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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자고 하면 싫다고 할까요? (34/303)

만나자고 하면 싫다고 할까요?

집 안으로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내 눈에 들어왔던 건 전축 스피커 위로 올려진 작은 액자 하나였다.

지난 한 달간 그렇게나 보고 싶었던 여정이의 나이 든 얼굴을 보기도 전에 그 액자 속에 든 가족사진에 난 잠시였지만 주춤하고야 말았다.

여정이가 아트 스쿨을 졸업할 때 찍은 우리 가족 사진이었다.

홍명이와 홍준이는 각각 한국에서 기본적인 인문학 대학 공부를 먼저 시키고 경영에 관련된 깊은 공부는 둘 다 일본에서 유학을 하게 만들었다.

반면에 여정이는 어릴 때부터 제 어미를 닮아서 미술에 소질이 있기도 했거니와 아들자식이 둘씩이나 있는데 굳이 막내딸 아이까지 회사 경영에 참여하게 만들 이유가 있을까 싶어 일찌감치 미술 쪽으로 지원을 많이 했었다.

뉴욕 대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그 뒤로 다시 2년간 스페인 마드리드의 아트 스쿨에서 공부를 하게 만들었다.

저 사진이 바로 그 아트 스쿨 졸업식 날 찍은 우리 가족 사진이다.

사진 속엔 여정이를 중심으로 오른쪽으로는 내가, 왼쪽으로는 안사람이 서 있고, 또 내 옆으로는 홍준이가, 안사람 옆에 홍명이가 서 있었다.

저런 사진을 찍었다는 기억은 있는데, 그때 찍은 사진이 저런 모습이었다는 건 이제야 봐서 안다.

저 사진 가장 중심에 서 있는 여정이와 가장 끝에 서 있는 홍준이… 그 둘만이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는 게, 내 마음을 찹찹하게 만들고 있었다.

“정훈이 왔어? 들어와, 들어와.”

여정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어떻게 그 통통하던 녀석이 지금은 얼굴에 생기가 하나도 없을까.

홍준이의 안사람인 장혜란의 모습과 너무 비교가 되고 있었다.

장혜란이는 그 나이라는 게 믿기 힘들 정도로 화사하게 젊음을 잘 유지하고 있던데, 어떻게 여정이 이놈은 이렇게까지 깡말라서, 얼굴에 핏기도 찾기 힘들 정도로 시들시들해져 있단 말인가.

아무리 비싼 옷을 걸치고 있으면 뭐 하나.

사람 자체가 너무 건조해져 있는데.

“배 많이 고프지?”

여정이는 양손에 비닐장갑을 낀 채 밖으로 나와서 내게 말을 걸었다.

“아뇨, 괜찮아요.”

“조금만 기다려. 금방 끝나. 안에서 아줌마가 매운탕 간 보고 있으니까, 화장실 들어가서 손부터 씻고 나와.”

날, 아니 정훈이를 챙기는 게 장혜란보다 더 엄마 같다.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평소엔 오라고 해도 안 오던 애가 같이 저녁을 먹겠다고 찾아왔어?”

비록 내 눈에는 너무 말라 있고 생기가 없었지만, 그래도 조카의 방문에 기분이 좋긴 한 모양이다.

여정이와 남 사장 사이에 딸이 하나 있다고 들었다.

정훈이 이놈보다도 6살이나 어리다고 하니까 스물셋.

지금은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다고 한다.

마침 전공도 미술이라고 하니 지금 여정이가 운영하고 있는 ‘남영 갤러리’를 맡아 나가게 하면 되겠다.

남영 갤러리.

나 손중길이의 모친 성함이다.

곽남영 여사.

그 갤러리 이름 역시 내가 지어 주고 눈을 감았다.

