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도면 설명이 될까?
내게 이 몸의 주인이 손정훈이라는 것과 재경 그룹의 둘째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려 준 여자.
그 여자가 이 시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유명 연예인이다?
“그렇단 말이지?”
정 대리와 간단하게 술 한잔을 함께하고 집으로 돌아와 곧바로 채서린에 대한 검색을 시작해 봤다.
그리고 카톡으로 그녀와의 대화 내용이 있는지를 확인해 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정훈이 놈 주위의 불필요한 인맥이라 보이던 것들은 모두 삭제, 차단을 했는데 채서린은 내가 지우지 않았다.
정말 소중하게 챙겨야 할 회사 직원들은 노예 1, 2, 3… 이렇게 저장을 시켜 놓았던 놈이 채서린의 이름은 ‘서린이’라고 정확하게 저장을 시켜 놓았다는 게 참 우스웠다.
내가 채서린을 카톡에서 삭제, 차단시키지 않았던 이유도 떠올랐다.
모든 카톡 대화 내용을 꼼꼼하게 살펴봤는데, 그중에서도 채서린과의 대화 내용은 어딘가 모르게 정훈이 놈이 끌려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어쩌면 정훈이 놈에게 꽤 중요한 사람, 혹은 정훈이 놈이 어렵게 대하는 상대일 거란 생각으로 차단을 시키지 않고 남겨 놓았다.
정훈이 놈과 채서린의 관계는 꽤 오래전부터 유지가 되고 있었다.
분명 정훈이 놈이 연락을 먼저 주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지만, 때론 이 아가씨가 정훈이를 먼저 찾는 경우도 분명 있었다.
그럴 때마다 정훈이 놈은 열일을 제쳐 두고 채서린을 만났고, 이 둘의 만남은 거의 대부분이 호텔방에서 이뤄졌다.
그날 호텔방에서 채서린이 먼저 방을 빠져나가며 내게 했던 말을 기억해 보자면… 채서린은 뭔가 물질적 목적을 가지고 정훈이와 만남을 유지하고 있는 게 아닐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고 하기엔 말투에서부터 정훈이를 얕잡아 보는 경향이 강했다.
“내가 가끔씩 이렇게 일탈처럼 오빠를 만나는 건 말 그대로 그냥 일탈이야. 다른 스폰이 필요한 애들처럼 오빠한테 뭔가를 바라고 만나는 게 아니라.”
채서린이 날 정훈이로 보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일탈?
채서린에게 정훈이는 그저 일탈일 뿐이었단 말이지?
그런데 그 일탈이 너무 길잖아.
이 역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최소 2년 이상은 그러한 만남이 유지되었던 걸로 보인다.
카톡 기록을 거슬러 올라가니, 최소 2년 이상은 그렇게 호텔방에서 이뤄지는 은밀한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던 걸로 나왔다.
잘됐다.
일탈만큼 솔직할 수 있는 관계도 없지.
그리고 그런 일탈만큼 솔직하면서 비밀이 필요한 관계가 어디에 있을까.
회사 안에서는 정 대리를 통해 많은 도움을 받고 있지만, 사실 정 대리를 통해 정훈이 놈의 원래 모습을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난 최대한 정훈이 놈이 채서린과 주고받은 카톡 문자 형식을 흉내 내며 문자를 보내 보았다.
―언제 시간 돼? 문자 보면 답장 줘.
이렇게 보내 놓으면 시간 날 때 답장을 주든지 하겠지.
* * *
채서린에게서 답장이 온 건 다음 날 오후 2시가 넘어서였다.
카톡!
―새벽 촬영 마치고 뻗어서 이제 일어났어.
지난 카톡 대화 내용을 보면 항상 이런 식으로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다.
정훈이 놈이 연락을 먼저 보내 놓으면 항상 다음 날이나, 아님 며칠 정도가 지나서 답장이 오는데 거의 대부분이 답장이 늦은 이유를 해명하는 식으로 대화가 시작된다.
그리고 놀랍게도 채서린의 답장이 오는 날, 만남이 이뤄진다.
―오늘 시간 돼?
―노 스케줄. 오빠는?
―나도.
―잘됐네. 간만에 노 스케줄인데 만날 사람도 없고 혼자 집에서 뭐 할까 고민 중이었거든.
