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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못 하게 하네 (37/303)

그걸 못 하게 하네

아래 항렬은 ‘승’ 자 돌림으로 결정한 것 같았다.

첫 손주의 이름을 작명소에서 받아 온 홍준이 놈이 내게 물었다.

“승현이. 어떤 거 같냐?”

그 이름 말고도 다른 이름이 두 개 더 있었는데, 나 역시 승현이라는 이름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좋네요. 이을 승에 어질 현. 저도 이게 제일 나은 거 같아요.”

“자,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네가 형이랑 형수한테 줘.”

이 녀석 홍준이가 날 따라 하고 있었다.

내가 그랬다.

홍명이가 정엽이를 낳았을 때, 홍준이를 옆에 앉혀 놓고 정엽이의 이름을 함께 골랐고, 반대로 홍준이가 정태를 낳았을 땐 홍명이를 옆에 앉혀 놓고 정태의 이름을 함께 고민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내가 직접 전달한 게 아니라 녀석들을 통해 형과 동생에게 대신 전달하게 만들었다.

내가 그런 아버지였다.

사업에는 항상 내가 최고라는 자신이 있었지만, 자식들에게 부모의 사랑을 보여 주는 거엔 항상 소심했던 아버지였다.

그리고 홍준이 이놈이 나의 그런 면을 닮아 있는 거 같았다.

좀 좋은 걸 닮지, 이게 뭐 좋은 거라고 이런 걸 닮았을까.

정태와 원수경 사이에서 내 증손주가 태어났다.

기쁜 날이었다.

내가 기쁜 것보다, 첫 손주를 안게 된 홍준이 놈이 산모와 아이 모두 건강하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모습이 날 더 기쁘게 만들고 있었다.

이제 조금은 이 아비의 마음을 알 것도 같으냐….

난 홍준이에게 닿지 못할 질문만 속으로 계속하며,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난 아기를 유리 벽 너머로 넋을 잃고 쳐다보는 홍준이 놈을 바라봤다.

일반 산부인과가 아니라 전 객실이 VIP 병실인 호텔 병원이었다.

그중에서도 7층, 산부인과 병동.

특히나 방역에 꽤 신경을 쓰고 있어서, 산모인 원수경은 직접 만나지도 못했다.

그래서 홍준이가 받아 온 이름을 정태에게 전달하며 대신 원수경에게 축하한단 말을 전달하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기분이 어때?”

“잘 모르겠어. 분명 좋은 건 맞는데, 아직은 실감이 안 난다고 해야 되나?”

그래, 그럴 거다.

아직은 그럴 거다.

부모라는 건 한순간에 되는 게 아니다.

아이가 크면서 그 아이와 함께 그 아이의 부모가 되어 가는 거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정말 기뻤다.

내 손주 놈이 부모가 되고, 그렇게 진짜 어른이 되어 가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어서.

그리고 그 순간을 함께해 줄 수 있어서….

“이거, 아버지가 주래.”

“이게 뭐야?”

“이름. 손승현.”

“아….”

“나랑 같이 골랐어. 물론 아버지 뜻이 더 많이 들어간 이름이고.”

“손승현….”

“왜? 별로야?”

“아니, 좀 신기해서.”

작명첩을 한참 동안 빤히 쳐다보며 결국 싱거운 웃음을 터뜨리는 정태였다.

“뭐가?”

“예전부터 아버지한테 들은 이야기가 있어. 내 이름도 그렇고, 정엽이 형 이름도 그렇고… 할아버지가 나랑 정엽이 형 이름 지을 때 각각, 아버지랑 큰아버지를 옆에 앉혀 놓고 같이 선택을 하셨다고.”

그런 이야기를 자식 놈에게도 했구나.

“넌 기분이 어땠어?”

“뭐가?”

“아버지가 너랑 같이 아기 이름을 골라 보자고 하셨을 때.”

“나? 그냥… 어떤 이름이 잘 어울릴까… 그런 생각?”

“아버지는 그러셨대. 할아버지가 처음으로 아버지의 생각을 물어보신 거라, 드디어 인정을 받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셨대.”

내가?

내가 그때 처음으로 홍준이 놈에게 생각을 물어봤다고?

설마.

난 내가 홍준이 놈을 키우며 아버지로서 해 왔던 지난 일들을 힘들게 되짚어 봤다.

“…….”

내가 정말 그랬나?

“하긴 넌 당연히 다르지. 아버지는 할아버지한테 인정을 못 받으신 게 평생의 한이라, 우리한테는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항상 주시는 분이잖아.”

