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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15/303)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파견 근무를 안 가겠다고요?”

차준영이 탁상 위로 올려놓은 파견 근무 지원서.

그곳 서명란은 비어 있었다.

“네. 신경 써 주셨는데, 죄송합니다.”

“결국 퇴사를 해야겠다는 뜻인가요?”

“아뇨, 아닙니다.”

서둘러 손을 흔든 뒤, 내가 들고 있는 자신의 사직서를 쳐다보며 차준영이 말했다.

“그거 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앞으로 밀어 줬더니 차준영은 그걸 반으로 접고, 접힌 상태에서 다시 반으로 접어 자기 재킷 안주머니 속으로 챙겨 넣었다.

“회사… 그냥 계속 다니겠습니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쳐다보자, 차준영은 스스로의 결정이 민망한 듯 파견 근무 지원서만 만지작거리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어제 과장님과 상담을 하고 혼자 생각을 많이 해 봤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도망을 치려고 했던 게 맞았던 거 같더라고요. 제 삶을 바꿔 보려고 용기를 내어 선택을 한 게 아니라, 그 용기를 내는 게 두려워서 도망을 치려고 했던 게 맞았습니다.”

“…….”

“그렇더라고요. 제가 잘못한 게 없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도망을 치는 건 아닌 거 같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웃음이 나왔다.

알이 깨어졌구나.

그 알을 깨고 나오는 과정이다.

그래, 그 알은 힘들어도 네가 직접 깨고 나오는 수밖에 없다.

네가 직접 깨지 않고 남이 깨 주면 넌 결국 계란프라이밖에 안 되는 거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진짜 용기를 내어서 제 삶을 제가 직접 선택하기로 했습니다. 독립을 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미움을 받더라도, 가족들이 제게 배신감을 느끼더라도 솔직하게 말할 생각입니다. 지금부터 나는 내 인생을 살겠다고요. 나도 하고 싶지만, 지금 내겐 가족들에게 얽매여 있을 여유가 없다고요.”

“그러니까요. 이거 좋은 기회 아니에요? 주재원으로 가면 회사가 거기에서 준영 씨가 지낼 집을 지원해 줘요. 그리고 기본적인 현지 생활비 정도도 따로 나오고. 준영 씨 월급은 오로지 한국에서 다 모을 수가 있다고.”

“해외 지사 파견 근무가 조건이 좋은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조건은 분명 좋지만, 제가 거기에서 꼭 필요한 사람은 아닐 겁니다. 오히려 지금 제가 있는 영업2팀이 절 훨씬 더 필요로 하고 있고요.”

“역시 사람은 참 쉽게 안 변해요. 그죠?”

내 말에 차준영이 보고 있던 파견 근무 지원서를 반으로 접어 놓고 날 쳐다봤다.

“이렇게 좋은 기회가 있는데, 이 좋은 기회 앞에서도 준영 씨는 준영 씨 본인을 위한 선택이 아닌, 준영 씨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한 선택을 하네요.”

“…….”

“결국은 준영 씨가 아니라 남 좋은 일을 시키는 거 아니냔 말이에요.”

“아닙니다.”

두 눈에 미소가 담기기 시작했다.

아주 확신에 찬 눈으로 날 쳐다보며 차준영이 말했다.

“남 좋은 일을 시키겠다고, 영업2팀에 계속 남겠다는 게 아니라 절 위해서 영업2팀에 계속 남겠다는 겁니다.”

“준영 씨를 위해서요?”

“네. 절 위해서요. 저는 지금까지 살면서 이곳 재경모직, 그리고 영업2팀 안에서만큼 인정을 받고, 관심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드디어 알을 깨고 나왔다.

“어쩌면 그런 인정과 관심을 받는 거에 중독이 되어서 더 일을 열심히 했었을 수도 있습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어제와는 달라진 차준영의 확신에 찬 모습에 응원을 보냈다.

“어렸을 때부터 저는 위로는 형에게, 밑으로는 동생에게… 제 것을 양보하고 희생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거든요. 회사에서 인정과 관심을 받으면서 일하는 게 어쩌면 제가 집에서 해야 했던 양보와 희생의 보상이었던 거 같습니다.”

