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을 일이 아닌 거 같은데요?
나 손중길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도 수차례 독대를 해 봤고, 지금의 대한민국 경제 기반을 잡은 여러 기업 총수들과도 호형호제하던 사이였다.
아무리 남 사장이 입사 4년 만에 그룹 본사 전략 기획 본부 과장까지 오른 인재라 해도, 그 재경을 만든 사람이 바로 난데, 설마하니 내가 이 친구 하나 구워삶지 못할까.
“일 잘하는 직원 하나가 집안 문제로 퇴사를 신청했다고 하더라고요. 알아봤는데, 이대로 놓치기엔 좀 아깝단 생각이 들잖아요.”
“그래서 직원 하나 놓치는 게 아까워서 인사 원칙을 싸그리 무시하고 그런 요청을 보냈다?”
“아니, 뭐 꼭 인사 원칙을 무시한 건 아니고… 보니까 이달의 우수 사원상. 그것도 두 번이나 받았더라고요. 아직 영업부 책임밖에 안 되는데. 다른 직원들한테 물어봤죠. 그게 어려운 거냐고. 이달의 우수 사원상이라는 게 한 번 정도는 성실하게만 일을 하면 다 받을 수 있는 거지만 두 번은 어려운 거라고 하던데요?”
“그래서?”
“아깝잖아요, 실력이 있다는 건데, 그런 직원을 놓친다는 게.”
“그래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인사를 인사부장을 통해 요청했다?”
“다들 사장님처럼 말을 하더라고요, 저한테. 말도 안 되는 인사다, 그런 건 원칙에도 어긋날 뿐 아니라, 나중에 다른 직원들이 인사 형평성에 관한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 그렇게요. 그런데 그 말을 듣고 나니까 더 오기가 생기잖아요. 그래도 제가 명색이 회장님 아들인데.”
“이런 생각 없는 친구를 봤나!”
갑자기 고함을 지르네?
야 이 사람아, 자네가 지금 생각 없는 친구라고 말한 내가 원래라면 자네 장인이야!
“다른 직원들이 그렇게 우려를 한다는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야.”
“에이… 알죠. 아는데… 지금 인사부 안에서 제 위치가 그렇습니다. 다들 겉으로 어려워만 하지, 속으로는 무시하고 언제쯤 다른 데로 옮겨 가나… 그것만 기다리고 있어요. 그런데 계속 그렇게 있을 순 없잖아요. 뭐라도 증명을 해야 할 거 아닙니까, 증명을.”
“…….”
“잘하고 싶다고요, 제가 지금. 제 할아버지, 큰아버지, 그리고 지금 회장님. 다들 능력 좋고, 아직까지도 인정을 받고 계신 분들인데 저 때문에 그분들이 욕을 얻어 드시면 안 되잖아요.”
“…….”
“알겠습니다, 알겠다고요. 잘못했어요. 제가 생각 없는 짓을 했나 보네요. 근데 그렇다고 제가 제 체면 좀 살려 달라고 사정사정한 인사부장한테 뭐라고 하시는 건 진짜 좀 아니죠, 인간적으로. 아, 그냥 저한테 뭐라고 하세요. 그게 진짜 그렇게까지 잘못된 일입니까?”
“날 납득을 시켰다면 모를까, 그렇지 못했다는 건 잘못된 일이라는 거지.”
“앞으로 안 그럴게요. 잘못했습니다.”
“진심이야?”
“아, 그럼요. 지금 제가 누구 앞이라고 안 하겠다 해 놓고 또 할까 봐요? 안 하겠다고요, 앞으로는. 그니까 인사부장한테 뭐라고 하지 마세요.”
“체면 때문에 그랬다?”
“아마 말리는 사람이 없었으면 안 했을 거예요. 근데 하나같이 다들 절 뜯어말리니까, 괜히 오기가 생기잖아요. 다들 날 무시해서 그러나 싶기도 하고….”
