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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생각을 못 해 본 내용이네 (12/303)

전혀 생각을 못 해 본 내용이네

점심시간을 끝내고, 오후 3시에 차준영을 다시 인사부로 불렀다.

“파리 주재원 근무요?”

차준영은 내가 한 제안에 입을 못 다물 정도로 크게 놀라고 있었다.

“네, 준영 씨한테는 나쁘지 않은 기회라고 보이는데요? 어때요? 생각 있어요?”

“제가 거기에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요?”

“그건 준영 씨가 직접 가서 찾으셔야죠. 준영 씨가 못 찾으면 거기 다른 직원들이 대신 찾아 줄 수도 있는 거고.”

여전히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차준영은 내가 보여 준 주재원 근무 지원서를 읽어 내려갔다.

“유럽 여행을 해 보는 게 대학 시절 목표였다면서요? 그걸 꼭 잘 다니고 있던 회사까지 그만두고, 준영 씨 돈으로 할 필요 있어요? 유럽은 나도 몇 번 가 봤거든요. 처음에나 좋지 며칠 지나면 그 건물이 그 건물인 거 같고, 그 음식이 그 음식인 거 같고… 금방 싫증 나요. 두세 달? 에이, 너무 길어요.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유럽 여행은 일주일 정도가 딱 적당해요.”

“…….”

“모든 게 다 그래요. 조금 아쉽다 싶을 정도로만 해야지, 다음에 또 해 보고 싶지, 시작부터 아예 뽕을 뽑겠다고 달려들면 그렇게 해 보고 싶었던 것도 금방 감흥이 사라지고 질린다니까? 이번 달까지 영업2팀에서 근무를 하고, 차라리 휴가를 내세요. 제가 최대한 근무 시작 날짜를 맞춰 드릴 테니까, 회삿돈으로 비행기 타고 일주일, 한 10일 정도 먼저 도착해서 해 보고 싶었던 유럽 여행 하면 되잖아.”

“그렇긴 한데….”

“그렇게 했는데도 아쉬우면, 쉬는 날 가까운 데 여행하면서 아쉬운 거 채워 가면 되는 거고. 어차피 지금 준영 씨가 하고 싶은 건 유럽 여행이 아니라 가족들과의 거리를 두겠다는 거 아니에요?”

“네, 맞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어디에 있어요? 한 번 가면 2년이에요. 거기에서 준영 씨만 열심히 해서 여기에서처럼 인정을 받으면 얼마든지 연장도 가능할 거고. 가족들과의 거리는 그렇게 둬야지, 아예 모든 걸 다 인위적으로 끊는 것처럼 해 버리면 지금까지 준영 씨가 가족들한테 희생한 게 욕으로 돌아오는 거예요.”

난 차준영이 읽고 있던 주재원 근무 지원서를 좀 더 차준영 쪽으로 밀어 넣으며 말했다.

“그리고 아까 아침에 내가 말했던 선택이라는 것도 이렇게 하는 거고. 선택이라는 건 얻을 수 있는 것과 잃을 수 있는 게 비슷한 것 중 하나를 고르는 거예요. 그런데 준영 씨가 하겠다는 건 어느 쪽을 선택해도 둘 다 잃을 수밖에 없는 선택이잖아요. 그렇게 일머리가 좋은 사람이 그 쉬운 걸 왜 모를까? 자, 선택합시다.”

“과장님. 제가 이건 정말 전혀 생각을 못 해 봤던 내용이라, 조금만 생각을 해 볼 시간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럼요. 당연히 드려야죠. 천천히 생각해 보고, 내일 다시 이야기하는 것도 저는 좋습니다. 이 정도 조건인데 하루 정도면 충분히 생각 정리할 수 있잖아요.”

“네.”

“그래요. 이거 하나만 내 뜻이 잘 전달됐다면 나는 그걸로 충분해요. 회사는 준영 씨를 잡고 싶고, 그래서 준영 씨 편에 서서 앞으로 하게 될 선택을 응원하고 싶다는 거. 이 제안이 준영 씨 선택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과장님.”

