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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진짜 인사의 역할 아니겠습니까? (35/303)

그게 진짜 인사의 역할 아니겠습니까?

“부장님, 제가 가서 한마디 할까요?”

하반기 공채 요강 공지를 올린 지 이틀째.

다른 공채 때와는 비교조차 안 될 만큼 여유로운 사무실 분위기에 결국 김원호 차장이 나섰다.

서류 심사가 실시간으로 이뤄져야 할 지금이 HRM 입장에선 가장 정신이 없어야 할 때이다.

하지만 김 차장 눈에 지금의 HRM은 여유를 부려도 너무 여유를 부리고 있다.

“있어 봐. 각 부서 인원을 호출해서 함께할 거라고 하잖아.”

“그건 손 과장 자기 계산인 거고요. 지금까지 끌고 온 건 대단하지만, 실제 공채를 한 번도 안 해 본 건 사실 아닙니까.”

김원호 차장은 애가 탔다.

인사 채용.

그중에서도 공개 채용은 워낙에 많은 지원자가 몰리기 때문에 전자 이력서가 들어오는 대로 실시간 확인을 하고 분류를 해 놓아야 한다.

지난 상반기 공채의 경우 서류 심사부터 계산을 한다면 총 경쟁률이 132 대 1이었다.

178명을 선발하는 데 2만 3천 부가 넘는 지원서가 들어왔고, 그걸 HRM에서 꾸린 채용팀에서 사흘 밤낮으로 확인을 하고 비교, 분석을 해 서류 합격자 명단을 만들어 냈다.

2만 3천 장이 아니라 자소서까지 포함된 2만 3천 부.

결코 적지 않은 분량이다.

2만 3천 장이라고 해도 이걸 종이책으로 묶어서 만들어 버리면 70권 가까이가 되는 거다.

그렇다고 그걸 그냥 스윽 하고 읽어 보기만 한다고 끝인가?

분석이라는 걸 해야 한다.

거기에 비교라는 걸 해야 하고, 다른 채용팀 사람들과 의견까지 주고받아야 된다.

괜히 채용을 인사의 꽃이면서도 그와 동시에 노가다라고 하는 게 아니다.

아무리 통합 리크루팅에서 부서별 리크루팅으로 바뀌어, 각 부서 인원이 서류 심사에도 참여한다고 하지만 이렇게 모든 지원서가 다 모일 때까지 기다린다는 건 김원호 차장의 눈엔 효율적이지 못했다.

어차피 손 과장은 과장일 뿐이다.

그가 비록 회장님의 아들일지라도, 이번 하반기 공채의 리크루팅 방식을 바꾼 주인공일지라도 만약 그 채용에 실수나 문제나 발생하게 되면 그 책임은 부서장인 고성표 부장이 져야 한다.

“가만히 놔둬 봐.”

“부장님!”

“생각이 있겠지. 지난 한 달간 해 온 거 봐. 그게 어디 생각이 없는 사람이 벌일 일들이야? 그냥 벌이기만 했어? 수습까지 깔끔하게 다 해내잖아.”

“그러니까 그 생각을 왜 밑에 애들하고만 공유하고 저랑 부장님한테는 전달을 안 하냐고요.”

“…….”

“제가 지금 다른 내용을 가지고 이러는 게 아니잖아요. 이거 지금 공채예요, 공채. 안 되겠어요, 부장님께서 못 하겠다고 하시면 저라도 한마디 해야겠어요. 회장님 아들이고 나발이고 아닌 건 아닌 거지.”

결국 김원호 차장은 고성표 부장이 말리기도 전에 HRM팀 쪽으로 걸어갔고, 손정훈 과장 자리 파티션을 노크했다.

노크 소리에 고개를 든 손 과장은 힘든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김 차장의 모습에 보던 걸 잠시 덮어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차장님.”

“과장님, 괜찮으시면 저랑 자판기 커피에 담배 한 대 같이 피우러 안 가실래요?”