“그 보상을 그동안 영업2팀이 차준영 씨한테 해 줬던 거군요.”

“네, 아직은 조금 더 제가 익숙한 곳에서 인정과 관심을 받으며 일을 하고 싶습니다. 좋은 기회 제안해 주셔서 정말 너무 감사하고, 또 힘들게 마련해 주신 자리인데 안 가겠다고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지금처럼 하면 됩니다.”

“네?”

“지금 나한테 한 것처럼 하면 된다고요. 파견 근무 자리 제안한 내가 준영 씨한테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단 생각 안 해 봤어요?”

“결국, 이렇게 될 거 괜히 사직서까지 제출하면서 여러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었단 후회는 하고 있습니다.”

“나 준영 씨 파견 근무 티오 자리 하나 만들어 보겠다고 설레발치다가 오늘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사장실에 불려 간 거 알아요?”

차준영은 놀란 나머지 입을 반쯤 벌려놓고 날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사장실에 불려 간 거… 그거 따지고 보면 준영 씨 잘못 아니잖아요. 내가 준영 씨 한번 잡아 보겠다고, 준영 씨가 그렇게 해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혼자 준비하다가 그렇게 된 거 아니에요?”

“하지만… 죄송합니다, 과장님.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난 손을 들어 차준영을 말린 다음 말을 이어 갔다.

“지금 당장 준영 씨가 꼭 해야겠다는 게 생기니까, 다른 건 안 보이고 딱 준영 씨가 원하는 것만 보이죠?”

“…네, 그런 거 같습니다.”

“그러면 되는 거라고요. 다른 사람에게 미움받는 거, 다른 사람들이 준영 씨한테 배신감 느끼는 거… 그런 걸 감당하고서라도 준영 씨가 꼭 해야겠다는 게 생긴 거 그게 중요한 거예요. 어제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는 게 버겁다고 했잖아요?”

“네.”

“물을 길어다가 채우려고만 하니까 버거운 겁니다. 그 독에 물을 가득 채우고 싶으면, 그냥 그 독을 그동안 준영 씨가 물을 길었던 우물 속에 빠뜨려 버리세요. 그럼 빠진 그 사이로 알아서 물이 들어가 독을 가득 채우게 됩니다.”

“……!”

“그러기 위해선 준영 씨가 그 우물의 주인이 되어야겠죠? 지금부터는 밑 빠진 독 신경 쓰지 말고, 오로지 준영 씨가 준영 씨 삶의 주인이 되게 만들어 보세요. 그럼 준영 씨의 부모님도, 형제들도 자연스럽게 준영 씨 곁으로 다시 돌아갈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 때문에 입장이 난처해지신 거 같은데, 어떻게 합니까?”

“난처해질 게 뭐가 있어요? 그냥 어쩌다 보니 보내려고 했던 사람이 안 가겠다고 한다, 미안하다, 그러면 끝인 거지. 내가 뭐 나라를 팔아먹었어요, 그렇다고 사람을 죽였어요? 준영 씨 같은 회사에 꼭 필요한 인재를 잡아 보겠다고 하다가 그렇게 된 건데, 그걸 누가 뭐라고 하겠어요? 못 잡은 것도 아니고, 이렇게 제대로 잡았는데 고만한 일로 뭐라고 하는 놈이 있으면 그놈이 그릇이 작은 거지.”

면담을 끝내고 차준영이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할 때였다.

“준영 씨, 이건 내 개인적인 건데, 내가 뭐 하나만 좀 물어봅시다.”

“개인적인 거요? 네, 물어보십시오.”

“둘째의 삶이… 정말 그렇게까지 숨이 막히는 겁니까?”

어쩌면 나는 어제부터 차준영을 통해 홍준이 놈의 인생을 이해해 보려고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둘째.

인정하건대, 나 역시 그러했던 거 같다.