채서린이 이런 식으로 대답을 하면 정훈이 놈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지난 대화를 통해 다 준비를 해 놨다.
―호텔 잡고 톡 보낼게.
―너무 멀리 있는 데는 잡지 마.
―지난번 호텔은 어때?
―그래라. 거기가 괜찮더라.
이 둘의 만남은 마치 미국 첩보 영화를 연상케 한다.
우선 정훈이 놈이 호텔 객실을 잡는다.
객실을 잡고 방 카드 두 개를 받으면, 하나는 지하 주차장에 세워 둔 차 앞바퀴 위에 조심히 올려놓는다.
그리고 사진을 찍는다.
차가 있는 위치.
그걸 찍어서 카톡으로 보내 놓으면, 채서린이 방 카드를 챙겨서 객실로 올라온다.
오후 5시가 조금 넘어서 채서린이 호텔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때처럼 검은색 모자, 선글라스, 그리고 마스크로 자신의 얼굴을 완벽하게 가리고 있었다.
쓰고 있던 모자와 마스크를 동시에 벗은 후, 선글라스까지 아무렇게나 벗어 현관 쪽 가구 위로 올려놓고 채서린이 안으로 들어왔다.
아주 큰 가방을 옆으로 매고 있었다.
날 보고도 아무런 말 없이, 그저 매고 온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침대 쪽으로 걸어간 그녀는 “뭐 좀 시켜서 먹을까? 나 아직 한 끼도 못 먹었어.”라고 말하며 아주 익숙하게 침대 위로 올라가 노트북을 열었다.
무릎 위로 노트북을 펼쳐 놓고 영화 같은 걸 재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보면서 다시 내게 물었다.
“뭐 좀 먹자고.”
“먹는 건 조금 이따가 하고, 오늘은 내가 그쪽한테 뭘 좀 물어보려고 만나자고 했어.”
내 말에 두 눈을 깜빡거리며 채서린이 말했다.
“그쪽?”
“괜찮으면, 이쪽으로 좀 와 줄래?”
난 내가 앉아 있는 소파 자리를 눈짓하며 채서린을 불렀고, 그런 날 잠시 쳐다보다가 피식 웃으며 채서린은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려 건성으로 날 상대했다.
“뭐야? 그날 나 나갈 때부터 그러더니, 왜 자꾸 컨셉 이상하게 잡아? 하지 마, 재미없어.”
그러더니 다시 날 잠시 쳐다보고는 “룸서비스 좀 시켜.”라고 말했다.
“먹는 건 조금 이따가 하라니까?”
날 빤히 쳐다보며 채서린이 말했다.
“내가 분명 그날도 말했어. 재미없다고, 하지 말라고.”
“…….”
“왜 평소 안 하던 행동을 해?”
“나는 평소 그쪽이 하지 말라고 하는 건 안 하고, 그러는 사람이었나?”
결국 보고 있던 노트북을 반으로 접어 놓고, 채서린이 침대에서 일어섰다.
마치 조금 전 풀었던 짐을 다시 가방에 챙겨 넣으려는 모습이었다.
“안 되겠다.”
“…….”
“급피곤해지네. 안 그래도 피곤한 것투성인데, 가끔씩 만나서 스트레스 푸는 상대까지 날 피곤하게 만들면 안 되는 거잖아.”
“그런 사람이 맞았던 모양이네.”
“뭐?”
“그쪽이 하는 걸 가만히 보니까, 분명 건설적인 관계는 아니었던 거 같고, 그렇다고 일방적인 관계는 아니었겠지만, 분명 그쪽과 나는 균형이 안 맞는 관계였던 거 같네.”
“그 말투 정말 거슬리네. 언제까지 할 건데? 계속할 거면 나 그냥 가고.”
정말 나갈 것처럼 자기 짐을 챙기는 시늉을 하다가, 잔뜩 피곤한 얼굴로 날 쳐다보며 채서린이 말했다.
“그리고 떠보는 거라면 내가 확실하게 말해 줄게. 그런 관계 맞아. 왜 알면서 확인을 해? 상처 받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
“서로 부담을 느껴야 하는 관계, 책임이 필요한 관계라면 시작을 안 할 거라고 분명히 말을 했어. 오빠도 그런 걸 더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이제 와 아닌 모양이네?”
