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가 좀 도와드립니까? (29/303)

제가 좀 도와드립니까?

“부서별 리크루팅. 상시 특별 채용 때 쓰는 방식이죠.”

더 이상 나의 발표를 가로막는 사람이 없었다.

“분명 채용 과정에 시간과 비용, 그리고 각 부서의 인적 소모가 많이 일어난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단점이 앞서 제가 통계로 보여 드린 인건비 낭비를 확실히 잡아 줄 수 있을 거라는 장점도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확신합니다.”

대회의실 안 임원진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눈에 익히며 말을 이어 나갔다.

“만약 각 부서 관계자분들이 이번 하반기 공채에 진심을 담아, 좋은 인재 선발을 함께해 주신다면 틀림없이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는 걸 말이죠.”

모두가 입을 꼭 다문 채 서로의 눈치를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공부를 안 했으면 시험 성적이 안 좋은 게 정상입니다. 그런데 공부를 안 해 놓고 좋은 성적을 받길 바라는 건 문제죠. 좋은 성적 받겠다고, 혹은 공부 안 한 걸 들키지 않겠다고 커닝을 하고 오답을 맞는다고 우기고… 최소한 그런 분들은 이 회사에 없으실 거라 믿습니다.”

“…….”

“지금이라도 안 늦었으니까 지금 이 성적이 내 성적이라는 걸 인정하고, 정신 차려서 공부하면 됩니다. 이상입니다.”

대회의실 안으로는 내가 발표를 모두 끝낸 후로도 꽤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불이 켜졌고, 서로의 표정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회의실 안이 밝아진 후에야 남 사장과 조 전문의 표정을 읽으며 눈치를 살피는 사람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정 대리는 입을 반쯤 벌린 채 내가 사장, 전무, 임원들이 모두 모인 이 자리에서 마치 그들을 혼을 내듯 공격적으로 퍼부어 버린 발표에 질려 버린 표정을 하고 있었고, 의외로 박 과장은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김 차장 역시 뭔가 느낀 게 많은지 혀끝으로 입술을 적셔 놓고 그동안 내가 보지 못했던 단단한 표정으로 날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고 부장은 단상 뒤에서 스탠드 마이크만 만지작거리며 사장 이하 임원들의 표정 변화를 읽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동안 우리가 공부 안 한 걸 들키지 않겠다고 커닝까지는 아니지만, 오답을 정답으로 우기고 있었던 건 맞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드네요.”

남필우 사장이었다.

“이 인사라는 건 지극히 시대상에 따라 답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기에, 어제까지는 정답이었던 게 오늘 와서 오답이 될 수도 있는 거죠. 그리고 인사부에서 준비한 자료를 보니까 부서별 리크루팅이 새로운 정답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그간 해 왔던 리크루팅 방식이 오답이었다는 건 부인할 수 없군요. 전무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깊은 눈으로 날 주시하고 있던 조동희 전무가 그 시선을 무겁게 거두며 스탠드 마이크를 자기 쪽으로 구부렸다.

“인사의 핵심은 사람을 쓰는 게 아니라 사람을 키우는 거죠. 가능성 있는 인재를 뽑아서 재경의 사람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리크루팅 방식이 뭐가 됐든 크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거기다 인사부에서 이렇게까지 준비를 철저하게 해서 자신감을 발표했는데, 그 자신감이 얼마나 좋은 결과를 가져올지 내심 기대도 됩니다.”

조동희 전무까지 마이크에서 입을 떼는 순간 임원들의 방향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단상 뒤에서 고 부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다른 의견이나 질문하실 내용 있으신 분 계십니까?”

“…….”

모두가 침묵하고 있었다.

그 침묵 속에서 고 부장은 이쯤에서 프레젠테이션을 정리하자는 식의 조동희 전무 사인을 눈빛으로 받았다.

“그럼 이번 인사부 HRM에서 준비한 2022년도 하반기 공채 리크루팅 변경 기획에 관한 프레젠테이션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단상을 돌아 고 부장이 내 옆으로 섰고, 난 고 부장과 신호를 맞춰 자리에 모인 임원진과 부서장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가장 먼저 회의장을 빠져나간 건 남필우 사장이었다.

