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제 것도 있습니까?
손정훈 과장과 정현수 대리가 파리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 있을 무렵.
한국에선 정태가 아내 원수경과 함께 아들 승현이를 데리고 본가를 찾았다.
본가에선 아직 원수경의 몸이 완전히 다 풀리지 않았을 것이기에, 여느 명절 때처럼 하루 전날 와서 차례 음식 준비를 도울 생각 같은 건 하지 말고 그냥 이번 추석은 당일 아침, 차례를 지내기 전까지만 오라고 했다.
그럼에도 정태는 원수경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결국 승현이를 데리고 하루 먼저 본가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분명 힘이 들 텐데도 불구하고 원수경은 평소보다 더 밝은 모습으로 차례상 준비를 도왔다.
“얘야, 수경아.”
“네, 어머니.
“하지 마, 손대지 마. 집에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음식할 사람이 몇 명이나 있는데 네가 왜 지금 거기 앉아서 그러고 있어? 그냥 소파 가서 티브이 보고 앉아 있어.”
“우리 어머니 또 모르는 소리 하신다. 움직여야 몸이 풀리죠. 저 지금 몸 풀러 온 거예요.”
그런 원수경의 모습이 어찌 장혜란의 눈에 예쁘게 안 보일 수 있을까.
싹싹해, 똑똑해, 거기에 떡두꺼비 같은 손자까지 낳아 줘.
만약 딸이 있었음 이런 기분이었을까.
평생을 딱딱한 아들 둘만 키워 봤던 장혜란은 원수경이 며느리로 들어온 이후부터 하루하루, 딸과 시간을 보내는 듯한 행복을 느꼈다.
“아주머니, 그거 놔두세요. 제가 조금 이따가 이거 다 붙여 놓고 간 볼게요.”
“그러시겠어요?”
“네, 그건 나중에 제가 할 테니까, 아주머니들 잠깐 나가서 제가 사 온 병과 한번 드셔 보세요. 아주머니들 것까지 해서 잔뜩 사 왔어요. 집에도 한 박스씩 가져가시고요.”
“매번… 작은 사모님한테 이거 감사해서 어떻게 해요?”
“감사는요. 저희가 직접 모시고 싶어도 아버님, 어머니가 무조건 나가 살라고 하셔서 그러지도 못하고… 아주머니들이 계셔서 저희는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어요. 항상 감사해요.”
“어쩜 말씀까지 그렇게 예쁘게 하세요. 정말 사모님은 너무 행복하시겠다.”
거기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까지 집안일을 봐주는 사람들에게까지 상냥할 수 있을까.
장혜란은 원수경이 이 집안의 큰며느리로 들어온 이후부터 그간 가사 도우미를 대해 왔던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반성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원수경을 보면서 둘째 정훈이의 짝으로도 딱 덜도 말고 더도 말고 원수경 같은, 수경이와 잘 지낼 수 있는 상대가 나타나 주면 여한이 없을 거 같단 생각을 항상 하고 있는 중이다.
원수경이 시어머니를 상대로 점수라는 점수는 모조리 긁어 따고 있을 때, 서재에서는 손홍준 회장이 손정태 본사 상무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손 회장의 품에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낯선 환경을 두리번거리는 3주 차 승현이가 안겨있었다.
그런 손주를 의자에 앉은 상태로 이리저리 흔들어 보며 손 회장이 말했다.
“올해는 내일 아침에 차례만 지내고 바로 처가로 가라.”
“네.”
“사돈어른들도 승현이가 보고 싶을 거 아냐.”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좋아들 하시지?”
“그럼요. 장모님은 아예 집에서 같이 사실 것처럼 하세요.”
“그러시겠지. 얼마나 기다렸던 첫 손주겠어.”
“아버님도 좋으시죠?”
“그럼.”
“어떠세요?”
“뭐가?”
“아버지가 됐을 때가 더 좋으셨어요, 아님 할아버지가 되셨을 때가 더 좋으셨어요?”