“납득은 안 되지만, 네 입장이 이해는 된다. 그래서 이번은 그냥 넘어가겠지만, 앞으로 한 번만 더 이런 어처구니없는 요청을 했다는 소리가 내 귀에 들어오면, 그땐 진짜 문제를 삼을 거야.”
“혹시 회장님한테 보고하실 거예요?”
내 말에 남 사장은 콧방귀를 끼며 이렇게 대답을 했다.
“날 우습게 생각하는 거야, 아니면 고작 입사 6개월 차밖에 안 되는 너 자신을 대단하게 생각하는 거야?”
“뭐가요?”
“고작 인사부 과장 하나가 일으킨 과한 요청 건 하나를 문제 삼아 그걸 그룹 회장님께 보고할 만큼 내가 한가한 사람처럼 보여?”
회사 안에서의 정훈이 놈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보고하는 일을 하는 존재가 남 사장은 아닌 게 분명하다.
처음부터 사장에게 그딴 임무를 맡기지는 않았을 거라, 애써 홍준이 놈을 믿고 있었다.
“근데 그게 그렇게 잘못한 겁니까? 제가 봤을 땐 진짜 괜찮은 인재였거든요.”
“진짜 잘못은 지난 6개월간 네 안목을 다른 사람들이 믿을 수 있게 네가 처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거 아닐까?”
우문현답이라….
점점 마음에 드는데?
“그럼 만약 제 안목을 다른 사람들이 믿을 수 있게 되면 그건 더 이상 잘못이 아니란 말인 거네요?”
“그렇게 되면 내가 어제 지사장한테 그런 전화를 안 받아도 됐겠지.”
“그렇네요. 사장님 말씀이 맞네요. 결국은 제가 부족하고, 회사 사람들한테 믿음을 못 줘서 그만한 일이 사장님 귀에도 들어간 게 되는 거네요. 알겠습니다. 앞으로는 더 이상 그만한 일로 그런 말 안 들으셔도 되게끔… 제가 처신을 똑바로 하겠습니다.”
“알았다. 나가 봐라.”
“그럼 그… 주재원 티오 자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안 되는 겁니까?”
“체면 때문에 그렇게 했다며?”
“네?”
“명색이 네가 회장님 아들인데, 그 체면을 내가 깎이게 만들어서야 되겠어? 좋아하지 마. 사람 보는 네 안목이 궁금해서 그러는 거니까.”
“…네.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그림 가지고 가야지.”
“아, 네.”
* * *
인사부 사무실로 내려왔을 땐 이미 부장과 차장도 출근을 해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날 발견한 인사부장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내 곁으로 다가왔고, 그 모습을 HRD의 박종근 과장이 파티션 너머로 몰래 훔쳐보고 있었다.
“정 대리가 그러던데, 사장님 호출받고 올라가셨다고요?”
간신이네, 간신.
뭔가가 아쉽다.
그래도 부장이라 하면 한 부서의 장인데, 그리고 인사부는 조직의 핵심 중에서도 핵심 부서인데, 그 부서장이라는 인물이 가벼워도 너무 가볍다.
“네, 아침 출근길부터 전화를 걸어서 사람을 오라 가라 하네요. 피곤하게….”
인사부장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 일부러 말을 가볍게 날려 봤다.
“하하하. 그래도 금방 끝나신 거 보니까 뭐 별일은 아니었던 거 같습니다.”
“그러니까 짜증이 난다는 거죠. 간만에 일찍 출근해서 뭘 좀 보려고 했는데….”
“혹시 뭐 때문에 호출을 하신 건지….”
“별거 아니에요. 어제 생뚜앙 지사에 주재원 자리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한 거 때문에 거기 지사장한테 전화를 받은 모양이에요.”
내 말에 인사부장은 손가락으로 자기 이마 주위를 긁적이며 난처한 표정을 보였다.
“그, 그렇습니까?”
“저는 어제 부장님이 너무 수월하게 알겠다고 하셔서, 부장님 선에서 다 정리가 되는 건 줄 알았는데 그런 건 또 아니었나 봅니다?”
