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 아들이잖아요
“아뇨, 그런 거 없는데요?”
박 과장의 대답으로 사무실 분위기는 한층 더 험악해졌다.
이거 지금 아무리 봐도 박 과장 이 친구가 날 상대로 작정을 한 거 같은데?
도대체 뭐지?
왜 이러지?
설마 어제 그 일 때문에 그러는 건가?
에이, 설마.
나 손중길인데?
뭐 내가 손중길인 건 모르겠지만, 그래도 최소한 지금 내 모습이 내 손주 놈, 이 회사의 현재 회장 아들이라는 건 알 거 아닌가.
그런데도 이렇게 작정하고 꼬투리를 잡는다고?
내가 지금 나도 모르게 실수를 하고 있는 건가?
고작 신입 사원 교육 자료를 보여 달라고 하는 게, 이 시대에선 해선 안 될 요청인 걸까?
“신입 사원 교육 자료… 그걸 좀 보자는 게 혹시 보안상 문제가 되는 겁니까?”
그럴 리가 없잖아.
어떻게 신입 사원 교육 자료가 보안상의 문제가 될 수 있겠나.
나의 물음에도 박 과장은 대답을 삼키고 있었다.
“진짜 몰라서 물어보는 겁니다. 혹시 보안상 문제가 되는 건데, 제가 그런 것도 모르고 무리한 요구를 한 거라면 사과를 드리려고요. 신입 사원 교육 자료를 보자는 게 원칙상 보안상 문제가 되는 겁니까?”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런 건 아니다?
이 친구가 지금 날 상대로 한번 놀아 보자는 건가?
“그런 게 아닌데 왜 원칙대로라면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던 겁니까?”
“어제 과장님께서 제게 말씀하신 대로 그 부분은 과장님이 월권을 하고 계시는 거니까요?”
“월권? 무슨 월권이요?”
어제 그 일 때문에 이러는 거라고?
간이 큰 놈이라고 봐야 하는 걸까, 아님 생각이 없는 놈이라고 봐야 하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다고 의심을 해 봐야 하는 걸까?
그런 거 다 떠나서 이 친구 이거… 왜 날 생각하게 만들지?
내가 딱 질색을 하는 게 이런 쓸데없는 일 가지고 생각을 하는 건데, 그걸 지금 내게 하게 만들고 있다.
혼을 좀 낼까?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신입 사원 교육 부분은 저희 HRD 영역입니다. 그걸 왜 보여 달라고 하시는 겁니까?”
“어제부터 그놈의 원칙, 영역… 아, 씨… 진짜 짜증 나네?”
“네?”
“짜증 난다고요.”
분위기가 걷잡을 수 없이 험악해지자, 김 차장이 조심히 다가와 나와 박 과장 사이를 갈라놓으며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왜 그래, 박 과장. 손 과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아니, 별일 아닙니다. 그냥 박 과장님하고 이야기 좀 하고 있었습니다.”
김 차장을 옆으로 비켜 있게 만들어 놓고 박 과장에게 말했다.
“진짜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사람 원칙 따지게 만드시네. 그 원칙, 한번 제대로 따져 볼까요?”
“무슨 원칙 말입니까?”
“박 과장님이 좋아하는 원칙 말입니다. 공채 공지까지 앞으로 한 달 정도 남았습니다. 맞습니까?”
내 말에 박 과장은 여유롭게 고개까지 끄덕여 가며 대답을 했다.
“네, 방금 이야기를 나눴던 내용인 거 같습니다.”
“그럼 우리 HRM팀은 리크루팅 범위를 잡아야 합니다.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그럼 저는 접수된 서류들을 분류 심사하는 총괄을 해야 합니다. 그것도 맞습니까?”
“네.”
“그리고 제가 이 회사의 직원인 것도 맞습니까?”
“…네?”
“제가 이 회사의 직원인 것도 맞느냐고요.”
“…네.”
“그런데 리크루팅 범위를 잡고, 접수된 서류 분류 심사를 총괄해야 하는 저는 아직 이 회사 신입 사원 교육을 못 받았습니다.”
“……!”
박 과장은 두 눈만 깜빡거릴 뿐, 눈 외의 모든 신체에 마비가 온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버렸다.
“그렇게 원칙을 좋아하시는 분이 왜 저를 상대로는 신입 사원 교육을 안 해 주셨습니까?”
“그야….”
“제가 안 받겠다고 했습니까?”
“…….”
