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기회에 모가지 날려 버리시죠
신상품 개발팀에 현재 있는 계약직 직원 전원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키자는 건의는 분명 회사 차원에서 부담스러운 내용이었을 것이다.
직원 몇 명에게 포상을 하듯 정규직 전환을 시켜 주는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일 테니.
어느 한 특정 부서에게만 이뤄지는 전체 정규직 전환은 틀림없이 다른 부서 쪽에서 불만의 목소리를 만들어 내기에 충분한 사안이고, 그 불만은 또 다른 불만으로 번질 것이다.
“이 부분은 내가 사장님께 전달하기 전에 고민을 많이 해 봤는데, 인사부에서 올리기엔 조금 과한 내용인 듯해.”
조동희 전무가 밑밥을 깔기 시작했다.
자신과 남 사장을 상대로 빈틈없이 설득을 해내라는 식으로 던져 주는 기회이기도 했다.
남 사장 역시 흥미를 가지며 나와 김 차장을 쳐다보고 있었고, 이에 나는 김 차장을 향해 준비해 온 내용을 펼쳐 보라며 눈빛을 보냈다.
김 차장이 말했다.
“해당 내용을 신상품 개발팀에만 한정시키지 마시고, 전사적인 차원에서의 인력 운영을 위한 기초 단계라고 인정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 차장.
일전에 나와 진지한 대화를 나눈 후, 진지함이 상당히 많이 생겨 있는 상태이다.
“인력 운영?”
“네, 그렇습니다, 전무님. 매년 11월이면 내년에 우리가 총 얼마만큼의 인력을 운영하게 될지에 관한 계획을 잡고 그에 맞는 리크루팅 준비, 재계약을 기획해야 합니다.”
남 사장과 조 전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김 차장의 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 준비 기간만 최소 한 달이 걸립니다. 하지만 올해는 벌써 다 끝이 났습니다.”
“벌써 끝이 났다? 아직 10월인데?”
“지난 하반기 공채를 준비하면서, 여기 손 과장이 각 부서의 부서장 및 과장급 관리자와 일일이 직접 만나 내년에 필요할 인력의 예상치를 다 잡아 냈습니다.”
남 사장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입가에 걸어 놓고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 조 전무는 쓰고 있는 안경테를 의미 없이 만지작거리며 날 쳐다봤다.
“그걸 다… 끝냈다?”
“네. 기존에는 11월에 맞춰 저희 인사 쪽에서 각 부서로 인력 운영 총괄 플랜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아시겠지만 진지하게 플랜을 만들어 보내 주는 부서가 많지 않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조 전무가 김 차장을 돕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 업무 부서야 부서 직원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고, 요즘은 조기 퇴사율이 높게 나오니 인력을 정확히 얼마나 확보하고 있어야 할지에 대한 예상을 하기가 힘들 테니.”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내년의 예상 인력 운영은 각 부서장이 저희 인사 쪽과 이번 하반기 공채를 함께 준비하는 과정에서 인력 운영의 중요성, 그리고 현재의 심각성을 피부로 느끼면서 진지하게 임해 줬습니다.”
“흠….”
“인원에 결손이 생길 때마다 상시 채용에 관한 리크루팅을 계속해 줘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드는 비용이 이제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까지 올라가 버린 상황입니다.”
아무도 그 회의 자료를 확인하지 않았지만, 김 차장은 자신이 준비해 온 회의 자료를 보고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에 들어가는 비용이라면 오히려 현 경력직 계약 사원을 정규직으로 전환시켜서 인원의 결손율을 줄이고, 동시에 신입 사원에게 들어가는 교육비까지 함께 세이브해 버리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바로 그때였다.
이젠 내가 슬슬 김 차장을 도와 마무리를 지어 볼까… 하는 시점이었는데, 남 사장의 폰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남 사장이 전화를 받았다.
“나 지금 미팅 중이니까, 중요한 내용 아니면… 뭐?!”
통화하며 비명처럼 꽥! 하고 고함을 치는 남 사장의 모습을 모두가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을 때였는데, 이번엔 조 전무의 폰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조동희 전무는 전화를 받기 전 인상을 쓰며 폰 액정에 뜬 발신 번호를 확인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나 지금 사장님 모시고 회의 중이니까 나중에 내가 전화할게. 뭐라고? 방금 뭐라고 했어?”
이번엔 조 전무가 조금 전 남 사장이 보인 반응과 비슷한 반응을 보이며 남 사장을 쳐다봤다.
동시에 통화를 하며 서로를 쳐다본 남 사장과 조 전무.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번엔 내 폰으로 정 대리의 전화가 걸려 왔고, 내가 전화를 받기도 전에 김 차장의 폰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
일이 터진 게 분명했다.
“네, 정 대리.”
우선 난 남 사장, 조 전무, 그리고 김 차장이 전화를 받는 모습을 살피며 정 대리와 통화를 시작했다.
―큰일 났습니다, 과장님. 결국 터졌어요!
“귀 아프다, 좀. 살살 말해요, 살살. 교복 생산 라인?”
