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좋네요
추석 연휴가 다가오고 있었다.
승현이 때문에 가족 식사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던 정태 내외.
녀석들이 없는 식사 자리이다 보니 내 입장에선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난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아들 내외 앞에서 내가 정말 녀석들의 둘째 아들인 척 연기를 하며 나의 책임을 다했고, 그 자리에서 홍준이 놈에게 연휴를 이용해 생뚜앙 지사를 다녀오겠다는 뜻을 밝혔다.
승현이가 태어난 첫 명절인데, 가족들 다 같이 좋은 시간을 보내야 하지 않겠냐며 질색을 했던 장혜란이었지만, 곧 홍준이 놈의 허락으로 장혜란은 그 내용에 더는 입을 열지 못했다.
그렇게 다시 또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러, 추석 연휴가 시작되기 바로 전날이었다.
“그럼 과장님, 내일 아침에 제가 댁으로 모시러 가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내가 그냥 정 대리를 데리러 가는 건 어때요?”
“과장님이요?”
“정 대리 말대로 굳이 차 두 대로 움직일 필요 있겠어요? 한 대면 충분하고 거리도 정 대리 살고 있는 오피스텔이 공항까지 훨씬 더 가깝잖아요.”
“…….”
“나 데리러 우리 집까지 왔다가 다시 공항으로 가면 왔다 갔다 하는 거잖아요. 그냥 내가 오피스텔 앞에서 정 대리 태워서 공항으로 가는 게 훨씬 경제적이지.”
퇴근길에 정 대리와 다음 날 움직일 대략적인 약속을 잡고, 혹시라도 중간에 다른 일이 생기면 전화로 조율을 하기로 한 다음 집으로 돌아왔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무척 헛헛한 명절 연휴 하루 전날이었다.
정훈이로 살아가고 있는 지금과는 달리, 재경 그룹의 작은 뼈마디 한 곳까지도 말 한마디로 움직이게 만들 수 있었던 당시의 난 명절 연휴를 앞두고 이렇게까지 여유가 있었던 적이 없었다.
이런 큰 명절을 앞두고 있을 때면 며칠 전부터 집으로 걸려 오는 정·재계의 다양한 인맥들과 일일이 통화를 하며 인사를 주고받았고, 또 내가 직접 집안의 어르신들이나 내가 꼭 챙겨야 하지만 여건상 직접 찾아가지 못하는 이들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기에 바빴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어서 그런 건지, 아님 정훈이 놈의 그런 인맥들을 내가 카톡이나 SNS상에서 내 기준으로 다 차단을 해 버려서 그런 건지 연락이 오는 곳이 없었다.
평생을 한국 전쟁 통에 작은아버지와 단둘이서만 남한으로 내려와 굶지 않기 위해, 조금이라도 배불리 먹기 위해 일을 했고, 또 가정을 꾸려서는 기업에 큰 뜻을 두고 재경을 키우는 것에만 온 정신을 쏟아부었던 인생이었기에 난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느껴 볼 겨를이 없었다.
내가 느껴 봤던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내 주위에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가끔씩 내 주위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째서 장태산이 말고는 내 진심, 내 뜻을 정확히 알아주는 사람이 없을까 하는 외로움이 전부였던 거 같다.
그나마도 태산이가 항상 내 옆에 있었고, 지금 이 시대와는 달리 비록 경제 수준이나 국가 위상은 한참 아래에 있었지만, 기업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국가 자체가 동력이 풍부한 상황이라 사업이 커 가는 모습에 정작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느껴 볼 틈이 없었다.
그런데 이젠 완전히 익숙해진 이 집에 홀로 있는 지금, 이상하게 헛헛한 기분이 들었다.
결국 난 용기를 냈다.
태산이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볼 용기.
명분은 있었다.
추석 아닌가.
큰 명절을 앞두고 안부 인사차 전화를 걸어 보는 건데, 그만하면 충분한 명분이 될 수 있으리라….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그리고 짧은 두 번의 연결음 후, 장태산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회장님. 저 손가 정훈입니다.”
정말 잠시였지만,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난 어떻게 하면 태산이와 따로 자리를 만들 수 있을지, 그 궁리를 하느라 침묵이 크게 부담스럽지도 않았다.
―자네가 또 어쩐 일인가?
“추석이지 않습니까. 제가 오늘이 아니면 따로 회장님께 명절 잘 보내시라는 안부 전화를 드리기가 어려울 거 같아서 미리 전화를 드렸습니다.”
제발 이 친구야, 내가 이렇게까지 대화를 이어 가려고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신경을 써서 말을 하면 받아 주는 척이라도 하게!
“제가 내일부터 며칠간 지사 방문차 파리에 가 있을 예정입니다.”
―…….
제발, 제발 이 친구야.
홍준이도 아니고, 정훈이처럼 이런 어린놈을 상대로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어쨌든 내 손주 아닌가.
제 아비가 자넬 실망시키고, 또 마음을 안 좋게 만들었다는 건 나도 대충 알겠네만, 그래도 어쨌거나 자네 친구, 내 손주 놈 아니냔 말이다.