“그랬다고 해도 받게 만드셨어야죠, 그게 원칙이라면. 어쨌거나 저도 아직은 신입 사원 아닙니까, 과장 직책을 떠나서. 입사한 지 6개월밖에 안 됐잖아요.”
잘됐다.
이참에 내가 누군지, 내 성깔이 얼마나 고약한지를 부서 사람 모두에게 보여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 같다.
그러게 왜 사람이 좋게 좋게 가려고 하는데, 발을 거냐고, 이 사람아.
“아, 재경모직은 과장 직함 달고 있으면 신입도 신입이 아닌 게 되는 회사입니까? 과장이니까, 아예 신입인데도 그냥 바로 경력직으로 분류를 하고 회사 문화, 조직 문화에 아무런 이해가 없는 사람도 곧바로 업무만 하게 만드나 봅니다?”
“…….”
“대답해 보세요. 그런 건데, 제가 모르고 있었던 걸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저는 신입 사원 교육을 안 받아도 되는 존재였습니까? 원칙 상관없이 예외로? 그러면 제가 그런 존재라면 최소한 제 앞에선 원칙 이야기를 하면 안 되는 거죠. 모든 걸 예외로 해 줘야지. 그럼 나야 좋지. 편하고. 안 그래요?”
“…….”
“그리고 그런 존재가 아니라면 원칙대로 신입 사원 교육을 해 주셨어야 맞는 거고. 그나마 공채 공지 올리기 전, 여유가 있을 때 신입 사원 교육 자료를 미리 확인하고 공부 좀 하겠다는 건데, 그게 왜 원칙대로 해서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겁니까?”
“그건 이제….”
“이러이러해서 교육 자료를 좀 보고자 합니다!”
나는 꽥! 하고 소리를 질렀다.
“라고 제가 말을 했더라면 이런 언쟁은 불필요했겠지만, 그 전에 HRM 영역이니, HRD 영역이니 하면서 쓸데없는 역할 나누기를 하면서 먼저 듣는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 건 과장님입니다. 오는 반응이 개똥 같은데, 어떻게 가는 대응이 꽃 같을 수 있겠어요?”
입맛을 다셔 놓고 박 과장이 내게 사과를 했다.
“네, 그 부분은… 제가 실수를 했네요. 죄송합니다.”
“나는, 아니, 저는 그냥… 우리끼린 편하게 갈 수 있는 건 편하게 갔으면 합니다. 월권을 하겠다는 게 아니라, 요청을 했던 겁니다. 제가 실례되는 걸 요청한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같은 인사부 식구들끼리 너무 퍽퍽하게 그러지 마세요.”
“…….”
“민은석 대리 맞죠?”
“네, 과장님.”
“준비 좀 해 주세요. 교육 내용을 알아야 리크루팅을 총괄해야 하는 제가 현재 이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상을 파악할 수 있을 거 아닙니까.”
* * *
망 과장이 자리를 벗어난 후, 김원호 차장은 박종근 과장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물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아뇨… 별일 아닙니다.”
“별일 아니긴. 지난 6개월 동안 망 과장 목소리가 내 자리까지 들어온 건 오늘이 처음이야. 뭔데 둘 다 그렇게까지 흥분을 했어?”
혀끝으로 마른 입술을 적셔 놓고 박종근 과장이 말했다.
“제가… 실수를 했네요.”
“실수?”
“네, 그동안 손 과장이 사무실에서 해 왔던 눈꼴사나운 짓 때문에 쌓여 있던 게 어쩌다 보니 살짝 터졌는데, 터지면 안 되는 타이밍에서 터졌네요. 우습게 됐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도대체?”
“신입 사원 교육 자료를 좀 보여 달라고 하던데, 생각해 보니까 그냥 보여 주면 되는 거였는데, 괜히 한번 저항을 해 보고 싶었던 거 같아요.”
“신입 사원 교육 자료? 그걸 왜 보여 달래?”
“뭐 볼 게 있으니까 보여 달라고 했던 거겠죠. 자기는 신입 사원 교육을 안 받았다고 합니다.”
“망 과장이 그걸 왜 받아?”
“원칙대로라면 받아야죠. 엄밀히 말하면 손 과장은 특채 아닙니까. 신입 사원 교육 과정에 공채, 특채 구분이 어디에 있습니까. 다 받아야지.”
“또 그놈의 원칙… 그렇게 살면 안 피곤하냐?”
“익숙해지면 이게 훨씬 더 편합니다. 그러라고 있는 게 원칙인 거고. 아무튼… 쩝, 제가 어이없는 실수를 했네요. 손 과장이 아니라 제 실수였습니다. 사무실 분위기 어색하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김원호 차장은 아무래도 요 며칠 망 과장의 행동이 수상했다.