정태 이 녀석, 내가 지 할아비인 걸 알고 일부러 날 먹이는 건가?

“고맙다. 이름 좋네. 형이 네 형수랑 같이 네가 이름 지어 준 조카 잘 한번 키워 볼게.”

“축하해, 형.”

“요즘 회사 일 열심히 한다면서? 보기 좋다. 근데 너 요즘 많이 바쁘지 않냐?”

“나?”

“거기 모직 한창 공채 중이잖아.”

“내가 바쁜 건 다 끝났어.”

싱긋이 웃으며 정태 놈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득남주 한턱 쏴야 하는데, 네 형수 새벽 두 시에 진통 시작해서 양수 터지고 여기 와서 다시 두 시간 넘게 기다렸다가, 분만 시간만 다시 일곱 시간… 형이 오늘은 도저히 체력이 안 따라 준다.”

“천천히 하면 되지. 나도 조금 있다가 가 봐야지.”

“그러니까 말이야. 네 형수 기운 좀 차려지고 하면 형이 따로 자리 만들 테니까, 그때 마시자.”

“형수한테 축하한다고, 몸조리 잘하라고 꼭 좀 말해 줘.”

“그래, 알았어.”

* * *

처가 쪽 사람들까지 일일이 다 챙기고 병실 안으로 들어온 정태는 원수경의 손을 꼭 잡아 준 뒤, 그 침대에 걸터앉았다.

“다 갔어?”

“어. 회사에서 꽃하고 선물들이 너무 많이 들어와서 장모님 편으로 다 보냈어.”

“잘했어. 그런데 그건 뭐야?”

원수경은 남편이 들고 있는 작명첩을 눈짓하며 물었다.

“아, 이거. 우리 아기 이름. 내가 이건 결혼하기 전에 분명히 말했다? 기억나지.”

“알아. 그래서 우리 아기 이름이 뭐야?”

“승현이. 손승현.”

정태는 작명첩을 펼쳐 아내, 원수경에게 보여 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눈치를 보게 됐다.

“괜찮네.”

괜찮다는 그 말에 안심을 하며 그제야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지? 우리가 걱정했던 것보다는 안 촌스럽고 괜찮지?”

“그러니까. 승현이? 손승현… 오… 진짜 괜찮은데? 입에 딱 붙어.”

“다행이네. 오늘 정말 수고 많았어. 중간에 사람들 챙기느라, 정작 수고했단 말을 이제야 하네. 수고했고, 또 엄마 된 거 축하해.”

“당신도 지난 10개월 동안 내가 히스테리 부리는 거 다 받아 준다고 수고 많았고, 또 고마워. 아빠 된 거 축하해.”

잠시 뒤 호텔 측 도우미가 힘차게 울어 대는 아기를 안고 객실 안으로 들어와 젖 물리는 법을 다시 가르쳐 주고 있을 때였다.

아기에게 젖을 물려 놓고 신기한 듯 솜털을 쓰다듬으며 원수경이 물었다.

“승현이 때문에 나 지금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야.”

“나도 그래.”

“승현이도 우리처럼 세상을 다 가질 수 있을까?”

“……?”

보호자를 위한 일반 침대 위에 앉아서 스마트폰을 보고 있던 정태는 그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원수경을 쳐다봤다.

“무슨 뜻이야?”

“당신. 정말 정훈이를 품을 수 있는 게 확실해?”

“뭐?”

“조 전무가 당신이 있는 앞에서 아버님께 그랬다며. 더 이상 정훈이의 회사 생활에 대해 보고할 게 없다고.”

“…….”

“더 이상 객관적인 보고를 올릴 수 있는 입장이 아닐 거 같다는 그 말 자체가 결국은 정훈이를 돕겠다는 말 아니냐고.”

정태는 보고 있던 스마트폰을 잠시 내려놓고, 침대에서 내려와 원수경의 곁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새근거리며 자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젖을 빠는 입만큼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아들을 대견스럽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늘은 정말 좋은 날이잖아.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축하만 받고 싶고, 또 당신한테는 축하만 해 주고 싶어.”

“언제부터 당신이 이렇게 감성적이었어?”

“그냥 딱 오늘 하루 정도는 그러고 싶다고.”

“…….”

“근데도 그걸 못 하게 하네. 나 한 번씩 당신을 보면 헷갈려.”

“뭐가?”

“도대체 이 사람은 결혼 상대로 날 선택한 건가, 아님 재경을 선택한 건가… 하고 말이야.”

