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한테 무슨 감정 있습니까? (16/303)

저한테 무슨 감정 있습니까?

역시 오늘도 난 정훈이 놈의 몸에서 눈을 떴다.

오늘도 알람 시계의 도움 없이 혼자 눈을 떴지만, 어제, 그제와는 달리 중간에 깨는 것 없이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정 대리의 도움으로 오늘부턴 아침에 신문을 읽을 수 있을 거 같다.

각기 다른 신문사의 종이 신문 세 부가 흰 비닐에 씌워져 현관문 앞에 놓여 있었다.

정 대리에게 배운 대로 커피를 한 잔 내려서 거기에 뜨거운 물을 섞어 최대한 묽게 만든 후, 그 커피를 마시며 천천히 신문으로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확인했다.

시끄러운 세상이다.

그 흔해 빠진 광고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신문 속엔 이 나라 대한민국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놀라운 뉴스로 가득 차 있었다.

30년 이상 뒤처져 있었던 대한민국의 개인 국민 소득이 일본을 따라잡기 시작했다는 뉴스.

그 뉴스를 보면서 내가 지금 내 손주, 정훈이 놈의 몸을 빌려 구경하고 있는 이 세상이 과연 현실인가 싶었다.

잠재력은 충분했지만, 중국은 벌써 미국 다음가는 세계 경제 강국이 되어 있었고, 어느 곳에서 일어난 전쟁이 전 세계 생활 물가, 서민들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나라의 정치는 불안하고, 경제는 한계에 도달해 있다는 느낌이다.

그런 뉴스들을 보며 난 세간에 받아 온 평판에 비해 무척 작은 사람, 부족한 경영인이었단 아쉬움을 지워 낼 수가 없었다.

정권과 연이 닿았던 당시, 난 항공을 선택할 것이 아니라, 정보 통신을 선택해야 했었다.

건설이 아니라 반도체에 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했고.

내겐 바로 어제의 일이지만, 이곳의 세월로는 30년 전의 그때.

그때의 난 한국이 이렇게까지 막강한 경쟁력을 가진 문화 강국, 반도체 강국, 정보 통신 강국이 될 거란 생각을 못 한 채 눈을 감았다.

나의 부족함이다.

역시 내가 아닌 이 회장의 선택과 도박이 맞았던 거다.

어쩌면 재경이 현재 이렇게까지 가라앉아 있는 데에는 홍준이 놈이 아니라 나의 잘못이 훨씬 더 클지도 모르겠다.

미래 사업을 내다보는 나의 선구안이 부족했고, 자식들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던 나의 잘못.

지난 며칠 동안 정 대리를 통해 스마트폰 사용법을 열심히 배웠다.

이젠 기본적인 건 얼추 다 할 줄 안다.

SNS, 카톡을 통해 평소 정훈이 놈이 고만고만한 망나니들과 어떤 대화를 주고받았는지 다 확인했고, 하등 도움이 안 될 거 같은 녀석들의 연락처는 모두 등록된 걸 삭제, 차단해 버렸다.

그리고 정태 놈과 주고받은 대화를 통해 평소 정훈이와 정태 놈의 관계를 유추해 볼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형제간의 관계는 크게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싱거운 농담이 주를 이루는 대화 속에서 정태 놈이 정훈이를 의외로 꽤 잘 챙기고 있다는 인상도 받았다.

정태뿐 아니라, 제 부모도 함께 속해 있는 단톡방은 읽을거리가 훨씬 더 많았다.

한 달에 두 번.

둘째, 넷째 주 화요일 저녁은 온 가족이 다 같이 본가에서 식사를 하는 것 같다.

그 화요일 저녁은 내가 지금 지내고 있는 이 집에 누군가가 청소만 해 주러 오는 시간대이기도 했는데, 이 집으로 청소를 하는 사람을 보내 주는 것 역시 이놈, 정훈이의 어미인 장혜란이었다.

홍준이 놈은 그 대화에 거의 참여를 하지 않지만, 장혜란이는 예쁜 음식, 꽃, 좋은 배경의 사진들을 틈만 나면 그 단톡방에 올렸다.

그 사진에 대한 감상 답장은 정태 놈의 배우자인 원수경과 정훈이 이놈이 주로 도맡아 하고 있었는데, 정훈이 놈이 제 아비인 홍준이 놈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에겐 친구에게 하는 것처럼 반말을 사용하고 있다는 거, 형수인 원수경과 아주 가까운 사이인 거 같다는 것 등은 지금 내게 아주 중요한 정보들이었다.

