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없어?
본가에 도착했을 땐 이미 정태와 그 처가 먼저 와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홍준이 놈은 아직이었다.
본사 상무라면 당연히 제 아비인 홍준이 놈과 같은 건물에서 근무를 한다는 소리.
처음엔 2주일에 한 번 가지는 가족 식사 날에 어째서 따로 움직이는 건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하지만 정태와 그 처인 원수경을 보자마자 바로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원수경의 배가 제법 차올라 있었다.
애를 가졌구나.
원수경은 배가 불러 있는 상황에서도 시어머니인 장혜란을 도와 가족 저녁 식사 준비를 돕고 있었다.
대충 살펴보니까 집안일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세 명이나 되던데, 그럼에도 가족 저녁 식사 자리를 중요하게 생각을 하는지, 장혜란까지 안에서 식사 준비를 함께하고 있었다.
“도련님 왔어요?”
내게 코를 찡긋거리는 모습을 보여 주고는 시어머니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가서 앉아 있어요. 뭐 마실 거 좀 갖다줄까?”라며 편하게 말을 하고 있었다.
이게 반말인지, 존대인지 헷갈리고 있었다.
하지만 가족 단톡방에서 나누었던 대화 기록을 통해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기에 크게 당혹스럽지도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실제로도 이렇게 대화를 한다는 걸 알 수 있어 재밌다는 기분까지 들었다.
“아니, 괜찮아요. 얼마나 됐지, 지금?”
난 원수경의 불러 있는 배를 보며 물었다.
“볼 때마다 물어봐? 다음 달이잖아요.”
“볼 때마다 좋아서 그렇지요. 이제 우리 조카 얼굴 보기까지 한 달밖에 안 남았네.”
“피… 가서 아버님 오기 전까지 형이랑 같이 이야기하고 있어요.”
원수경.
콧대가 단단하고, 입꼬리가 다부지게 올라가 있으며 눈에 총기가 있다.
손주 며느릿감으로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정훈이 놈의 입장에선 어떤 형수 감일지 좀 더 지켜봐야 할 거 같다.
관상만 봐서는 재물을 지키는 힘은 있어 보이나, 곳간 문을 융통성 있게 풀 수 있는 그릇까지는 아닐 것으로 보인다.
정태 입장에선 든든한 배필감일 것 같고.
그리고 장혜란이.
저게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미용의 힘인 것일까.
생각했던 것보다는 내 기억 속 30대 젊은 장혜란의 얼굴이 여전히 남아 있어 살짝 당황했다.
세월의 흔적이야 어쩌겠냐만, 그래도 형제간의 갈등을 가장 옆에서 지켜봤을 사람의 얼굴치고는 보기 싫은 욕심이 크게 붙지 않고 오히려 평온한 인상으로 늙어 가고 있었다.
하긴.
장혜란이는 첫째 놈 때와는 달리 내가 선택을 했던 며느리였다.
집안 배경을 중요시했던 게 사실이지만, 그 못지않게 인물됨을 크게 봤다.
차분한 교양을 가지고 있고, 그 교양에서 우러나오는 자존감을 내가 무척 좋게 봤던 기억이 있다.
역시, 정훈이 놈의 몸에서 처음 눈을 떴던 그 호텔방에서, 정훈이 놈의 얼굴을 보며 떠올렸던 얼굴이 장혜란이 맞았네.
정훈이 놈은 확실히 외탁을 했구나.
“뭘 그렇게 처음 와 보는 집처럼 서성거려? 이쪽으로 와서 앉아.”
정태 놈이 옆쪽 소파 자리를 손짓하며 내게 말했다.
3인 소파 자리에는 정태 놈이, 그 옆의 2인 소파 자리에는 내가 앉았다.
정말 홍준이 놈을 빼다 박았구나.
흡사 내가 눈을 감기 전 태산이만 남기고 모두 밖으로 나가라고 했을 때, 홍명이 놈과 함께 고개를 푹 숙인 채 병실 문을 나서던 홍준이 놈이 지금 내 옆에 그대로 앉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다.
“야, 인마. 너 그림 받았다며?”
다짜고짜 무슨 그림 타령이지?
“그림? 무슨 그림?”
