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라고 있는 자리가 임원 자리 아닙니까?
프레젠테이션 진행은 고 부장이 직접 맡아 나갔다.
단상 뒤로 선 고 부장.
그는 남 사장과 조 전무, 그리고 이외 임원진 및 부서장들을 향해 절도 있는 인사를 건넨 뒤 스탠드 마이크에 입술을 붙이기 위해 자세를 앞으로 살짝 숙였다.
“지금부터 저희 인사부 HRM팀에서 준비한 2022년도 하반기 공채 리크루팅 변경 기획에 관한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하겠습니다. 발표자 손정훈 과장, 앞으로 나와 주세요.”
미리 챙기고 있었던 무선 마이크 성능을 다시금 확인하며 스크린 앞으로 섰다.
고 부장은 눈빛으로만 지금부터 내가 이 자리를 이끌어 가야 한다는 걸 전달하며 더는 마이크 쪽으로 자세를 숙이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인사부 HRM의 손정훈 과장입니다.”
내실도 하나 없어 보이는 것들이 한자리 꿰차고 앉았다는 이유로 무게 잡는 꼴들이라니….
손중길이 성격 많이 죽었다.
성격대로 하자면, 회사 꼴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도 밥값을 하고 있다는 식으로 거들먹거리고 앉아 있는 저 임원이라는 놈들부터 죄다 모가지를 날리고 시작을 했을 거다.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발표 진행의 태도가 눈에 거슬렸던지 남필우 사장이 미간을 찡그리기 시작했다.
조동희 전무 역시 꿈틀거리는 눈썹으로 옆에 앉은 남 사장의 심기를 읽고 있었고, 다른 임원진들 역시 눈알만 굴려 가며 남 사장과 나를 차례대로 훑느라 여념이 없었다.
발표 자료 설치를 도와준 정 대리는 경악하듯 두 눈을 크게 뜨며 날 쳐다봤지만, 난 그런 정 대리를 향해 피식하고 미소를 지어 주는 것으로 그의 긴장을 비웃어 주었다.
“2018년 상반기, 하반기 공채 최종 합격자 토털 178명. 현재 근무자 총 118명. 이하 동일 단어는 생략을 하겠습니다. 2019년 토털 169명. 현재 근무자 104명. 2020년 토털 189명. 현재 근무자 137명. 2021명 토털 165명. 현재 121명. 올해 상반기 공채 최종 합격자 78명. 현재 근무자 67명. 다음 자료 보시겠습니다.”
리모트 컨트롤로 재빨리 다음 화면으로 넘겼다.
“2018년 특별 상시 채용을 통해 이뤄진 계약직 인력 수급 건수 108건. 그다음 해 계약 연장 실패로 인한 자동 퇴사 99건. 여기에서 자동 퇴사라는 건 다들 아시겠지만, 회사가 그들의 계약을 연장해 주지 않은 걸 뜻합니다. 정직원 전환 성공 7건. 건강 및 적성의 사유로 인한 희망 퇴사 2건. 이하 동일 단어는 생략하겠습니다. 2019년 토털 124건. 자동 퇴사 108건. 정직원 전환 4건. 업무 환경 및 불평등 대우의 사유로 인한 희망 퇴사 12건….”
스크린에 띄워진 항목들을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실어 읽어 내려갈 때였다.
“저기 손정훈 과장님….”
임원 배석 어딘가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요약을 해 놓은 내용이 화면에 다 나와 있는데, 굳이 그걸 다 일일이…!”
난 눈에 힘을 실어 나의 발표에 끼어든 임원 하나를 쏘아보았다.
말은 하지 않았다.
그냥 그가 시선을 피할 때까지 계속 쏘아보기만 했다.
“…….”
그가 시선을 피하는 걸 확인한 뒤 다시 시작했다.
“계속해도 되겠습니까?”
“…….”
“계속하겠습니다. 2020년 토털 119건. 자동 퇴사 113건. 정직원 전환 0명. 업무 환경 및 불평등 대우 등의 사유로 인한 희망 퇴사 6명. 2021년 토털 135건. 아직 계약이 진행되고 있는 인원이 많은 관계로 다음 내용을 생략했습니다. 올해 내용 역시 포함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다시 다음 화면으로 넘겼다.
대회의실 안의 공기는 나의 일방적인 발표 태도로 인해 조금씩 얼어붙어 가고 있었다.
스크린 화면 속엔 아무런 설명도 붙이지 않은 8,496만 원이라는 금액만 크게 띄워진 채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의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었다.