주변에 관한 공부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

지금부터는 본격적으로 정훈이 이놈에 대해 알아야 한다.

나는 전혀 알지 못했던 존재, 내가 눈을 감을 당시엔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정훈이 놈에 대한 공부.

그게 어려웠다.

분명 정 대리만 통하는 건 한계가 있었다.

정 대리에 의하면 내가 정훈이 놈의 몸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정 대리뿐 아니라, 회사 모든 사람과 대화를 거의 안 했다고 한다.

심지어 인사조차 안 받았다고 한다.

무리도 아니지.

직장 동료를 노예라고 폰에 저장을 해 놓을 정도인데, 크게 놀라울 것도 없다.

그렇다고 정훈이 놈이 어떤 놈이었는지를 정태 놈이나 홍준이 놈, 장혜란이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분명 방법이 있을 것이다, 다른 좋은 방법이.

우선은 출근부터 하자.

“오셨습니까, 과장님.”

“네, 좋은 아침입니다. 정 대리, 어제 내가 부탁했던 거….”

“과장님 책상 위에 올려놨습니다. 혹시 몰라서 원본 파일도 메신저로 보내 놨는데, 메신저 확인하는 거 이젠 할 줄 아시죠?”

“네, 하다가 혹시 막히면 그때 가서 물어볼게요.”

“네, 알겠습니다.”

“나중에 미팅할 때 나도 부르고요.”

“네!”

현재 인사부로 접수된 퇴사 희망 신청서와 그 신청자들의 이력서를 하나하나 대조해 봤다.

놀랍게도 영업부 쪽에서 퇴사를 희망하는 직원들의 평균 학력이 서울 4년제였다.

그중엔 연세대에서 심리학과를 전공한 인재도 있었다.

다른 지원 부서들의 상황은 더 했다.

“정 대리.”

“네, 과장님.”

“혹시 이 토익이라는 게 영어 시험인 겁니까? 토플 같은.”

“네, 그렇죠. 그런데 과장님이 토플은 또 어떻게 아십니까?”

“그냥저냥 어디에서 들은 거 같습니다.”

토익이라는 게 내가 예상한 대로 영어 능력을 평가하는 시험이라는 걸 알고 난 뒤, 900점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를 다시 물어봤다.

“990점이 만점입니다.”

“그럼 900점이면 100점 만점에 90점 이상이란 뜻이네요?”

“그렇죠.”

“이 시험이 공신력이 있는 시험입니까?”

“현재로서는 취준생들의 노력을 평가할 수 있는 대표적인 기준인 건 분명합니다.”

“지금 이 이력서들을 보면, 하나같이 905점, 이건 920, 940점대도 있네요? 한국에 있는 영어 영재, 천재들은 죄다 재경모직으로 몰린단 말입니까?”

“그럴 리가요. 아니죠.”

물론 나도 아니라는 건 안다.

설마 그 정도도 모를까.

하지만 정말 이상하지 않나.

내가 알고 있는 90년대 초만 하더라도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영업 직원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때에도 총무나, 인사, 전략 기획과 같은 지원 부서는 기본 학력을 중요시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영어 평가 시험의 고득점자들을 많이 데리고 있을 이유도 없었고.

시대가 그만큼 변했다는 말이기도 하겠지만, 과연 이렇듯 조기 퇴사자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신입 직원들을 굳이 이러한 기준으로 뽑는 게 맞는 것일까 하는 의심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리고 받아 놓은 퇴사 희망 신청서에 들어 있는 퇴사 사유들도 난 솔직히 납득이 되지가 않았다.

직무가 적성에 맞지 않는다.

자기 계발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너무 부족한 거 같다.

회사가 요구하는 업무량에 비해 보상이 만족스럽지 못하다….

허허….

정말 딴 세상에 와 있는 기분이다.

퇴사를 희망하는 직원들에게 굳이 퇴사 사유를 문서로 요청하는 지금의 기업 문화도 적응이 안 될뿐더러, 보상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노골적이지만, 결국은 솔직하다고 봐야 할 직원들의 사고방식도 적응이 안 된다.

무엇보다 회사는 이렇게 퇴사 사유를 알려 주길 요청까지 하면서, 왜 그 사유를 취합해서 직원들이 느끼는 불만을 개선하지 않는 거지?