―네, 파업 들어갈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거기 강 소장님 전화가 왔는데, 노조 측 대표들이 노조원들 집결시키면서 생산 라인 일곱 기가 현재 멈춘 상태라고 합니다.
“일단 알겠어요.”
―네?
“알겠다고요.”
―…그게 끝이에요?
“그게 끝이지, 뭐가 더 있겠어요?”
―과장님….
“파업에 준비가 어딨어요? 생산 라인 멈췄음 이미 그게 파업이지. 이미 시작된 걸 어떻게 하겠냐고. 알았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정 대리는 다른 업무 보고 있어요.”
* * *
같은 시각, 경기도 안산의 스마일 스쿨 생산 현장.
“테이핑 제대로 쳐! 그쪽 말고 이쪽으로 쳐야지. 밥 안 먹을 거야? 식당 가는 길을 그렇게 막으면 어떻게 해? 생각 좀 하고 일하자, 생각 좀.”
붉은색 노조 조끼를 입고 있는 몇몇 건장한 남성이 공장 본관 앞에 모여 빨간색 테이프로 임시 통로를 설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스무 명 가까운 인원이 테이프로 형성된 그들만의 길 위로 간이 테이블을 설치해 준비해 온 박스를 뜯기 시작했다.
그 박스 안엔 노조원들에게 나눠 줄 붉은색 조끼와 머리에 동여맬 띠, 그리고 돌돌 말려 있는 종이 묶음이 들어 있었다.
말려 있는 종이 묶음을 펼치니 피켓에 붙일 파업 시위 문구가 적혀 있다.
“자, 자! 일사불란하게. 줄 서요, 줄. 한 명씩 차례대로 조끼, 띠, 그리고 피켓 문구 받아 가요.”
확성기를 입 앞으로 갖다 대고, 건조하게 말하는 전무식 노조 위원장.
그의 모습엔 파업을 주도하는 사람이 보여야 할 결연함보다는, 오히려 권태스러움이 더 짙게 묻어 나오고 있었다.
마치 원치 않는 잔업을 해야 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그런 전무식 노조 위원장 앞으로 생산 라인 총책임자인 강인환 소장이 다가왔다.
“이봐, 전 팀장. 왜 또 그래?”
울음을 터뜨리기 바로 일보 직전의 울상을 하며 강 소장이 노조 위원장을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다.
“비키세요, 소장님.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라인 키는 또 언제 다 가져갔던 거야? 이러는 거 아냐, 전 팀장. 시위를 할 사람은 하더라도, 아닌 사람은 일을 할 수 있게 해 줘야지. 얼른 라인 키 줘.”
“안 됩니다.”
“얼르으으은! 이거 지금 자네 범죄 행위야. 라인 키 관리는 소장인 내 책임이라고.”
하지만 노조 위원장은 콧방귀도 끼지 않았다.
“제가 지금 저 혼자 잘 먹고 잘살자고 이러는 겁니까? 소장님도 노조원입니다. 평상시 때는 몰라도, 지금처럼 비상 상황에는 제 지시를 따라 주셔야 된다고요.”
“비상 상황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지금이 왜 비상 상황이야? 잘 돌아가고 있는 생산 라인 일부러 멈추고, 일 잘하고 있는 직원들 밖으로 불러 모아서 비상 상황을 만든 건 자네야!”
“만들 만하니까 만든 거죠.”
“또 뭐? 이번엔 또 왜 이러는 건데? 제발 그만 좀 해. 자네는 양심도 없어? 다른 사람들한테 미안하지도 않냐고.”
현장 소장과 노조 위원장의 팽팽한 힘겨루기 앞에 밖으로 불려 나온 현장 직원 모두는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제가 왜 이 사람들한테 미안해해야 합니까? 저는 지금 우리 생산직 직원의 권익을 대변하고 있는 중이에요. 야! 거기 뭐 하고 있어? 얼른 와서 소장님 안으로 모시든, 아님 조끼를 입히든 해!”
하지만 강인환 소장은 한 발도 못 물러난다는 식으로 두 팔을 넓게 펼쳐 그들의 접근을 막았다.
“다들 정상적으로 생각해, 제발. 지금이 1년 중 가장 바쁠 때야. 생산 라인 계속 돌려야 한다고!”
“뭐 해! 얼른 소장님 안으로 모셔!”
“특근 수당 안 받을 거야?!”
그 말에 강 소장 쪽으로 다가오던 몇몇 노조원이 주춤했다.
“잔업 수당 안 받을 거냐고! 회사가 있어야 노조가 있는 거야, 이 사람들아! 자네들이 지금 라인 키를 왜 나 몰래 훔쳐 갔어?”
“…….”
“지금 자네들이 하고 있는 이게 꼭 필요한 거고, 반드시 해야 하는 거라면 왜 치사하게 라인 키를 훔쳐서 다른 사람들까지 다 일을 못 하게 라인 키를 훔쳐서 라인을 다 멈춘 거냐고!”
“…….”