재경은 내 부친 손 재 자, 경 자 쓰시는 분의 성함을 그대로 옮겨서 회사 이름을 만든 것이고 여정이에게 미술에 소질이 있다는 걸 눈치채고 미술 쪽으로 지원을 하면서 나중에 녀석이 계속 미술 쪽으로 나가겠다고 하면 갤러리를 하나 만들어 맡기면서 그 갤러리의 이름에 내 어머니의 성함을 붙여 그 정을 그리고 싶었다.

잠시 뒤 남 사장이 편한 일상복으로 갈아입고 거실로 나왔는데, 아주 당연하다는 듯 주방으로 들어가 식탁의 차림을 확인하고 찬그릇을 이리저리 옮겨 보는 모습이 퍽 자연스러워 보였다.

반대로 여정이 이 녀석은 그런 남 사장 옆에서 입으로만 식탁을 차리고 있었고.

“당신이 여기 앉을 거잖아요. 정훈이가 이쪽으로 앉고. 회 접시는 그냥 이쪽으로 둬요.”

“당신은 안 먹어?”

“나는 맛만 보면 되지. 앞접시에 조금 덜어서.”

“당신이 여기에 앉을 거야?”

“오늘은 내가 여기에 앉지, 뭐.”

“그럼 이거 고등어랑 브로콜리는 이쪽으로 놔야겠네.”

“생선도 그냥 정훈이 앞으로 놔요. 난 브로콜리만 있으면 돼.”

“무슨 소리야. 내가 이거 당신 먹으라고 생물 건져 올린 거 그 자리에서 바로 웃돈까지 줘 가며 가져온 건데.”

“아, 됐다고. 그냥 정훈이 앞으로 놔.”

“이렇게?”

“씁… 아, 그냥 저리 비켜요, 저리.”

괜히 고맙네.

회사에서 봤을 땐 몰랐는데, 집에선 꽤 다정한 구석이 있는 친구였구만.

남 사장 하는 걸로 봐선 딱히 속을 썩일 것 같지도 않은데, 도대체 여정이 이놈은 그간 무슨 마음고생을 그렇게 많이 했길래, 얼굴에 저런 우환 주름이 가득하단 말인가.

역시 그런 거겠지?

아비인 나의 죽음이야, 비록 이르긴 했지만 어쩌면 자연스러운 이별이었을 거다.

하지만 아비인 나보다 더 부모처럼 따랐던 큰오빠, 홍명이 놈의 바보 같은 선택과 그 선택으로 이어진 어미와의 이별은 그 예민하고 감수성 풍부했던 여정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감당해 내기엔 너무 큰 시련이었을 것이다.

여정이는 정말 그림과 가족밖에 모르던 녀석이었다.

특히나 오빠들을 잘 따랐고, 오빠들이 있었기에 완벽한 공주의 삶을 살 수 있었던 녀석이다.

그런데 그 오빠들이 회사 경영권을 놓고 세상이 시끄러울 정도로 난리를 떨었으니, 그리고 그 난리로 인해 홍준이 놈을 제외한 가족 모두를 잃었으니… 지난 세월 얼마나 홀로 버티기 힘들었을까.

그 옆을 남 사장이 지금처럼 따뜻하게 지켜 줬을 거란 생각을 하니 내 입장에선 고마울 수밖에.

식사를 시작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여정이는 채소 위주로만 그것도 아주 조금씩 맛만 보는 수준으로 젓가락을 놀렸다.

“고모 혹시 어디 아프세요?”

“나? 아니.”

“근데 왜 이렇게 마르셨어요? 식사하시는 것도 그렇고….”

내 말에 여정이와 남 사장은 서로를 쳐다보며 내가 알 수 없는 자기들만의 대화를 눈빛으로 주고받는 눈치였다.

“정훈이 너도 이제 서른 가까워진다고 나이가 드는 모양이다.”

여정이가 말했다.

“안 보이던 게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지? 그거 나이 든다는 증거야.”

남 사장도 함께 피식하고 웃으며 식사를 이어 갔다.

“그런데 고모 육고기는 원래 안 드셨어요?”

