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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업적이라고요? (25/303)

내 업적이라고요?

다음 날 아침, 출근 후 업무를 보기 시작한 지 1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출근과 동시에 가방만 책상 밑으로 내려놓고 어딘가로 향했던 고 부장이 사무실로 돌아와서는 내게 이야기를 좀 나누자고 했다.

“회의실까지는 필요 없고….”

“저도 부장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소형 회의실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한테 무슨 할 말이 있으실까요?”

“부장님이 먼저 하시죠. 저는 업무 외적인 내용이라, 그렇게 급할 건 없습니다.”

안경을 고쳐 쓴 뒤 고 부장이 말했다.

“어제 과장님이 올렸던 기획안 말인데요, 그걸 사장님께서 보시고 전 부서장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보라고 하셨답니다.”

“누가요?”

“사장님이요. 그 자리엔 부서장들뿐 아니라 임원분들도 다 참석을 하실 거랍니다.”

“아뇨, 누가 사장님 말씀을 부장님께 전달했는지를 여쭙는 겁니다.”

눈에 힘을 실었다.

정훈이 놈에 관한 회사 내의 일거수일투족을 조 전무에게 전달해 왔던 인물이 고 부장이라는 걸 안 이상 더는 봐줄 필요가 없는 거지.

고 부장도 내가 알고 있다는 걸 이미 눈치챘을 것이고.

“전무님께 받은 지시 내용입니다.”

나는 다리를 꼬아 그 위로 깍지 낀 손을 올렸다.

“전무님께서 다른 말씀은 없으시던가요?”

“다른 말씀이라면….”

“그냥 부장님한테 개인적으로 하신 말씀이라도 괜찮습니다. 제가 참고할 만한 내용이 있으면 귀띔 좀 해 달라는 겁니다.”

“저기 손 과장님….”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난 얼른 고 부장의 말을 가로막으며, 내가 먼저 말했다.

“괜히 일 잘하고 있었는데, 어디서 회장 아들놈 하나가 폭탄으로 떨어져서 부서는 부서대로 챙겨야 해, 회장 망나니 아들놈 회사 생활도 눈여겨봤다가 전무님한테 보고해야 해… 지난 6개월 스트레스가 많으셨을 거로 생각합니다.”

앉아 있는 의자가 사무 의자였다.

앉은 상태에서 좌우로 움직일 수 있는 의자.

그렇게 내 몸까지 의자와 함께 좌우로 움직이며 말을 이어 갔다.

“그 스트레스를 잘 알기 때문에, 제가 지난 6개월간 부족하나마 부장님께 선물을 드렸던 겁니다.”

“선물… 이요?”

“제가 아무 문제 안 일으키고, 착실하게 회사 생활을 했다고 생각을 해 보세요. 어떻게 부장님이 지금처럼 전무님께 꼭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었겠어요. 안 그래요?”

“…….”

“가끔 사고도 치고, 맘대로 자리도 비워 가며 특이 사항을 만들어 드려야, 부장님 입장에선 쓸 만한 보고거리가 생기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6개월 정도 그렇게 생활을 하다 보니까, 이게 밑지는 장사란 생각이 드는 겁니다. 명색이 제가 회장님 아들이고,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는 거지만, 최소한 사업체 하나 정도는 제가 맡아서 나가야 하는데 밑지는 법만 배워서 되겠습니까? 지금부터는 얻는 법도 배워 나가야죠.”

“그게 무슨….”

“앞으로도 꾸준히 저에 관한 내용을 전무님께 잘 전달해 주세요. 지난 6개월간은 다르게 앞으로는 다른 방향에서 보고거리가 많아지도록 도와드릴 테니까.”

“…….”

“대신 앞으로는 부장님도 절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전무님께 하시는 것처럼, 저한테도 보고를 좀 해 주세요. 전무님에 관한 내용.”

“……!”

“그래야 공평하죠. 안 그렇습니까? 뭐든 좋으니까, 저에 관한 보고를 하실 때, 그 보고에 전무님이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어떤 반응을 보이시는지 잘 눈여겨보셨다가 저한테 귀띔 정도만 해 주세요.”

“과장님….”

“누구하고 직장 생활을 더 오래 하실 거 같습니까?”

내 말에 고 부장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임원 승진하셔야죠. 지금껏 그거 하나 보고, 그 약속 하나 믿고 지난 6개월을 달려오신 거 아닙니까? 제가 이 회사에 오래 있겠습니까, 아님 내일모레 육십인 전무님이 이 회사에 오래 있겠습니까? 이건 암산도 필요 없는 계산 아닌가요?”

좌우로 돌리고 있던 의자를 고정한 뒤, 꼬았던 다리를 풀고 회의 탁상 위로 깍지 낀 손을 올렸다.

그리고 고 부장에게 말했다.

