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서 좀 쉬고 있어
“분위기를 바꾸겠다는 거야, 분위기.”
“분위기요?”
민은석 대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퍼져 있던 몸을 다시 테이블 쪽으로 당겨 앉았다.
모두가 박종근 과장의 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래, 인사에 관련된 조직의 전체적인 분위기. 부서별 리크루팅이 뭐야? 결국은 해당 부서의 관리자들이 채용에 직접 참여를 한다는 거야. 면접에만 참여하는 게 아니라, 서류 분류까지 함께하는 거지. 채용에 책임을 져야 하는 거야, 지금부터는.”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기성들이 신입을 얼마나 막 굴렸어? 조금만 아니다 싶고,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자기들도 결국은 똑같은 입장이면서 신입 정도는 언제든 교체가 가능하다는 생각으로 너무 막 대했단 말이야.”
“그렇죠.”
“그와 동시에 기성들의 입맛을 맞춰 주겠다는 의도도 깔려 있는 거야. 결국 실질적인 주요 업무는 기성들이 보는 거고, 신입을 받아서 회사의 인재로 키우는 역할도 기성의 역할이니까. 우리가 뽑아 주는 대로 받아 쓰는 게 아니라, 앞으로는 직접 보고 우리랑 같이 뽑자는 거지. 이게 큰 거야.”
“크다면….”
“다들 잘 생각해 봐. 처음 이 회사에 입사했을 때.”
“……?”
“우리가 선택을 한 건 재경모직이라는 회사밖에 없어. 그 후로 우린 무조건 선택을 받는 입장이었지. 부서부터 시작해서, 심지어 상사, 동기, 어느 정도 짬이 차서부터는 밑으로 들어오는 부하 직원들까지. 우리가 선택을 한 건 아무것도 없다고. 안 그래?”
“…그렇네요. 그게 당연한 거라는 생각만 했지, 과장님처럼 생각해 보지는 못했네요.”
모두가 그 당연한 사실도 간과하고 있었던 자신들을 어이없어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선택의 권한을 주는 거야, 기성들에게.”
“아….”
“자기가 한 선택이야. 그 선택에 후회를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이 선택한 신입들에게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는 거지. 그리고 따지고 보면 부서별로 기대하는 인재상이 다 다를 것이기 때문에 부서 관리자들이 함께하다 보면 우리 인사 기준에선 당연히 탈락인 서류 전형에서 뜻밖의 인재를 찾을 수도 있는 거야.”
“신입들 역시 최소한 부서 정도는 자신의 선택이기에 적성에 관한 불만도 그만큼 줄어들 수 있을 거고요.”
“그건 그때 가 봐야 아는 거지. 적성에 안 맞는다는 말이 어떻게 보면 업무 자체가 아니라 업무 환경이 자신과 안 맞는다는 말일 가능성이 크거든. 영업이 뭔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 인사, 재무가 뭔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알고 시작했는데, 나중에 가서 적성이 안 맞는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결국 그 업무 환경이 자신과 안 맞는다는 말을 하는 거야.”
다시 민은석 대리가 물었다.
“그 분위기라는 게 정말 리크루팅 방식 하나 바꾼다고 크게 바뀔 수가 있을까요?”
모두가 박종근 과장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가능할 수도 있다고 봐.”
정현수 대리가 하고 싶은 말을 참으며 박종근 과장을 쳐다봤다.
“분위기를 바꿔 보겠다고 나선 사람이 손 과장님이잖아.”
“오… 지난주엔 그렇게 신경전을 벌이셔 놓고, 이젠 지지가 대단하시네요?”
“내가 느끼고 있는 걸 너희들도 다 똑같이 느끼고 있지 않아?”
“뭘요?”
“지난 일주일 사이에 손 과장이 바꿔 버린 우리 인사부 전체 분위기.”
“……!”
“지금 이거 나만 느끼는 거야? 아니잖아. 다들 바뀐 분위기 느끼고 있잖아. 그리고 누가 바꾼 건지도 다들 알잖아. 손 과장이야. 혼자서 우리 인사부 전체 분위기를 이렇게 바꿔 놨다고. 우리 인정할 건 인정하자. 망 과장일 때 정말 개차반이긴 했지만, 망 과장에서 손 과장으로 바뀐 지 일주일 만에 인사부 분위기를 이렇게까지 바꿔 놓은 건 대단한 거야.”
