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흐… 역시
사무실로 내려와서 고 부장에게 다시 물어봤다.
“부장님은 생뚜앙 지사 방문해 본 적 있으시죠?”
뭐야?
뭔데 이렇게 놀라?
“네? 생뚜앙 지사요?”
고 부장은 마치 못 들을 소리라도 들은 듯 화들짝 놀랐다.
“네, 왜 그렇게 놀라세요?”
“아뇨, 놀라긴요.”
분명 놀란 게 맞는데….
“네, 물론 저는 몇 차례 방문해 봤습니다. 매년 한 번씩 사장님이나 전무님이 직접 감사팀하고 같이 방문을 하십니다. 그때 저도 몇 번 따라나섰던 적이 있고요.”
“직원들 생활하기에 생뚜앙 거기 생활 환경은 어떻습니까?”
“파리 아닙니까. 좋죠. 회사에서 주거비 지원해 주지, 자녀뿐 아니라 배우자 학비까지 다 지원해 주지, 거기다 생활비 지원도 별도로 해 줍니다.”
“제가 설마 그런 걸 물어보는 거겠습니까?”
이 새끼는 진짜 크게 한번 혼을 내야 할 거 같은데….
내 말에 고 부장은 입을 꼭 다물었다.
“제가 인터넷으로 좀 찾아보니까 너무 외곽에 있는 거 같더라고요. 주위에 한인 마트 같은 건 있는 건지, 생각날 때마다 찾아갈 수 있는 괜찮은 한식당 같은 건 있는 건지… 그런 걸 물어보는 겁니다.”
“있지 않겠습니까? 파리 현기차 해외 지부도 그 근처 어딘가에 있는 거로 알고 있는데, 있을 겁니다.”
“몇 번이나 방문을 해 보셨다면서요?”
“네.”
“직원들 근무 환경을 챙기는 인사부를 대표해서 가셔 놓고, 그 정도 기본적인 것도 확인을 안 하셨던 겁니까?”
“아니, 과장님. 제가 금방 말씀드렸잖아요. 저 혼자 간 게 아니라 사장님이나 전무님, 그리고 감사팀 다 같이 가는 겁니다. 그런 중요한 방문에서 어떻게 지사 주위에 잘하는 한식당은 있냐, 한인 마트는 있어서 한국 식자재는 구할 수 있느냐… 하는 걸 물어볼 수 있겠습니까?”
“인사부를 대표해서 간 건데, 다른 건 다 안 해도 그런 걸 가장 중요하게 물어보셔야죠.”
에휴, 됐다.
이런 놈을 붙잡고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거 자체가 바보짓이고 시간 낭비다.
“하… 쩝, 알겠습니다. 저 이번 추석 연휴 동안 생뚜앙 지사 잠시 방문을 할 계획입니다. 부장님은 추석 지나는 대로 바로 생뚜앙 지사로 넘어가시죠?”
뭐지, 또 이 당황하는 표정은?
설마 내가 추석 연휴 끝나는 대로 고 부장이 생뚜앙 지사로 발령이 날 거라는 걸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래도 있는 동안은 부서장님이시니까, 제가 보고는 드려야 할 거 같아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렇게 말해 놓고 내 자리로 돌아와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 * *
고성표 부장은 사무실 분위기를 살피다가 잠시 쉬러 나가는 척, 곧바로 조동희 전무의 사무실을 찾았다.
“무슨 일이야?”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무슨 보고?”
“추석 연휴 동안 손정훈 과장이 생뚜앙 지사를 방문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이미 사장님께는 확인을 받은 내용이라고 하는데요.”
조 전무는 고개를 갸웃거린 상태로 미간 사이 주름을 만들어 낸 뒤, 이내 그 주름을 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갈 일이 있겠지.”
“그리고… 혹시 말입니다, 전무님.”
“뭐?”
“추석 연휴 끝나고 저 생뚜앙 지사 발령 나는 거 혹시 저랑 전무님 말고 알고 있는 다른 사람이 또 있는 겁니까?”
“그건 왜 물어?”
고 부장은 자신과 조 전무 말고는 아무도 없는 이 사무실 안에서 혹여나 이 대화를 다른 사람이 엿듣기라도 할까 몸을 앞으로 숙이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손정훈 과장이 알고 있습니다.”
“자네한테 뭐라고 하던가?”
“아뇨. 다른 말은 없었고, 그냥 확인하듯 이번 추석 연휴 끝나는 대로 생뚜앙 지사로 가지 않느냐는 식으로 물어봤습니다.”
