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잡이야
내가 네 머리 꼭대기 위에 앉아 있다, 이놈아.
“당연히 형과 저 사이에 갈등 같은 건 없어야겠죠. 재경이 어떤 회사예요? 어떻게 지켜진 회사인지 저도 다 아는데, 제가 어떻게 형과 갈등을 만들 수 있겠어요? 형도 그렇고요.”
“그래,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IMF 때 회사에 균열 나고, 큰아버지 그렇게 되시고… 할아버지야 그 전에 돌아가셨으니까 그렇다 치고, 그 모습을 두 눈 뜨고 다 지켜봐야 했던 할머니 심정이 어떠셨을까요?”
“…….”
“정말 심장이 칼로 도려지는 심정 아니었겠어요?”
내가 지금 그렇다, 이놈아. 홍준아.
“저하고 형까지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우린 우리끼리라도 사이좋게 지내야죠. 곧 형도 아빠가 되는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정엽이 형이요.”
“뭐? 지금 여기에서, 그것도 네 입에서 정엽이 이야기가 왜 나와?”
“저한테 지금 형수 뱃속에 든 아이가, 아버지께는 정엽이 형이나 다름없는 거잖아요. 할아버지, 할머니 입장에선 정엽이 형이 지금 형수 배 속에 든… 제 조카 아니겠느냐고요.”
“……!”
“물론 저랑 형은 절대 그럴 일이 없겠지만, 정말 만약에 저랑 형이 문제가 생겨서, 지금 형수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정엽이 형처럼 되어 버리면 아버지 심정은 어떠실 거 같으세요? 첫 손주인데. 만약 제가 형수 배 속에 있는 아이를 상대로 그렇게 한다고 치면, 절 용서하실 수 있겠습니까?”
“너 지금 나랑 뭐 하자는 거냐?”
“여쭤보는 겁니다. 제가 정말 지금부터 최선을 다해도 되는 건지요.”
“최선? 무슨 최선?”
“회사 안에서의 제 역할에요.”
“풉. 꼭 지금까지 네 살고 싶은 대로 살아왔던 게,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식으로 말하네.”
“꼭 지금까지 제가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식으로 말씀을 하시네요.”
지금부턴 다를 거다, 이놈아.
네 철부지 둘째 놈 정훈이는 더 이상 없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내가 지금 네 아들놈 몸에 들어와 이러고 있어야 하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 같다.
네놈에게 반성이라는 걸 할 수 있는 기회를 아비인 내 손으로 직접 주라고, 그리고 나 역시 재경을 키우며 살아온 지난 세월을 곰곰이 되짚어 보라고….
아들아.
우리 반성할 게 있으면 같이하자.
혼이 나야 될 게 있으면 같이 혼이 나자.
내 어찌 그걸 너한테만 시키겠냐.
널 혼을 내면서도, 자식 놈 혼을 내며 가슴이 찢어지는 건 정작 부모인 나의 몫일 텐데….
그럼에도 네놈이 한 잘못된 선택, 실수가 있다면 나랑 같이 고쳐 가 보자.
이게 지금 네 아들놈의 몸속에 갇혀 버린 내가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회초리이고, 또 아비의 역할인 듯싶다.
“제가 말한 최선. 못 미더우시겠지만, 말 말고 행동으로 보여 드릴게요.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제가 지금부터 보여 드릴 최선에, 결정은 회장님이 직접 하십시오.”
* * *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원수경이 남편에게 물었다.
“정훈이 말이야.”
“왜?”
“오늘 뭔가 좀 이상한 거 같지 않아?”
“글쎄? 난 딱히 이상한 거 못 느꼈는데? 왜? 뭐 이상한 거 있었어?”
인상을 쓰며 원수경이 말했다.
“무거운 몸 이끌고 저녁 준비하느라 몇 시간 동안 안에서 손에 물 묻히고 있었음, 나보다 당신이 먼저 눈치를 챘어야지.”
“그니까 뭐?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당신, 정말 내가 걱정이 된다.”
“적당히 해라, 진짜.”
“정훈이 왼손잡이야.”
“……?”
“근데 아까 저녁 먹을 때 오른손으로 밥 먹었어.”
“뭐?”
“하나 있는 동생, 형이라고 챙기는 건 보기 좋은데 당신이나 좀 적당히 해.”
“걔가 아까 밥을 오른손으로 먹었다고?”
“나는 그게 신경 쓰여서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분간도 못 하면서 꾸역꾸역 한 그릇 다 비웠구만, 뭐? 설마?”
“…….”
“이상해. 분명 이상해. 뭔가가 있어.”
그 말에 손정태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원래 뻘짓 잘하는 놈이야. 밥 먹고, 글 쓰는 건 왼손을 주로 쓰는 게 맞는데, 어릴 때 야구 할 땐 오른손으로 했어. 맞다. 정훈이는 당구도 오른손으로 친다. 테니스, 골프도 그렇고. 어릴 때부터 양손 다 썼다고.”