“그러게요. 정말 거짓말 같아요. 하지만 인사부는 손 과장님이 계시니까 그런 거고, 다른 부서는 상황이 좀 다르지 않을까요?”
이 질문에 박종근 과장은 정현수 대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정 대리는 아까 낮에 너네 과장님이 사장님, 전무님, 임원들 앞에서 발표하는 거 봤잖아.”
“네, 봤죠.”
“그게 어디 정상이더나? 나는 약 빨고 발표하는 줄 알았어. 꼭 싸우자는 식으로, 분명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데, 필요 이상으로 센 단어들만 골라 사용하면서 발표를 했잖아.”
“네, 보는 내내 제가 다 조마조마했어요.”
“나도 처음엔 그랬어. 이건 좀 아닌데… 도대체 저 사람이 왜 저러나… 했단 말이야. 그런데 중간에 전무님이 발표를 한 번 끊으셨잖아. 발표 태도가 너무 강압적이라고 지적을 하시면서.”
“네.”
“그때 손 과장이 그 말까지 씹으면서 계속 발표를 했어. 그때 알겠더라.”
“뭘요?”
“그 자리에 모인 사장님, 전무님, 임원들이 아니라 다른 부서장들한테 보여 주려고 사장님, 전무님, 임원들을 압박했다는 걸 말이야.”
정현수 대리는 그제야 눈앞에서 번쩍하며, 손 과장이 왜 발표 분위기를 그렇게 이끌어 갔는지 이해를 하게 됐다.
“나 회장 아들이다 이거지. 그러니까 내가 지금부터 바꾸겠다는 부서별 리크루팅. 앞으로 당신들이 그 결과물이 잘 나올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줘야 할 거다… 그걸 보여 준 발표였다고, 그 발표가.”
“아….”
“임원들까지 찍소리도 못 하게 만들었는데, 당연히 부서장들은 앞으로 목숨을 걸어야지. 다들 손 과장님이 우리 편인 걸 행운이라고 생각해. 나는 그 발표 보는 내내 소름이 돋았어. 발표 내용이 아니라, 아무리 회장 아들이라도 아직은 입사한 지 6개월밖에 안 되어서 아는 게 크게 없을 텐데, 그럼에도 그 자리에 모인 모두를 논리, 명분으로 아예 찜을 쪄 먹더라고. 정 대리, 내 말이 틀려?”
“아뇨, 진짜 그랬어요.”
자리에 있는 모두를 향해 박 과장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이번 리크루팅. 다들 집중하자. 우리 HRD도 지원 사격 계속할 테니까 HRM은 손 과장님 도와서 젖 먹던 힘까지 한번 끌어 올려 봐. 지금은 내가 하는 말 이해가 잘 안될지 몰라도 직장 생활 하면서 오로지 업무에만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 볼 수 있는 기회, 그리 많지 않아. 업무보다는 다른 데 더 많은 에너지를 빼앗겨야 하는 게 직장 생활이라는 거니까. 근데 감히 내가 한마디 하자면, 지금의 HRM은 다른 데 에너지를 빼앗기지 않고 오로지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질 거야.”
“…….”
“나도 우리 HRD가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만들어 볼게.”
* * *
손정훈 과장에 대한 보고가 또다시 전무실로 올라갔다.
벌써 이 주일째다.
하반기 공채 리크루팅 변경 기획에 관한 프레젠테이션이 있은 지 이 주일이 지났다.
그 이 주일 동안 사흘이 멀다 하고 손정훈에 관한 내용을 들고 고성표 부장이 전무실을 찾아왔다.
“또야?”
“…네.”
“이번엔 누구랑 만났는데?”
“어제는 영업부 연규호 부장하고 퇴근 후 단둘이 저녁을 같이하며 술 한잔했던 거 같습니다.”
“연 부장하고?”
“네.”
조동희 전무는 점점 손정훈 과장을 감시해야 할 자신의 시야가 좁아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손 과장이 고 부장에게 업무 보고는 꼬박꼬박 해 주고 있다는 거다.
부서별 리크루팅 건으로 오늘은 어느 부서의 부서장과 점심을 먹으며 협조 요청을 했고, 또 오늘은 퇴근 후 어느 부서장과 만나 가볍게 술잔을 기울이며 부서 내 인사의 문제점을 물어봤다는 식의 보고가 이뤄지고 있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별개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전 부서의 부서장들을 만나고 돌아다닌다는 게 조동희 전무의 입장에선 신경이 쓰였다.