“……!”

“내가 그런 의문을 품을 때마다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고 또 기분이 나쁜지 당신 모르지?”

새근거리는 아이의 볼을 가볍게 툭 하고 건드려 보며 정태가 말했다.

“왜? 지금 내가 한 말이 당신한테는 상처야? 난 당신이 나와 정훈이 관계를 그렇게 보는 게 상처야. 더는 정훈이 관련해서 나 스트레스 받게 만들지 마. 당신 한 번씩 그럴 때마다 내가 과민 반응을 보이는 건, 정훈이 때문이 아니라 당신 때문이야.”

“…….”

“걱정하지 말라고. 우리 승현이한테는 지금의 재경보다 더 큰 재경을 물려줄 거니까. 혼자 키우는 거보단 정훈이가 진짜 정신을 차린 게 맞는다면 정훈이랑 함께 키우는 게 훨씬 빠르지.”

원수경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라는 사람은 어쩌면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욕심이 많은 사람일지도 몰라. 난 지금의 재경이 성에 안 차거든. 아버지, 큰아버지가 잃었던 건설부터 시작해서 물산, 쇼핑… 거기에 앞으로 유망한 사업군까지… 난 그 두 사람이 놓친 지난 20년의 재경을 다 되찾아 놓을 거야.”

* * *

“와! 드디어 끝났다. 다들 그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와!”

그 후로 다시 일주일간 1차 면접부터 시작해 임원 최종 면접까지 숨 가쁘게 달렸다.

면접관들의 만족도도 무척 높게 집계가 되고 있었고, 내가 봐도 괜찮은 인재들을 다수 발굴한 유의미한 공채였다.

하지만 인사부는 잠시라도 숨을 돌릴 수가 없었다.

요즘 시대에 기업의 인사부는 조직의 콜센터로 불린다고 한다.

예전처럼 막강한 힘을 가지고 어깨에 힘을 넣고 다닐 수가 없는 게 이 시대의 인사부인 모양이다.

시도 때도 없이 각종 부서에서 걸려 오는 전화.

사무 책상 교체, 파티션 수리, 하다못해 화장실 변기가 막혀도 인사부를 찾는 게 요즘 이 시대의 직장 문화였다.

회사 안에 시설부가 따로 없는 것도 아니고, 왜 그런 잡다한 내용까지 일일이 다 인사부로 요청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런 건 정말 별거 아닌 내용이니까 그렇다 치고, 하반기 공채가 끝나자마자 다시 또 우리 HRM을 기다리고 있는 일거리가 있었다.

바로 추석.

추석 연휴에 맞춰서 앞뒤로 휴가를 쓰겠다고 신청하는 사람들 때문에 업무에 마비가 올 정도였다.

“우와… 정 대리.”

“네.”

“인정.”

“갑자기요? 무슨 인정이요?”

“나 그동안 정 대리 앞에서 이것저것 나 혼자 잘났다는 식으로 떠들어 댔던 거 다 취소!”

“……?”

“어떻게 이 생활을 몇 년 동안 계속할 수 있었어요?”

“뭐가요?”

“추석만 이런 건 아닐 거 아니에요. 설 연휴 때도 이렇게 앞뒤로 붙여서 휴가 신청서 내는 사람이 이만큼은 될 거 아니냐고.”

“그렇죠.”

“거기다 지금 주 5일 근무에 화요일이 공휴일인 달엔 월요일까지 월차를 쓰겠다고 하는 사람들 태반일 테고. 정말 인정. 그동안 정 대리뿐 아니라 인사부 사람들이 어떻게 한 해 농사인 공채에 대한 고민을 그동안 한 번도 제대로 안 해 봤던 건지 이해를 못 하고 있었는데, 정말 할 게 많네요.”

“지금이라도 알아주시니까 감사하네요. 하하하.”

“아니, 진짜 너무 힘들다!”

30년 전과 비교해 직원 복지라는 명목으로 세세하게 챙겨야 하는 게 너무 많이 생겨났다.

그런데 그 세세한 항목들을 정 대리를 통해 설명을 듣다 보면, 당연히 다 챙겨 줘야 하는 항목들이었고.

그렇게 조금씩 이 시대에 나의 사고방식이 적응을 해 나가고 있을 때였다.

“과장님, 그나저나 올해 직원들 추석 선물은 어떻게 하죠?”

정 대리가 물었다.

“지난 설날 때는 어떻게 했는데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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