“저도 지금 제가 모시고 있는 부장님이 임원 승진까지 성공을 해서, 이 회사에 오래오래 계시고 싶으신 마음만큼 이 회사에서 부장님을 오래 보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렇게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같은 부서에서 함께 지내고 있는데, 앞으로 서로 얼굴 보는 게 불편해져서 좋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딱 거기까지만 조동희 전무에 관한 내용을 매듭지어 놓고 프레젠테이션에 관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부장님 지시 사항이니까 발표 준비 철저하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요청드릴 게 하나 있습니다.”

“요청… 이요?”

“어차피 그 기획안은 통과가 될 겁니다.”

뭘 그렇게 놀란 눈으로 쳐다봐?

“사장님이 전 부서장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할 수 있게 준비를 해 보라고 하신 건, 기획 통과 보류의 개념이 아니라, 얼마만큼 제가 각 부서장을 잘 설득할 수 있을지, 그걸 보는 게 목적일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전무님도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기획은 제 개인의 기획인 겁니까, 아니면 인사부의 기획인 겁니까?”

“결국인 인사부의 기획입니다.”

“그렇죠. 그럼 우리 인사부가 다 같이 준비한 기획이 수월하게 통과가 될 수 있도록 부장님도 뭔가를 하셔야죠.”

난 깍지를 풀어 양손의 손톱 길이를 확인해 가며 말했다.

“저는 완벽한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되어야겠죠?”

“…네.”

“부장님께서 각 부서장과 만나서 통합 리크루팅에서 부서별 리크루팅으로 바꿨을 때 발생하게 될 예상 문제점을 미리 좀 취합해 주세요. 아무래도 부서장들이 해당 부서 업무엔 우리보다 전문가들일 거 아닙니까. 그런 예상 문제점들이 잘 취합이 되어야 기획안이 통과된 뒤, 실제 리크루팅을 했을 때 발생될 문제점들을 최소화시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고 부장을 향해 마지막 한마디를 박아 줘 놓고 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장님은 보여 주기를 기대하고 계시는 거 같은데, 저는 보여 주기가 아니라 진짜 신입 사원 리크루팅 방법을 효과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이거든요, 이 회사를 위해. 제가 요청한 내용 가급적이면 취합이 좀 빨리 됐음 좋겠습니다.”

* * *

정태 놈에게서 카톡 문자가 왔다.

―몇 시에 출발할 거야?

한 달에 두 번.

짝수 주 화요일마다 본가에서 가족들 다 같이 저녁 식사를 한다는 건 이미 가족 단톡방의 지난 대화 기록으로 확인한 내용이다.

드디어 오늘, 내가 눈을 감기 전의 나보다 더 나이가 들어 버린 홍준이 놈과 처, 장혜란이. 그리고 정엽이만큼 안아 주지 못해 항상 미안한 마음을 품어야만 했던 정태와 그 아내 원수경의 얼굴을 실제로 볼 수 있게 됐다.

―퇴근하는 대로 바로 출발할게.

―무슨 퇴근 시간을 지켜? 좀 빨리 출발해.

―형은?

―나는 5시에 출발할 거야.

―아버지랑 같이?

―뭔 개소리야? 아버지가 어디 나랑 같이 움직이는 분이시냐? 아버지는 오늘도 딱 시간 맞춰서 오시겠지.

―그럼 나도 시간 맞춰서 갈게.

―일찍 오라고. 1시간 정도.

크게 문제 될 건 없었기에 알았다고 답장을 보냈다.

정태 놈과 카톡을 주고받은 다음 정 대리에게 물어봤다.

“본사 상무님이요?”

“네, 그동안 제가 술만 취하면 정 대리를 불러서 운전을 시켰다면서요.”

“그러셨죠.”

이젠 내가 제법 가깝게 느껴지는지, 째려보는 시늉까지 하며 장난을 걸어왔다.

“본사 상무 집까지 저한테 알려 주겠다고 할 정도면 제가 본사 상무를 만나러 가거나, 아니면 만난 후에라도 정 대리를 불렀단 말일 텐데… 혹시 제가 혼잣말로라도 본사 상무가 어떻다고 했다거나, 그런 적이 없었나 해서요.”

“확실한 건….”

“네.”

“본사 상무님을 만나러 가실 때 저한테 운전을 시키실 때와 만나고 나서 절 부르실 때의 모습은 확실히 달랐다는 겁니다.”

“어떻게 달랐나요?”

“만나러 갈 땐 아무렇지도 않으셨어요. 그런데 만나고 나서 절 부르실 땐 대체로 표정이 안 좋으셨죠.”

“그런데 주고받은 카톡 문자 내용만 보면 사이가 무척 좋아 보이는데….”

“제가 거기까지는 알 수 없는 내용이고요, 저한테 술이 많이 취하신 상태로 이런 질문을 하신 적은 있었어요.”

“어떤 질문이요.”

“과장님은 안 될 거 같냐는 질문이요.”

“안 될 거 같냐고요?”