“아닌… 데? 지사장님이 왜 그러셨지? 어제는 분명히 알겠다고 그렇게 대답을 해 주셨는데. 하, 하, 하하하….”
“이야기 들어 보니까 아닌 게 아닌 거 같던데요? 제 이름 파셨다면서요.”
“그건 좀 더 확실하게 처리를 하려고….”
“아무튼, 알겠습니다. 어쨌든 잘 해결된 거 같으니까,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뭐라고 하시던가요?”
“뭐라긴 뭘 뭐라고 합니까? 그 인사에 책임을 져야 할 거라고 하셔서, 알겠다, 내가 책임지겠다 하고 대답하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부장님.”
“네.”
난 인사부장 쪽으로 몸을 좀 더 붙여 귓속말했다.
“다음부터는 제가 어제 같은 부탁을 드리면, 부장님 선에서 확실하게 해 주실 수 있는 것만 해 주겠다고 약속을 해 주세요.”
“…….”
“이게 뭡니까? 아침부터 사장실에 불려갈 거였음 그냥 어제 차라리 부장님이 아니라 사장님한테 바로 말을 했죠. 안 그래요?”
“아, 네. 하, 하하, 하하하. 네, 네. 알겠습니다. 앞으로는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네, 아무튼 어제 편들어 줘서 감사합니다.”
“편이요?”
“어제 저랑 박 과장 사이에서 저를 편들어 주셨잖아요.”
“에이, 같은 인사부 사람들끼리 네 편 내 편이 어디에 있습니까? 다 같은 편이지.”
“그렇죠? 다 같은 편이죠?”
말에 뼈를 박았다.
“그, 그럼요.”
“이렇게 다 같이. 우린 같은 편인 거 맞죠?”
“당연하죠.”
난 이번엔 부서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을 만한 목소리로 인사부장에게 말했다.
“우린 같은 편이니까, 이 안에 우리끼리 있었던 일을 밖으로 흘리고 그러는 사람은 없겠죠? 인사부라는 게 결국은 입이 무거워야 하는 부서인데, 그런 부서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혹여나 우리 부서 사람들의 일을 밖으로 흘리고, 혹은 보고하고… 그런 건 없어야 하는 거니까.”
“그럼요. 그건 당연한 겁니다. 우리 안에서 있었던 일은 우리끼리 해결을 해야죠, 그걸 왜 밖으로 흘립니까?”
“네, 알겠습니다.”
난 다시 한번 파티션에 몸을 숨긴 채, 눈알만 굴리고 있던 HRD 박종근 과장을 쳐다본 후, 내 자리로 돌아왔다.
HRM팀은 텅 비어 있었다.
아마도 정 대리가 직원들을 데리고 미팅을 하고 있는 중인 모양이다.
30분 정도가 지나 10시가 되었을 때 HRM팀 사람들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는데, 난 정 대리에게 내일부터는 아침 미팅에 나도 불러 달라고 말했다.
“내일부터요?”
“네, 대충 과장 직무 파악은 다 끝난 거 같으니까, 내일부터는 저도 같이하죠.”
“직무 파악이 벌써 끝났다고요? 저는 아직 과장님께 과장님 직무에 관해 말씀드린 게 없는데요?”
그걸 꼭 들어야 아나, 이 친구야.
그냥 딱 보면 바로 답이 나오지.
“지금 정 대리가 하고 있는 업무들이 결국은 다 제 업무 아닙니까?”
“…….”
“과장이 일을 안 하니까, 그 업무를 대리가 대신 다 보고 있었던 거 같은데, 정 대리가 하는 업무만 배우면 되는 거 아닐까요? 아니에요?”
“네, 얼추 맞는 말이긴 한데….”
“그니까 직무 파악 끝이죠. 업무 보는 법은 지금부터 배우면 되는 거고. 그것도 금방 배울 수 있을 겁니다. 업무 배우는 거보다는 컴퓨터 이거 다루는 거 배우는 게 훨씬 더 걱정이에요.”
“……?”