“오! 저 안 그래도 화장실 갔다가 담배 한 대 피우러 갈 생각이었는데.”

“그러세요? 잘됐네. 그럼 천천히 화장실부터 다녀오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김원호 차장은 손 과장이 화장실을 간 사이 심호흡을 했다.

일단 도저히 이건 아닌 거 같아서 자리를 마련하긴 했는데, 막상 커피 이야기를 꺼내 놓고 보니 역시나 김원호 차장의 눈에 손 과장은 거인이었다.

꼭 신입 시절 부장을 대하는 것처럼, 벌써부터 손에 땀이 잡히는 느낌이었다.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흡연실까지 올라가는 동안에도 김원호 차장은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꺼내야 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흡연실에서 담배를 함께 입에 물며 불을 붙인 뒤 김원호 차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과장님, 공채 요강 공지 올리고 마감일까지 4일밖에 시간이 없습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원래라면 공채 요강을 올리기 전에 HRM은 채용팀을 따로 꾸려야 합니다.”

“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팀도 안 꾸리셨지요?”

“네, 딱히 서류 분류만을 위한 채용팀은 필요가 없을 거 같아서요. 그 부분은 지난주 미팅 때 부장님 계신 자리에서 확인을 받은 내용인데요.”

“네, 저도 알고는 있는데… 채용팀까지 안 꾸린 상황에서 공채 요강 올린 지 벌써 이틀째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김원호 차장은 뜬금없이 의미 모를 미소를 짓고 있는 손 과장의 모습에 절로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손 과장이 말했다.

“처음인 거 같네요.”

“뭐가 처음인 거 같단 말씀이세요?”

“차장님이 지금처럼 이렇게 절 따로 불러서 업무 지시, 업무 진행 상황을 직접 물어보신 게요.”

“…….”

“처음 맞죠? 저는 처음인 거 같은데, 혹시 또 제가 기억을 못 하는 있는 게 있을 수도 있잖아요.”

“…네, 이렇게 따로 자리를 마련해서 물어보는 건 이번이 처음인 거 같네요.”

손 과장은 갑자기 몇 걸음 난간 쪽으로 걸어가, 그 난간에 기대어 건물 밖 세상을 쳐다봤다.

김원호 차장은 어쩔 수 없이 그쪽으로 함께 걸어가 손 과장 옆으로 섰다.

“회장 아들이 부하 직원으로 있는 게 많이 불편하시죠?”

“…….”

“저 같아도 불편할 거 같아요. 그것도 엄청. 불편하긴 엄청 불편한데, 그렇다고 그 불편한 걸 내색하기도 애매하고, 참고 계속하자니 지금처럼 도저히 참기 힘든 상황들도 나와 버리고….”

고개를 살짝 돌려 김 차장을 쳐다보며 손 과장이 물었다.

“제가 얼른 그룹 본사로 올라가든, 다른 부서로 트랜스퍼가 되든 딴 데로 갔음 좋겠죠?”

“…아닙니다.”

“그럼 계속 인사부에 남아서 차장님이랑 같이 근무해도 괜찮을까요?”

“…….”

“저도 어디에서 들었는데, 사람들이 제가 이 회사 인사부에서 1년 정도만 하고 그룹 본사로 올라가는 줄 알고 있더라고요. 어디에서 나온 말인지는 모르겠는데, 저는 모르는 이야기거든요.”

김원호 차장은 자기가 왜 이곳 흡연실로 손 과장을 데리고 왔는지조차 잊어버린 채 속으로 타들어 가는 가슴만 진정시키고 있었다.

“저 여기 계속 있을 거예요.”

“네, 그건 어디까지나 회장님, 사장님, 아님 본사 상무님과 과장님의 선택이기 때문에 저희가 거기에 대해 왈가왈부할 입장은 아닌 거죠.”