“그러니까 음… 어떤 느낌이었냐면… 제가 재연을 해 드릴게요. 이렇게 술이 이만큼 취하셔서, 누가 봐도 다음 날 기억을 못 하실 정도로 술이 떡이 된 상태예요. 그런 상태로 뒷자리에 앉아서 혼자 중얼거리다가 저한테 이렇게 따지듯 물으신 거예요.”

“……?”

“나는 안 될 거 같아? 내가 못 할 거 같아? 나도 할 수 있어, 내가 왜 못 해? 내가 진짜 형만 아니면… 푸후… 약간 이런 느낌으로 저한테 주사를 부리신 적이 있어요.”

호텔방에서 채서린에게 들었던 내용 중에도 이 비슷한 정훈이 놈의 감정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럼 그냥 회사에서 도는 본사 상무에 관한 이야기는 좀 있습니까?”

“음… 있죠. 왜 없겠습니까, 그룹 후계자인데. 어느 누구보다 말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는 분이시잖아요.”

“그러니까요. 그런데 난 모르잖아요. 알고 있는 내용 있으면 이야기 좀 해 주세요.”

적절한 표현을 고민하는 게 틀림없었다.

정 대리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적당한 표현이 떠올랐는지, 혀끝으로 입술을 적시기 시작했다.

“보통 어느 한 집단에서 눈에 띄게 능력이 좋고 다양한 방면에서 실적을 많이 만들어 내는 사람들은 성과 지향적, 자기중심적, 그리고 약간의 소시오패스적 기질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소시오패스….”

스마트폰으로 이 시대의 정보를 찾아 공부를 하다 보면, 종종 눈에 띄는 단어였다.

소시오패스.

그런 기질이 정태 놈에게도 있다?

“본사 상무님이 소시오패스라는 게 아니라, 보통 어느 한 조직에서 능력을 크게 인정받고 특출한 실적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그런 경우가 많다는 거죠.”

“본사 상무가 자기 자리에 맞는 능력 정도는 갖추고 있다는 말이네요?”

“어후, 그럼요.”

그 부분에 있어서는 반박의 여지가 없다는 듯, 단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정 대리였다.

“저희야 그룹 본사 근무자들이 아니니까, 그래서 본사 상무님을 직접 뵐 기회는 거의 없지만, 그래도 한 번씩 회사에 돌고 있는 이야기들을 종합해 보면 젊은 나이에 사업 추진력도 굉장하시고 결단력, 순간 판단력 모든 게 굉장하신 분입니다.”

“그런 소문들도 결국엔 다 본사 상무한테 붙은 사람들이 흘리는 소문이에요.”

“그럴지도요. 그런데 그룹 본사 쪽과 관계가 안 좋은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 봐도, 본사 상무님한테 특별한 점이 있긴 있는 거 같아요.”

“그룹 본사 쪽과 관계가 안 좋은 사람들이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까?”

“당연히 있죠. 전략기획팀. 같은 뿌리라도 엄연히 재경모직은 독립 기업이고 엄밀히 말하면 재경그룹의 모태 기업인데 유독 그룹 본사의 전략 기획 본부에서 우리 재경모직 전략기획팀을 컨트롤하려는 월권을 자주 한다고 해요.”

“그래요?”

“아무리 기억이 안 난다고 하셔도 과장님께서 그래요? 하고 물어보시면 안 됩니다.”

“왜요?”

“결국은 그게 다 과장님의 업적이거든요.”

“내 업적이라고요?”

“과장님이 지난 6개월간 사고를 많이 치셨습니다.”

“크흠….”

“그 뒷수습을 다 그룹 본사 전략 기획 본부에서 했고요. 그 전까지는 그룹 본사 전략 기획 본부의 월권이 지금처럼 심하지 못했는데, 과장님이 입사하신 이후부터는 관여가 당연한 것처럼 되어 가고 있습니다.”

할 말 없네.

“이제 와서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아무튼 우리 쪽 전략기획팀 직원들이 하는 말을 들어 보면 본사 상무님이 생긴 것부터 시작해서 식성, 성격… 회장님 젊었을 때와 아주 많이 닮았다고 합니다.”

맞다.

정훈이 놈 얼굴엔 홍준이 놈보다는 그 처인 장혜란의 얼굴이 더 많이 담겨 있지만, 정태는 갓 태어났을 때부터 홍준이 놈을 그대로 찍어 놓은 것처럼 제 아비와 똑같이 생겼었다.

말문이 또래 여자아이들에 비해서도 빨랐을 정도로 무척 빨리 튼 것도 그렇고, 가족 어른들에게 관심받길 좋아하는 성격, 욕심이 많은 것까지 홍준이 놈 어릴 때와 똑같았던 놈이 바로 정태였다.

기대되는데?

모든 걸 다 떠나, 순수하게 그놈들의 아비이고, 할아버지의 입장에서, 이젠 나보다 더 나이를 많이 먹은 홍준이 놈과 이젠 다 커서 그룹 본사 상무 자리까지 올라가 있는 장성한 정태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묘하게 가슴이 뛰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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