“이게 어디 나한테 감사할 일입니까? 그동안 집안일도 버거웠을 텐데, 그럼에도 회사 일에까지 그 정도로 열심히 해 준 준영 씨 스스로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이지.”

* * *

차준영과의 면담을 끝내고 자리로 돌아온 내게 정 대리가 물었다.

“뭐랍니까?”

“생각을 좀 해 보겠다고요. 전혀 생각을 못 해 봤던 내용이라서, 생각해 볼 시간을 조금만 달라고 하네요. 그래서 그러라고 했어요.”

“괜찮으시겠어요?”

“뭐가요?”

혹여나 파티션 너머 HRD팀 쪽으로 목소리가 흘러 나갈 것이 걱정인 듯,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정 대리가 말했다.

“제가 계속 생각을 좀 해 봤는데요, 박 과장님 말씀이 맞는 거 같아요. 준영 씨가 아까운 인재인 건 확실하지만, 이런 식으로 회사가 직원들을 상대로 예외를 만들어 버리면, 나중에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정 대리의 말처럼 부장 자리에서 박 과장이 내게 했던 말은 하나같이 다 맞는 말들이었고.

하지만 차준영에게 선택지를 만들어 준 내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설마하니 내가 얼굴도 몰랐던 회사 직원 하나 살리겠다고 본사 상무, 회장까지 거론하며 이런 억지를 부렸을까.

나는 지금 차준영이를 회사에 계속 묶어 두겠다고 그런 게 아니라, 내가 회사에서 이런 행동을 벌이면 과연 어느 선에서 내게 다가올지, 그걸 확인해 보기 위해 미끼를 던진 거뿐이다.

아무리 봐도 인사부장이나 차장은 정훈이 놈을 어려워만 했지, 정훈이 놈에 관한 회사 생활 내용을 홍준이 놈이나 하다못해 정태 놈에게 보고하는 위치에 있는 건 아닌 거 같다.

틀림없이 인사부장이나 차장 위에 다른 놈이 있다.

정훈이 놈의 일거수일투족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회사 안에서의 행실이나, 업무 파악 능력 따위를 확인하고 본사 쪽으로 말을 옮기는 인물.

그 인물을 잡아야 한다.

그걸 하기 위해서 일부러 인사부장이 있는 자리에서 박 과장에게 압박을 가했고, 해외 지사 파견직 자리를 만들어 보라는 다소 억지 부탁을 인사부장에게 했던 거다.

그 정도 억지는 부려야 회장과 본사 상무에게 말을 전하는 일을 하는 놈이 움직일 게 아닌가.

나도 그랬다.

나도 홍명이 놈과 홍준이 놈을 각각 과장으로 입사를 시켰을 때, 내가 믿을 수 있을 만한 인물로, 놈들 몰래 그 주위에 심어 놨었다.

그 역할이 꽤나 중요했기에 난 그 친구들이 올리는 보고로 홍명이와 홍준이 놈의 역량을 평가했고, 또 녀석들이 실수를 하면 대신 그 역할을 하는 친구들을 불러 혼을 내고, 녀석들이 대견한 일을 해내면 대신 상을 주었다.

지금 정훈이 놈에게도 분명 그런 존재가 이 회사, 재경모직 본사 안에 숨어 있을 것이다.

그 존재를 잡아야 한다.

“정 대리가 말하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건 어떤 상황을 말하는 겁니까?”

“당연히 직원들 사이에서 파리 지사 파견 근무의 형평성에 관한 논란이 일어나는 거죠.”

“그 논란은 누가 일으킬 거라고 보이세요?”

“그야… 파견 근무에 뜻이 있는 직원들이겠죠.”

“그런 직원들이 얼마나 됩니까? 그냥 대충 퍼센티지로 놓고 봤을 때, 이곳 본사에 그런 직원들이 몇 퍼센트나 될 거 같습니까?”