“저 같은 부하 직원하고 계속 같이 근무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하, 하하, 하하하… 그, 그럼요. 당연하죠.”

“조금 속이 타시더라도 그냥 제가 차장님 위로 올라가는 게 여러모로 차장님 입장에서는 속이 편하지 않을까요?”

“네, 저도 과장님께서 이번 공채 건을 발판으로 빠르게 회사 임원분들께 인정을 받고 위로 올라가시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뇨, 우리 인사부 안에서요.”

“네?”

“우리 인사부 안에서 제가 그냥 차장님 상급자로 함께 근무를 하는 게 차장님 입장에서는 더 속이 편하시지 않겠느냐고 여쭤보는 거예요.”

“인사부 안에서 제 윗자리라면 부장 자리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부장님은 현재 계시고….”

몸을 아예 돌려, 난간에 등을 기대고 선 손 과장.

그는 담배 연기를 아래로 내뿜은 후 김 차장에게 말했다.

“과장 시절 땐 대단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박종근 과장이 가장 무서워하면서도 배울 게 많고, 의지가 되는 선배가 바로 차장님이었다고 하더라고요.”

“…….”

“솔직히 저는 상상이 잘 안 되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박 과장이 그랬다고 하는데, 그게 맞는 거겠죠.”

김원호 차장의 고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아래로 숙여져 있었다.

“지금의 차장님 모습은 저 때문인 겁니까, 아님 앉아 계신 자리의 무게 때문인 겁니까?”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김원호 차장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내용이었으니까.

“저는 차장님이 앞으로도 지금 절 이곳까지 부르신 것처럼… 제게 용기를 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손 과장이 김 차장 앞으로 한 발 다가가며 말했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차장으로서 과장에게 지시할 건 지시를 하고, 또 저한테 물어볼 게 있음 지금처럼 다른 사람 거치지 말고 저한테 직접 물어봐 주세요. 차장님이 저한테 거리를 두시니까, 제가 박 과장이나 다른 직원들한테 하는 것처럼 먼저 다가가기가 어렵네요.”

“…….”

“저는 박 과장이 경험해 봤다던, 차장님이 가지고 계신 선배로서의 카리스마가 어떤 건지 경험을 해 보고 싶거든요. 그 모습이 궁금해서라도 저는 그 모습을 보기 전에는 인사부도 안 떠날 거고, 또 차장님 위로 올라가지도 않을 겁니다. 그리고 저 더 이상 예전의 망 과장 아닙니다.”

그렇게 미소를 지어 보인 다음 손 과장이 말을 이었다.

“제가 저번 미팅 때도 한 번 말씀드렸다시피 하반기 공채는 정말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이미 70퍼센트는 성공을 했습니다.”

“아직 서류 심사도 안 끝났는데, 어떤 지원자들이 들어올 줄 알고 이미 70퍼센트는 성공을 했다고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이번 공채는 저희 HRM이 아니라 박 과장님의 HRD의 역할이 9할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겨 놓고 싸운다는 말. 혹시 들어 보셨습니까?”

“이겨 놓고 싸운다고요? 누굴 상대로요?”

“누군 누굽니까, 신입들의 적이죠.”

“신입들의 적이요?”

김원호 차장은 손 과장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이내 지난 2주일간 박종근 과장이 각 부서의 부서장, 과장급 관리자를 상대로 해 온 공채 교육을 떠올렸다.

부서별 리크루팅인 만큼 각 부서의 부서장, 과장급 관리자의 참여 역할이 클 수밖에 없다.

그래서 HRD의 박종근 과장이 각 부서의 부서장, 과장급 관리자를 상대로 공채 준비, 진행에 관한 50분짜리 교육을 4차례에 걸쳐서 진행을 했는데, 아마도 지금 손 과장은 그걸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난 상반기 공채 경쟁률이 132 대 1이었더군요.”

“네.”

