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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나 보자

단순 숫자만의 600이 아니라, 실제 그 600여 명이 한곳으로 집결된 노조원의 규모는 엄청났다.

본사 앞은 물론이고, 그 규모가 8차선 도로 앞 인도까지 이어져 있다는 부분에서 자칫 아슬해 보이기까지 했다.

출근길에 차를 지하 주차장 쪽으로 넣으며 그들의 시위 현장을 살펴봤는데, 몇몇이 들고 있는 시위 피켓이 날 자극했다.

“…….”

정말 화가 났다.

정규직 전환, 일한 만큼 보상하라, 혁신안 폐지하라, 법정 근로 시간 준수하라….

그 모든 피켓 문구가 재경모직을 부도덕한 기업, 회사의 직원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기업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소인배 기업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내가 내 인생을 갈아서 만든 회사를 저딴 식으로 폄하하고 있는 놈들을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고, 도대체 그간 회사 운영을 어떻게 해 왔길래 저런 말도 안 되는 거짓 내용에 선동되어 조합원 600여 명이 본사 앞으로 집결하도록 만들었는지, 홍준이 놈, 그리고 남 사장이 괘씸할 지경이었다.

“썩을 놈들….”

이번 파업을 예상하며, 노조 측 대표 7인에게 현장 활동 지원비 지출 내역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안산 공단의 근무 환경을 자세히 확인했다.

그곳 강인환 소장과 직접 통화를 하면서 말이다.

정규직 전환?

시급한 부분이라고 나 역시 생각을 하고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저들이 피켓을 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과는 다른 내용이 훨씬 더 많이 숨어 있다.

우선 안산 공단의 생산 라인 노조원들은 계약직의 정규직 전환에 아무런 절실함이 없는 놈들이다.

왜?

가장 험한 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가 전체 안산 공단 생산직의 5퍼센트 정도가 된다.

그리고 2년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전체 안산 공단 생산직의 38퍼센트 정도가 되고.

이들에겐 노조 가입의 기회조차 주지 않고 있는 게 현 재경모직 생산 라인의 노조인 거다.

내가 그 이유를 살펴봤다.

그리고 아주 충격적인 내용을 확인했다.

노조를 이끌고 있는 주력 인물 대부분이 CS팀 소속, 혹은 출신이고 이들은 생산 관리와 불량에 대한 불만을 접수하는 업무를 하는 사람이지, 실제 라인을 돌리며 생산에 직접 참여를 하는 인력이 아니었던 거다.

자기들 딴에는 안산 공단 생산 라인 안에서 대학물을 먹고 배운 게 있다라고 착각하는 놈들이 노조 측 대표를 맡고 있었던 것.

일한 만큼 보상하라?

도대체 얼마나 더 보상을 하란 말인가.

전무식이가 받아 가는 연봉이 8,900이다.

여기에 현장 활동 지원비 명목으로 월 300씩, 1년에 3,600만 원이 추가된다.

이 3,600만 원은 지출항이 아니라, 판공비 개념의 보관항이기 때문에 세금이나 4대 보험 같은 게 일절 빠지지 않고 오로지 3,600이 실물로 떨어지는 항목이다.

그런데 우습게도 생산 라인 기본급이 3,600이다.

특근과 잔업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오로지 기본급이 3,600이라는 뜻이다.

이건 내가 너무 궁금하고, 이해가 되지 않아서 알아봤다.

도대체 다른 공단 생산직은 어느 정도 수준의 임금을 받아 가는지.

생산직이라는 게 업무의 강도가 다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다른 생산 라인, 다른 기업과 기본급을 비교한다는 거 자체가 노조 입장에선 부당하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난 비교를 해 볼 수밖에 없었다.

재경모직이라고 하면 다행히 이 시대에서도 업계에서는 대우가 좋기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그 대우가 생산직이 아닌 사무직에만 국한된 내용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정도는 해 볼 수 있는 거 아니겠나.

하지만 아니었다.

생산 라인 역시 재경모직의 직원 대우는 업계에서 손에 꼽힐 정도였고, 복지 수준은 최고 수준이었다.

IT 계열이 아닌 모직 분야에서 기본급 3,600은 이 시대에서조차 결코 적은 기본급이 아니었던 거다.

혁신안 폐지하라?

이 부분은 저들이 느낄 공포와 두려움에 충분히 공감을 할 수 있었다.

자동 생산화에 따른 노동력 감소 현상에 어느 노동자가 자신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을까.

하지만 법정 근로 시간을 준수해 달라는 내용에는 정말이지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시대 대기업 생산 라인은 잔업과 특근을 노동자에게 강제할 수가 없었다.

정확한 타임 테이블 안에서 분 단위로 그들의 잔업 수당과 특근 수당을 산정해 주게끔 시스템이 만들어져 있는데, 여기에서 법정 근로 시간을 준수해 달라는 게 무슨 뜻일까?

오히려 정 대리를 통해 내가 듣기로 생산 라인에서도 잔업과 특근을 기대하는 인력이 많은 거 같았다.