들어올 때와는 달리 조동희 전무와 따로 움직이고 있었다.

절반쯤 되는 임원의 무리가 남필우 사장을 따라 함께 움직였고, 나머지 절반의 무리는 조동희 전무를 기다리거나 혹은 다른 부서장을 개인적으로 불러 뭔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이탈하고 있었다.

“정 대리.”

“네, 과장님.”

“뒷정리 좀 부탁해요. 나는 지금 좀 가 볼 곳이 있어요.”

꽉 막힌 긴장감을 긴 한숨으로 풀어내며 정 대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박 과장이 정 대리를 도와 정리를 하고 있는 동안 난 고 부장과 김 차장에게 양해를 구했다.

“저 지금 전무님을 좀 만나 봐야 할 거 같은데, 먼저 나가 봐도 되겠습니까?”

조동희 전무를 만나 봐야 할 거 같다는 말에 고 부장과 김 차장은 각기 다른 표정으로 놀라움을 표현했다.

아마도 고 부장은 불안함이 크게 섞인 놀라움이었을 것이고, 김 차장은 네가 왜 전무를 만나는 것이냐는 순수히 궁금증에 의한 놀라움이었을 것이다.

난 그 둘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얼른 고개를 숙여 몸을 돌렸다.

그리고 대회의실 출입문 앞에서 다른 임원들에게 뭔가 지시를 내리고 있는 조동희 전무 쪽으로 다가갔다.

나의 모습에 조동희 전무 주위로 모여 있던 몇몇 임원들이 눈치를 살피며 길을 열어 주었다.

“지원 감사합니다, 전무님.”

짧지만, 최대한 예의를 갖춰서 조동희 전무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올해로 재경 생활 32년 차인데 오늘 같은 발표는 처음 참관해 봐요. 꼭 회장님께 꾸중을 듣는 기분으로 앉아 있었어요. 하하하.”

주위로 모여 있던 임원들 모두가 아주 어색한 미소로, 조동희 전무가 보이고 있는 웃음을 흉내 내고 있었다.

“전무님께 따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조동희 전무는 곧장 대회의실 스크린 주위로 모여 있는 우리 인사부 사람들을 훑었다.

그러더니 자기 주위로 모여 있는 임원들에게 볼일들 보러 올라가란 말만 남기고, 날 자기 사무실로 데리고 갔다.

* * *

조동희 전무.

그날 홍어회 전문점에서 조동희 전무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던 나의 질문에 박종근 과장은 짧은 그의 일화로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이해시켜 주었다.

“이런 표현이 거창하게 느껴지실지는 모르겠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조동희 전무님이라고 하면 기업인보다는 정치인에 가까운 인물이다… 라는 인상이 가장 강합니다.”

“정치인이요?”

“네. 물론 능력이 좋은 분이시죠. 재경모직의 전무 자리까지 올라가 계신 분인데 능력은 기본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다?”

“정치력이 대단하신 분이에요. 지금은 재경모직에 계시지만 그룹 본사 전략기획본부장 출신으로 항공, 식품에서도 임원으로 근무를 꽤 오래 하셨던 분입니다.”

“재경 그룹의 모든 구조를 현장에서 다 파악하고 있는 인물이란 뜻이네요?”

“현 임원 중엔 삼사 임원을 모두 거친 유일한 분이시죠.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회장님의 세 번째 눈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계시는 분이세요.”

“회장님의 세 번째 눈이요?”

“전무님이 계시는 자리는 회장님이 안 계셔도 회장님이 계시는 자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회장님과 밀접한 관계라는 거죠. 지금 사장님이 재경모직의 사장으로 오신 데에도 조동희 전무님의 역할이 컸습니다.”

“어떻게요?”

“혹시 전무님이 사장님의 그룹 본사 전략 기획 본부 3년 선배라는 건 알고 계십니까?”

“정확한 연차까지는 몰라도 같은 전략 기획 본부에서 근무했었다는 정도는 압니다.”

“라인이 완전 달랐죠. 사장님은 그…”.

“제 큰아버지 라인이었겠죠.”

“네, 반대로 전무님은 회장님 라인이셨어요. 전 회장님께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신 이후에 지금 회장님께서 그룹을 이끌기 시작하시면서 남필우 사장님을 고립시키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내치는 분위기였다고 이해하면 될까요?”

