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있으면 다들 불편하잖아요
아마 대회의장에서 있었던 프레젠테이션에 관한 이야기가 벌써 인사부 안에 다 퍼졌던 모양이다.
인사부 안으로 들어서는 날 힐긋거리는 눈길이 어제보다 한결 부드러워졌고, 사무실의 분위기에도 힘이 생겨나고 있었다.
고 부장의 자리로 가서 조동희 전무에게 받아 온 카드를 건넸다.
“제가 직접 하는 거보다는 부장님께서 하시는 게 더 좋겠습니다.”
“이건 무슨 카드인가요?”
“전무님이 주시네요. 짧은 시간 동안 프레젠테이션 준비하느라 고생 많았다고, 인사부 직원들 다 같이 회식이나 한번 하랍니다.”
얼떨떨해하는 고 부장에게 한 발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귓속말을 했다.
“제가 전무님 카드까지 받아 왔는데, 사무실 분위기 좀 띄워 주세요.”
“네?”
“다들 프레젠테이션 결과에 흥이 올라오는 표정들인데, 생각 많은 부장님 표정 때문에 그 흥이 폭발을 못 하고 있지 않습니까?”
고 부장은 쓰고 있던 안경을 매만지며 인사부 사무실을 쭉 둘러보았다.
“제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걸까요?”
“…….”
고 부장이 얼굴 표정을 바꾸기 시작했다.
재빨리 양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 고 부장은, “자, 자! 다들 주목!”이라며 인사부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큰 목소리로 말했다.
“이야… 이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자, 이게 뭔지 아는 사람, 거수.”
내가 받아 온 카드를 높이 흔들어 보이며 고 부장이 말했다.
확실히 카멜레온이네.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전설의 전무님 카드다!”
“오!”
사무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짦은 기간 안에 프레젠테이션 준비하느라 다들 고생 많았다고, 다 같이 이걸로 회식 한번 하라고 주셨단다. 우리 다 같이 좋은 결과 이끌어 낸 손정훈 과장님한테 박수 한번 쳐 드리자.”
“와!”
그제야 꾹꾹 눌려 있던 기획안 통과에 대한 흥이 여기저기에서 함성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여세를 잡아 내가 한마디 했다.
“뭘 먹든 그 식당 기둥을 뽑아 오라고 하셨어요. 어설프게 뽑는 시늉만 하면 다음부터는 카드 안 주실 거라고 하시네요. 빈말일 수도 있지만, 우린 또 이런 기회 놓치면 안 되잖아요. 이런 기회 흔치 않을 텐데, 소고기 회식 어떻습니까? 한우로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박수를 치는 사람까지 눈에 보였다.
“와!”
“레알 이거 실화야? 소고기로 인사부 전체 회식을 한다고?”
“과장님! 진짜 소고기집에서 한우로 기둥을 뽑아도 되는 거 확실한 거예요?”
그래, 바로 이거다.
일이라는 게 별거 있나.
결국 일이라는 건 사람이 하는 거고, 그 사람을 움직이는 건 보상과 그 보상이 만들어 주는 흥인데.
아무리 나의 시대와 지금 이 시대가 30년의 세월을 두고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해도, 사람을 움직이는 힘, 조직을 움직이는 힘에까지 큰 차이가 생겨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 조직이라는 곳에서 모든 사람들을 상대로 유지, 발전, 성장… 그것들을 동시에 관통시킬 수 있는 건 결국 적절한 보상밖에 없다.
“제가 카드를 받아 왔으니까, 그 책임도 제가 지면 되는 거 아니에요? 뭐가 문젭니까, 카드가 우리 손에 있는데. 진짜 기둥뿌리 한번 제대로 뽑아 보죠.”
내 말에 다시 한번 사무실 안으로는 흥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와!”
“에이 씨… 이럴 줄 알았음 점심 안 먹는 건데.”
“선화 씨, 다이어트 중이라고 하지 않았어?”
“한우 앞에서 다이어트가 어디에 있어요? 저 그냥 앞으로는 생긴 대로 살려고요.”
“아하하하!”
* * *
퇴근 후 인사부 회식 자리.
숯 화로가 들어 있는 테이블 네 개가 길게 붙어 있는 룸 안이었다.