“…….”
“오늘은 그냥 오른손으로 먹고 싶었겠지. 네가 봤는데 어머니, 아버지라고 못 봤을까.”
“당신은 못 봤잖아.”
“못 본 게 아니라 너만큼 그걸 특이하게 볼 이유가 없어서 신경을 안 썼던 거지. 말했잖아. 어릴 때부터 양손 다 썼다고. 걔 오른손으로 글씨도 잘 써.”
“…그래? 나만 몰랐던 거야?”
“뭐 그런 걸 가지고 예민하게 그래.”
“근데 아까 식사 자리에서도 좀 이상하지 않았어?”
“또 뭐가.”
“평소랑은 다르게 좀 가라앉아 있는 느낌 아니었어? 보통은 내가 아니라 정훈이랑 어머니가 주로 분위기를 맞추잖아. 난 거드는 수준이고. 그런데 오늘은 말도 거의 없고, 상당히 다운되어 있는 거 같았어.”
그 부분에 대해선 손정태 역시 식사 자리 내내 정훈이를 힐긋거렸을 정도로 평소와 달랐다.
“아버님이 정훈이만 따로 보자고 하신 것도 그렇고.”
“뭐 따로 하실 말씀이 있으시겠지.”
“나만 지금 속이 타는구나. 나만 지금 두 형제간 이간질하겠다고 이러고 있는 거야. 그지?”
“야, 적당히 하라고 했다.”
“말 예쁘게 해라.”
“…뭐?”
“당신이 그러라고 하면 내가 그렇게 해야 하는 사람이야? 뭔데 이렇게 말본새가 사나워? 당신도 오늘 뭔가 느낌이 이상하니까 예민해져 있는 거 아니냐고.”
“…….”
“아, 몰라. 됐어, 그만하자. 피곤하다.”
* * *
다음 날 오전.
인사부 사무실로 자동차 영업을 하는 사람이 찾아왔다.
“손정훈 과장님이 누구…신지요?”
인사부 안으로 들어올 때부터 내가 보자고 한 자동차 영업맨일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리 쪽 홍재희 주임한테서 날 찾고 있길래, 내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내 곁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접니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아, 그러시군요. 안녕하십니까, 김영배 대립니다.”
“계약서 가지고 오셨죠?”
도저히 집에 있는 차를 가지고는 출퇴근용으로 쓸 수가 없을 거 같아 적당한 국산 차를 한 대 봐 놨다.
“네, 여기 있습니다.”
“사인 어디에 하면 됩니까?”
“그런데 다른 설명 안 들어 보셔도 되겠습니까?”
“설명은요, 무슨. 아니, 그냥 됐습니다.”
“그래도 제가 업세일링을 하려고 그러는 건 아닌데….”
“업세일링 그거 하셔도 되는데, 지금 저는 차를 고민할 여유가 없어요. 그냥 이거면 됩니다. 이게 출고가 제일 빨리 되는 게 맞죠?”
“네, 이건 사인하시면 오늘 당장이라도 보내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 차가 필요해서 이걸로 한 거예요. 제가 오늘 이 차 타고 퇴근할 거라고 아침에 택시 타고 출근했거든요. 바로 좀 보내 주세요.”
자동차 영업맨이 아주 색다른 경험을 했다는 듯 실감을 못 하고 나간 뒤였다.
“차 새로 바꾸시는 겁니까?”
“네, 박 과장님이랑 똑같은 차로 하나 주문했습니다.”
“차를 꼭 편의점에서 컵라면 고르듯이 사시네요.”
“출퇴근용으로만 쓸 거니까요.”
집에 그렇게 근사하고 멋진 차들이 4대나 있는데, 출퇴근용으로 쓸 차에 고민 같은 걸 할 이유는 없으니까.
사무실 안을 대충 둘러봤다.
확실히 공채라는 큰 프로젝트를 앞두고 있어서인지 사무실의 공기가 바뀌었다.
눈치로만 일을 하는 걸로 보이던 고 부장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고, 입으로만 일을 하는 김 차장 역시 오전 내내 부서 협조를 받으러 다니느라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을 거의 못 봤다.
그렇게 하루가 다시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 통합 리크루팅을 부서별 리크루팅으로 바꾸자는 기획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해야 하는 날이 다가왔다.
우리 인사부의 기획인 만큼 고 부장과 김 차장은 물론이고 발표에서 날 도와야 하는 정 대리와 HRD의 박 과장까지 함께 대회의장으로 향했다.
아직은 대회의장 안에 우리 인사부 사람들이 전부였고, 나와 정 대리는 부서장들, 임원들이 모이기 전 간단한 리허설을 하며 발표에 손발을 맞춰 보았다.