“그런 거였겠죠. 그런데 그때 회장님 옆에서 지금은 한 명이라도 회장님 사람을 더 만들어서 조직의 기반을 새로 다질 때이지, 그룹의 핵심 인사를 내치게 되면 남아 있는 전 회장님의 인물들까지 와해가 될 수도 있다며 오히려 재경모직의 사장 자리를 추천했던 게 조동희 전무님이었다고 합니다.”

“오….”

“이게 말은 쉽지, 당시 조동희 전무님 입장에선 상당히 위험한 도박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남필우 사장님은 재경가의 일원이지 않습니까. 당시 전무님 입장에선 회장님의 최측근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랬겠죠. 거기다 라인이 달랐으니 그룹 본사 전략 기획 본부의 선후배 사이였더라도 분명 사장님과 전무님의 관계는 어색했을 것이고.”

“네, 그런데도 남필우 사장님을 회장님이 끌어안아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추천하신 거죠.”

“이중으로 보험을 들어 놓은 거네요. 회장님께는 자신의 자리보다 회사의 미래를 더 걱정한다는 충심을 보일 수 있었을 것이고, 사장님을 통해서는 자신이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양보하면서 가장 든든한 아군을 만들어 낸 거고.”

“그런데 거기가 끝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회장님의 최측근 자리에 사장님이 앉으실 수 있게 최선을 다하셨죠.”

“자신이 만들어 낸 수가 얕지 않다는 걸 증명해 나갔단 말이 되는 거네요.”

“대단하신 분이죠.”

하지만 내 눈엔 전혀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결국엔 실력이 아닌 눈치와 처세로 자기 자리를 지켜 내고 있다는 뜻 아니겠나.

나는 눈치와 처세는 순발력일 뿐이지, 결코 순발력을 무기로 삼는 인물을 중요 자리에 앉히지 않았다.

내가 이끄는 재경이었다면 딱 임원 승진까지가 적당했을 인물.

그날 홍어회 집에서 박 과장에게 들은 이야기들을 염두에 두며 조 전무와 마주 보고 앉아 얼굴 인상을 가만히 살펴봤는데, 확실히 눈빛은 살아 있고 얼굴에 재복은 있어 보이지만 남 사장에게 비할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훈이 놈의 모습으로 뭔가를 해 나가야 할 지금의 내게 당분간은 꼭 필요한 인물임은 틀림없었다.

내가 봤을 때 조동희 전무 이 친구는 정치력이 뛰어나다고 하기보다는 시대 운을 좋게 타고난 인물이다.

그 운을 잘 살렸다.

내 장담하는데, 홍준이 놈이니까 옆에 두고 귀하게 쓰고 있는 거지, 홍명이 놈이 재경을 이끌었다면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조 전무에게 차를 한 잔 대접받았다.

그 차를 마시면서 조 전무가 말했다.

“회사 임원들과 공식적 업무로는 첫 만남이었는데, 그 첫인상을 너무 강하게 남긴 거 같아요? 발표가 너무 셌어요.”

“제가 번거로운 걸 별로 안 좋아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시작부터 이렇게 강하게 한 번 물어 놔야, 제가 있는 동안은 앞으로 인사부에서 올리는 기획안이 쉽게 통과가 될 거 아닙니까.”

네가 정치에 강하다면, 그 정치로 내가 널 묶어 주마.

“그 말은… 혹시 이런 자리가 필요해서 공채 리크루팅 방식 변형 기획안을 올렸다는 겁니까?”

확실히 눈치는 빠르네.

근데 그래서 뭐?

빨라 봤자, 그게 눈치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고의로 생략하고 조동희 전무에게 옛날이야기를 하나 들려주었다.

“전무님은 제 할아버지 손중길 회장님을 실제로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럼요. 직접 주시는 술도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내가?

음… 이건 내가 기억이 안 난다.

그런데 그랬을 수도 있다.

특히 그룹 본사 전략 기획 본부였으니, 개별적으로 내가 그러지는 않았겠지만, 해외 출장이나 다른 특수한 회식 자리에서 술 한 잔 정도 직접 따라 줬을 수는 있다.