가장 먼저 룸 안으로 들어선 인물은 HRM의 막내 이민혁과 HRD의 막내 박민영이었다.
두 사람은 부장, 차장, 그리고 자신들의 과장들이 룸 안으로 들어오기 전 얼른 안으로 들어와 방석을 자리마다 깔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부서 사람들이 룸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문 입구에 서서 대기를 하고 있었다.
부장부터 시작해 사람들이 룸 안으로 들어올 때마다 일일이 그들의 외투를 받아 옷걸이에 거는 것 역시 그들의 몫이었다.
각 팀의 막내 바로 위인 HRM의 김은혜와 HRD의 심요한은 반대로 가장 마지막으로 룸에 들어갔다.
이유는 상사들이 벗어 놓은 신발을 가장 마지막으로 들어오며 반듯하게 정리를 해 놓기 위함이다.
회식은 업무의 연속, 그리고 일부분.
이미 그들에게 부서 전체 회식 날 이 정도 잡일 정도는 수고 축에도 못 끼는 일이다.
오히려 오늘 회식은 여러모로 마음이 편한 회식이다.
화딱지가 날 이유가 크게 없는 회식이니까.
지난달 부서 전체 회식은 회사와 멀리 떨어진 상계동의 한 삼겹살집에서 시작했다.
보통 부서 전체 회식은 3차가 기본이기에 7시 이후로 시작되는 회식은 아무리 빨리 끝나도 기본 12시, 새벽 1시, 2시는 되어야 끝이 났다.
버스가 끊길 때까지 사람을 잡아 놓을 거면 택시비라도 챙겨 주든지, 자차가 있는 과장, 대리급은 대리비를 써야 하고, 아직 차가 없는 신입 사원은 거리에 따라 택시비만 3만 원 이상이 나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회사 근처가 아닌 상계동의 한 삼겹살집에서 회식한 이유는 바로 그 삼겹살집이 있는 상가 건물 뒤편 아파트가 고성표 부장의 집이기 때문이다.
부서 전체 막내인 이민혁과 박민영은 입사 8개월 차로 부서 전체 회식을 총 7번 해 봤는데, 그 7번 중 4번이 상계동의 삼겹살집이었다.
차를 가지고 있는 직원들은 근처 유료 주차장에 차를 세워야 했다.
하지만 고성표 부장은 자신의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직원들이 모두 모여서 기다리고 있는 그 삼겹살집까지 편한 복장 차림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고성표 부장이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회식 장소에 나오기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 역시 모든 인사부 직원들이 당연히 해야 할 업무의 연속, 일부분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회식 1차는 부서 회식비로 계산을 하지만, 그 뒤로 이어지는 2차, 3차는 직급 상관없이 모두 공평하게 n분의 1을 해야 한다.
물론 부장과 차장은 조금씩이라도 많이 내긴 한다.
그럼에도 부서 막내들의 입장에서 이런 회식 자리가 불편하고 화딱지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택시비로 기본 3만 원은 있어야 하고, 2차, 3차에서도 2만 원, 3만 원씩 훅훅 나간다.
회식은 업무의 연속, 그리고 일부분이라면서 직원 개인 돈이 그만큼 나가는 거다.
거기다 진짜 짜증이 나는 건 그렇게 현금을 걷어서 계산하는 사람은 꼭 걷어진 현금이 아닌 자기 카드로 계산을 하며 카드 포인트를 적립시킨다는 거다.
특히 체질상 몸이 알코올을 견디지 못해 술을 입에도 대지 못하는 박민영에게 부서 전체 회식은 공포일 수밖에 없다.
한 번은 1차까지만 참석하고 개인적인 사유로 먼저 귀가를 했는데, 다음 날 박종근 과장에게 불려 가서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단체 조직 생활에서는 하기 싫은 것도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평소 박종근 과장에 대한 좋은 감정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박민영이었지만, 그날 이후로 박민영에게 박종근 과장은 어쩔 수 없는 꼰대 과장의 이미지가 붙어 지워지지 않고 있다.
그런 부서 전체 회식을 오늘은 회사 근처에서 하게 됐고, 심지어 오늘은 막내라고 해서 고기를 구울 필요도 없다.
종업원이 식사 내내 전문가처럼 고기를 대신 구워 주고 있으니 말이다.