“흠….”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전무님 주위로 손정훈 과장이 사람을 심은 거 아닐까요?”
“아냐. 그럴 이유가 어디에 있어?”
“그런 게 아니라면 그걸 손 과장이 어떻게 알고 있겠습니까?”
소파에 등을 깊게 기대어 앉으며 조 전무가 말했다.
“손 과장이 나한테 직접 부탁한 내용이니까.”
“네?!”
고 부장은 자신이 마주 보고 앉은 상대가 조동희 전무라는 것도 잊은 채 턱이 떨어질 정도로 입을 크게 벌였다.
“자네를 생뚜앙 지사로 보내는 거, 그거 손 과장이 나한테 직접 부탁한 내용이야.”
“그, 그게 무슨….”
“눈에 계속 보이면, 자네를 날릴 거 같다고 하더군.”
고 부장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자네 입장을 전혀 이해 못 하는 눈치는 아니었어. 손 과장 감시. 그거 내가 지시를 한 거고, 자네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한 거밖에 더 있어? 그런 내용을 다 알고 있어, 손 과장도. 그런데도 자네가 앞으로도 계속 눈에 보이면 날릴 수밖에 없을 거 같다고 하는데, 내가 뭐라고 하겠어?”
“…….”
“회장 아들이 그렇게까지 강성으로 나가는데, 내가 한발 물러서 주는 건 예의 아니겠냐고.”
“하지만….”
“자기 입장에서도 부장 자리가 빨리 비는 게 여러모로 편하겠지. 자네도 그렇고, 김 차장도 어쨌든 손 과장은 데리고 일하는 게 아니라 모시고 일하는 거잖아.”
“그건… 그렇죠.”
“손 과장이 나한테 부탁을 한 거니, 손 과장이 아는 건 당연한 거지. 내가 봤을 땐 손 과장이 자네 배려를 많이 했어. 그래도 명색이 해외 지사 부지사장 자리 아니냐고. 그런 거 한 번 하고 돌아오면, 임원 승진은 자동으로 되는 거고. 그런 부분까지 다 계산을 하고 나한테 부탁을 한 거니까 다른 걱정은 안 해도 돼.”
“……네.”
그렇지 않아도 손 과장이 두려웠던 고 부장이었다.
하지만 전무실에서 들은 이번 발령의 숨은 그림을 다 보고 나니 더 공포스러웠다.
다시 사무실로 내려온 고 부장은 HRM 파티션 안으로 들어가 손 과장을 찾았다.
자신의 목숨에 관한 실질적인 생살여탈권은 지금부터 손 과장이 쥐고 있다고 생각한 고 부장이었다.
“네, 부장님.”
“혹시 생뚜앙 지사에 대해 필요하신 내용 있으실까요? 있으시다고 하면 제가 준비를 해 드리겠습니다.”
고 부장의 얼굴은 온통 직장 생활 명줄에 대한 절실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런 고 부장의 모습에 손 과장은 입맛을 다셨다.
“그것보다… 그쪽 지사에서 본사와 연락은 어떻게 주고받습니까? 시차가 많이 나잖아요. 혹시 알고 계시는 내용 있으세요?”
“주로 메일 작업으로 소통을 합니다.”
“직접 전화나 화상 연결이 필요할 때도 있을 거 아닙니까.”
“네, 업무적으로 주문이나 인보이스 관련된 내용은 그쪽 직원이 이쪽 근무 시간에 맞춥니다. 그 외적인 부분은 서로 조율을 하죠. 그쪽 출근 시간에 맞춰서 우리가 연락할 때도 있고, 아니면 이쪽 퇴근 시간이 그쪽에선 오전 근무 혹은 점심시간이니까 그렇게 상황 봐 가며 조율을 합니다.”
“그럼 나중에 제가 그곳 지사장님이랑 통화를 한번 했음 싶은데 제가 언제쯤 전화를 드리면 될까요?”
“제가 나중에 퇴근 전까지 확인해 보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네, 그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더 필요하신 거 있으시면 편하게 말씀하세요.”
“…네,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 * *
오후 5시.
고 부장을 통해 지금 생뚜앙 지사장에게 전화를 걸면 통화가 가능할 거란 이야기를 들었다.
이미 자기가 그쪽 지사장과 통화를 했고, 괜찮은 시간을 잡아서 내게 알려 주는 거라고 했다.
그곳 지사장으로 있는 양수호 상무에게 전화를 걸었다.
“인사부 손정훈 과장입니다, 지사장님.”
