.”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오 과장이라는 분은 언제 내려온답니까?”
“미팅 중이시던데, 거의 다 끝나 간다고 하니까 금방 올 겁니다.”
정 대리가 나가고 나서 다시 20분 정도 조직도를 살펴보고 있을 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렸고, 정 대리와 함께 영업2팀 오 과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정 대리는 자기가 직접 오 과장에게 마실 것을 물었고, 나와 오 과장이 마주 보고 앉아 간단하게 인사를 주고받는 동안 오 과장이 마실 생수 한 병을 가져다주었다.
“차준영 씨는 어떤 직원입니까?”
처음엔 회장 둘째 아들이 가지고 있는 망나니 인식 때문이었는지, 날 경계하던 오 과장이었는데 차준영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자 그때부터는 나에 대한 경계를 풀기 시작했다.
“고마운 부하 직원, 그와 동시에 음… 미안한 부하 직원이라고 말씀을 드릴 수 있겠네요.”
내가 몸을 빌리고 있는 정훈이 놈보다는 최소한 10살 이상은 나이가 많아 보였다.
김원호 차장과 비슷한 연배처럼 보였다고 할까?
“고맙고 그와 동시에 미안하다? 조금만 자세히 풀어서 이야기를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말 그대로 꼭 필요한 직원입니다. 왜 저렇게까지 할까 싶을 정도로 열심히 일을 하는 친구거든요. 그런데도 미안하다고 표현했던 건, 일을 잘하니까, 가장 믿을 만하니까, 또 무슨 업무를 줘도 표정 바뀌는 거 하나 없이, 속된 말로 군말 없이 해내니까… 그러다 보니까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차 책임한테만 업무를 주는 경향이 저도 없지 않아 있었던 거 같습니다.”
그럴 수 있지.
“그리고 매사에 진심이 담겨 있는 직원입니다.”
“어떤 진심 말씀이십니까?”
“작은 것 하나라도 회사 비품을 허투루 쓰는 일이 없었던 직원입니다. 출장 같은 걸 갈 때도 쓴 경비 내역을 보면 알 수 있죠. 이 친구가 진짜 가서 일만 하다 왔구나… 하는걸요. 아, 이건 제가 과장님 앞에서 할 말은 아니었는데….”
“아뇨, 아닙니다. 꽉 막힌, 답답한 구석이 있는 직원이란 말씀이시네요.”
“네?”
“누가 출장을 가서 일만 합니까? 회삿돈으로 맛있는 것도 좀 사 먹어 보고, 좋은 데서 잠도 자 보고 그러는 거죠.”
“하, 하하… 아닙니다.”
“아니긴요. 그런 재미라도 없으면 회사 생활 팍팍해서 어떻게 합니까? 다 눈치껏 하는 거죠. 위에서도 눈치껏 눈감아 줄 건 눈감아 주는 거고. 그건 그렇고, 그렇게 꼭 필요한 직원이 퇴사를 하겠다는데, 어째서 과장님은 직계 직원을 제대로 못 잡고 계십니까?”
그 말에 오 과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 친구가 이 회사에 진심이었던 것만큼, 저도 일을 떠나 인간적으로 차 책임한테 진심이 많았습니다. 따로 술도 많이 마셨고, 개인적인 집안일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죠.”
난 계속해 보라는 뜻을 전달했다.
“그나마 제가 몇 번이나 잡고, 설득을 하고, 사람 사는 거 다 거기에서 거기다… 하면서 가라앉혔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던 거지, 따지고 보면 진작에 터져도 터질 일이었습니다. 작년에 자기 형이 차 책임 앞으로 대출을 내서 사업을 시작해 망했을 때도 제가 잡았거든요. 그런데 지금 생각을 해 보면 제가 그때 안 잡는 게 맞았던 거 같기도 합니다.”
“과장님 선에서는 더는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네, 부끄럽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그렇습니다. 업무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는 거라면 모르겠지만, 차 책임 같은 경우는 회사에서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없다고 보입니다.”
“그렇… 군요.”
“한 번도 새 교복을 입어 본 적이 없답니다.”