“고모한테 물어보니까 남 사장 통해서 그림 전달했다던데?”
아, 그 해바라기 그림 말하는 거구나.
그런데 정태 이놈도 제 고모부를 고모부라고 하지 않고 남 사장이라고 부르네?
이놈들이 왜 이렇게 버릇이 없어?
“아, 그 그림? 어, 받았어.”
“야 이, 자식아. 그림을 받았음 고맙다고 문자라도 한 통 보내야 할 거 아냐.”
“어?”
“자식 이거 별것도 아닌 걸로 형 섭섭하게 만드네.”
“그 그림… 형이 산 거야?”
처음 며칠 정도야 정훈이 몸에서 정훈이인 척하는 게 어색하고, 또 여러 걱정이 있었지만 일주일 정도 시간이 지나니까 그런 걱정들로부터도 무뎌지고 있는 중이다.
뭐 어쩔 건가?
누가 봐도 지금 내 모습은 손정훈인데.
“남 사장이 그런 말도 안 하고 그냥 전달만 한 거야?”
“딱히 내가 물어보지도 않았어. 고모가 그림 빼놨다고 가져가라길래, 그런가 보다 하고 받아 간 게 끝인데?”
“하여간 그 양반 하는 거 보면 이상해. 엑스맨도 아니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그 생각을 읽을 수가 없다니까. 그럼 사지, 그림을 고모가 그냥 줬을까 봐?”
“……?”
“고모가 우리 어릴 때부터 뭐 하나 조카들이랍시고 그냥 준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어?”
난 정태 놈의 장단만 맞춰 주며, 최대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 나갔다.
“그거 네 형수가 산 거야.”
“형수가?”
“그래, 그날 갤러리에서 네가 고모한테 가격까지 물었잖아. 실은 나도 건성으로 봤던 상황이었는데, 네가 그 그림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걸 네 형수가 눈여겨보고 있었던 모양이야.”
“몰랐네. 몰랐어, 그걸 형수가 사서 보내 준 건지.”
“그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 이 자식아. 설마하니 그걸 내가 사서 보냈겠냐?”
“알았음 내가 문자가 아니라 전화를 해서 고맙다고 했겠지.”
눈을 가늘게 뜨며 정태 놈이 말했다.
“너 뭐 듣자 하니까 이번 공채 때 공채 방식에 변형을 줘 보자는 기획안을 올렸다며?”
여기에선 이 부분을 잘 파악해야 된다.
당연히 이 정도 내용이라면 조동희 전무를 통해 홍준이 놈의 귀에는 들어갔겠지. 그런데 이 내용을 정태가 홍준이 놈을 통해 들어 알고 있는 건지, 아니면 조동희 전무에게 따로 전해 들은 건지는 크게 다른 내용이 되는 거다.
“형 생각은 어때?”
난 정훈이 놈과 정태 놈의 정확한 관계를 직접 확인해 보기 위해 진심으로 정태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대답이 아닌 질문을 해야 한다.
대화 방식을 그렇게 이끌어 나가야 한다.
대답하기 시작하는 순간, 난 상대의 의중을 읽는 게 아닌, 내 의중을 의심받기만 할 뿐.
“뭐가?”
“공채 방식에 변형을 줘 보는 거 말이야. 괜찮은 생각 같아?”
“너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뭐가?”
장혜란이 들어가 있는 주방 쪽을 빠르게 살핀 후, 몸을 탁상 쪽으로 당겨 앉으며 정태가 말했다.
“형이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편하게 있으라고 했잖아. 때 되면 알아서 본사로 부르겠다고.”
이놈 봐라?
“네가 왜 남 사장 밑에서 일을 해? 왜 집주인이 머슴 밑에서 일을 하느냐고.”
답답하다는 듯 파리처럼 손바닥을 비벼 대다 얼굴 표정을 부드럽게 바꿔 놓고 정태가 다시 말했다.
“아버지랑 남 사장이 무슨 이야기 끝에 널 모직에서 일을 시작하게 만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거긴 그냥 딱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곳이야. 머슴한테 자리 하나 만들어 주고 맡아 나가라고 하면 충분한. 거기에서 네가 무슨 일을 배워? 어? 형이 몇 번 말했지? 지금 이건 아버지가 너랑 나, 우리 둘 놓고 경쟁을 붙이는 거라고.”