―네, 과장님. 안 그래도 고 부장 통해서 연락받았습니다.
“네, 일전에 제가 주재원 자리 티오를 하나 만들어 달라고 무리한 요구를 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무리한 요구는요. 필요한 상황이라면 얼마든지 요청하고, 또 요청을 받기도 하는 거죠. 한 가족 아닙니까.
“그렇게 이해해 주시니 감사하긴 한데, 티오 자리를 부탁해 놓고, 또 금방 없던 일로 해 달라고 귀찮게 해 드려서 내내 마음이 쓰였습니다.”
―아닙니다. 일을 하다 보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죠. 그런데 제가 조금 전에 고 부장하고 통화를 하기로는 한국 추석 연휴에 지사를 방문하실 계획이시라고요?
옆에서는 정 대리가 귀를 쫑긋 세운 채 통화 내용을 엿듣기에 여념이 없었다.
“네, 그 전에 지사장님께 미리 말씀을 드려 놓는 게 예의가 아닐까 싶어 이렇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저희 입장에서 오시는 건 아무 문제가 안 되는데, 한국에선 연휴일 텐데, 왜 굳이 연휴에 오시려고 그러세요?
“해외 지사는 현지 공휴일을 따르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현지 방문이니까 현지에 맞추려고 그러는 겁니다. 그날도 근무하시지 않습니까?”
―네, 그렇죠. 저희는 이곳 빨간 날에 직원들 스케줄을 맞추니까요.
어느새 몸이 반쯤 넘게 내 쪽 파티션으로 들어와 버린 정 대리를 밖으로 밀어내며 통화를 이어 갔다.
“혹시 지사 근처에 괜찮은 한식당은 있습니까?”
―사무실 근처예요?
“네.”
―근처에는 없습니다. 파리에서 괜찮은 한식당은 주로 1구에서 3구 사이에 다 밀집이 되어있다 보니, 이곳 생뚜앙 근처에는 뭐가 없습니다.
“그럼 직원들 회식 같은 거 할 때 가는 한식당도 주위에는 없습니까?”
―사무실 주위는 아니지만 회식 때 항상 가는 한식당은 한 군데 있습니다.
“그 한식당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요?”
―혹시 과장님 오셨을 때 그곳에서 다 같이 회식을 하려고 그러시는 거면, 그냥 저희가 이쪽에서 예약을 해 놓겠습니다.
“아닙니다. 그거 때문에 여쭤보는 건 아닙니다.”
―그럼요?
“혹시 차례상을 준비해 줄 수 있는지, 그걸 좀 물어보려고요.”
수화기 너머에서는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차례… 상이요?
“네, 돈은 얼마가 들더라도 상관이 없으니까, 차례상을 준비해 줄 수 있을지 물어보고, 된다고 하면 추석 당일 아침까지 부탁을 하려고요.”
―….
“종교 때문에 차례를 안 지내는 직원도 있겠지만, 꼭 그런 걸 떠나서라도 멀리 해외에 나가서 가족들과 떨어져 회사를 위해 일해 주시는 분들이, 바로 우리 생뚜앙 지사 주재원분들입니다. 지사장님 말씀처럼 우린 한 가족 아닙니까. 진작에 챙겼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죄송하고요, 올해부터는 본사 차원에서 지사 근무자들이 소외당하는 기분이 들지 않게끔 제가 여기에서 여러 방법을 고민해 보겠습니다. 이번에는 회사 차원이 아니라, 그냥 저 혼자 가는 겁니다. 그냥 편하게 생각해 주시면 됩니다.”
양수호 상무와 통화를 끝내 놓고, 폰으로 항공권 예약을 해 보려고 시도를 해 봤다.
그런데 이게… 역시나 아직은 나 혼자 해내는 게 무리였다.
어쩔 수 없이 정 대리에게 항공권 예약하는 방법을 물었다.
“이거, 재경항공 어플은 이렇게 깔려 있는데… 이걸로 항공권 예약은 어떻게 하는 겁니까?”
그제야 허락을 받고 파티션을 넘어오는 거라는 식으로 기다렸다는 듯 정 대리가 내 쪽으로 붙었다.
“이번 연휴 때 파리 가시게요?”
“네.”
“혼자 가십니까?”
“네.”
“혼자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혹시 다른 사람 도움이 필요하다거나, 그럴 일은 없겠습니까?”
뭐야?
이놈은 또 갑자기 왜 이래?
“네, 없는데요?”
“잘 한번 생각해 보세요, 과장님. 아마 필요하실 겁니다.”