“8,496만 원. 혹시 이 금액이 어떤 금액인지 아시는 분 계십니까?”
“손정훈 과장.”
이번엔 조동희 전무가 직접 마이크에 입을 갖다 대며 날 불렀다.
“네, 전무님.”
“발표 태도가 지나치게 고압적인 느낌이 드네요. 사장님을 포함해서 지금 여기 있는 사람 중에 손정훈 과장에게 뭔가를 배우기 위해 시간을 내서 자리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발표 태도에 예의와 경우를 붙이세요. 꼭 이 자리에 모인 모두를 상대로 싸우자는 거 같아요.”
그 말에 잠시였지만, 자리에 모인 임원들이 가볍게 웃기 시작했다.
웃어?
지금 웃음이 나온다고?
상황의 심각성을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고 있는데도 웃는다?
지금 웃은 놈들 얼굴 내가 다 기억했다.
“8,496만 원.”
“……!”
난 조동희 전무의 지적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다시 발표를 이어 갔다.
이에 남필우 사장만이 의미 모를 미소를 흘릴 뿐, 나머지 임원 및 각부 부서장, 그리고 우리 인사부 사람들의 얼굴 표정은 흙빛이 되어 버렸다.
조동희 전무 역시 불쾌한 심정을 숨기지 못하고 아랫입술을 꽉 깨무는 모습을 내게 보여 주었다.
“공개 채용을 통해 선발된 신입 사원에 한해 한 명당 평균적으로 1년에 8,496만 원이라는 금액을 회사가 부담해야 합니다. 평균. 여기에는 당연히 그들의 연봉과 4대 보험, 교육 지원비, 장려 대출, 사내 동호회 지원금, 신입 연수비 등등등… 실제 직원이 가져가는 연봉보다 훨씬 더 큰 금액이 붙어서 만들어진 액수죠.”
그리고 다시 다음 화면으로 넘겼다.
“이건 이번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면서 각부 부서장님, 과장급 이상 관리자분들을 통해 조사한 내용입니다. 신입 직원을 받았을 때, 그들에게 믿고 업무를 줄 수 있게 되기까지, 즉 독립적인 업무가 가능해질 때까지 어느 정도 기간이 필요한 거 같은지를 물었습니다. 거기에 대한 부서별 부서장님 이하, 관리자분들의 대답입니다. 이 역시 사람에 따라 보는 관점이 다를 수 있기에 평균치를 올린 겁니다. 한번 보시죠. 기획 마케팅 1년 6개월, 재무 1년 4개월, 구매 1년 8개월, 영업 11개월, 전산 1년 9개월….”
너무 많은 부서가 지난 30년간 쓸데없이 세분화되어 있었기에 그걸 다 일일이 큰 소리로 읽어 주는 데에만 1분 가까이 걸렸다.
“이걸 다 다시 합쳐서 평균을 내면 18개월, 1년 6개월이라는 평균값이 나옵니다. 자, 그럼 중간 점검을 한번 해 보겠습니다. 업무 부서에서는 한 명의 신입이 부서에 들어왔을 때, 그 신입을 열심히 교육한 뒤, 믿고 업무를 맡길 수 있게 되기까지 1년 6개월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정작 입사 후 2년 미만의 퇴사자들 비율이 전체 퇴사자 비율의 50퍼센트를 넘어가고 있습니다. 2년 전 2020년 수치만 놓고 보겠습니다. 상·하반기 공개 채용을 통해 총 189명을 선발했고, 2년이 지난 지금 그중 137명만이 퇴사를 하지 않고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임원 모두가 사태의 심각성 앞에 남 사장과 조 전무의 눈치를 보느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2년 사이에 52명이 퇴사를 했습니다. 8,496만 원. 귀찮습니다. 8,500만 원 잡고요. 52명도 계산하기 귀찮습니다. 그냥 50명 잡고요. 이거 계산하면 얼마야? 42억 5천만 원. 대략 40억 정도 되는 돈이 본전도 찾지 못할 곳에 아무 생각 없이 버려진 겁니다.”
“…….”
“그런데 이걸 그냥 단순히 40억으로만 환산할 수 있는 걸까요? 명문대 나와서 화려한 스펙을 장전해 입사를 한 인재. 그런데 그 인재를 막상 업무 현장에 데려다 놓고 뚜껑을 열어 보니까 아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처음부터 다 가르쳐야 합니다. 그걸 누가 가르칩니까? 네, 바로 1년 차, 2년 차… 바로 위에 선배들이 가르치겠죠. 옛말에 애 엄마한테 집에서 애 볼래, 밖에 나가서 밭맬래 하고 물어보면 백이면 백 밖에 나가서 밭매겠다고 대답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옆에 앉혀 놓고 뭔가를 가르쳐 가며 일을 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죠.”