이런 걸 퇴사 희망자들에게 묻지 않았다면 모르겠지만, 묻는다는 거 자체가 퇴사자들이 근무하며 느낀 불만, 아쉬운 점들을 통해 문제점을 파악하고 개선을 하겠다는 의지일 것 아닌가.

정 대리가 챙겨 준 자료를 다 확인을 하고 나니까, 어느덧 11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오늘은 아침 미팅이 없나?

정신을 차리고 옆을 쳐다보니, 정 대리가 자리에 없었다.

“정 대리 어디에 갔어요?”

“부장님 호출로 미팅 들어갔습니다.”

HRD팀 쪽을 보니, 역시나 박종근 과장도 자리에 없었다.

“그럼 홍 주임.”

“네, 과장님.”

“내가 부탁 하나만 합시다. 근속 연수 2년 이상 되는 직원들의 이력서를 좀 찾아봐 주세요.”

“모두요?”

“네, 모두. 전 부서.”

“…….”

“너무 많나요? 시간이 오래 걸릴 거 같아요?”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바로 그때 부장 미팅을 끝내고 정 대리가 자리로 돌아왔다.

“근속 연수 2년 이상 되는 직원들의 이력서는 뭐 때문에 찾으시는 겁니까?”

다행이다.

고작 며칠일 뿐인데, 확실히 정 대리가 돌아오니까 마음이 편해진다.

“퇴사 희망 신청서, 그리고 그들이 입사할 때 이력서를 보니까, 공통점이 확실하네요. 그 말은 2년 이상 근속을 하고 있는 직원들에게서도 공통점이 분명 나올 거란 뜻 아니겠습니까?”

당연한 걸 말했을 뿐인데, 뭘 이렇게 놀라는 표정을 짓는 거지?

“왜요?”

“아, 아닙니다. 그렇… 네요.”

“당연한 거 아니에요?”

“…….”

“에이, 한 기업의 인사, 그 안에서도 채용, 고용을 다루는 HRM팀 대리씩이나 되는 사람이 조기 퇴사자 수치가 높아진다고 그렇게 걱정을 하면서 그 정도 의심도 못 해 보고 있었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죄송합니다.”

뭘 또 죄송하단 말까지 하고 그러나.

내가 지금 정훈이 이놈의 몸으로 정 대리에게 업무에 관한 지적을 한다는 거 자체가 모순인데.

“근속 연수 3년 이하, 2년 이상 되는 직원들 위주로 그 사람들의 이력서를 좀 준비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팀 미팅 안 합니까?”

“네, 안 그래도 해야 합니다.”

“그거 미팅하고 준비해 주셔도 됩니다.”

“네.”

* * *

오후 근무 시간이 시작됐을 때였다.

정 대리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과장님.”

“네.”

“아침 미팅 전에 저한테 요청하셨던 자료 있지 않습니까.”

“네, 준비됐습니까?”

“준비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뭐지?

혹시 내가 봐선 안 되는 내용이라도 있는 건가?

“과장님께서 직접 한번 찾아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제가요?”

“네, 그렇게 안 어렵습니다. 제가 컴퓨터로 업무 자료 찾는 법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대신 찾아 드리는 건 금방 하는데, 그것보다는 과장님께 자료 찾는 법을 알려 드리는 게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아….”

“그것만 배우시면, 굳이 다른 사람한테 자료 좀 찾아 달란 부탁을 하실 필요도 없고, 바로바로 필요하실 때 찾아서 보실 수 있거든요.”

생각보다 간단했다.

아니면 원래라면 간단한 게 아닌데, 정 대리가 간단하게 잘 가르쳐 준 거거나.

“정 대리, 갑자기 궁금한 게 생겼는데요.”

“네.”

“나한테만 이렇게 친절한 거예요, 아니면 다른 회사 사람들한테도 다 이렇게 친절한 거예요?”

그 말에 정 대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때도 한번 말씀드렸다시피 회사 직원들의 직장 내 고충과 애로 사항을 접수하고 문제점들이 해결될 수 있도록 돕고 조치를 취하는 게 인사부, 그 안에서도 우리 HRM팀의 역할입니다.”

내가 싱긋이 웃어 보이자, 정 대리도 함께 미소를 지으며 말을 끝맺었다.