“10퍼센트? 그건 너무 많나? 5퍼센트? 근데 과장님, 퍼센티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런 이야기들이 나올 수도 있다는 게 문제인 거죠.”

“그게 왜 문제죠?”

정 대리는 답답하다는 듯 자기 가슴을 주먹으로 때리며 내게 말했다.

“직장 내 여론이 이상하게 흘러갈 수도 있으니까요.”

“정 대리, 이 조직이라는 곳에서 진짜 문제가 뭔지 아세요?”

“진짜 문제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게 진짜 문제예요. 오히려 문제가 나오는 건 그 조직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설마하니 직원이 3천 명이나 되는 이런 큰 조직에서 정말 아무 문제가 없겠습니까? 다들 그냥 참고, 자기가 앞에 나서서 문제를 제기할 용기가 없으니까 조용히 넘어가는 거지. 안 그래요?”

그제야 정 대리는 조금 전 답답함을 표현했던 것과는 달리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 대리 생각에는 차준영 씨가 왜 퇴사를 하려고 하는 거 같습니까? 아까 차준영 씨가 했던 이야기 말고, 진짜 이유.”

“진짜 이유요? 그거 말고 무슨 진짜 이유가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집안일 그거는 차준영 씨가 모든 것에 다 손을 놓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만든 계기일 뿐이고, 진짜 이유가 될 수는 없어요.”

“그럼 과장님이 생각하시는 진짜 이유는 뭔가요?”

“동력. 지금 차준영 씨는 열심히 살아야 하는 동력이 끊어진 거예요.”

“동력이요?”

난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다음 말했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사람들은 그 동력이 느슨합니다. 반대로 차준영 씨처럼 필요 이상의 책임감을 느끼고, 매사 열심히 사는 사람은 그 동력이 팽팽해질 수밖에 없어요. 내가 봤을 때 차준영 씨의 동력은 팽팽해질 대로 팽팽해져서 결국 스스로 끊어진 거 같아요.”

“동력이 끊어졌다…?”

“계획한 뭔가를 꼭 이루겠다, 내가 저 사람은 꼭 뛰어넘겠다, 내년엔 꼭 승진하겠다… 그런 목표가 결국은 살아가는 동력이라고 봐야죠. 원동력. 편하게 살고 싶고, 그래서 큰 욕심이 없다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도 따지고 보면 다 동력이 끊어진 사람이에요. 세상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 해도 안 될 거 같으니까 비겁하게 그런 말을 하는 거지. 환경이 안 받쳐 주니까, 더는 앞으로 나아갈 자신이 없는 사람이 하는 거짓말인 거지. 세상에 욕심 없는 사람은 없어요. 차준영 씨처럼 모든 걸 다 놓아 버리고 싶은 사람도 없고. 그런 사람들 대부분의 진심은 결국 잘살고 싶은 거예요.”

“…….”

“차준영 씨처럼 동력이 끊어진 사람한테는 어떻게 해 줘야겠어요?”

“동기 부여?”

“아니죠. 안 그래도 사는 게 힘들어 죽겠는 사람한테, 조금만 더 힘내서 열심히 살자고, 저 산만 넘으면 매실나무가 있다는 거짓말로 동기 부여를 하는 것만큼 큰 폭력이 어디에 있어요?”

“그럼요?”

“그냥 들어 주는 거죠. 아까 정 대리가 했던 것처럼. 그리고 편이 되어 주는 거죠. 조금 전 내가 하고 온 것처럼.”

“……!”