내 직원들 동기 부여 차원에서 일부러 그런 자리를 만들어 직접 술잔을 채워 줬던 적이 꽤 있다.

“제 할아버지는 그러셨다고 합니다. 전무님도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는데, 제 할아버지는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회사에 입사해서 일을 배우실 때 꼭 자기 사람을 자식들에게 붙였다고 합니다.”

“…….”

“직접 챙기셨지만, 결국엔 직접 챙기는 게 아니셨죠. 꼭 자기 사람을 통해서 두 아들의 가능성을 평가하셨고, 자식들이 성과가 좋게 나오거나 그 반대일 경우에도 그 상벌을 자식들이 아닌 자기 사람들에게 대신 내렸다고 들었습니다.”

“네, 유명한 일화죠.”

“그랬을 겁니다. 그걸 숨기지도 않으셨으니까요. 지금 회장님은 어떠십니까?”

긴장하지 마라, 이 친구야.

난 아직 시작도 안 했다.

정치 9단이라는 놈이 뭐 이 정도에 긴장을 하고 그러나.

“유명한 일화가 그거 말고 하나 더 있지 않습니까?”

“다른 유명한 일화요?”

“네, 하긴. 그건 지금 회장님에 관한 일화이기 때문에 다들 입조심들 하고 있으려나요?”

“무슨 일화 말이죠?”

“회장님과 제 큰아버지가 이렇게 그룹 후계자 자리를 놓고 열심히 경영 수업을 받고 있을 때 문만호라고 아실 줄 모르겠는데, 제 할아버지의 처가 쪽 큰조카 되는 분이 재경건설 전무로 있으며 제 큰아버지를 데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연기 어설픈 거 봐라.

“그런데 그 문만호 전무를 제 아버지가 포섭하셨죠.”

“그, 그걸….”

“그리고 큰아버지의 회사 생활 일거수일투족이 제 할아버지뿐 아니라 제 아버지한테도 흘러 들어갔다고 합니다.”

“…….”

“그룹 후계자 자리가 큰아버지 쪽으로 확정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했고요. 그걸 제 할아버지가 모르실 리가 없었으니까요. 당시 그룹 본사 전무님이셨던 장태산 그분이 제 할아버지한테 그렇게 물으셨다고 합니다. 그걸 도대체 어떻게 알아냈냐고. 그때 제 할아버지가 뭐라고 대답을 하셨는지 아세요?”

“…….”

“내 눈에는 다 보이던데, 어떻게 자네들 눈엔 그런 게 안 보일 수 있는지 내가 다 묻고 싶다… 라고 대답을 했답니다. 희한하죠? 제 눈에도 그런 게 다 보입니다.”

놀라기는.

척 보면 딱이지.

도대체 나의 재경이 어쩌다 이렇게 엉망이 되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간땡이가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는 놈이 재경모직에서 실력자 소리를 들으며 전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느냐고!

“사람 욕심에 어디 끝이 있겠습니까? 앉으면 눕고 싶고, 말 타면 종 거느리고 싶은 게 사람 욕심인데. 안 그렇습니까?”

난 자세를 앞으로 좀 더 당기며 조 전무의 두 눈을 응시했다.

“그런데 전무님의 욕심에 왜 제가 희생양이 되어야 합니까? 모르는 척하지 마시고요. 제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그렇게 어설프게 모르는 척을 해 버리시면… 그건 뒤통수가 아니라 기만이 되는 겁니다.”

“……!”

“왜 기만까지 하려 드세요? 제가 만만합니까? 아니면 제가 아니라 우리 집안, 이 재경 그룹 전체가 만만하신 겁니까?”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넌 정말 운이 좋은 놈이니까.

지금의 내게는 너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냐.

“앞으로는 저에 관해 좋은 내용만 회장님께 전달하시게 될 겁니다. 그건 제가 그렇게 만들어 드릴게요. 본사 상무를 상대로도 지금까지 해 오신 대로 계속하시면 됩니다. 대신….”

“…….”

“앞으로는 저도 좀 알아야겠습니다. 본사 상무에 대해서. 그래야 공평할 거 아니에요. 본사 상무 앞에서는 본사 상무 편인 것처럼 하세요. 대신 제 앞에서는 제 편인 것처럼 하셔야 할 겁니다.”