심지어 오늘은 고 부장이 1차 소고깃집에서 자신은 먼저 일어나 보겠다며, 전무 카드를 김 차장에게 전달까지 해 버렸다.
그리고 김 차장 역시 그 카드를 손정훈 과장에게 전달한 뒤, 자신은 고 부장을 챙겨야 할 거 같다며 일어나 버렸다.
인사부 직원 모두 알고 있었다.
고 부장과 김 차장이 1차에서 깔끔하게 자리를 비켜 준 이유를.
바로 손 과장이 회식에 참석했기 때문이다.
더는 회식 자리라고, 자신들 앞에서 왕 대접을 받기를 노골적으로 요구할 수 없으니까.
실제 이민혁이 평소 부서 회식 때 하던 것처럼 이것저것 챙겨 주니, 고성표 부장은 손정훈 과장의 눈치를 보며 쉬지 않고 움직이는 이민혁을 직접 자리에 앉혀 식사만 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런 회식이라면 부서 막내들 입장에선 회식이 무서울 이유도, 불편하고 짜증이 날 이유도 없었다.
오히려 매주 한다고 해도 기쁜 마음으로 따라와 비싼 한우 고기를 배불리 먹어 댈 자신이 있었다.
“진짜 더 안 시킵니까?”
손정훈 과장이 느려지는 직원들의 젓가락질 모습을 보고 실망스럽다는 투로 말했다.
고 부장과 김 차장이 떠난 회식 자리.
그들이 있을 때에도 손정훈 과장이 이 자리의 중심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이 빠진 뒤로, 인사부 직원들의 모습에선 좀 더 자연스러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과장님, 지금 우리 모둠 스페셜만 벌써 8접시 먹었어요.”
“우와, 실망인데? 이렇게 먹어서 무슨 수로 이 가게 기둥을 뽑습니까? 이건 기둥이 아니라 서까래도 못 흔들겠는데? 거기 민 대리!”
“네.”
“배 차게 쌀밥을 왜 먹어요, 고깃집에 와서. 고기 먹어요, 고기.”
“과장님, 저 정말 때려 죽인다고 해도 더는 못 먹겠어요. 저는 쌀밥은 꼭 먹어야 하는 사람이라 이것도 간신히 지금 먹고 있는 중인데, 숨도 못 쉬겠어요. 이 테이블은 더 시키지 마세요. 먹을 사람 없어요.”
모두의 상태가 HRD의 민은석 대리와 같았다.
“그러면 잠깐만.”
손정훈 과장이 다시 한번 전무 카드를 박종근 과장에게 전달하며 말했다.
“인간적으로 전무님 카드를 이렇게밖에 못 쓴다는 건 자존심 문제예요. 나는 먼저 일어나 볼 테니까, 다들 조금씩만 더 힘내서 2차까지는 가요. 3차까지 가면 더 좋겠지만 그럼 또 너무 늦잖아요. 내일 출근도 해야 하는데. 자신 있는 사람들은 가도 괜찮고.”
카드를 건네받으며 박종근 과장이 물었다.
“왜요? 과장님은 같이 안 가시게요?”
“저 있으면 다들 불편하잖아요.”
그 말에 순간적으로 아니라는 대답을 해 주는 사람이 아직은 아무도 없었다.
뒤늦게 박종근 과장이 그럴 리가 있냐는 식으로 말문을 열었고, 그 뒤로 다른 직원들이 말을 보태었지만 보태어지는 말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이상하게 분위기는 점점 더 어색해지고 있었다.
“빈말이라도 고맙네요. 그런데 아니라고들 하셔도 사실 제가 불편해요.”
“…….”
“저 하나 끼어서 여러 사람 소화 안 되게 만드는 거보다는 저는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에서 사라져 주는 게 맞는 거 같아요. 사람이 평소 안 하던 짓을 갑자기 하면 안 되잖아요. 이번 회식에서 저는 여기까지만 하고, 대신 다음 전체 회식 땐 지금보다는 여러분들이랑 좀 더 가까워져서 편안한 마음으로 2차, 3차까지 같이 달릴 수 있도록 할게요.”