이렇게 명절을 핑계로 다시 한번 큰 용기를 내어 연락을 넣은 건데, 꼭 이놈 정훈이를 이겨 먹어야만 하겠는가?
꼭 이렇게까지 박하게 굴어야 하겠어?
“명절인데도 우리 지사 직원들, 회사 일 하느라 고향에 계신 부모, 가족들을 만나지도 못하고 있는데 저라도 가서 수고 많다고, 고맙다는 말을 대신 전하려고요.”
―…….
분명 전화는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상대가 전화를 받고 있다는 게 주위에서 들려오는 생활 잡음으로 다 느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태산이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내가 하는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해 주지 않고 있었다.
결국 난 태산이를 상대로 낚시질을 할 수밖에 없었다.
“회장님의 자식들인 것처럼 살펴 달라고 하셨다 들었습니다.”
―뭐?
“무리한 부탁이고, 또 너무 큰 짐을 짊어지게 한다는 걸 알면서도 회장님 말고는 그런 부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셨다 합니다.”
―자네 방금 뭐라고 한 건가?
“친구가 아닌 형제인 듯 부탁을 하실 거라 했습니다.”
―자네가 그걸….
역시.
결국 태산이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가족들을 다 밖으로 물리고 오로지 회장님만 곁에 있게 하시면서… 그런 부탁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까 그걸 자네가 어떻게 아느냐고. 난 그 내용을 다른 사람들한테 말한 역사가 없는데.
“저 역시 제 할아버지의 자식입니다.”
―…….
“비록 회장님 눈에는 많이 부족하고, 정이 안 가시겠지만… 저 역시 할아버지의 자식입니다.”
태산이는 다시 침묵을 시작했다.
“이 말고도 더 많은 이야기를 회장님과 나눠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오늘은 정말 순수하게 추석 명절 잘 보내시라, 건강하시라… 그 말씀 전해 드리려고 연락드렸던 겁니다.”
―…그래, 자네도 명절 잘 보내고.
“혹시 제가 추석 명절 끝내고 다시 전화를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때 그렇게 차갑게 전화를 끊었는데, 또 이렇게 다시 전화를 하는 걸로 봐선 내가 하지 말라고 한다고 안 할 거 같지는 않네.
“정태 형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건너 건너 들어서 알고는 있네.
“그런데 저는 건너 건너서라도 제 할아버지의 형제나 다름없으셨던 회장님의 안부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
“회장님께서 불편해할 만하신 내용에 대해서는 제가 약속드리건대, 절대 제가 먼저 입에 올리지 않겠습니다. 저는 그저 회장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자네가 이러는 걸 자네 아버지, 손 회장은 알고 있나?
“모릅니다. 그런데 숨기지는 않을 겁니다. 마땅히 저라도 해야 하는 걸 하고 있는 거니까요.”
―마땅히 해야 하는 걸 하는 거다?
“현재 회장님께서 들고 계신 재경모직의 지분. 회사 쪽에서 아무리 큰 금액을 제시하더라도 절대 넘기지 말고 끝까지 들고 계셔 주십시오.”
―뭐?
“재경모직은… 아니, 재경 그룹 전체로 놓고 봐도 현재 회장님께서 들고 계신 지분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계열별로 그렇게 가지고 계시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모직 쪽에서만 11.3퍼센트라니요.”
―…….
“누가 뭐래도 재경은 회장님께서 제 할아버지의 옆을 지켜 주지 않으셨다면 성장하기 힘든 회사였습니다. 그리고 이건 제가 짐작건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부터 지금까지도… 회장님의 관여가 없으셨다면 지금처럼 유지되기 힘들었을 겁니다. 저라도 염치를 챙기겠습니다. 그리고 저라도 앞으로는 회장님에 대한 저희 집안의 도리를 하고 싶습니다. 진심입니다.”
그렇다 다시 한참의 침묵을 만들어 낸 태산이가 탁한 웃음소리를 만들어 낸 뒤 말했다.
―지금 자네가 한 그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나로서는 이렇게 목소리만 들어서는 분간이 안 가네.
“네?”
―지사 방문 잘하고 돌아와서… 그러고 나서 다시 전화를 주게. 자리를 한번 만들어 보는 걸로 하지.
태산이.
자네는 내 목소리만 들어서는 내가 한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분간을 하기 어렵다고 했지만, 난 바로 알겠네.
난 자네 목소리만 들어도 바로 알겠어.
고맙네, 태산이.
그간의 사정을 내가 정확히 알 수는 없겠으나, 어쨌거나 다른 사람도 아닌 천하의 장태산이가 이렇게까지 내 자식 놈에게 부아가 나 있다는 말은 홍준이 놈이 정말 큰 잘못을 했다는 말일 텐데… 그럼에도 정훈이 이놈에게 마음을 열어 줄 노력을 한다는 그 자체로 난 또 한 번 자네에게 고맙네.