여정이 녀석이 제일 좋아했던 음식이 바로 고기였다.

처음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 놨을 때, 방학이라고 한국에 들어왔는데 미국 고기에 맛을 들여서 살이 이만큼 쪄서 왔던 게 아직도 눈에 훤하다.

“고모 신경성 위염이야. 몰랐어? 가끔 삶은 거나 한 점씩 먹을까, 그것도 먹고 나면 부대끼고, 나이 드니까 잘 안 먹어지더라. 제사나 다른 가족들 모임 때, 고모가 고기 먹는 거 본 적 있어?”

“…….”

남 사장이 거들었다.

“정훈이 이놈이 어디 그런 걸 관심 있게 보기나 했겠어?”

아주 따끔한 회초리 같은 한마디였다.

그 말 앞에 난 내가 그렇게 한 것도 아니면서 그저 고개만 숙이며 회 한 점을 입속으로 넣었다.

“건강 챙기세요, 고모.”

“고맙다. 이젠 고모 걱정도 다 해 주고. 그건 그렇고 넌 왜 젓가락질을 오른손으로 해?”

“…네?”

“너 원래 밥 왼손으로 먹잖아.”

그 말에 남 사장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정훈이 얘, 두 손 다 쓰잖아.”

“그래도 밥 먹을 땐 항상 왼손 쓰는 것 같더니….”

정훈이 놈도 나처럼 양손을 다 쓰는 모양이다.

그건 또 몰랐네.

난 얼른 젓가락을 왼손으로 옮겨서, 능숙하게 젓가락질하는 시늉을 했다.

“앉은 자리가 이래서 오른손으로 먹고 있는 거예요. 제가 왼손으로 먹으면 고모부하고 계속 부딪치니까. 고모부 한잔하시죠.”

식사가 거의 다 끝나 갈 즈음이었다.

난 식사 내내 여정이와 남 사장 사이에 흐르는 돈독한 관계에 흐뭇해하며, 사위가 따라 주는 술을 받고, 내 사위, 딸에게 두 손으로 술을 따라 주며 철저하게 정훈이인 척을 했다.

그러다 결국 힘들게 물어봤다.

“혹시….”

여정이와 남 사장은 뜨던 숟갈을 잠시 멈춰 놓고 날 쳐다봤다.

왜 말을 하다가 마느냐는 표정이었다.

“정엽이 형 소식 아는 거 있으세요?”

다시 한번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쳐다보며,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둘만의 눈빛 대화를 시작했다.

남 사장이 입을 열었다.

“정엽이?”

“네.”

“갑자기 정엽이 소식은 왜?”

들고 있던 젓가락을 한쪽으로 가지런히 내려놓고 여정이와 남 사장을 차례대로 쳐다본 뒤 말했다.

“궁금한데, 정엽이 형 소식을 물어볼 사람이 마땅히 없네요.”

“…….”

여정이에게 물어봤다.

“고모.”

“응?”

“저희 아버지… 미우시죠?”

여정이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가, 소리 소문 없이 그 숨을 빼어 낸 뒤 식사를 도와주고 있던 가사 도우미를 쳐다봤다.

“식사 끝나면 부를 테니까, 잠깐 방에 들어가서 쉬고 있어요.”

“네, 사모님.”

여정이는 가사 도우미가 거실을 통과해 어딘가로 아예 모습을 감춘 뒤에야 입을 열었다.

“갑자기 왜 그래? 평소 안 찾아오던 집을 다 찾아오지를 않나, 정엽이 소식을 묻고… 왜 그러는지 고모가 물어봐도 될까?”

진심 어린 걱정이었다.

저 걱정이 정훈이를 향한 걱정인 것인지, 아니면 정엽이를 향한 걱정인지는 알 방법이 없었지만, 분명 지금 여정이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형수 지금 친정에 가 있어요.”

“……?”