“혼자라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은 이미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다. 사람이기 때문에 힘이 들 때가 있는 건 너무 당연한 거다. 하지만 그럴 때 모든 걸 다 놓아 버리면 누구도 당신을 도와줄 수가 없게 된다. 내가 당신을 도울 수 있게 조금만 틈을 남겨 둬라. 그럼 내가 당신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그런 말 한마디가 끊겨 버린 동력을 다시 붙게 할 수도 있는 거예요. 그게 또 결국은 인사의 핵심 아닌가? 인사는 책상머리에 앉아서 숫자와 통계로 하는 게 아닙니다, 정 대리. 인사는 발로 뛰는 겁니다. 영업보다 더 변수가 많이 생기고, 훨씬 더 돌발 상황이 많이 발생하는 게 인사라고요. 그런 인사를 잘하기 위해선 조직에 문제가 생기는 걸 두려워하면 안 되죠. 문제가 생겨야 해결 방법을 찾을 수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해결 방법을 많이 가지고 있는 조직일수록 외부 위기에 강해지는 법입니다. 고작 이만한 일로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표현을 쓰는 게 답답해서 하는 말이에요.”

정 대리의 표정이 시무룩해져 있을 때 난 스마트폰으로 통화 목록을 눌러, 그 화면을 정 대리에게 보여 줬다.

그리고 정 대리는 내가 보여 준 화면을 보자마자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연락처 정보 바꾸는 건 또 누구한테 배웠습니까?”

“검색해 보니까 자세하게 다 나와 있던데요?”

정 대리뿐 아니라, 노예 2, 3, 4, 5… 등으로 등록되어 있던 회사 모든 직원의 연락처 정보를 그들의 이름과 직책을 붙여서 바꿔 놓았다.

그런데 도저히 ‘노예 1’이 누구인지는 찾을 수가 없었다.

회사의 비상 연락망에도 안 나와 있는 인물, ‘노예 1’.

아무튼, 내가 그렇게 등록을 해 놓았던 건 아니지만….

“어제 그 일은 내가 정말 미안해요, 정 대리. 혹시라도 내가 기억이 다시 돌아오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회사 사람들을 그렇게 저장시켜 놨던 건지, 내가 꼭 물어볼게요.”

“푸훕.”

“방금 그건 웃으라고 한 말이 맞는데, 그렇게 정 대리를 저장시켜서 미안하다는 건 진심이에요.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그 사과, 저도 오늘은 진심으로 받겠습니다.”

* * *

정훈이 놈의 몸에서 삼 일째를 맞은 아침이었다.

출근길이었는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리고 스마트폰 화면엔 발신자 표시로 ‘노예 1’이라는 글자가 뜨고 있었다.

노예 1.

부서 간 직원들 비상 연락망에도 없었던 번호.

틀림없이 최소 임원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 노예 1이 홍준이 놈이나 정태 놈이 심어 놓은 나의 관찰자일 가능성도 크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보세요?”

―정훈이.

정훈이?

이름을 부른다?

그것도 아주 친근하게 부르는데?

목소리만 들어서는 중년이다.

“네.”

―지금 어디야?

“지금 출근하는 중입니다.”

―그래? 그럼 출근하고 바로 내 사무실로 잠시 올라와.

“사무실요?”

누군지 알아야 가지.

이럴 줄 알았음 그냥 누군지 모르겠다고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할 걸 그랬나?

그런데 스마트폰에 저장되어 있던 다른 노예 2, 3, 4, 5… 와는 정훈이 놈과의 관계가 다른 게 확실했다.

말투 하나하나에 지시적인 느낌이 흐르고 있었다.

―그래, 네 고모가 너 가져다주라고 그림 하나 빼놨다.

“그림…이요? 무슨 그림이요?”

―네 고모 말로는 지난주에 갤러리에서 네가 마음에 들어 하더라면서 가격까지 물어봤다고 하던데?

고모?

정훈이에게 고모라면 셋째 놈 여정이가 유일할 텐데….

혹시 몰라서 도박을 해 봤다.

“고모부?”

―왜?

맞나 보네.

“아뇨, 갑자기 전화가 잘 안 들리는 거 같아서요.”

―운전 중이라서 그런가 보다. 나는 지금 출근했으니까, 너도 회사 들어오는 대로 잠시 내 사무실로 올라와. 그림 말고 다른 할 말도 있으니까.

“네, 그럴게요.”

여정이 남편이 재경모직에 있다?

이건 또 전혀 생각을 못 해 본 내용이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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