* * *
“도착해서 내일 아침에 지사 직원들 다 같이 합동 차례 지낼 때까지만 내 옆에 있어 주고, 나머지 시간은 정 대리가 알아서 개인 시간 가져요.”
파리로 향하는 비행기 안이었다.
“에이, 어떻게 그럽니까? 지금 제가 타고 가는 비즈니스석 이거 가격이 얼만데요.”
“그룹의 메인 비즈니스가 항공인데, 재경 직원이 푯값 따지는 것도 좀 우습네요.”
“그래도 거리가 가까운 일본, 동남아도 아니고 파리 가는 건데 비즈니스석은 이야기가 다르죠.”
“다를 게 뭐 있어요? 어차피 정 대리 곧 과장 진급하면 희귀 노선 빼놓고는 다 비즈니스석 업그레이드가 되잖아요.”
재경 그룹이 가지고 있는 직원 복지에 그런 내용이 있다.
재경식품이 하고 있는 요식업체 쪽 포인트 적립과 함께 재경항공의 마일리지 적립이나, 좌석 업그레이드에 관한 혜택.
평사원은 할인 혜택이 있지만, 과장 이상급은 몇몇 희귀 노선을 제외하고는 1년에 몇 회까지는 일반석 예약 후 비즈니스석으로 업그레이드를 할 수 있게 해 주고 있었다.
괜찮은 직원 복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다.
“과장 진급까지 앞으로 얼마나 더 남았을 줄 알고요? 크게 신경 안 쓰고 있습니다.”
“직장인이 승진을 신경 안 쓴다는 게 말이 되나.”
“신경을 쓴다고 지금 당장 안 될 게 갑자기 되고 그러는 거 본 적 있습니까? 하하하.”
웃기는….
“부장님 지사 트랜스퍼 이야기 나오는 중인 거 알지 않아요?”
“그런데 그거 확실한 거예요?”
“연휴 끝나고 회사 출근하면 아마 공지가 올라갈 겁니다.”
“진짜구나… 그럼 부장 자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정 대리는 어떻게 조직이 바뀔 거라 예상하는지, 정 대리의 생각을 들어 보고 싶었다.
정 대리가 하고 있는 예상이 결국은 우리 인사부 전 직원들의 생각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란 기대로.
“정 대리 생각엔 어떻게 될 거 같아요?”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하하….”
“그래도. 그냥 정 대리가 만약 고 부장이 빠진 상태로 인사부를 새로 개편을 해야 한다면 어떻게 할 거 같아요?”
“글쎄요… 저는 정말 모르겠는데요?”
“그럼 부장 자리엔 누가 갈 거 같아요?”
턱끝을 매만지며 신중한 표정으로 정 대리가 말했다.
“일반적으로 본다면 아무래도 김 차장님이 올라갈 확률이 높겠죠. 그런데 과장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전 아직 입사 8개월 차밖에 안 됩니다.”
“에이, 과장님이 저희랑 같나요, 어디.”
“같지 않기 때문에 더 철저하게 지켜야 하는 것도 있는 겁니다.”
“어떤… 거요?”
“본사 상무도 그룹 본사 전략 기획 본부에 과장으로 입사해서 2년 동안 아무 이동 없이 과장 자리에서 근무를 했습니다. 그건 현재 회장님, 그리고 전 회장님 역시 마찬가지셨죠.”
“…….”
“아마 본사 상무가 저를 1년 정도만 모직 생활을 하게 만들고 본사로 부르려고 하는 거 같던데, 전 제가 직접 예외를 만들고 싶지는 않거든요. 저도 똑같이 할 겁니다. 그래야 비교가 되죠.”
“네?”
“그런 게 있습니다. 아무튼 비게 될 인사부장 자리에 제가 올라가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그럼 차장님 말고는 없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럼 비게 될 차장 자리엔 누가 갈까요?”
“그야 당연히 과장님께서 예외를 만들지 않겠다 하셨으니, 박 과장님이 올라가시겠죠.”
“그럼 HRD 과장 자리에는요?”
“…….”
“아이고, 입사 동기인데 민 대리가 정 대리보다 먼저 과장을 달겠네요.”
난 애써 진지한 척 표정 연기를 하며 놀리듯 정 대리의 표정을 훑었다.
“뭐… 민 대리는 충분히 달 만하죠. 일… 잘하잖아요. 하하하….”
“우리 정 대리한테 내가 미안해서 어떻게 하지? 나 때문에 민 대리하고는 입사 동기인데도 1년 이상 과장 진급 차이가 벌어지겠네.”
“그게 왜 과장님 때문입니까?”
“괜찮아요?”
“그, 그럼요. 괜찮습니다.”
“나 같으면 안 괜찮을 거 같은데, 확실히 정 대리는 사람이 좋네요.”
“…….”
“그래요, 정 대리처럼 여기저기 좋은 소리 못 듣고, 좋은 사람 소리만 들으면서 손해 보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한 명쯤은 있어야 조직이 굴러가죠.”
“…….”
“안 그래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