“아뇨, 전혀 필요할 거 없습니다.”
“과장님.”
“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난 일부러 몸을 뒤로 빼며 정 대리와의 거리를 만들었다.
“뭘요?”
“아무리 공식 일정이 아니라, 과장님 개인 일정으로 가시는 거라도 어쨌거나 생뚜앙 지사 직원 입장에선 회장님의 아들이 지사를 방문하는 겁니다.”
“근데요?”
“이건 공식과 비공식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죠.”
“그래서요?”
“혼자 방문을 하시는 건 여러모로 보기가 안 좋을 수 있습니다.”
“안 좋을 게 뭐가 있습니까?”
“저 데리고 가시죠.”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정 대리가 좀 더 내 곁으로 다가왔다.
난 그런 정 대리를 밀어내며 물었다.
“이거 출장 아니에요. 그냥 연휴 이용해서 가는 겁니다.”
“네, 저도 조금 전 통화하시는 거 다 옆에서 들었습니다.”
“정 대리는 추석 때 부모님 만나러 안 가요?”
“다른 날은 다 가도 명절만큼은 피하고 싶죠.”
“…왜요?”
“왜긴요. 그날은 집에 작은아버지, 고모도 오시거든요.”
“……?”
“장가는 언제 갈 거냐, 만나고 있는 아가씨는 있냐… 저 이제 그런 질문 더는 안 받고 싶어요.”
마치 자신을 살려 달란 눈빛으로 다시 한 발짝 내게 다가오며 정 대리가 말했다.
“그날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제가 집에 없어야 저희 부모님도 스트레스가 덜할 거예요. 과장님.”
“…네.”
“저 정말 그동안 열심히 과장님 도와 왔습니다. 뭘 도와 왔는지는 제가 굳이 말씀 안 드려도 과장님이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
“저 파리 가 보고 싶습니다.”
“…….”
“아직 저 유럽 한 번도 못 가 봤습니다. 그냥 놀러 가겠다는 거 절대 아닙니다. 가서 과장님께서 하시려고 하는 거 옆에서 최선을 다해 보좌할 겁니다. 그리고 저 파리 지사도 꼭 한번 가 보고 싶었고요.”
솔직히 정 대리만 괜찮다고 하면 나도 같이 가는 게 좋긴 하다.
“그래도 쉬는 연휴를 그렇게 써 버리는 건 좀… 정 대리 입장에선 아깝지 않을까요?”
“아뇨, 전혀요. 저 비행기 안 타 본 지도 너무 오래됩니다.”
“아니, 나야… 정 대리만 괜찮다고 하면 출장 개념은 아니지만 내가 비행 편이랑 다 부담을 해서 같이 가고 싶죠.”
“호텔도….”
“그게 무슨 문제라고….”
“과장님. 저 진짜 가 보고 싶습니다. 파리. 데리고 가 주세요.”
어랍쇼?
이젠 아예 대놓고 불쌍한 표정까지 만들어 짓네?
“진짜 괜찮겠어요? 나는 갔다 왔다 하는 동안 안 심심하고 좋을 거 같긴 한데, 그 연휴를 왜 그렇게 쓰려고 하지?”
“과장님이랑 같이 있으면요, 그냥 뭔가… 제 시야가 넓어지는 거 같아서 좋습니다.”
“우와, 몰랐는데, 정 대리 사회생활 완전 잘하네. 그동안 정 대리가 이런 사람이라는 걸 내가 왜 몰랐지?”
“진심으로요.”
“흠… 나중에 뒤에서 이상한 말 하고 다니지 마요.”
“무슨 이상한 말이요?”
“추석 연휴에 쉬지도 못하고 손 과장 따라 파리 다녀왔다… 그런 말이요.”
“진짜 제가 가 보고 싶은 거라니까요?!”
“방금 나한테 소리 지른 겁니까?”
“누가요? 제가요?”
난 고개를 돌려 다른 직원들을 쳐다봤다.
모두가 나와 정 대리의 대화를 킥킥대며 엿듣고 있었다.
이건 엿듣고 있었다고 말하기도 조금 애매하다.
정 대리의 목소리가 그만큼 컸으니까.
“알겠어요. 자, 이거 내 폰으로 항공권하고 호텔 예약 좀 하세요.”
“호텔은 어디로….”
“생뚜앙 지사 근처에 있는 호텔.”
“네.”
“그중에 제일 비싼 호텔, 그 안에서도 제일 좋은 방으로 두 개.”
“크흐… 역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