짧은 몇 주 사이에 사람이 너무 극과 극으로 바뀌어 버린 거다.
지난 32년간 해 온 재경 생활 중 손에 꼽힐 정도로 난처한 상황에 직면을 해 버렸다.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회장님께 손 과장의 비행이 아닌 활약상을 보고하는 게 이렇게까지 어려운 일이 되어 버릴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 해 본 조동희 전무였다.
회장님께만 보고를 올리는 거라면 이게 무슨 문제일까.
하지만 조동희 전무는 그간 꾸준히 회장님의 제3의 눈 역할을 해 오며, 뒤에선 손정태 본사 상무의 귀 역할도 해 오고 있었다.
본능적으로도 이건 있는 그대로 보고를 올리기가 어렵다는 판단이 섰다.
“회사 밖에서 연 부장하고 무슨 이야기를 나눴다던가?”
“다른 부서장들과 만나 나눈 내용과 크게 다른 건 없었다고 합니다. 이번 공채 때 많은 협조를 부탁한다는 내용과 연 부장이 생각하는 현재 영업부의 인사 문제점, 현재 영업부에 근무 중인 계약직 직원 중 정규직 전환을 추천하고 싶은 인물이 있는지 등… 그런 것들 위주로 이야기를 나눴던 거 같습니다.”
“대표 부서는 거의 다 한 번씩 훑은 거라고 봐야지?”
“네, 재무, 개발 쪽 빼고 대표 부서는 다 만났습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자네가 시킨 게 아니라며?”
“우선 그날 프레젠테이션 자리에서 사장님이 이번 공채 리크루팅에 대한 모든 권한을 손 과장에게 주자는 식으로 말씀을 하시는 바람에 저로서도 하겠다는 걸 못 하게 막을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사장님이 그런 말씀을 안 하셨다고 한들 자네가 무슨 수로 손 과장이 하겠다는 걸 막겠다는 거야? 말 같은 소릴 해야지. 손 과장이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 본 부장들은 뭐라고 그러던가?”
“다 똑같습니다. 손 과장이 이 정도로 유능할지 몰랐다는 말부터 시작해서, 생각의 깊이가 남다르다, 확실히 사람은 직접 겪어 봐야 하는 건데, 그간 소문만 듣고 색안경을 꼈던 게 부끄럽다… 칭찬 일색입니다.”
“아예 여론을 몰아가고 있는 거네? 그렇게 봐야 하는 거 아냐? 공식적으로 업무 협조를 위해 각 부서장을 만나고 다닐 명분도 생겼겠다, 이참에 다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자… 그런 거 아니냐고.”
고성표 부장은 침묵하며 고개를 떨어뜨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자네한테는?”
“네?”
“자네한테는 다른 부장들 만나서 하고 다니는 것처럼 별다른 말 없었냐고.”
“저야 뭐… 손 과장 입장에선 그… 인사부 직속….”
“또 혓바닥 길어진다. 있었나 보네.”
“…….”
“아, 나도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이 사람아.”
“네?”
“나한테도 그랬어.”
“전무님께도요.”
“그래, 그날 프레젠테이션 있었던 날. 나한테 찾아와서 카드 받아 가면서 자기편에 서란 말을 했다고.”
그제야 고 부장은 안심을 하며 숨을 쉴 수 있었다.
“손 과장도 알고 있지?”
“뭘 말씀이십니까?”
“자네가 나한테 손 과장에 관한 이야기를 보고하고 있다는 거.”
“…네.”
“앞으로는 손 과장이 사고 치지 않는 다음에는 이 방에 찾아오지 마.”
“네?”
“내가 뭘 더 들어야 해? 잘한다, 남다르다, 유능하다… 모두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면 그게 맞는 거겠지.”
“…….”
“손 과장 감시하는 게 내 역할의 전부가 아닌데, 그거 한다고 다른 중요한 회사 일을 못 해서야 되겠어? 그건 그렇고… 고 부장.”
안경을 고쳐 쓴 뒤 생각을 정리하며 조 전무가 말했다.
“네, 전무님.”
“손 과장하고 같이 근무하는 거 어때?”
“…….”
“손 과장이 아무것도 안 할 때야 몰라도, 지금처럼 인사부뿐 아니라 전 부서, 회사 전체를 휘젓고 다니는데, 아무래도 부서장 입장에서 그런 회장 아들을 부하 직원으로 데리고 일하는 거… 불편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물어보는 거야.”