“그건 그렇고, 어제 차준영 씨 사직서를 받아서 끼워 놓은 파일철 있지 않습니까?”
“네.”
“그 안에 들어 있던 서류들이 모두 사직서였습니까?”
정 대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말한 그 서류철을 꺼내 들었다.
“이거요?”
“네.”
“네, 맞습니다. 다 접수된 사직서입니다.”
“처리가 된 것도 같이 있는 겁니까, 아니면 처리를 해야 하는 것들만 있는 겁니까?”
“같이 보관하면 안 되죠. 다 처리를 하는 것들입니다.”
“그 말은 거진 한 달 사이에 들어온 사직서만 그만큼이 된다는 말이에요?”
“좀 많죠? 하하하….”
“이건… 웃을 일이 아닌 거 같은데요?”
내가 심각하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자, 정 대리도 애써 짓고 있던 쓴웃음을 감추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죠. 절대 웃을 일이 아니죠.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현실이 이런걸.”
“혹시 회사에 문제가 있는 겁니까?”
못 잡아도 최소 열 장 이상은 되어 보였다.
“이게 꼭 우리 회사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힘들게 뽑아 놓으면 나가고, 힘들게 일을 가르쳐 놓으면 나가고… 본인들 입장에서도 힘들게 취업 준비를 해서 어렵게 입사한 회사를 이렇게 빨리 그만두고 싶겠습니까만, 요즘은 조기 퇴사의 정도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조기 퇴사라면 그때 정 대리가 말했던 그 1318세대? 그런 걸 말하는 겁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정 대리가 말했다.
“비슷하죠. 그런 거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퇴사를 신청하는 직원들의 60퍼센트 정도가 입사 2년 미만의 직원들입니다. 그리고 그 2년 미만의 직원들 중 80퍼센트 이상이 입사 1년 미만의 직원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추세가 꼭 재경모직만의 문제는 아니다?”
“절대 아니죠. 우린 그나마 다른 회사에 비하면 양호한 편입니다. 어쨌거나 업계 안에서는 직원 대우가 좋은 편이니까요. 이건 어느 한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현재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라고 보셔야 할 겁니다.”
잠시 생각을 해 보다가 정 대리에게 자료를 부탁했다.
“지금 그 파일철에 모아 놓은 사직서들 있지 않습니까?”
“네.”
“그 사직서를 제출한 직원들이 입사할 때 회사에 제출한 이력서를 가지고 있습니까?”
“있죠. 공채 기수별로 다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걸 좀 볼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사직서들도 좀 봤으면 싶은데.”
“당연하죠. 결국엔 이거 제가 과장님께 컨펌을 받아서 처리를 해야 하는 겁니다.”
“하긴, 그렇겠네요. 아무튼 지금 제가 부탁한 거 좀 챙겨 주세요.”
알겠다고 대답을 한 정 대리가 잠시 후 뒤늦게 생각이 났다는 듯 내게 물었다.
“아 참, 근데 사장님은 뭐 때문에 아침부터 호출을 하셨다고 하던가요?”
“그냥 어제 그 일 때문에요. 차준영 씨.”
“아… 별말씀은 없으셨고요?”
“네, 그냥 좋게 좋게 잘 끝났습니다. 그건 그렇고.”
그러고 있을 때였다.
인사부 사무실 문이 열렸다.
영업2팀 차준영이 안으로 들어왔는데, 한결 편해진 얼굴로 손에는 어제 내가 건넸던 해외 지사 파견 근무 신청서로 보이는 종이 한 장을 들고 있었다.
옆에서는 정 대리가 눈치껏 파일철을 하나 꺼내 그 안에서 차준영이 제출했던 퇴사 신청서를 뽑아 내게 전달했다.
난 차준영의 퇴사 신청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 표정이 하루 사이에 많이 좋아졌네요?”
“네, 복잡했던 생각이 정리가 되니까, 머리도 가벼워지고 마음도 편하네요.”
“상담실에 들어가서 이야기 나눌까요?”
“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