“다음 주가 예정일이잖아요. 정태 형 다음 주면 애 아빠 돼요. 저는 삼촌이 되고요. 기분이 참 묘해요.”

남 사장은 깊은 눈으로 마치 내 폐부를 훑기라도 하듯, 내가 하는 말에서 진심을 찾아내기 위해 실눈을 뜨기 시작했다.

“다음 주에 태어날 조카가 아들이라고 하니까 생각이 더 많아지는 거 같아요. 꼭 다음 주에 태어날 제 조카가… 제 아버지 입장에선 정엽이 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요.”

“…….”

“저는 큰아버지와 아버지 두 분 사이에 있었던 그런 갈등을 정태 형이랑은 만들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을 할 거예요. 하지만, 정말 만약에 혹시라도 갈등이 생긴다고 하면… 과연 저는 제 아버지처럼 할 수 있을까 하고 스스로한테 물어봤어요. 저는 절대 못 그럴 거 같아요.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더 이상 여정이와 남 사장의 눈을 쳐다보지 않았다.

누워서 침 뱉기라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거지.

내가 내 입으로, 내 자식 앞에서 또 다른 내 자식 욕을 한다?

이것만큼 누워서 침 뱉기를 하는 게 어디에 있으랴….

“아까 고모 말처럼 저도 이제 나이가 드니까 어릴 땐 안 보이던 게 하나둘 보이기 시작하나 봐요. 궁금하네요. 어쨌든 정엽이 형도 가족이잖아요.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잘살고 있는지… 궁금한데… 그걸 마땅히 물어볼 곳이 없네요.”

“정훈아.”

여정이가 말했다.

“때로는 그냥 모르고 살아가는 게 약일 때도 있어.”

“…….”

“알고도 모르는 척 살아가야 할 때도 많고. 네가 철이 들고 있는 거 같아서 고모가 기쁘긴 한데, 고모 생각은 그래.”

“어떤….”

“정훈이 너는 정엽이 소식이 궁금할지 몰라도, 입장을 바꿔서 정엽이는 네가 자기 소식을 궁금해한다는 거 자체가 불편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 정도예요?”

“응? 뭐가?”

“그 정도로… 저희 가족이 큰아버지, 그리고 정엽이 형을 내몰았던 거예요?”

“…….”

“전 몰라요. 정말 몰라요. 그 일에 대해서 자세하게 물어볼 수 있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제가 물어본다고 해도 객관적으로 이야기를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제 주위, 지금의 재경 그룹 안에는 아무도 없어요.”

“그렇겠네. 고모가 네 입장은 전혀 생각을 못 해 봤네. 하긴, 그때 넌 너무 어렸네.”

“그냥 고모라면 알고 있지 않을까, 어쩌면 가끔 연락 정도는 하고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물어본 거예요.”

여정이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이로써 최소한 여정이는 어떤 식으로든 정엽이를 보살피고 있다는 내 심증이 확인되었다.

“정엽이 형은 만약에 제가 만나자고 하면 싫다고 할까요?”

그 말에도 여정이와 남 사장은 아무런 대답을 내놓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더 충분한 답이기도 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가 정훈이 놈의 몸에서 다시 살고 있다는 게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에이, 알겠어요. 제가 괜히 서로 어색해질 주제를 꺼냈네요. 그런데 고모.”

“응?”

“저 오늘처럼 일 마치고 고모부랑 같이 고모 밥 얻어먹으러 자주 와도 돼요?”

그 질문은 엄밀히 말해 여정이가 아닌 남 사장을 겨냥해서 한 질문이었다.

“그럼, 고모 집에 밥 먹으러 오면서 뭘 그런 걸 묻고 그래? 오면 오는 거지.”

남 사장을 쳐다봤다.

남 사장 역시 여정이가 짓고 있는 표정처럼, 회사에서의 관계를 떠나 오로지 정훈이 녀석의 고모부 입장에서 내게 싱긋이 웃어 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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