“가족, 형제끼리 네 편 내 편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걸 돕고 계신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니까, 웃기네요. 네 편 내 편이 왜 없습니까? 세 명만 모여도 한 명 심판 보게 하고, 싸우면서 그 심판 내 편 만들려고 하는 게 사람인데. 네 편, 내 편. 가족들끼리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너무 한쪽 편만 들어 왔단 생각 안 드세요? 제가 지난 6개월간 그걸 모르고 있었겠습니까? 재경모직 안에서 일방적으로 본사 상무 편에 서 있는 존재가 전무님일 거라는 확신을 가지기 위해 지난 6개월이 필요했었던 거란 생각은 안 드세요?”

“……!”

“제가 제 편만 들어 달라고 하는 게 아니잖아요. 하던 대로 하세요. 대신 앞으로 제 앞에선 제 편을 들어 달란 소립니다. 기회를 드리는 거라고요, 그간 저와 우리 집안, 재경모직을 기만해 왔던 걸 만회할 기회. 본사 상무 옆에 사람 하나 심는 게 저한테 크게 어려운 일일까요? 안 어렵습니다. 그게 왜 어렵습니까? 근데도 그간 기만당해 온 게 기분이 나빠서 저는 그 일을 꼭 전무님한테 부탁을 드려야겠습니다.”

“제가 지금 이 대화 내용을 회장님, 그리고 본사 상무님께 전달하면 입장이 좀 난처해지실 것도 같습니다만.”

“설마 제가 그딴 걸 걱정할 거 같아요? 사람 보는 눈이 영 없으시네. 근데 그건 그렇고 왜 전무님이 내 걱정을 하지? 난 아무리 봐도 지금부터 전무님은 내 걱정이 아니라 전무님 걱정을 하셔야 할 거 같은데….”

결국,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피식하고 웃음을 흘리는 조 전무였다.

웃기는.

그렇게 웃는다고 해서 안 괜찮은 네 심정이 내 눈에 괜찮게 보이겠어?

“재경에서 32년. 삼사 임원을 거쳐, 지금은 재경모직에서 전무 일을 보고 있어요. 이미 재경 그룹 안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봤는데, 제가 무슨 욕심이 더 크게 있겠어요? 제 동기, 친구들 다 은퇴해서 집에서 손주 놈들 재롱떠는 거 보고 있습니다. 부럽기도 하죠. 저도 앞으로 그렇게 살면 됩니다.”

“그렇게 하실 수 있게 제가 좀 도와드립니까?”

조 전무는 날 쳐다보고 있던 눈을 가늘게 뜨기 시작했다.

“전무님이 진심으로 원하신다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 거 같은데요.”

“그럼 저한테 보여 주세요.”

“뭘요?”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는 걸 보여 달라고요.”

“그걸 뭘 또 귀찮게 보여 주고 자시고 합니까. 그냥 결과로 말하면 되는 거지.”

“…….”

“좋습니다. 뭐 어떻게 보고 싶으신 건데요?”

“하반기 공채 결과로 보여 주세요. 발표 때 보여 줬던 자신감처럼 실제로도 과장님이 인사 분위기를 한 번에 바꿀 수 있다면, 모두가 만족할 만한 결과를 만들어 낸다면 그땐 제가 과장님 옆에 서겠습니다.”

그 대답에 웃으며 내가 말했다.

“기회를 드린 건데, 그 기회에 조건을 다시네요? 근데… 생각해 보니까 전무님 입장에선 도박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죠?”

“…….”

“오늘 마치고 인사부 전체 회식을 할 건데요, 그 회식에 찬조 좀 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모두가 만족할 만한 결과를 만들어 내려면 뭘 좀 잘 먹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회식을 전무님께서 직접 찬조를 해 주셨다고 하면 아마 다들 큰 힘이 날 겁니다.”

조동희 전무가 재킷 안 주머니에서 장지갑을 꺼내 카드 한 장을 내게 건넸다.

“앞으로 기대해 볼게요.”

“그 기대 저도 같이하겠습니다. 그럼 일어나 보겠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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