손주의 볼을 가볍게 꼬집어 보며 손 회장이 말했다.
“그걸 말로 해서 뭐할까. 나이 든 건 서럽지만, 할아버지가 된 지금이 훨씬 더 좋아.”
“우와… 이거 제 아들한테 질투심 생기는데요?”
“질투심 생길 게 어딨어? 지금 내가 느끼는 행복을 나중에 너한테 만들어 줄 놈이 이놈인데.”
“그건 또 그렇네요. 그런데 아버지.”
정태는 손주에게 푹 빠져 있는 손 회장의 모습을 미소로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른 날도 아니고, 바쁜 일이 생긴 것도 아닌데 명절에 정훈이는 왜 파리로 보내신 거예요?”
이미 정훈이가 파리 지사를 방문해 보고 싶다며 허락을 구할 때부터 대답을 준비하고 있던 질문이었다.
손 회장은 특유의 무심한 표정으로, 그러면서도 손주를 향해서는 미소를 유지하며 대답했다.
“앞으로는 너도 가야 해.”
“네? 어딜요?”
“정훈이가 회사 일 배우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같이 시키겠다고 일부러 그동안 너한테는 따로 안 시키고 있었는데… 앞으로는 정태 너도 명절 되고 하면 해외 지사들 다니면서 그곳 직원들 챙기고 그렇게 해야 해.”
이건 손 회장이 맏아들 앞에서 하고 있는 어쩔 수 없는 거짓말이었다.
만약 정훈이가 자신을 찾아와 명절인데 어떻게 기업의 오너가 다른 일반 직원처럼 가족 차례를 챙길 수 있겠냐는 질문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 질문으로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았더라면… 맏아들 앞에서 이런 비겁한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됐겠지.
손 회장은 지난주 자신을 찾아와 추석 연휴 동안 생뚜앙 지사를 방문하겠다며 그곳 직원들의 명절 떡값을 회장 사비로 따로 챙겨 주길 부탁했던 정훈이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날 정훈이는 손 회장을 찾아와 이런 부탁을 했다.
“직원들한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 사비로 회장님이 주시는 것처럼 떡값을 만들어 전달할 수도 있겠지만 제가 그렇게 해 버리면 당연히 빠른 시일 내에 회장님 귀에도 들어갈 거고, 그렇게 되면 저는 직원들뿐 아니라 회장님께도 거짓말을 하는 게 되어 버리잖아요.”
“떡값은 다 들어가잖아.”
“기분 차이죠. 항상 받는 기본적인 떡값 말고, 다문 100달러 정도씩이라도 현찰로 회장님이 직접 따로 챙겨 주신다면 거기 직원들이 얼마나 기운이 나겠어요? 큰돈 아니잖아요. 이건 돈이 아니라 기분 문제예요.”
“그 기분을 왜 해외 지사 나가 있는 직원들한테만 만들어 주겠다는 거야?”
“그럴 가치가 있으니까요.”
“뭐?”
“현재 재경모직 총매출의 70퍼센트가 해외 브랜드 수입 유통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
“그 일선에 있는 직원들입니다. 60명 조금 넘는 인원으로 3천 명의 재경모직 직원들을 떠받쳐 주고 있는 셈인데, 당연히 다른 대우를 받아야죠.”
철부지로만 알고 있었던 둘째로부터 그런 말을 듣는데, 순간 손 회장은 지금부터 자신이 정태와 정훈이를 위해 교통정리를 제대로 해 주지 않으면 나중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일전에 자신을 찾아와서 그때까지는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승현이의 존재를 거론하며, 승현이라는 존재가 어쩌면 정훈이 자신에게는 손 회장의 입장에서는 정엽이와 같은 존재이지 않겠냐고 물었던 순간 때문이었다.
손 회장 본인부터 형을 밀어내고 재경의 총수 자리에 앉은 인물이다.
그 일로 인해 많은 사람을 잃었고 더 많은 책임을 떠안아야 했다.