“……?”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모두 자기 형이 입었던 교복을 물려 입었답니다.”
“음….”
“교복만 그랬겠습니까? 모든 게 다 형이 입고 쓰던 걸 물려받았겠죠. 형은 맏이라고 항상 새것, 늦둥이 여동생은 막내에 여자라고 항상 새것. 그런 집안의 둘째라서 그런지 눈치가 빤한 친구입니다.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차 책임과 가까워지면 자기 것에 대한 집착도 상당하고요.”
“그렇지 않아도 아까 상담을 하는데, 그런 말을 하더군요.”
“어떤 말이요?”
“자기 스스로한테 너무 애틋하고, 또 미안하다고요.”
“그렇죠. 차 책임은 충분히 그런 생각을 할 만하죠.”
“일단 과장님이 보시기에 차 책임이 괜찮은 직원이었던 건 확실한 거네요?”
두 눈을 크게 뜨며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투로 오 과장이 말했다.
“그럼요. 그걸 말로 해서 뭘 하겠습니까? 현재 영업부 전체로 놓고 봐도 저희 영업2팀의 실적이 가장 높습니다.”
“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영업2팀의 실적 30퍼센트 이상을 차 책임이 만들어 낸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희처럼 영업 뛰는 사람들이 사람이 좋다, 인성이 좋다… 그런 걸로 능력을 증명할 순 없는 거죠. 실적. 실적이 말해 주지 않습니까. 개인 실적도 순위권, 거기에 팀 실적 기여도는 1위입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오 과장님은 그런 인재를 잡을 수가 없으시고요?”
“하… 잡을 수만 있음 저라고 왜 안 잡겠습니까? 발에 족쇄라도 채우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런데 결론은 잡지 못하신 거고요.”
“…….”
“제가 그 차 책임을 다른 부서로 발령을 내 볼까 합니다. 그 부분에 대해 미리 양해를 구하려고 잠시 보자고 한 겁니다.”
“네?”
“어차피 과장님의 손은 떠난 거 아닙니까?”
“그야….”
“어차피 퇴사를 하겠다고 하는 사람인데, 다른 쪽으로도 제안을 한번 해 볼까 싶어서요. 더 이상 과장님하고는 큰 상관이 없는 거 아닙니까.”
“그야, 그렇죠. 네. 맞습니다. 솔직히 저는 과장님께서, 아니 인사부에서 그렇게 해 줄 수만 있으면 감사한 입장입니다.”
진심이었다.
“영업부 과장이 부서 트랜스퍼에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물론 차 대리는 영업 쪽 일이 적성에도 맞고 능력도 좋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차 책임이 맨땅에 헤딩하는 것만은 막고 싶은 게 제 솔직한 심정이거든요. 여기저기 오퍼를 몇 군데에서 받았다고는 합니다. 머리를 좀 식히고 다시 돌아와서 재취업을 해 볼 생각이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게 말이 쉽지, 현실이 그렇게 호락호락합니까.”
“그렇죠. 아무래도 회사에 소속이 된 상태에서 이직을 하는 거랑, 아닌 거엔 분명 큰 차이가 있을 겁니다.”
“제 말이요. 그런데 포인트는 차 책임이 이직에 뜻이 있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그저 잠시 모든 걸 다 버리고 현실 도피를 하고 싶은 거뿐입니다.”
“저도 그런 거 같아서 다른 방법을 알아볼 생각인 겁니다. 제가 알아보려고 하는 데 동의를 해 주시는 걸로 알고 있어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거기에 제가 왈가왈부할 입장은 아니죠.”
“알겠습니다. 바쁘실 텐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차 책임 건은 본인이 끝내 그렇게 해야겠다면 어쩔 수 없는 거지만, 그래도 제가 신경을 좀 써 보겠습니다.”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 * *
부장 자리를 찾아가는 날 정 대리가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 눈빛을 느꼈지만, 못 본 척 인사부장을 찾아갔다.
자리엔 HRD의 박종근 과장이 먼저 와서 부장과 이야기 중이었다.