홍명이는 맏이라서 엄하게 키우면서도 항상 내 곁에 있게 만들었고, 여정이는 회사 일을 가르칠 마음이 애초에 없었기에 금지옥엽 사랑으로만 키웠다.

그런데 홍준이 놈을 생각하면… 아비의 역할을 했다는 기억만 있지, 정확히 어떤 마음으로 녀석을 대했는지는 나 역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둘째의 삶이요?”

“네.”

“안 좋은 점만 있는 건 분명 아닙니다. 좋은 점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제 부모님이 조금만 더 공평한 분들이셨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항상 하면서 살았던 건 사실입니다.”

“공평이요?”

“네, 공평이요. 형은 첫째니까, 동생은 막내니까… 그런 말을 저한테 참 많이 하셨거든요. 뭔가 제게 불공평한 상황들이 벌어질 때마다요. 그럴 때마다 저한테는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넌 혼자서도 잘하니까, 넌 누가 안 도와줘도 알아서 잘하니까… 그리고 명절 때 친척들이 다 모이면 제 칭찬을 빠짐없이 해 줍니다. 어른스럽다, 집안일을 잘 돕는다, 학원 같은 걸 안 보내는데도 성적을 곧잘 받아 온다… 결국은 그런 칭찬들은 진짜 칭찬이 아니라 제게 앞으로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일종의 부탁이셨던 거죠.”

“…….”

“세상에 처음부터 혼자서도 잘하는 아이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누가 안 도와줘도 알아서 잘하는 아이는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혼자서만 하게 만드니까, 도와주는 게 없으니까 결국은 혼자서 하게 되고, 도움 없이 하게 되는 거죠. 혼자서, 아무 도움 없이 뭔가를 해내기 위해 제가 겪어야 했던, 힘들었던 상황들은 저 말고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 게 숨이 막히는 거죠.”

나는 과연 홍준이 놈에게 어떤 부모였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내겐 언제나 재경 그룹이 내 인생 우선순위 가장 위에 있었기에, 부모로서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 * *

“쟤 왜 일해?”

“네?”

흡연실.

정현수 대리를 따로 부른 김원호 차장이 혹여나 자신들의 대화를 다른 부서 사람들이 듣기라도 할까,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망 과장 말이야. 쟤 지금 일하고 있는 거 아냐?”

“아마도요?”

“왜 저러냐고. 왜 안 하던 짓을 해?”

정 대리는 대답 없이 그저 담배만 한 모금 빨아 연기를 김원호 차장이 서 있는 반대쪽으로 내뿜었다.

“이건 또 무슨 신종 꼬장이야? 쟤 혹시 약 같은 거 먹었어? 아니면 먹어야 하는 약을 안 먹은 건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어제 부장님 앞에서 박 과장이랑 붙은 것도 그렇고, 차준영이 일도 그렇고….”

“어쨌든 준영 씨 일은 잘된 거 아닙니까?”

하지만 김원호 차장은 고개를 흔들었다.

“잘되긴 뭐가 잘돼? 여기저기 다 쑤셔 놓고 결국은 또 부장님이 생뚜앙 지사장한테 직접 연락해서 없던 일로 해 달라고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인데. 똥 싸는 놈 따로 있고, 그 똥 치우는 놈 따로 있고. 정말 인생 불공평하다.”

“저는 이번 건은 과장님이 잘하신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너 설마 지금 망 과장 편드는 거야?”

“누구 편을 드는 게 아니라, 회사 입장에서는 어쨌거나 일 잘하는 직원을 잡은 거 아닙니까. 그렇지 않아도 점점 더 최근 입사자들의 퇴사율이 높아지고 있는데, 이러는 와중에 준영 씨처럼 일 잘하고 성실한 직원을 세이브해 낸 건 과장님이 잘한 거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게 어디 망 과장 실력이야? 소 뒷걸음치다가 쥐 잡은 격이지.”

정 대리는 속으로만 웃으며 “그럴까요?”라고 물었다.