“…….”
“너 진짜 거기에 놀아날 거야? 우리가 왜 그래야 하는데? 그때 너는 너무 어려서 아무런 기억이 없겠지만, 나는 아버지랑 큰아버지가 회사 운영을 놓고 형제끼리 다투고, 큰아버지 뉴스로 온 세상이 시끄러웠던 걸 직접 경험했던 사람이야.”
흠….
그렇겠네.
나보다는 정태 이놈이 비록 당시에 어린아이였을지언정, 홍명이 일에 관해선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수밖에 없겠군.
“회사 일. 남 사장 말고 형한테 와서 배워. 그게 맞는 거야, 정훈아. 머슴 밑에서 무슨 수로 주인이 되는 법을 배워? 그걸 머슴이 어떻게 안다고. 아버지가 재경 이끌어 가는 거 앞으로 길어 봤자 10년이야. 그리고 내가 너 약속한 대로 1년 안에 그룹 본사로 부를 거고. 벌써 6개월 했잖아. 앞으로 6개월밖에 안 남았어.”
“…….”
“너 나랑 경쟁할 거 아니지?”
“경쟁은 무슨.”
경쟁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네가 이 할아비랑 해서 되겠냐?
“형이 항상 하는 말이지만, 나는 우리 재벌 3세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 그리고 후계자 문제로 형제간에 벌어지는 다툼… 그런 게 정말 싫어. 그리고 그걸 너랑 한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기 싫고.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재경의 세대교체는 말 그대로 동화야, 동화. 동화처럼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세대교체를 꿈꾸고 계시는 분이 과거에 한 일을 생각해 봐. 이것만큼 모순이 어디에 있냐고.”
“…….”
“너는 형을 도와. 난 널 끝까지 챙긴다. 그리고 너랑 같이 재경을 아버지, 큰아버지 세대의 재경이 아니라 할아버지 대의 재경으로 반드시 끌어올린다.”
꿈도 야무지다.
이 할아비가 보기에 너라면 지금의 재경을 유지하기도 버거워 보인다.
각오는 가상하다만, 그 각오까지도 진심인지 모르겠구나.
“그런데 형.”
“그래, 왜?”
“모직이 정말 머슴한테 자리 하나 만들어 주고 맡아 나가라고 하면 충분한 곳이야?”
“대한민국 모직 산업에 미래가 있어? 거봐. 넌 벌써 여기에서부터 막히는 거야. 너 지금 우리 재경 3사 중에 그나마 앞으로의 재경이 희망적인 이유가 어디 때문인 거 같아? 항공, 식품, 모직. 이 셋 중에 뭐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재경이 살아남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형 생각은?”
“당연히 식품이지. 앞으로 세계는 식량 전쟁의 시대를 맞을 수밖에 없어.”
다시 한번 주방 쪽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조금 더 낮추고 있는 정태 녀석.
“지금 우리 재경에서 희망을 걸 수 있는 산업이 유일하게 식품뿐이라는 게 갑갑하긴 하지만, 그래도 식품이라도 가지고 있는 게 어디야? 모직은 답이 없어. 우리가 유럽이야? 유럽처럼 명품을 탄생시킬 수 있어? 그렇다고 우리가 베트남이야? 거기처럼 공장을 크게 돌릴 형편이나 되냐고. 모직은 사양 산업이야. 이미 죽었어.”
답답한 놈.
능력이 있다더니, 능력은 개뿔 모자라기가 끝이 없다.
헛똑똑이도 이런 헛똑똑이가 없구나.
어찌 사업을 숫자로, 돈으로만 본단 말인가.
숫자는 말 그대로 숫자일 뿐, 결코 그게 알맹이가 될 수 없는 것인데.
“형은 그냥 네가 걱정되는 거뿐이야. 괜히 남 사장한테 저렴한 물이나 들지 않을까 하는 걱정. 널 모직으로 보낸 게 만약 100프로 아버지 뜻이었다고 해도 그래, 남 사장 지가 뭘 가르칠 수 있다고 자기도 월급쟁이 사장밖에 안 되는 주제에 널 받아, 널 받기를. 진짜 하는 거 보면 내가 어이가 없다.”