“불편해도 어쩌겠습니까, 계속 있을 것도 아니고 조만간 본사 상무님이 본사로 부를 거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조 전무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그 흔드는 고개에 고 부장의 미간은 깊게 패기 시작했다.
“부른다고 갈 거 같지가 않아. 내가 봤을 때 손 과장은 지금 결심을 했다.”
“결심이라면….”
“본사 상무랑 붙어 보기로. 딱 보면 모르겠어? 지금 손 과장이 하고 돌아다니는 게 어딜 봐서 공채 리크루팅 때문이야? 그건 핑계고, 지금 저러고 돌아다니는 거… 결국엔 모직 사람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겠다고 저러는 거야.”
“전무님 생각도 그렇습니까?”
“내가 본사 상무도 잘 알거든.”
“당연히 그러시겠죠.”
“내 예상이 완전 틀렸어. 게임이 돼. 되겠어. 아니, 어쩌면 손 과장이 더 유리할 수도 있겠다.”
“어째…서요?”
“손 과장은 본사 상무만큼 그룹 안에서 알려진 게 많지 않잖아. 나도 손 과장에게 저런 날카로운 면이 있다는 걸 이번에 알았지, 그전까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어.”
허공을 쳐다보며 조 전무가 그간 회사 전체를 상대로 손 과장이 해 온 연기에 실로 감탄을 한다는 듯 피식하고 웃었다.
“이게 얼마나 무서운 거야? 저런 이빨을 가지고 있는데도, 지난 6개월간 망나니 코스프레를 해 왔고, 또 그 코스프레로 나뿐만 아니라 모두를 속였어. 대단하지 않아?”
고 부장은 조 전무가 무슨 말을 하겠다고 이렇게 밑밥을 거창하게 까는 것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나한테 자기편에 서 달라고 말했어. 내가 본사 상무와 따로 교점이 있다는 걸 다 알고 있으면서.”
“…….”
“그래서 내가 그랬지. 내가 뭘 보고 손 과장 당신 옆에 서겠냐는 식으로 말하면서, 이번 공채를 빌어 회사 분위기를 단번에 바꿔 보라고 했어. 그걸 해내면 내가 생각을 해 보겠다는 식으로 말이야. 그런데, 이건 공채 뚜껑도 안 열렸는데, 벌써 회사 분위기가 바뀌었잖아.”
“그건 그렇습니다.”
조 전무의 두 눈에도 확신이 차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고민은 의미가 없다는 표정으로, 고 부장을 쳐다보며 조 전무가 말했다.
“고 부장 자네, 가족들 다 데리고 파리 주재원으로 좀 가 있어라.”
“네? 파리요?”
“그래, 지금 여기에선 내가 봤을 때 자네 간당간당해.”
“…….”
“나한테까지 자기편에 서라면서 겁을 주는데, 자네 하나 날리는 거야 작정한 손 과장 입장에서 일이겠어? 난 내가 한 약속은 하늘이 반쪽이 나도 지키는 사람이야. 끝까지 자네 챙기겠다고 했잖아. 생뚜앙 지사 가서 한 2년 정도 임 상무 도와서 지사 챙기고 있어. 2년 뒤에 내가 다시 부를 땐 임원 승진 시켜서 부를 테니까.”
생각이 많아진 고 부장의 얼굴을 보며 답답하다는 듯 조 전무가 말했다.
“거기 가서 좀 쉬고 있으라고. 회삿돈으로 딸아이 국제 학교도 보내고.”
“아….”
“나라고 자네한테 손 과장 감시하는 일 맡기면서 마음이 편했겠어? 하기 싫은 일이었다는 거 다 알아. 근데도 그간 묵묵히… 수고 많았어. 내 계획대로라면 내년쯤 임원 자리 하나 비워 놓고 자넬 올릴 생각이었는데, 낸들 손 과장이 저렇게 빨리 앞으로 치고 나올 줄 알았나.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때 되면 내가 다시 부를 테니까, 가서 좀 쉬고 있어.”
“가면 언제쯤….”
“공채는 끝내고 가야 안 되겠어? 그래야 딴 사람들이 봐도 그림이 안 이상하지. 공채 잘 마무리 지어 놓고, 추석 지나고 나면 내가 따로 이야기를 줄게.”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무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