“당연하지. 회장 아들이 자리 하나 만들어 보라고 하는데, 어느 간 큰 지사장이 안 된다고 하겠어? 그리고 어느 직원이 회사 월급은 월급대로 고스란히 모으고, 또 해외 생활 경험도 만들 수 있는 그 자리를 못 본 척할 수 있겠냐고.”

“준영 씨는 못 본 척을 했잖아요.”

“그러니까 소 뒷걸음치다가 쥐 잡은 거라고. 이건 망 과장 실력이 아니라, 망 과장이 가지고 있는 배경의 힘인 거야.”

“그렇더라도 어쨌거나 결과는 좋은 거 아닙니까?”

“뭐지?”

“뭐가요?”

“왜 아까부터 정 대리가 계속 망 과장 편을 드는 거 같지? 이거 내 기분 탓인 거야? 그런 거야?”

결국 정 대리는 피식하고 웃으며 장난스레 김원호 차장에게 물었다.

“제가 과장님 편 좀 들면 안됩니까?”

“어? 어? 이거 봐, 이거 봐. 맞네, 편드는 거 맞네.”

“저희 팀 과장입니다. 대리가 과장 편드는 건 당연한 거 아닙니까?”

“우와… 또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뭐가 또 이렇게 나온다는 겁니까? 저도 좀 의외라서 그런 겁니다.”

“의외? 무슨 의외?”

“저도 과장님이 준영 씨 건을 이렇게 손쉽게 해결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고,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저는 우리가 준영 씨를 잡을 수 있을 거란 생각도 못 했거든요. 오 과장님이랑 통화하는 순간 직감적으로 이건 방법이 없겠다는 생각만 했어요. 그런데 과장님이 정말 별거 아닌 거처럼, 차장님 말씀대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배경의 힘을 썼더라도 손쉽게 해결을 했잖아요.”

김원호 차장은 손가락으로 지적을 하듯 정 대리를 몇 번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이거… 정 대리 똑똑한 줄 알았는데 영 헛물이네.”

“뭐가요?”

“그쪽 아니야.”

“그쪽이라니요?”

“망 과장은 아니라고.”

“그러니까 뭐가요?”

“지난 6개월간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도 답이 안 나오냐? 망 과장 라인 타지 말란 말이야.”

그 말에 정 대리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리며 담배를 다시 한 모금 빨았다.

“망 과장 눈 밖에 나서 좋을 건 없지만, 그렇다고 망 과장한테 비비는 건 더 위험해. 회사에 보는 눈 많다. 더군다나 망 과장은 앞으로 6개월 정도만 더 하다가 다른 데로 옮길 거야.”

“그런데 그때부터 왜 자꾸 과장님의 인사부 생활을 1년이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어디에서 들은 이야기라도 있으세요?”

“드, 듣긴 내가 뭘 들어? 보통 다 그렇게 하니까 망 과장도 그럴 거라는 말이지, 내 말은.”

“보통이요? 본사 상무님 같은 경우는 그룹 본사 전략기획팀 과장으로 2년 넘게 있지 않았었나요? 저는 그렇다고 들었는데?”

재빨리 화제를 바꾸며 김원호 차장이 말했다.

“그런 게 지금 중요하냐? 아무튼 앞으로 정 대리 네가 옆에서 잘 좀 지켜봐. 내가 봤을 땐 이거 지금 신종 꼬장이야.”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거 아닐까요?”

“뭐?”

정 대리는 손 과장과 개인적으로 한 약속이 있었기에, 예전처럼 김 차장 앞에서 무조건 솔직할 수만은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일단 며칠만 더 지켜보시죠. 제가 옆에서 잘 지켜보다가 혹시라도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차장님께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네가 참 고생이 많다.”

“아닙니다. 고생은요, 무슨. 괜찮습니다.”

“괜찮긴. 그냥 옆에서 지켜만 보는 나도 피가 거꾸로 솟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닌데. 어쨌든 회장님 아들이야. 밉보여서 좋을 건 없으니까, 최대한 말랑말랑하게… 알지? 내가 지금 무슨 말 하는지.”

“네, 그럼요.”

“조금만 더 참자. 곧 딴 데로 갈 거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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