“…….”
“네, 그 어려운 일. 당연히 누군가는 해야죠. 해야 하는데, 가르쳐 놓으면 나가고, 일 좀 시킬 만하면 나가고… 그렇게 되면 가르치는 입장에서 가르칠 맛이 나겠습니까? 거기에서 오는 업무적 피해를 어떻게 40억하고 비교를 하겠습니까?”
왜 그 힘든 일을 사장, 전무, 임원 딱지, 부서장 딱지를 달고 앉아 있는 너희들이 직접 하지 않고 너희보다 훨씬 더 적은 임금을 받으며 일하는 직원에게 시키냐는 말이, 이런 문제점을 빠르게 파악하고 개선을 하라고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너희는 도대체 그동안 뭘 하고 있었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저기, 잠깐만요. 손정훈 과장님, 잠깐만.”
누군지도 모르겠다.
임원 쪽 자리에서 누군가가 펜을 손가락 사이에 끼운 손을 들며 말했다.
“사장님, 전무님까지 모신 지금 이 자리에서 과연 기획안 발표를 하겠다는 건지, 아니면 우리 임원진에 대해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현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네요.”
그때부터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에 탄력을 받았기 때문일까.
그의 목소리에 더 힘이 실리고 있었다.
“물론 무슨 의도로 이런 내용을 발표했는지는 알겠어요. 알겠는데 지금 손정훈 과장이 나열한 그런 내용은 우리 재경모직만의 인사 문제가 아니에요. 지금 대한민국 전체가 앓고 있는 고용, 채용의 큰 문제점입니다. 이걸 꼭 우리 재경모직만의 문제인 것처럼 발표를 해 버리면, 우선적으로는 인사부 스스로 누워서 침 뱉기를 하는 것밖에 안 되는 거 아닙니까?”
곧바로 난 그 지적을 한마디로 정리해 주었다.
“제가 지금 하고 있는 게 발표 같습니까?”
“……?”
“제가 이런 내용의 발표를 회장님과 아무런 상의 없이 준비했겠습니까?”
“……!”
“혹시 지금 이 자리에 회장님을 모셔야 했던 겁니까?”
웅성거림으로 가득 찼던 대회의장 안엔 숨소리조차 흐르지 못하고 있었다.
나 손중길이가 고작 이런 놈들 입을 막아 버리겠다고 아들의 존재를 팔아먹게 될지 누가 상상이나 해 봤겠나.
“그리고 지금 그 말씀은 고용의 문제가 대한민국 기업 전체, 사회적 문제이기 때문에, 문제인 걸 알면서도 그냥 계속 이대로 상황에 끌려가자는 말씀입니까?”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제가 여쭤보겠습니다. 만약에 경기가 너무 안 좋아서 대한민국의 모든 기업이 하나같이 큰 적자를 보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조차 우리한테 생긴 적자도 사회적 흐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씀하실 수 있으십니까?”
“…….”
“회장님은 안 계시지만 사장님, 전무님 다 옆에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 회사에 생긴 적자도 사회적 흐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마음 편하게 다시 경기가 좋아질 때까지 기다리고만 있어야 하는 겁니까?”
“…….”
“그리고 이게 왜 우리 인사부 얼굴에 제가 침을 뱉고 있는 겁니까? 인사는 인사의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뽑으라고 해서 뽑았고, 교육하라고 해서 교육을 했습니다. 인사부가 더해야 할 내용이 있을 거 같으면 임원분들께서 방법을 모색해서 지시해 주셔야죠.”
최대한 진정을 하며 목소리를 낮춰 말을 끝맺었다.
“그러라고 있는 자리가 임원 자리 아닙니까?”
나란히 앉아 있으면서도 완벽히 대조가 되는 얼굴.
그 대조되는 표정만으로도 난 누굴 내 옆에 세워야 하는지, 누굴 내 옆자리를 미끼로 활용을 해야 하는지 바로 구별을 할 수 있었다.
내가 만들어 가고 있는 이곳 대회의실 분위기에 자신의 능력, 자질에 대한 부끄러움을 숨기고 있는 남 사장.
그리고 남 사장과는 반대로 무척 불편한 심기를 모두 다 노출하고 있는 조 전무.
역시 지금부터 남 사장을 내 옆에 세워야 하는 걸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