“내가 지금 그런 내용을 좀 자세히 알고 싶어서 그쪽을 만나자고 한 거야.”
내 말에 채서린은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하는 거 같았다.
“오빠, 어디 문제 있어? 가만히 보니까… 뭔가 이상하네? 사람이 좀… 변한 거 같아.”
“그 전에 하나만 더 물어볼게. 나와 이런 관계를 가끔씩 가진다는 걸 그쪽 주위에 아는 사람이 있나? 앉아서 할까? 그래, 앉아서 이야기하지.”
“뭐야, 진짜? 갑자기 왜 이렇게 낯설어?”
난 내가 앉아 있는 소파 맞은편 자리를 다시 한번 채서린에게 눈짓으로 권했고, 곧 채서린도 얼떨떨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날 마주 보고 앉았다.
“대답부터 듣고 시작하지. 나와 이런 관계를 가끔씩 가진다는 걸 그쪽 주위에 아는 사람이 있나?”
“있을 리가. 나 연예인이야, 오빠. 이런 관계를 내가 내 입으로 떠벌리고 다닐 리가 없잖아. 지금 나 떠보는 거지? 여보세요, 손정훈 씨. 그쪽보다 내가 더 조심해야 할 게 많은 사람이야. 나랑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나도 그렇게 생각을 해. 그래서 그쪽이라면 내가 안심하고 뭘 좀 물어볼 수 있겠다 싶었던 거고.”
“…….”
“내가 지금 기억이 없어.”
“기억이… 없어? 그게 무슨 말이야?”
차라리 기억이 없다는 게 제일 편한 핑계다.
“말 그대로. 이틀 전 그쪽이랑 이 방에서 헤어졌잖아. 그때부터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고, 뭔가가 상당히 혼란스러워.”
내 말에 채서린은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날 호텔에서 헤어질 당시를 기억해 내듯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다.
“어제 식사하면서 그쪽이 하고 있는 소주 광고 포스터를 보고, 그쪽이 연예계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어.”
입이 반쯤 벌려진 채로 날 쳐다만 보는 채서린.
“내가 평소 그쪽을 어떻게 불렀는지도 알 방법이 없어서 계속 그쪽이라고 부르는 거니까, 그 점은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
“진짜야? 장난치는 거 아니지?”
“내가 평소 이런 장난을 자주 치는 사람이었나?”
“아니, 아니니까 물어보는 거 아냐. 근데 장난이라고 해도 이 정도 메소드면 내가 인정을 할 수밖에 없겠는데? 재밌어, 오빠. 이 정도면 급재밌어.”
난 더는 이런 불필요한 확인을 계속 시켜 줄 수가 없어서 본론을 꺼냈다.
“방금 그쪽이 말하는 거 듣고 조금은 안심이 되는데… 서로 부담을 주는 관계, 책임을 져야 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말 말이야.”
“…….”
“그 말에 안심을 하면서 몇 가지만 좀 물어볼게. 진지하게 대답을 해 주면 고맙겠어. 내가 지금 꽤나 심각한 상태거든.”
채서린의 표정도 이젠 사뭇 진지해져 있었다.
“그 전에 잠깐만.”
채서린이 손을 들어 내 말을 막았고, 난 시간은 충분했기에 소파에 등을 기대어 앉아 먼저 이야기를 하라는 뜻을 보였다.
“몸에 그런 이상이 생겼으면 가족들한테 말을 하거나, 아니면 병원에 가서 도움을 받아야지, 왜 굳이 나한테 뭘 물어봐? 내가 뭘 안다고. 전혀 앞뒤가 안 맞잖아.”
“나에 대해 크게 아는 게 없다는 말인가? 그렇게 이해를 해야 하나?”
“이해가 안 돼서 물어보는 거야. 자, 입장을 바꿔 놓고 내가 갑자기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고 쳐. 그럼 나는… 아, 나도 이럴 수 있긴 하겠네.”
“아예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는 건 아냐. 다행히 내가 누구인지는 이제 알겠고, 또 가족들, 우리 집안… 그런 건 대충 알겠어.”
“해리성 기억 상실, 뭐 그런 거야?”
“그게 뭔지 난 잘 모르겠고, 그냥 좀 겁이 나.”
“겁? 무슨 겁?”