“우리가 지금 지원자가 없어서 사람을 못 뽑는 게 아니잖아요. 문제는 뽑아서 교육하고 부서 배정을 한 뒤에 일어나는 조기 퇴사율이죠. 조기 퇴사자들이 말한 퇴사 사유. 그게 백 퍼센트 신뢰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충분히 참고 정도는 해도 되는 거겠죠. 조기 퇴사자들 대부분은요, 누구보다 자신의 성장에 대한 갈망이 큰 사람들이었습니다.”

“…….”

“철이 없고, 조직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힘든 일은 하기 싫어하고 쉬운 일만 하고 싶어 하는 개념 없는 MZ세대가 아니라…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애틋하게 여기기 때문에, 이 힘든 사회 구조 속에서 어떻게든 남들보다 빨리, 조금이라도 더 자신을 성장시키길 바라는 사람들이었다는 겁니다. 그들의 퇴사 희망 신청서를 조금만 그들의 입장에서, 진심으로 읽어 보면 그들은 회사를 나가면서 공통적으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회사가 나를 성장시켜 주든지, 그게 힘들 거 같으면 내가 알아서 나 스스로 성장을 할 테니까 그럴 수 있게 시간을 보장해 달라.”

“……!”

손 과장은 종이컵 속으로 담배를 떨군 뒤 말했다.

“회사 안에서 기성과 신입의 마찰이 심화하고 있는 이유를 살펴보니까 답이 바로 나오더군요. 답이 나올 수밖에요. 문제가 명백하잖아요. 이 시대의 신입들은 입사를 위해서도, 입사를 한 뒤에도 해야 하는 게 너무 많습니다. 벌써 취준생 기간만 평균 13개월이라고 합니다. 차장님은 혹시 대학까지 졸업했는데, 여전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경험을 해 보신 적 있으세요?”

“…….”

“그 기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이미 너무 큰 노동을 한 겁니다. 그러니 더 마음이 급할 수밖에요. 더 성장과 돈에 집착할 수밖에요. 그런데도 조직은, 선배들은 그들을 성장시켜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혼자서라도 성장을 해 보겠다는 그들의 시간을 빼앗아 가고 있습니다. 회식이다, 주말 등산이다, 뭐다… 그런 불편한 자리를 만들어 가면서요.”

김 차장은 결국 손 과장을 인정하고야 말았다.

확실히 다르다.

박종근 과장이 했던 말처럼 아예 보는 관점, 생각의 깊이가 다르다.

“지난 30년 사이에 재경모직은 단순히 직원 수만 놓고 봐도 두 배 이상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구획별로 나눠 보면 1990년에서 2010년까지 이 20년 동안 지금의 조직 규모를 만들어 놓은 거고, 그 이후 10년 간은 유지는 되고 있지만, 성장 속도는 무척 더딥니다. 마이너스 성장을 할 때도 몇 차례 있었죠. 차장님뿐 아니라, 부서별로 대부분의 핵심 인력은 회사가 폭발적으로 성장을 할 때 입사를 했기 때문에 그만큼 회사와 함께 성장할 기회가 있었던 겁니다. 보상이 보장되는 일을 열심히 했던 것을 그저 자기 때엔 열심히 했다는 식으로 착각들을 하는 거죠. 하지만 이 시대의 신입들은요?”

“…….”

“그런 부분에 대한 각 부서 부서장 및 과장급 관리자들을 상대로 지난 2주일간 박종근 과장이 HRD팀 팀원들과 함께 교육을 해 왔습니다. 교육 참여도도 높았고, 반응도 좋게 나왔다는 건 차장님도 들어서 알고 계실 겁니다. 서류 분류 작업은 내일 오전부터 바로 시작할 겁니다. 각 부서에서 자기네 인재를 자기들 손으로 직접 뽑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습니다. 우리 인사는 언제나 그래 왔듯, 뒤에서 있는 듯 없는 듯 그들의 업무를 지원해 주기만 하면 될 겁니다. 그게 진짜 인사의 역할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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