그랬기에 손 회장 자신에게는 둘째 정훈이에게 욕심을 내지 말고 형인 정태를 잘 도와서 재경의 안전한 미래를 만드는 거에만 온 힘을 쏟으라는 식의 말을 할 명분이 없었다.
실력이 있는 자식을 재경의 후계자 자리에 앉히는 것.
그렇게 하는 거야말로 손 회장의 입장에선 형을 밀어내고 현재 재경의 총수 자리에 앉아 있는 자신의 지난 결정을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던 손 회장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 손주로 인해 얼른 정신을 차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뭐가?”
“금방 저도 다음 명절부터는 해외 지사들을 다니면서 그곳 직원들을 챙겨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아, 그거….”
“어떻게 그럽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식으로 웃어넘기는 정태의 모습에 손 회장은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저까지 나가 버리면 명절날 차례는 누가 지내고요? 그리고 지금이 옛날도 아니고, 요즘 같은 시대에 오너가 사람들이 명절이라고 해외 지사 돌아다니면서 직원들 챙기면, 오히려 직원들은 부담스러워해요. 서로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데, 그 부분은 아버지가 생각을 조금 다시 해 주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부담스러워할 거 같아?”
“그럼요. 요즘은 그런 거보다는 그냥 돈을 좀 더 따로 챙겨 주거나 하는 걸 백배는 더 선호할 거예요.”
“…….”
“아버지, 승현이 저 주세요.”
“응?”
“승현이 지금 똥 싼 거 같아요. 그래서 우는 거예요. 하하하. 희한하게 이제는 알겠어요.”
“뭘?”
“왜 우는지. 배가 고파 우는지, 잠이 와서 우는지, 아니면 지금처럼 똥을 싸서 우는지… 다 똑같이 우는 건데, 제 눈엔 우는 게 다 다르게 보여요. 냄새나죠?”
“그렇네. 하하하.”
“저 주세요. 제가 얼른 데리고 나가서 기저귀 갈고 다시 올게요.”
“아니다.”
“네?”
“같이 나가자.”
“이야기 더 안 하시고요?”
“무슨 할 이야기가 있어? 일 이야기는 회사에서 하면 되는 거고. 자, 받아라. 먼저 나가 있어. 나도 곧 따라 나갈게.”
* * *
파리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
8시가 조금 넘었다.
객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 대리예요?”
“네, 과장님. 김 과장님 지금 로비에 도착했다고 연락 왔습니다. 준비 다 되셨습니까?”
“네, 지금 나가요.”
김철진 과장이라고, 본사에서는 해외영업부 소속이었는데 작년에 가족들 다 데리고 파리로 넘어와 주재원 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가 하나 있었다.
어제도 그 친구가 공항까지 직접 나와서 나와 정 대리를 이곳 호텔까지 데려다주었다.
지사장이 직접 픽업을 오겠다는 걸 내가 통화로 정색까지 해 가며 못 오게 말렸다.
마음은 충분히 알겠지만 난 해외 지사 직원들을 괴롭히러 온 게 아니니까.
어차피 회장 아들이 온다는 소식에 얼마나 쓸고 닦았을 건가.
그런 불필요한 일을 하게 만든 것도 마음이 불편한데, 오늘 차례상 받으면서 만나면 될 것을 굳이 지사장씩 되는 사람을 공항까지 나오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잘 주무셨습니까, 과장님.”
“네, 아침부터 저희 데리러 온다고 과장님만 고생하시네요.”
로비에서 김철진 과장을 만났다.
“고생은요, 무슨. 저희 집 이 호텔 바로 뒤에 있습니다.”
“네, 어제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이 동네는 주거지가 지금 계시는 그곳이 최선입니까?”
“네?”
“제 객실 발코니에서도 보이더라고요. 현재 과장님이 가족들이랑 다 같이 지내고 있는 집이. 어제 그 단지에 다른 우리 직원들도 많이 살고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렇죠. 저처럼 애 있는 집은 대부분 저희 커뮤니티에 살고 있습니다.”