큰 기대도 안 하고 있었지만, 몇 마디 나눠 보니 역시나 정태 이놈에게 정엽이의 소식을 물어선 안 되겠단 확신이 생겨 버렸다.
* * *
홍준이 놈의 모습엔 그간의 풍파가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괘씸한 마음과는 별개로 어느덧 깊게 패 있는 주름살을 보자 하니 짠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한세상 신나게 살아 보는 것, 원하는 걸 다 가져 보는 것, 나만의 왕국을 건설해 보는 것… 그 얼마나 매력적이고 흥분되는 일이란 말인가.
하지만 도대체 네놈은 뭘 위해 그렇게까지 했단 말인가.
지금 네가 앉아 있는 그 자리가 과연 네 형과 조카를 밀어내고 차지할 정도로 가치가 있는 자리라고 생각을 했단 말이냐.
네 형과 함께 갔다면, 그만큼 갈 수 없었을 거라 생각을 했단 말이냐.
정녕 그렇게 생각을 했고, 이 손중길이의 아들, 손홍준이의 그릇이 그것밖에 안 되었단 말이냐….
식사 자리 내내 홍준이 놈은 별말이 없었다.
그저 원수경에게 몸 상태는 괜찮은지, 가벼운 운동 정도는 꾸준히 해야겠지만 항상 조심을 하라는 당부 정도가 끝이었다.
그럼에도 식사 자리의 분위기는 썩 나쁘지 않았다.
장혜란과 원수경이 분위기를 잘 이끌어 나가고 있었다.
“그럼 시간도 늦었는데, 더 늦기 전에 출발들 해라.”
“네, 아버지.”
“네, 아버님.”
나도 대답을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홍준이 이놈이 나만 따로 부르는 게 아닌가.
“너. 정훈이.”
“네.”
“너는 잠시 나 좀 보고 가라.”
그 말에 미묘하게 바뀌는 정태와 원수경의 표정을 난 놓치지 않았다.
확실히 정태 놈보다는 원수경이가 눈치도 빠르고 단수가 높은 게 틀림없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정태 놈과는 달리, 원수경은 재빨리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제 남편의 팔짱을 꼈다.
“네, 그럼 저희는 먼저 가 볼게요, 아버님. 그리고 매번 올 때마다 뭘 이렇게 싸 주세요. 잘 먹을게요, 어머니.”
“몸 관리 잘하고, 다음 주에 윤 회장네 잔치 있는 거 알고 있지?”
“그럼요.”
“그런데 너 진짜 갈 수 있겠어?”
“당연하죠. 오히려 집에 가만히 있는 게 더 안 좋대요.”
“그걸 누가 몰라?”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제일 예쁘게 해서 나갈 테니까.”
“호호호. 그래, 그래. 알겠어. 정태 너는 처 잘 챙기고.”
“네.”
정태 내외가 나간 뒤, 난 홍준이 놈을 따라 서재로 들어갔다.
서재 꾸며 놓은 거 하난 마음에 드네.
“이젠 정신을 차린 거냐?”
내가 묻고 싶다.
도대체 왜 그랬냐고,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고 해도 어째서 작은아버지가 되는 놈이 정엽이까지 내쳤느냐고.
“왜 대답이 없어? 이젠 정신을 차린 거냐고.”
“궁금한 게 있는데요.”
“말해 봐.”
“아버지는 둘째셨잖아요.”
“뭐?”
“위로는 큰아버지가 계셨고, 밑으로는 고모가 있잖아요.”
홍준이 놈은 숨을 길게 들이마신 후, 그 숨을 코로 천천히 뿜어내며 자세를 바로잡고 앉았다.
“그게 왜?”
“둘째의 삶. 어떠셨어요?”
“그러니까 그게 왜 궁금하냐고.”
“저도 둘째잖아요.”
“……!”
“할아버지 밑에서 둘째의 삶. 어떠셨을지 궁금해서 여쭤보는 겁니다.”
“무슨 일 있었냐? 너 혹시 형이랑 갈등 있어?”
“아뇨, 아직은 없어서 여쭤보는 거예요.”
“아직은 없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