“모든 직원에게 다 친절할 순 없겠지만, 최소한 제게 애로 사항을 말하고 도움을 부탁하는 직원이 있다면 당연히 제 일처럼 생각하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죠. 그게 꼭 과장님이 아니더라도요. 전 HRM이니까요.”

“멋지네요.”

“아닙니다.”

“내가 멋지다는 표현을 쉽게 쓰는 사람은 분명 아니었을 겁니다.”

“…….”

“내가 멋지다고 하면 진짜 멋진 거예요. 믿으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2년 이상 근무한 직원들의 이력서들을 확인하며, 그들이 가진 공통점들을 확인하고 있을 때였다.

이번에도 만만한 게 정 대리, 바로 옆에 앉아 있는 게 정 대리였기에 정 대리에게 물어봤다.

“정 대리는 이 회사에 입사할 때 스스로 인사부에 지원을 했던 겁니까, 아니면 차출이 됐던 겁니까?”

“입사할 때 특채나 경력직 빼놓고는 부서 지원이라는 게 없습니다.”

이제야 알겠다.

현재 재경모직이 가지고 있는 인사의 문제점을….

“아, 그래요?”

“네, 다 공채로 뽑아서 연수 기간 동안의 평가, 인적성 검사 결과를 통해 배정을 받는 거죠.”

“정 대리는 평가 점수가 좋았나 보네요? 아무래도 전략 기획, 재무, 인사 쪽은 선발 기준이 높을 거 아닙니까.”

“운이 좋았던 거 같습니다.”

“인사부 업무가 정 대리 적성에는 맞습니까?”

“적성이요? 음… 이젠 그런 걸 따져 볼 타이밍을 놓쳤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어째서요?

“입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설레고, 기뻤던 기간 2주, 그 2주 뒤부터는 연수 끝나고 본격적으로 부서 분위기 파악을 3달 정도 해야 했습니다.”

난 고개만 끄덕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부서마다 조금씩의 차이는 있겠지만, 신입에게 바로 업무를 주는 경우는 거의 없거든요.”

“그렇겠죠.”

“그리고 그 뒤부터는 업무 파악에 정신이 없죠. 그렇게 2, 3년 정도 정신없이 일을 하다 보면 중간에 주임, 책임… 이렇게 작은 승진이 몇 번 이뤄집니다.”

“네.”

“그땐 이미 적성에 대한 고민을 해 보기에 늦은 거죠. 하하하. 근데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내가 정 대리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요 며칠 그래도 정 대리랑 회사 안에서는 거의 딱 붙어 있었잖아요?”

“네, 그러셨죠.”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정 대리에게 잘 어울린단 생각이 들어서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계속 띄워 주십니까? 저 어지럽습니다, 하하하.”

띄워 주겠다고 하는 말… 맞다.

오늘 하루 종일 퇴사 희망자들, 2년 이상 근속하고 있는 직원들의 이력서를 쭉 훑어보니까, 정 대리 정도면 충분히 띄워 줘도 될 만한 괜찮은 인재가 맞는 거 같으니까.

“일 잘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는데, 그걸 정 대리가 가지고 있는 거 같아요.”

“그게 뭡니까?”

“자기가 알고 있는 내용을 다른 사람들한테 설명을 쉽게 잘해 준다는 겁니다.”

정 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자기 말을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업무의 본질,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면, 그 내용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쉽게 설명을 해 주기가 참 어렵거든요. 저한테 컴퓨터로 자료를 찾는 법을 쉽게 알려 줬던 것처럼 말이죠.”

“…….”

“제 할아버지, 그러니까 손중길 회장님은 그러셨다고 합니다. 뭔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혹은 회사에 큰 변화를 줘야 할 일이 생길 땐 꼭 회사 임원들이 아닌 회사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제 할머니께 제일 먼저 사업 설명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건 어째서죠?”

“제 할머니는 항상 집에서 할아버지의 내조만 하신 분이지, 평생을 사회생활이라는 걸 안 해 보신 분이거든요. 그런 할머니가 한 번 듣고 이해를 할 정도로 설명을 할 수 있으면, 그 사업은 모두를 이해시킬 수 있는 사업이라고 생각을 하셨다고 합니다.”

“아….”

“카톡, SNS, 컴퓨터 활용… 이 모든 게 정 대리에겐 너무나 쉽고 당연한 것이겠지만, 지금의 나한테는 아니거든요. 그런데 내가 정 대리 덕에 너무 쉽고 빠르게 잘 배웠어요. 고마워요.”