“회사 사람을 통해 좀 알아보니까 난 회사에서 안하무인, 망나니였던 게 틀림없어. 그리고 카톡으로 그동안 나와 연락을 주고받았던 사람들과의 대화 내용을 다 확인해 봤는데, 딱히 친구라고 할 만한 존재도 없는 거 같고, 있다고 해 봤자 다들 일종의 이해관계로만 얽혀 있는 관계 같더군.”
“…….”
“나 스스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날 아는 사람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거. 요 며칠 해 보니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야. 그렇다고 아무나 붙잡고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물어본다는 건 더 말이 안 되는 거 같고. 그런데 그나마 그쪽이 왠지 모르게 내가 마음을 터놓고 만남을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상대인 거 같더란 말이지.”
갑자기 헛웃음을 터뜨리며 채서린이 말했다.
“우와, 이게 뭐라고 순간 심쿵할 뻔했네.”
“심쿵? 그건 또 무슨 말이지?”
“조금 설레었다고. 고백하는 건 줄.”
“더 솔직하게 말하면 그쪽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 만큼 유명한 연예인이잖아. 우리 관계의 비밀을 위해서라도 나의 이런 상태를 떠벌리고 다닐 순 없겠단 생각이 들었어. 내 생각이 맞아?”
다시 한번 헛웃음을 터뜨리며 채서린이 말했다.
“기억이 안 나는 게 아니라 아예 사람이 바뀐 거 같은데? 그렇네. 아니네, 내가 아는 손정훈이. 내가 아는 오빠는 대화를 이렇게까지 계산적으로 이끌어 가는 사람이 아니지. 꼭 마치 우리 소속사 대표랑 작품 이야기하는 기분인데?”
은근히 걱정을 했는데, 믿기 시작한 눈치다.
“원래 오빠 성격이 이런 거였나? 근데 내 앞에선 일부러 아닌 척 숨겼던 거고? 충분히 그럴 수 있잖아. 나야 서로가 가볍게 만나는 상대였으니까. 나도 오빠 앞에서 내 진짜 모습을 보여 준 적은 거의 없거든.”
“지금의 나한테 그런 걸 물어보면 난 대답을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그렇겠네. 우와, 재밌다. 오빠 만나고 지금까지 중 오늘이 제일 재밌어. 오빠 잠깐만 있어 봐, 나 담배 좀 가져올게. 이거 완전 흥미진진한데?”
“호텔은 담배를 피워도 되나? 다른 곳들은 다들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면 안 되는 거 같던데.”
“전자 담배는 괜찮아.”
자리로 돌아온 채서린은 전자 담배라는 걸 뻐끔거리며 날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 나한테 평소 오빠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묻겠다는 거야?”
“그렇지.”
“그런 게 왜 궁금할까?”
“궁금한 건 당연한 거 아닐까?”
“당연한 건데, 그걸 나한테 묻는 건 당연한 게 아니지. 그냥 사람들한테 나 지금 이런 상태다… 라고 말하면 되는 거 아냐? 그럼 훨씬 더 쉽고 빠르게 오빠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을 텐데? 기억을 잃은 게 죄는 아니잖아. 그리고 오빠 집안이 어떤 집안인지도 알겠다며? 누구처럼 일 안 하면 안 되는 사람도 아니고, 나는 오빠가 굳이 나를 보자고 해서 이러는 게 이해가 안 되네?”
“지금 내 상태가 이렇다는 걸 다른 사람들한테 다 고백을 할 수 있을 거 같았음, 그쪽 말대로 내가 왜 그쪽한테 이런 걸 물어보겠어? 그쪽이 그쪽과 내가 가끔씩 이렇게 호텔방에서 만나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이라는 걸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나 역시 지금 내 상태가 이렇다는 걸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하고 싶은 거야.”
“그러니까 왜 그렇게 해야 하는 거냐고.”
“그쪽이 나와의 관계를 비밀로 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유겠지?”
“……?”
“왜 그쪽은 나와의 관계를 비밀로 해야 하지? 사람들이 알게 되면 그쪽이 잃어야 할 게 많기 때문 아냐?”
“……!”
“지금 내 상황도 비슷해. 이 이상의 설명은 힘들지만, 난 잃을 게 아니라 앞으로 내가 가져야 할 것들에 위협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야. 그래서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을 못 하는 거야. 이 정도면 설명이 될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