정 대리는 발표자인 나보다 더 긴장을 하고 있었고, 난 그런 정 대리의 모습이 우습기까지 했다.
어느덧 부서장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어 빈자리를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프레젠테이션을 앞두고 내 모습에 긴장감이 너무 느껴지지 않아서였을까, 정 대리가 조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과장님, 그래도 사장님까지 직접 참관을 하는 자리인데, 그렇게 건성건성 하지 마시고 실제로 하는 거처럼 해 보세요.”
“실제로 하는 게 아닌데, 어떻게 실제로 하는 거처럼 합니까? 실제가 되면 실제로 하겠죠.”
“방금 랩하신 거 아니죠? 라임 괜찮은데요?”
“스웩이 좀 느껴졌습니까?”
“우와, 이젠 스웩도 아십니까?”
“그 정도는 기본이죠.”
나와 정 대리가 주고받는 농담에 몰래 웃음을 숨기는 박 과장.
김 차장은 너무 많이 변해 버린 나의 모습에 여전히 의심을 풀지 못하고 있었고, 고 부장은 입을 꼭 다문 채 부서장, 임원들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부장님.”
“네.”
얼른 생각을 정리하며 날 쳐다보는 고 부장.
“이번 달 인사부 전체 회식은 언제쯤으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전체 회식이요?”
“네.”
“글쎄요. 하긴 해야 되는데….”
“오늘 하는 건 어떻습니까?”
“오늘이요?”
“네, 지난 며칠간 이거 프레젠테이션 준비한다고 야근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다들 고생했잖아요. 다음 달 회식이야 공채 다 끝내 놓고 하면 되는 거고, 이번 달 회식은 지금 안 하면 못 챙겨 먹을 수도 있을 거 같은데, 그냥 기획안 확실히 통과시켜 놓고, 그 기분 살려서 오늘 바로 하는 게 어떨까 해서요.”
내 말에 박 과장이 신중을 기하는 표정으로 조심히 말했다.
“통과만 되면야 못 할 것도 없지만, 일단 지금은 회식 생각보다는 프레젠테이션 생각에만 정신을 집중시키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과장님.”
“박 과장님도 오늘 전체 회식에 동의하는 걸로 알고 있을게요.”
곧 대회의장 문이 양옆으로 열렸고, 남필우 사장이 다른 임원들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왔다.
“사장님, 그리고 전무님 들어오십니다.”
단상 뒤로 선 고 부장이 스탠드 마이크에 입을 갖다 대며 자리에 모인 부서장들의 주의를 사로잡았다.
저 무리 속에 조동희 전무도 함께 있다고?
그럼 남 사장 옆에서 한 발 정도만 뒤로 떨어져 걷고 있는 저 키 작은 친구가 조동희 전무란 말인가?
그렇겠네.
입장하는 순서를 보나, 모든 면에서 저 무리 속에 전무가 끼어 있다면 저 키 작은 친구가 조동희 전무일 수밖에 없겠다.
잠깐.
저 친구….
며칠 전 박 과장과 홍어회에 막걸리를 마시며 조 전무에 대해 물었을 때, 어쩌면 입사 연도상 내가 아는 친구일지도 모르겠다 생각을 했는데, 낯이 익네.
내가 그룹 본사 전략 기획 본부의 일반 사원 이름까지는 다 기억을 못 하지만, 조 전무 저 친구… 내가 오다가다 한두 번 정도는 마주쳤던 기억이 있는 친구다.
젊었을 당시 얼굴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네.
특히 작지만 단단한 체구, 특히 눈빛이 살아 있단 기분이 들어 인상이 퍽 괜찮다고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이런 걸 보고 감회가 새롭다고 하는 거겠지?
지금까지는 이 회사에 내가 아는 인물이 한 명도 없어 그저 새로운 세상에 적응을 한다는 기분만 있었다면, 비록 많은 세월을 맞았지만 안면이 있는 직원을 이렇듯 다시 보고, 특히 그 직원이 전무의 위치까지 올라와 있는 걸 보니까 기분이 참 묘했다.
자네란 말이지.
자네가 그동안 홍준이 놈 옆에서 많은 방향을 제시해 왔다던 그 조동희 전무란 말이지.
재밌네.
먼저 와 대기를 하고 있던 전 부서 부서장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가벼운 고갯짓으로 사장 남필우와 전무 조동희에게 목 인사를 전달했고, 그 인사에 짧지만 여러 번 고개를 끄덕이며 남 사장이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남 사장이 자리에 앉기까지 기다렸다가, 그 모습을 확인한 뒤 자리에 앉은 조 전무는 남 사장을 대신해 자리에 서 있는 부서장들을 향해 앉으라는 손짓을 보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