손 과장은 자신을 가게 앞까지 배웅해 주겠다고 하는 정 대리를 비롯해 HRM 직원들에게까지 나오지 말고 앉아서 좀 더 시켜서 먹으라는 말만 남기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정훈 과장이 나가고 난 뒤 어색한 듯 박종근 과장이 말했다.
“졸지에 부서 전체 회식 자리에서 내가 제일 노땅이 된 거지?”
“노땅이란 표현으로 인증하셨네요.”
정 대리의 팩트 폭행에 직원들 모두는 불러 있는 배를 부여잡고 힘들게 웃었다.
“웃기지 마세요, 대리님. 저 토할 거 같아요.”
“아, 진짜 여기서 웃기는 건 반칙 아니에요? 잔인하다.”
그렇게 얼마나 웃었을까, HRD의 민은석 대리가 조금은 용기를 내어 사람들에게 말했다.
“지금까지 제가 해 본 인사부 전체 회식 중에 오늘처럼 수월했던 전체 회식은 처음인 거 같아요.”
“없던 사람 하나 새로 끼었을 뿐인데, 분위기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 거예요?”
그 말 역시 HRD 쪽에서 나왔다.
윤선화 책임이었다.
“전체 회식은 중간에 낀 사람들 스트레스가 보통이 아니거든요.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며 메뉴 정해야 하지, 돈 걷어야 하지, 위로는 부장님, 차장님 챙겨야 해, 회식이란 소리에 노이로제 걸린 신입들 눈치까지 살펴야 해… 그런데 오늘은 그런 거 전혀 없이, 꼭 어디 잔칫집에 초대받아서 식사만 하러 온 사람처럼 편하게 즐기기만 했네요.”
그 말에 박종근 과장이 맥주 한 모금을 마신 뒤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분위기를 우리끼리 더 이어 가라고 자리까지 만들어 주고 먼저 일어나기까지 했어.”
“에이, 그건 손 과장님만 일어나서 그런 게 아니죠. 부장님, 차장님도 먼저 일어나 주셨으니 이런 분위기가 가능한 거죠.”
“아니지… 딱 보면 몰라? 애초에 손 과장은 자기가 제일 먼저 일어날 생각이었어.”
“……?”
“그런데 분위기를 보니까 아닌 거 같거든. 그래서 자기도 오늘 회식은 끝까지 같이 달릴 것처럼 하면서 그 두 분이 알아서 먼저 일어나게 만든 거라고.”
정현수 대리 역시 박종근 과장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아까 화장실에서 자신에게 손 과장이 물었다.
만약 지금 손 과장이 먼저 자리를 일어서면 회식 분위기가 어떻게 될 거 같냐고.
그럼 당연히 그간의 부서 전체 회식처럼 고 부장 위주의 꼰대 분위기로 변할 거 같다고 했더니, 손 과장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알았다고 했었다.
“그런데 정 대리님.”
입사 동기인 민은석 대리가 정현수 대리를 불렀다.
입사는 동기이지만, 정현수가 민은석보다 두 살이 더 많아서 민은석은 존댓말을 쓰고 정현수는 편하게 말을 놓는 관계이다.
“왜?”
“부서별 리크루팅 말이에요. HRM에서 프레젠테이션 준비하는 거 도와 달라고 해서 도와주긴 했지만, 그게 정말 효과가 있을 거 같아요?”
“그걸 민 대리가 물어본다고 내가 대답을 해 줄 수 있겠어? 나도 과장님이 까라고 하니까 까는 거지, 확신은 없어.”
“그니까. 리크루팅 방식을 바꾸면 조기 퇴사율을 낮출 수 있을 거라는 발상 자체가 억지 아닐까요? 물론 이것저것 시도를 해보는 건 저도 찬성인데, 프레젠테이션하는 상황 자체가 손 과장님이 임원진들을 압박하는 분위기였다면서요. 막상 통합 리크루팅에서 부서별 리크루팅으로 바꿔 진행을 했는데, 똑같은 결과가 나와 버리면 그 뒷일은 어떻게 감당을 하시려고….”
역시 이번에도 박종근 과장이 맥주 한 모금을 마신 후 입을 열었다.
“아니지.”
“……?”
모두가 박종근 과장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지금 손 과장님은 리크루팅 방식을 바꿔서 조기 퇴사율을 낮추겠다는 게 아냐.”
“그럼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