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싹 다 뜯어고칠 겁니다 (20/303)

싹 다 뜯어고칠 겁니다

갑자기 앉은 상태에서 상체만 내 쪽으로 살짝 숙이며 채서린이 말했다.

“우와, 근데 오빠 말 진짜 잘한다. 헐, 대박. 만약에 이게 오빠의 원래 모습이었고, 그동안 내 앞에서 아닌 척 연기를 했던 거라면 개소름인데?”

요즘 사람들은 말 앞에 개라는 접두어를 붙이는 걸 참 좋아하는 거 같다.

“내가 알고 싶은 건 그쪽이 알고 있는 손정훈이야.”

“계속 그쪽, 그쪽 하니까 그것도 좀 거슬리네. 이름 불러. 오빠 원래 내 이름 불렀어. 서린아, 그렇게.”

“서린이 네 앞에서 난 어떤 사람이었어?”

“이거 솔직하게 말해도 되는 거지?”

“그래 주면 고맙겠다.”

“등신.”

뭐라고?

“뭐? 등신?”

전혀 예상치도 못한 대답이 나와 버렸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응, 형에 대한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쳐 있는 등신. 등신 중에서도 아주 상등신이 따로 없었는데, 뭐랄까? 그냥 가만히 보고 있으면 어떤 부분은 나랑 닮은 구석이 많은 거 같아서 괜히 짠할 때도 있고, 좀 그랬어.”

“형에 대한 자격지심이라면 어떤 걸 말하는 거야?”

“형이 잘났잖아. 그건 알아? 오빠네 형 잘났다는 거.”

그건 월요일에 출근해서 정 대리에게 제대로 물어봐야겠다.

“솔직히 말하면 나야 잘 모르지. 나는 오빠네 형이라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으니까. 근데 나랑 같이 술 마시다가 좀 과하게 마셔서 취하기만 하면 형 이야기를 했어.”

“내가 너한테?”

정훈이 이놈이 정말 정신이 나간 놈이었구나.

이런 딴따라한테 술 마시고 집안 이야기를 다 흘리고 다니고….

“내가 그 이야기 듣기 싫어서 오빠 취할 때까지 못 마시게 했던 게 한두 번이 아냐.”

“어떤 식으로 내가 우리 형에 관한 이야기를 너한테 했어?”

“다 가진 사람이라고. 그래서 오빠를 너무 초라하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그리고 오빠는 그런 오빠네 형을 더 돋보이게 만드는 포지션만 하도록 태어난 사람이라고.”

다 가진 사람이다?

정태 놈이?

허, 허허….

제 아비를 도와 재경을 이딴 식으로 경영하고 있는 것만 봐도, 내 눈엔 부족해도 한참 부족한 놈인데, 아직 가져야 할 게 한두 개가 아닌 놈인데, 그런 정태 놈을 다 가진 놈이라고 생각을 해?

이런 머저리 같은 녀석을 봤나!

조만간 정태 놈을 만나 보긴 만나 봐야 할 거 같다.

하긴 화요일 저녁이면 정태 놈뿐 아니라 홍준이 놈, 장혜란이, 그리고 정태 놈 짝이라는 원수경까지 다 한 번에 볼 수 있긴 하다.

만약 정태 놈이 정훈이 이 녀석의 생각처럼 모든 걸 다 가지고 있는, 그런 자질이 있는 놈이라면 나에게 나쁠 게 뭐가 있을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난 정훈이 이놈이 생각하는 것만큼 정태 놈이 제대로 컸을 리가 없다고 본다.

하나 있는 동생이 회사 일을 안 배우고 있다면 모를까, 회사 일을 배우고 있는데도 이렇게까지 안하무인, 망나니처럼 생활하게 내버려뒀다는 거 자체가 재경의 다음 세대 주인이 되기엔 그 그릇에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내가 채서린이 한 말에 그나마 동의를 하면서 주목했던 부분은, 정훈이 놈이 정태 놈을 돋보이게 만드는 포지션만 하도록 태어난 사람이라고 본인 스스로를 평가했다는 부분이다.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동생의 망나니짓을 방치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런 게 아니고서야, 지난 6개월간 회사에서 정훈이 놈이 해 왔다던 행동들은 이해를 받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래서 오빠는 회사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젊음이라도 즐길 수밖에 없다고 그랬어.”

“…….”

“어차피 회사는 오빠네 형이라는 사람이 다 물려받을 것이고, 형이랑은 붙어 봤자 어차피 게임도 안 되는데, 그럴 거면 차라리 형한테 딱 붙어서 형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현명한 거 같다면서 말이지.”

“형이 시키는 대로?”

“형이 그냥 편하게 회사 다니라고 했다던데?”

역시.

“알아서 승진도 시켜 줄 거고, 회사 지분도 눈치껏 나눠 줄 거니까 형만 믿고 괜히 복잡한 회사 일에 관심 가지지 말고 회사는 그냥 다른 사람들 말이 안 나올 정도로만 요령껏 다니라고….”