그래서 HRD팀 파티션을 나오면서 곁눈질로 HRM팀의 분위기를 살폈다.
망 과장은 자리에 없었다.
얼른 정 대리를 불러, 같이 담배나 한 대 피우러 가자고 김 차장이 꼬셨다.
“씁… 후우….”
담배 한 모금을 길게 빨아 연기를 내뿜은 후 김 차장이 말했다.
“근데 쟤 왜 일 열심히 해?”
“네?”
“망 과장 말이야. 아무래도 이상하잖아.”
“또 뭐가요?”
“조금 전에 HRD에서 있었던 일 봤지?”
“네.”
“이 정도면 꼬장이 확실하다고 봐야 되는 거 아니야?”
그에 정 대리는 망설임 없이 망 과장의 편을 들었다.
“조금 전 그 일은 누가 봐도 박 과장님이 실수하신 거죠.”
“너까지 왜 그래?”
“아뇨, 객관적으로 봐도 박 과장님이 실수를 하신 게 맞습니다. HRM 영역, HRD 영역… 그렇게 영역을 확실히 나누는 건 그분 스타일이니까 그렇다 해도, 그렇게 영역을 확실히 나눌 거면 저희 쪽으로 이번 리크루팅 진행할 때 서류 심사 기준을 좀 올려 보라는 참견은 안 해야 정상이죠. 내로남불도 아니고, 아까는 누가 봐도 손 과장님이 뭔가 실수를 하기만을 기다렸다가 한번 물어보겠다고 한 시도가 역관광이 된 상황이었어요.”
“야, 그건 지난 공채 기수 애들 상태가 너무 엉망이었으니까 그런 거지.”
“그게 어디 꼭 저희 쪽 무능입니까? 저희는 서류 분류 심사만 하는 거 아닙니까. 1차 면접 때야 과장이 참석하지만, 최종 면접은 다 위에서 하는 거고. 합격자들 연수하는 동안 이뤄지는 평가는 결국 HRD의 역할이잖아요. 결국 그 평가 점수대로 부서 발령이 나는 거고, 그 뒤부터는 부서 사람들 간의 일인 건데, 그걸 아까 미팅 자리에서 리크루팅의 문제였다는 식으로 말을 하는 건 문제가 있는 거죠.”
“너 뭐냐?”
김 차장이 미간을 찡그리며 정 대리를 쳐다봤다.
“뭐가요?”
“너 왜 어제부터 자꾸 망 과장 편들어?”
“왜요? 섭섭하십니까?”
“씨… 이럼 내가 망 과장 씹는 맛이 안 나잖아. 확실히 망 과장 라인 한 번 타 보겠다 그런 거야?”
“아, 그런 거 아니라니까 왜 자꾸 그러세요?”
“아닌 게 아닌데? 진짜 이상하잖아. 지난 6개월 동안 출근해서 아무것도 하는 것 없이 시간만 보내다가 집에 가던 인간이 어젠 갑자기 안 하던 일을 하고, 오늘은 그 일을 열심히 해. 그럼 내가 아니라 네가 당황을 해야 정상 아니냐?”
“하고 있습니다. 뭘 잘못 먹었나 싶기도 하고.”
“그지? 뭘 잘못 먹은 거 같지? 맞아. 그거 말고는 없어. 그게 아니라면 이건 진짜 작정을 하고 우릴 먹이겠다고 이러는 건데….”
정 대리는 그저 속으로만 웃으며 표정은 딱딱하게 만들어 놓고 말했다.
“제가 봤을 땐 우릴 먹이겠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지금부터는 자기 밥값을 하겠다고 그러는 거 같은데요?”
“자기 밥값?”
“어쩌면 우릴 먹이는 건 지금이 아니라, 지난 6개월간 꾸준히 먹여 왔던 걸 수도 있잖아요.”
“그게 무슨 말이야?”
“그동안 간을 본 걸 수도 있지 않냐는 말이죠. 부서 분위기 파악. 회장 아들이잖아요.”
“…….”
“아닐 수도 있고.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잠시 후 김원호 차장과 정현수 대리가 은밀한 부서 이야기를 끝마치고 흡연 공간을 빠져나갔을 때였다.
한쪽 귀퉁이 쪽에서 그 둘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던 고성표 인사부장이 그제야 입에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이며, 천천히 걸어 나왔다.
고성표 부장은 불을 붙인 담배를 깊게 한 모금 빤 다음, 그 연기를 천천히 내뿜으며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