모니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려놓고 정 대리에게 다시 물어봤다.

“아 참, 저는 신입 사원 교육을 따로 받았습니까?”

“과장님이요?”

“네.”

“음… 아니요, 따로 안 받으셨습니다.”

“그렇군요. 네, 알겠습니다. 업무 보세요.”

* * *

2년 이상 근속을 하고 있는 직원들의 이력서를 다 확인한 뒤, HRD팀의 파티션을 넘어갔다.

“박 과장님.”

박종근 과장.

정 대리한테 물어보니까, 나이는 서른일곱, 아직 결혼을 안 하고 혼자 살고 있다고 했다.

업무 능력은 인사부 안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뛰어나다고 한다.

업무 능력이 뛰어난 만큼 차가운 구석도 많아서, 자기 HRM팀 팀원들뿐 아니라, 우리 HRM팀 팀원들까지도 박종근 과장을 어려워한다고 정 대리가 설명을 해 줬다.

무리도 아니다.

어제 인사부장 자리에서 내게 인사의 원칙을 말할 때 보니까, 성격이 있는 건 분명하다.

“네, 과장님. 어쩐 일로….”

“제가 뭘 좀 요청할 게 있어서요.”

“네,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정 대리한테 듣자니까 곧 하반기 공채 기간이라고 하더라고요. 아침에도 그거 때문에 부장님 미팅이 열렸던 거라고 하던데….”

“네, 앞으로 한 달 정도 남았습니다.”

“그때부터 접수 공지를 올린다는 거죠?”

“네, 그렇죠. 그런데 자세한 부분은 제가 아니라 정 대리한테 물어보시는 게 훨씬 더 정확할 겁니다. 채용은 HRM 영역이니까요.”

“네, 저도 그 정도는 알고 있는데, 공채 일정 관련된 걸 물어보려는 게 아니라 신입 사원 연수 때 쓰는 교육 자료를 좀 받아 보고 싶어서요.”

“교육 자료요?”

“네, 신입 사원 연수 기간 동안 어떤 교육이 어떤 식으로 진행이 되는지, 교육 내용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그런 걸 좀 미리 보고 싶습니다.”

박 과장은 자신의 인중을 손가락으로 긁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직원들 교육 부분은 저희 HRD의 영역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아니까 과장님께 요청을 드리는 거 아닙니까.”

“저희 쪽 자료를 왜 과장님이 보시겠다고 하는 겁니까?”

그 말에 HRD 팀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얼어붙기 시작했다.

이게 이렇게까지 저항을 받을 만한 요청일까?

세상 좋아졌네.

내 말 한마디면 그룹 전체가 움직이던 자리에만 앉아 있다가, 이만한 일로 일개 부서 과장의 저항을 받고 있자니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그런데 또 생각해 보면 내 말이라면 무조건적으로 네, 네 하는 인사부장이나, 내 앞에서만 실실거리고 뒤에선 얼굴 표정을 바꿀 것만 같은 김 차장보다는 이렇게 자신의 확실한 강단을 보이는 박 과장이 조금은 더 기특해 보이기도 하고….

“그게… 문제가 되는 걸까요?”

“상대가 과장님이기 때문에 문제로 삼기가 애매하긴 하지만, 원칙대로라면 문제가 될 수도 있는 부분입니다.”

“상대가 저이기 때문이라는 말은… 흠… 쩝,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내가 지금 무슨 중요한 대금 정산서를 보자고 하는 것도 아니고, 이 회사 직원이라면 모두가 다 듣는 교육 내용을 좀 보자고 하는 건데, 전 그게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과장님 말씀이 이해가 잘 안 되네요.”

그에 박 과장은 갑자기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려 한숨을 내쉰 다음 그곳 민은석 대리에게 교육 자료를 뽑아 오라고 지시했다.

“후… 네, 알겠습니다. 민 대리, 신입 사원 교육 자료 한 부 뽑아 드려.”

“…네.”

소신대로 자신의 역할을 해내려고 하는 부분이 기특하긴 기특한데… 그래도 좀 받치네?

내가 손을 들어 민은석 대리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 박 과장에게 말했다.

“잠시만요.”

박 과장은 내가 왜 민은석 대리를 멈춰 세웠는지 모르겠단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왜 그러십니까?”

“박 과장님, 혹시 저한테 무슨 감정 있습니까?”

사무실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팽팽해지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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