“어? 손 과장님이 무슨 일입니까?”
내가 자신을 찾아온 게 무척 의외라는 듯, 인사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 곁으로 다가왔다.
“이야기 중이신 거 같은데, 조금 이따가 다시 오겠습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이야기 거의 다 끝나 갑니다.”
전혀 그런 분위기는 아닌 거 같은데?
“박 과장, 그럼 그건… 일단 조금만 내가 생각을 해 볼게.”
어떻게든 박 과장을 보내려고 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부장님. 이건 무조건 해야 하는 겁니다.”
“어허이, 참. 조금 이따가 다시 이야기하자고. 그렇게 급한 사안도 아닌 거 같구먼, 왜 그래?”
“급합니다, 부장님.”
부장이라는 인물도 차장과 크게 다를 게 없어 보인다.
내가 정훈이기 때문에 그런 거겠지?
회장 아들이니까.
“부장님.”
“네, 과장님.”
“저는 진짜 괜찮습니다. 그냥 뭐 좀 확인해 볼 게 있어서 찾아왔던 겁니다. 박 과장님이 먼저 이야기 중이셨으니까, 저는 조금 이따가 다시 오겠습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박 과장.”
박 과장을 향해 짐짓 눈을 크게 뜨며 더는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는 인사부장이었다.
그럼에도 박 과장은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그럼, 제가 그냥 이거 하나만 확인하고 나가겠습니다.”
결국 인사부장은 나와 박 과장의 뜻을 꺾지 못했다.
“파리 생뚜앙 지사 있지 않습니까?”
인사부장뿐 아니라 박 과장도 놀라는 눈치였다.
설마 네가 지금 회사 일을 하겠다는 거냐… 하는 식의 놀라움이었다.
“네, 있습니다.”
“그 해외 지사 파견은 어떻게 이뤄지는 겁니까?”
“파견요?”
“주재원 근무는 정기적으로 신청을 하는 겁니까, 아님 거기에서 인력이 필요할 때마다 요청을 하면 여기에서 보내 주는 겁니까?”
“둘 다라고 보시면 됩니다. 한 번 갈 때마다 기간이 2년입니다. 1년에 3명씩 보내죠. 그럼 먼저 가서 파견 근무를 하고 있는 직원들과 로테이션이 맞아떨어집니다. 그런데 중간에 개인적인 사정이 있거나, 문제가 있을 경우, 복귀가 빨리 이뤄지는 인원도 있기 때문에, 그럴 때마다 차출하거나, 대기 중인 인원이 있으면 우선적으로 기회를 주기도 합니다.”
“그럼 현재 그곳에 자리가 없더라도, 본사에서 한 명 정도 교육 삼아 보낼 수도 있는 겁니까?”
“음… 지금까지 그랬던 적은 없습니다.”
“제가 꼭 보냈음 싶은 사람이 있는데, 자리를 만들 수 있을지 부장님이 좀 알아봐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 말에 박 과장의 눈썹 끝이 눈에 띄게 꿈틀거렸다.
박종근 과장.
그나마 생각이 있는 친구라고 봐야 하나?
“과장님이 꼭 보냈음 싶은 사람이요? 혹시 우리 회사 직원입니까?”
“네.”
“실례가 안 된다면 누군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영업2팀의 차영준 책임입니다. 혹시 아십니까?”
“차영준? 어… 네, 누군지 압니다. 일 잘하는 친구죠.”
“차 책임이 개인적인 이유로 퇴사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니까, 회사에 꼭 필요한 인재인 거 같고, 퇴사 사유도 회사 업무와 아무 관련이 없는 거 같아 좀 아깝더군요.”
“아, 그러셨습니까?”
인사부장이 내게 꼬리를 흔들면 흔들수록, 박종근 과장의 미간 사이 주름은 더 깊게 파여만 갔다.
“제가 주재원 파견 근무를 제시하면서 차 책임을 한번 잡아 볼까 하는데, 혹시 그쪽에 자리를 하나 만들 수 있을지… 부장님이 도움을 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인사부장이 더 격하게 꼬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아이고, 그런 거라면 당연히 제가 알아봐 드려야죠. 그 뭐지? 그래, 맞아. 차영준이라면 이달의 우수 사원상을 벌써 두 번이나 받았을 겁니다.”