“할 사람들은 해! 내가 어떻게 그것까지 막겠어? 하지만 라인 키는 줘. 일하고 싶어 하는 자네들 동료, 특근 수당, 잔업 수당이 필요한 저기 저 사람들이 무슨 죄냐고. 이봐, 전 팀장.”
분함에 턱까지 덜덜 떨어 가며 강 소장이 노조 위원장을 향해 한마디를 던졌다.
“왜 저기 저 직원들을 위해선 이런 시위를 준비하지 않지? 자네들 기준에서 저 직원들은 동료가 아니야?”
강 소장이 눈짓한 곳엔 외국인 노동자들과 계약직 생산 직원들이 한숨만 푹 내쉬며 파업이 준비되는 현장을 맥없이 구경하고 있었다.
“도대체 자네들이 원하는 게 뭐야? 정말로 자네들이 말하는 직원들 근무 환경 개선이 목적인 거야, 아님 자네들 마음대로 이 회사를 돌리겠다는 거야? 이러는 거 아냐, 전 팀장. 그만해, 제발 좀!”
하지만 강 소장의 절절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그런 강 소장을 비웃으며 쳐다보는 노조 위원장의 입에선 듣는 사람들 모두가 납득할 수 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치워.”
“……?”
“소장님 안으로 치우라고!”
* * *
“우선은 저번 교섭 때처럼 자원팀장, 섬유팀장, 생산부장 그리고 재무리스크팀장으로 1차 교섭팀을 꾸려서 보낸 다음에 본사로 노조 측 대표를 불러들여서 제가 직접 교섭을 끝내겠습니다.”
조동희 전무가 말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모양이다.
그는 남 사장이 보고 있는 앞에서 안경까지 벗어 눈을 몇 차례 비빈 다음, 다시 안경을 썼다.
남 사장이 아랫입술을 잠시 깨물고 있다가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아무래도 버릇이 된 거 같죠?”
“…….”
“꼭 이 타이밍에만 저러네요. 작년 9월, 그리고 올 3월, 그리고 지금. 절기 바뀌면서 교복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저러네요.”
“이번 교섭 때는 제가 그 부분도 함께 지적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장님 말씀대로 이 정도면 버릇이라고 봐야죠.”
남 사장은 조 전무가 말한 방법 말고는 현재 뾰족한 수가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게 하세요. 빨리 1차 교섭팀 꾸려서 현장으로 보내세요.”
이런 답답한 친구들을 봤나.
조 전무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할 때였다.
“아닙니다, 사장님.”
조 전무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잠시 서 있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고, 난 그런 조 전무에게 양해를 구한 뒤 남 사장에게 말했다.
“더는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뭘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말이야? 이 상황에서 그거 말고 다른 방법이 있나?”
“없으면 만들어야죠. 정확한 방법이 없다고, 방법이 아닌 걸 방법처럼 사용을 해 왔으니 직접적인 문제 해결은 안 되고, 계속 지금처럼 회사가 끌려만 가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지금은 그 방법이라는 걸 만들어 낼 시간이 없다는 거야.”
“시간이 문제인 겁니까?”
내 말에 김 차장이 남 사장과 조 전무 몰래 테이블 아래에서 내 허벅지를 꽉 붙잡았다.
지금은 가만히 있으라는 사인이었다.
난 그런 김 차장의 손을 옆으로 치워 놓고 남 사장과 조 전무에게 말했다.
“왜 그들이 원하는 걸 계속해 주십니까?”
“아직 원하는 걸 들어 보지도 않았어.”
“아뇨, 이미 사장님은 그들이 원하는 걸 해 주려고 하십니다.”
“무슨 소리야?”
“왜 파업 현장으로 교섭팀을 보냅니까? 거기에서 지금 무슨 예쁜 짓을 하고 있다고요. 할 말이 있음 와서 하라고 하세요.”
남 사장이 한숨을 내쉬며 답답하다는 듯 날 가르치기 시작했다.
귀엽네.
“이봐, 손 과장. 파업이 길어져서 회사에게 좋을 게 뭐가 있어? 누군 그놈들이 예뻐서 교섭팀을 보내는 줄 알아?”
“어차피 터진 거 아닙니까?”
“뭐?”
“터지기 전에 교섭팀을 꾸려서 파업 터지는 걸 막았다면 모르겠지만, 이미 다 터졌는데 지금 보내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거죠.”
“……?”
“지금쯤 거기에선 본사가 보낼 교섭팀을 얼마나 기다리고 있겠습니까? 당연히 이번에도 교섭팀이 득달같이 달려갈 줄 알고 있겠죠. 그들이 원하는 대로 다 해 주는 게 무슨 교섭입니까?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거지.”
“그래서 뭘 어쩌자는 겁니까?”
결국 조동희 전무가 인상을 쓰며 내게 물었다.
뭘 당연한 걸 묻고 있어?
난 고민할 가치도 없다는 듯 짧게 대답했다.
“노조 측 대표 7명. 이번 기회에 모가지 날려 버리시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