참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고 있던 그때.

“근데 오빠도 다 알고 있었어.”

“뭘?”

“오빠네 형이라는 사람이 오빠에게 기회를 안 주려고 그렇게 오빠를 가스라이팅하는 거라는 걸.”

“가스라이팅?”

이거도 신문에서 읽어 본 기억이 있는 단어인데….

“일종의 세뇌라고 봐야지. 사람의 심리를 교묘하게 조종하는 거. 내가 봤을 때 오빠는 오빠네 형이라는 사람한테 아주 어릴 때부터 가스라이팅을 당해 왔던 거 같아. 그리고 오빠 스스로도 그걸 알고 있지만,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계속 그렇게 끌려가고 있었던 거 같고. 이건 내 생각이지만,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었어.”

“그… 래?”

“그런데 난 충분히 오빠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어.”

“어떻게?”

“나라도 오빠처럼 그렇게 했을 거야. 얼마나 축복받은 인생이야? 큰 욕심만 안 품으면 인생 자체가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을 만큼 귀족 한량 인생 아냐.”

“그런데도 술만 취하면 자격지심이 올라왔던 건, 진심은 회사에서 나도 인정을 받고 뭔가를 해 보고 싶었던 거 아닐까?”

“…그렇겠지?”

나 역시 채서린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정훈이 놈의 입장을 이해해 보려고 애를 써 봤다.

“우린 서로가 서로에 대해 간섭 같은 거 일절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만나는 관계였어.”

난 고개만 한 번 끄덕여 보여 줬다.

“내가 그렇게 하자고 했어. 안 그럼 안 만나겠다고. 근데도 가끔씩 오빠를 보면 그런 관계를 유지하자고 먼저 말한 내가 입이 다 간지러워질 정도로 답답한 짓을 할 때가 많았어.”

“가령?”

“주위에 쓰레기들이 너무 많아. 오빠를 이용해 먹으려고만 드는 양아치들? 내가 봤을 땐 주위에 오빠 인생에 하등 도움이 안 되는 인간들뿐인데, 오빠는 또 그런 인간들한테 이용을 당해 주면서 그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있어.”

똑같은 놈들끼리 만나는 거지.

“내가 내 입으로 한 말이 있기 때문에 일부러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솔직히 말리고 싶다가도 그렇게 하는 오빠가 이해가 되기도 하고 그랬어.”

“어떤 부분에서 이해가 되기도 했다는 거지?”

“외로우니까.”

“외롭다?”

“오빠 편이 아무도 없잖아. 뭔가 목적을 가지고 오빠한테 접근을 하는 쓰레기, 양아치들이라도 그렇게 먼저 오빠한테 연락을 해 주고 오빠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 자체를 오빠는 좋아하는 거 같았어.”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너는 아니다?”

“뭐가? 아, 나는 뭔가 목적을 가지고 오빠를 만나는 사람이 아니냐는 말이야?”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더니, 아주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채서린이 말했다.

“내가 오빠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오빠 나보다 돈 많아?”

“네가 나보다 더 많다고?”

“어머, 지금 이 대화 이거 실화야? 뭐야, 진짜. 내가 어떻게 오빠한테 이런 소릴 다 들을 수가 있지? 나 채서린이야. 기억이 없어도 날 찾았잖아. 내가 그런 사람이야, 오빠.”

“…….”

“내가 오빠네 집안이랑은 비교가 안 되겠지만, 오빠보다는 당연히 많지 않을까? 그리고 난 내가 누리는 모든 것들을 내가 직접 벌어서 누리고 있는 사람이야.”

이건 반박을 할 수가 없군.

“아쉬울 게 없는데, 왜 나 같은 놈이랑 그동안 이런 만남을 유지해 왔던 거야?”

“나도 외로우니까.”

“…….”

“외롭긴 한데, 그렇다고 딱히 역할이 필요한 만남을 시작하긴 싫고. 편하잖아, 이런 만남. 딱히 책임감 같은 거 가질 필요 없고, 진지할 필요 없고, 관계 자체에 심각할 필요도 없고, 언제 쫑 내도 문제 될 거 없고.”

“이런 식의 만남이라도 너 정도면 충분히 괜찮은 상대를 만날 수 있을 텐데, 왜 하필 나였지?”

“만만해서.”

이런 상태를 요즘 사람들 말로 어지럽다고 하는 걸까?

첩첩산중이네.

“만만하고 쉬워서 만나고 있는 거야. 내 입장에서는 혹시라도 이런 만남을 빌미로 날 귀찮게 할 수도 있을 거 같은 사람은 최대한 피해야지. 최소한 오빠는 이런 만남을 인질 삼아 협박하고 돈을 요구하지는 않을 거 아냐. 그런데 오늘 오빠가 하는 거 보니까… 아마도 이 관계는 오늘로 끝이겠다. 그지?”