“애들 학교 때문입니까?”
“네, 근처에 국제 어린이집이 없습니다. 한국으로 따지면 초등 교육, 중등 교육이 가능한 국제 학교도 3구까지는 들어가야 하고요. 그나마 저희가 현재 살고 있는 커뮤니티 앞에 스쿨버스 정거장이 있다 보니, 다들 애 있는 집은 저희 가족이 살고 있는 커뮤니티에서 살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우선 차를 타고 지사로 향하기로 했다.
지사로 향하면서도 난 직원들 거주 부분에 관해 몇 가지 다른 질문을 던졌다.
“이 동네 치안은 좀 어떻습니까?”
“파리라는 도시 자체가 치안에 관련해선 한국이랑은 비교가 안 되죠. 전 세계에서 한국만큼 치안이 좋은 나라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실 이건 나도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한 번씩 깜짝깜짝 놀라고 있는 부분이다.
이 시대 한국엔 소매치기라는 게 없다.
어디 그뿐인가.
도둑도 없는 거 같고, 밤늦게 여자 혼자 어두운 길거리를 아무렇게 돌아다니는 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보여 깜짝깜짝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근데도 생뚜앙 이 동네는… 파리의 다른 동네와 비교를 해도 조금은 더 우범 지대라고 봐야 합니다.”
그래 보였다.
그들 대부분은 아마도 생뚜앙 벼룩시장에서 장사하거나, 그에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 같아 보였는데 그들에게서 풍기는 기운이 상당히 거칠었다.
도로 자체도 너무 지저분했고, 80년대 중반에 사업차 매달 다녔던 미국 LA의 느낌과도 상당히 비슷했다.
“애들 키우면서 지내기에 좀 불편한 부분이 많으시겠습니다?”
“물 좋고 정자 좋은 곳이 있습니까? 하나가 좋으면 다른 하나가 좀 아쉽고… 그런 게 사람 사는 거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물 좋고 정자 좋은 곳이 왜 없나, 이 친구야.
물 좋은 곳에 정자를 만드는 게 사업하는 사람들이 할 일인 것인데.
생뚜앙 지사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였다.
전날 한식당 사장에게 부탁한 대로, 이미 차례상을 다 차려져 있었다.
그곳 현지에서 채용한 외국인 직원도 여럿 눈에 띄었는데, 내가 안으로 들어서자 그곳 지사장이 대표로 얼른 출입문 쪽으로 다가와 날 맞이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어제 제가 직접 공항으로 마중을 나갔어야 했는데, 한사코 못 가게 하셔서 마음이 많이 불편했습니다.”
“지사장님이 직접 오셨으면 제가 불편했겠죠. 불편한 거 하시게 만들어 죄송합니다. 하하하.”
“아닙니다, 아닙니다. 안으로 들어오시죠. “
난 정 대리와 함께 지사 사무실을 천천히 둘러보며 차례상이 차려진 곳으로 걸어갔다.
차례상과는 별개로 한쪽 테이블 위로는 분홍색 쇼핑백이 줄지어 세워져 있었다.
딱 봐도 지사장이 이곳 지사 직원들에게 나눠 주겠다고 준비한 명절 선물 같았다.
“저건 뭡니까?”
“마카롱입니다.”
내 옆에서 정 대리가 긴장을 하며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난 모르는 척 지사장에게 물었다.
“혹시 이게 직원들 명절 선물입니까?”
“네.”
“혹시 제 것도 있습니까? 하하하.”
“네, 그럼요. 이거 하나 과장님하고, 정 대리 하나씩 가져가세요.”
궁금했다.
마카롱….
난 그 자리에서 상자를 열었다.
이걸 어떻게 먹지?
모든 과자의 색깔이 다 달랐다.
노란색, 하늘색, 분홍색, 연두색….
그 색깔이 너무 예뻐서 먹기에 아깝단 생각까지 들었다.
그럼에도 난 빈속에 마카롱 하나를 입에 넣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