“네, 맞습니다.”
“과장님께서 직접 그런 인재를 아깝게 여기고 잡으려고 하시는데, 당연히 제가 알아봐 드려야죠. 아니, 자리를 만들어야죠. 제가 거기 지사장으로 가 계신 상무님한테 사정을 말씀드리고 자리를 하나 만들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인사부장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넨 후 몸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
“원칙에 어긋나는 인사입니다.”
“……?”
박종근 과장이었다.
몸을 돌려보니, 인사부장은 원칙에 어긋나는 인사라고 표현했던 박 과장에게 마치 잡아먹을 듯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박 과장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내게 말했다.
“저 역시 대리까지는 HRM에서 근무를 했습니다. 채용과 트랜스퍼. 분명 HRM의 분야가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 손 과장님께서 하겠다고 하는 해외 파견 트랜스퍼는 다른 내용이죠.”
“쓰읍, 박 과장.”
“부장님. 아닌 건 아닌 겁니다.”
재밌었다.
박 과장 이 친구도 은근히 고집이 있네?
“좋은 인재를 뽑는 것 못지않게 좋은 인재를 키우고 잡는 것도 인사의 역할이 맞습니다. 하지만 회사의 원칙을 지키는 것 역시 인사의 역할입니다. 회사의 원칙을 지키고 직원들에게 그 원칙을 교육해야 하는 인사부에서 아까운 인재 하나 잡겠다고 회사가 만들어 놓은 인사의 원칙을 깨뜨린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죠.”
“어허, 거참… 오늘따라 안 그러던 사람이 왜 이러지?”
조금 더 지켜보고 싶긴 했는데, 이러다 큰소리가 나올 것 같아 결국 내가 끼어들어서 말했다.
“원칙, 중요하죠. 그런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지켜져야 하는 원칙이라는 게 뭡니까?”
박 과장이 막힘없이 대답을 시작했다.
“우선 해외 지사 주재원 파견직은 경쟁률이 높습니다. 매년 파견직 티오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직원들이 상당수 있을 만큼요.”
그렇겠지.
“그런데 그런 자리에 과장님 눈에 들어온 사람이라고, 인사 절차 모두 생략을 하고 보낸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죠.”
“제가 지금 해외 지사로 보내겠다고 하는 직원은 제 눈에 들어온 적이 없는 직원입니다.”
“……?”
“저는 오늘 그 직원과 처음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해 봤습니다. 그 직원이 평판이 좋고 업무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도 오늘 확인을 했고요.”
“그렇다면 더 문제가 될 수 있는 인사가 아닙니까? 잘 알지도 못하고, 다른 직원들이 말하는 평판과 업무 능력만으로, 그 직원이 퇴사를 희망하기 때문에 그 경쟁률이 높은 해외 지사 주재원 자리를 미끼로 잡겠다는 건, 추후 비슷한 상황을 또 만들어 낼 수도 있는 겁니다.”
마음에 드네, 이 친구.
꽤 논리가 있어.
부장을 옆에 두고, 회장 아들을 상대로 이 정도로까지 자신의 소신을 말할 수 있을 정도라면 배짱도 충분하고.
“비슷한 상황이 또 나오면, 그때도 보낼 만한 인재라면 보내 주면 되는 거 아닙니까? 만약 주재원 근무를 해 보고 싶다고 하면 말이죠.”
“네?”
“그게 문제입니까?”
“당연히 문제죠. 그게 왜 문제가 아닙니까? 우리 재경모직의 주재원 대우는 타 기업과 비교를 해서도 무척 높은 수준입니다. 요즘은 주재원의 혜택이 많이 줄어들어서 다른 기업에선 주재원 근무의 메리트가 크게 낮아졌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자녀들 국제 학교 학비 지원부터, 배우자 어학원 지원, 주거 지원, 현지 생활 자금 지원 등… 지원 내역을 줄이지 않고 있죠. 그런 자리에 비슷한 상황이 또 나오면 그때도 보낼 만한 인재라면 보내 주면 된다는 생각은 아주 위험한 생각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언제 희망하는 모두를 보내 주자고 한 겁니까? 비슷한 상황이라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내 말에 박 과장은 뭔가 말을 하려다 말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입을 다물었다.