난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채서린에게 말했다.

“오늘 고마웠어. 앞으로 티비에 나오는 너 보면 좋은 감정으로 응원할게.”

“헐… 진짜 오늘로 끝인가 보네? 벌써 가게?”

“혹시 더 해 줄 말 있어?”

“이건 아니지. 간만에 노 스케줄 받아서 집에서 쉬고 있는 사람을 호텔방까지 불러 놓고 이렇게 가겠다고?”

“그… 럼?”

“밥은 같이 먹어 주고 가라. 나 오빠랑 같이 룸서비스 시켜서 먹으려고, 일부러 아무것도 안 먹고 왔단 말이야. 간만에 노 스케줄인데, 오늘 같은 날은 혼밥하기 싫다고.”

“…….”

“사람을 먼저 보자고 불렀음, 기억이 있건 없건 그 정도는 해야지. 그게 매너지. 오빠가 기억을 못 할지는 몰라도, 우리 사이에 그 정도 의리는 있었어. 관계 끝낼 때 끝내더라도 밥은 같이 먹어 주고 가. 아님 나 먹는 동안 옆에 같이 있어 주든지.”

* * *

주말 동안 스마트폰을 충전기에 꽂아 놓고 하루 종일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상을 검색하는 걸로 시간을 다 보내고, 월요일 아침에 출근을 했다.

“지금 출근 다 한 거 맞죠?”

“네, 과장님.”

“우리 미팅합시다.”

HRM팀 사람들 모두가 못 들을 소리라도 들은 듯 저마다 눈치를 살피며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미팅이 좀 길어질 수도 있을 거 같은데, 내가 쏠 테니까 누가 밑에 내려가서 커피 좀 사 오세요. 타 먹는 거 말고 월요일 아침이니까 전문점 커피 마십시다. 나는 아아. 아아에 시럽 두 번 짜서 한 잔 부탁합니다.”

카드를 정 대리한테 전달해 놓고 이 정도면 능숙하지 않냐는 뜻을 담아 윙크를 보냈다.

“다들 아아가 뭔지 모르는 건 아니죠? 아이스 아메리카노.”

그러자 정 대리가 내게 살짝 “과장님, 그만하시죠. 더 어색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주말 동안 난 요즘 젊은 친구들이 사용하는 줄임말부터 시작해서 신조어, 유행어를 열심히 공부했다.

자신 있다.

뭐든 와 봐라.

30분 뒤 인사부에 붙어 있는 상담실에서 미팅을 가졌다.

“오, 존맛. 여기 이 집 커피 잘하네. 다들 마시면서 합시다.”

정현수 대리.

지금 내게 가장 큰 조력자 역할을 해 주고 있다.

조윤우 책임.

정 대리의 오른팔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인물로 올해 나이 서른하나.

원래는 HRD 소속이었지만, 내가 인사부 과장으로 오면서 약간의 조직 변화가 생겼고, 그 변화 속에서 책임으로 승진을 해 HRM으로 옮겨 온 인물이다.

홍재희 주임.

HRM의 살림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걸로 보인다.

업무 스펙트럼이 조윤우 책임만큼 넓은 건 아닌 거 같지만, 손이 꼼꼼하고 맡은 업무에는 실수를 만들어 내지 않는, 약간의 강박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다.

사원 김은혜, 그리고 이민혁.

김은혜는 정보 처리 능력이 뛰어나다.

아직 배우고 있는 중이긴 하지만, 자신의 사수인 홍재희 주임이 책임지고 있는 서류 보관 업무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고, 손이 빠르다고 정 대리가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는 직원이다.

그리고 이민혁.

눈치가 빠르다.

분위기 파악도 탁월하고.

그럼에도 패기가 있어, 팀 막내임에도 팀 미팅에서 자신의 의견을 내놓는 걸 주저하지 않는 인물이다.

김은혜와는 달리 톡톡 튀는 맛이 있고, 그럼에도 크게 밉상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 HRM팀 팀원들과 일일이 눈을 다 맞춰 본 뒤, 미팅을 시작했다.

“한 달 뒤에 공채 리크루팅 시작하는 거 알죠? 이번 리크루팅은 기존에 해 왔던 리크루팅과 전혀 다를 겁니다.”

“……?”

팀원들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전혀 다를 거라는 게… 정확하게 어떤 뜻입니까?”

정 대리가 대표로 물었고, 난 정 대리가 아닌 팀원들 모두에게 대답했다.

“말 그대로 기존에 해 왔던 아무 특색 없던 리크루팅 스타일을 싹 다 뜯어고칠 겁니다. 일반 리크루팅이 아닌 부서별 리크루팅을 할 겁니다.”

“부서별 리크루팅이요?”

“네, 부서별 리크루팅이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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