“이달의 우수 사원상. 그걸 두 번이나 받을 정도로 부서 내뿐 아니라 회사 전체적으로도 인정을 받고 있는 직원이라면, 주재원 파견 근무 자리? 자리가 없어도 만들어서 보내 줄 만하지 않습니까? 혹, 그런 거로 문제를 삼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이달의 우수 사원상 두 번 받아 오라고 하세요. 그럼 그땐 제가 부장님이 아니라 제 형인 본사 상무님, 아니 회장님께 직접 부탁드려서 자리를 만들겠습니다. 그럼 되는 거 아닙니까?”
“과장님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신다면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거 하나는 여쭤보고 싶습니다.”
“네. 물어보세요.”
“과장님께서 보내고 싶어 하시는 그 직원이 영업2팀 직원 아닙니까?”
“네, 맞습니다.”
“언어가 됩니까?”
언어….
하긴.
주재원이니까 언어가 되어야지.
“무슨 언어가 필요할까요?”
“생뚜앙 지사 파견 근무는 불어까지는 아니더라도 영어는 기본적으로 할 수 있는 직원들 위주로 뽑습니다.”
“그런데 그 언어라는 게요. 불어, 영어… 그렇게 외국어만 된다고 충분한 겁니까?”
“……?”
“제가 외국어 잘하는 사람들을 상당히 많이 알고 있거든요. 8개 국어 가능한 사람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 중에 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외국어를 잘하는 거랑 언어, 즉 소통을 잘하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뭐가 더 중요할까요? 저는 외국어보다는 소통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사람이거든요.”
“…….”
“물론 외국어? 중요하죠. 상당히 중요하죠. 그런데 그 외국어라는 게 어렵게 이 회사에 입사를 해서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직원들에게 기회의 발목을 잡게 해선 안 될 겁니다.”
“……!”
“박 과장님의 논리대로라면 외국어를 못하는 우리 회사 직원은 모두가 다 가고 싶어 하는 해외 파견 근무를 아예 쳐다도 보지 말아야 된다는 건데, 우리 직원이 아니라면 모를까, 힘들게 그 높은 경쟁률을 뚫고 입사한 우리 직원에게까지 그런 제약을 둘 필요가 있습니까? 과장님의 생각이 틀렸다는 게 아니라, 그 부분은 충분히 다른 쪽으로 메울 수가 있다는 겁니다. 해외 파견 근무라고 해서 꼭 외국어가 필요한 업무만 봐야 하는 겁니까? 아니죠. 본사와의 업무 소통을 해 줘야 하는 사람도 분명 필요하고, 그게 가장 중요한 역할 아닙니까? 그리고 언어는 가서 배우면 됩니다. 아까 과장님이 말씀하셨던 주재원 혜택에 왜 자녀, 배우자 교육비만 말씀하시고, 직원 교육비는 말씀을 안 하십니까? 그것도 포함이 되는 거 아닙니까?”
박 과장은 코로 숨을 내뿜은 뒤, 다시 입을 벌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과장님.”
“네.”
“회사의 원칙, 인사의 원칙을 생각하시는 과장님의 마음은 잘 알겠는데 월권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도 직장 생활의 원칙입니다. 저는 지금 그렇게 하겠다는 게 아니라,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를 부장님께 여쭤본 거고, 부장님은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 같다고 저한테 답을 주셨습니다. 이 부분에서 과장님이 관여할 수 있는 내용은 전혀 없다고 보이는데요?”
“…….”
“그래도 좋은 의견, 그리고 진심 어린 걱정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부장님.”
“네, 과장님.”
“좀 알아봐 주시겠습니까?”
“네, 그럼요, 그럼요. 제가 자리 하나 만들어 보겠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