실제 안산 생산 라인은 학생들의 교복을 생산하는 라인이라서 교복이 바뀌는 봄, 가을을 제외하고는 잔업과 특근이 있을 수도 없는 근무 환경이고.

1년 365일이 항상 그런 것도 아니고, 1년 중 딱 두 시즌, 지금과 같은 봄, 가을에 주문량이 폭발적으로 밀려드는데, 이럴 때조차 기업이 잔업과 특근을 요청하지 못한다면 도대체 기업 운영을 어떻게 하라는 건가.

하물며 계약직 직원들과 외화 벌이를 하겠다고 한국을 찾아온 외국인 노동자들은 잔업과 특근을 반기는 입장들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결국 저들이 회사 앞으로 모여서 들고 있는 저 피켓은 안산 생산 라인 노동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게 아니라, 있지도 않은 파업의 정당성을 보여 주기 위해, 그 파업을 통한 교섭을 자기들 쪽으로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한 얕은 수작일 뿐이었다.

오전 10시가 넘어 회사 측 교섭단이 대회의실 안으로 모였고, 김원호 차장이 노조 측 대표들을 교섭단과 만나게끔 하기 위해 시위 현장으로 내려갔다.

난 김 차장이 노조 측 대표들을 안으로 안내하는 모습을 사무실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며 안산 생산 라인의 소장 강인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장님. 지금 바로 와 주시면 되겠습니다.”

―네, 지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 * *

인사부 김원호 차장의 안내로 교섭 장소에 도착한 노조 측 대표 7인.

그들의 얼굴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교섭에서 벌써부터 승리를 거머쥔 듯,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런 자신감도 잠시.

사측 교섭 대표 5인의 얼굴을 확인한 그들의 얼굴엔 조금 전까지 가득했던 자신감은 온데간데없고 의아함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조동희 전무를 제외한 나머지 교섭단 대표들의 얼굴이 생소했기 때문이다.

조 전무를 제외한 나머지 4명은 노조 측 대표들이 처음 보는 인물들이었다.

전무식은 속으로 생각했다.

‘뭐지? 재무리크스팀장은 어딨어? 섬유팀장도 안 보이네? 섬유팀장은 모르겠지만, 최소한 자원팀장은 나와야 하는 거 아냐?’

전무식이 그런 의아함을 속으로 키우고 있을 때, 조동희 전무가 입을 열었다.

“전무식 위원장님?”

“…네.”

“라인 마스터키를 가지고 가셨다고요?”

전무식은 그 첫 대화에서부터 뭔가 상황이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조동희 전무의 얼굴에서는 그 어떤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섬뜩할 정도로 차갑고, 표정 없는 그 얼굴에 전무식뿐 아니라 다른 노조 측 대표들도 동시에 주눅이 들어 버렸다.

“내놓으세요.”

“지금은 없습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를 해 보았지만, 그럼에도 전무식의 목소리에 묻어 있는 떨림을 그 자리에 모인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어디에 있어요?”

“그건….”

“어디에 있냐고.”

“다, 다른 사람한테 맡겨 놨습니다.”

“다른 사람 누구?”

“…….”

“내가 지금 좋아 보여요?”

그 한마디로 상황은 끝이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직 시작도 되지 못한 교섭.

하지만 전무식을 시작으로 자리에 모든 다른 노조 측 대표는 그간 자신들 앞에서 보여 주지 않았던 조동희 전무의 얼음보다 차가운 모습에 상황이 자신들의 예상과는 달리 무척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내가 지금 화가 상당히 많이 났어요.”

“…….”

“이건 협박인 거거든. 그렇죠?”

“혀, 협박이라니요, 전무님.”

“다른 건 몰라도, 라인 마스터키는 건드리면 안 됐어.”

곧바로 조 전무는 자신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는 그룹 본사 법무팀장을 쳐다봤다.

조 전무의 눈빛을 받은 법무팀장이 말했다.

“문종일, 그룹 본사 법무팀장입니다. 안산 공장 라인 마스터키를 처음 키 보관함에서 소장 확인 없이, 절차 무시한 채 가져가신 분이 누굽니까?”

사측 교섭단으로 앉아 있는 5인의 표정이 하나같이 똑같았다.

무표정.

“다시 묻겠습니다. 안산 공장 라인 마스터키를 처음 키 보관함에서 소장 확인 없이, 절차 무시한 채 가져가신 분이 누굽니까?”

노조 측 대표들은 일제히 전무식 위원장만 쳐다볼 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고 있던 와중, 법무팀장 바로 옆으로 앉은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목구비가 날카롭기로는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 가운데 단연 최고였다.

“그 부분은 조금 이따가 확인을 하시고요, 제가 먼저 해도 되겠습니까?”

조 전무의 허락을 받은 뒤, 노조 측 대표 7인을 향해 남자가 말했다.

“구종학, 그룹 본사 감사팀장입니다.”

“……!”

“재경모직 본사 인사부에서 3차례나 노조 측 대표분들의 현장 활동 지원비 지출 내역을 요청했으나, 아직 받지 못하고 있다고 그룹 본사 감사팀 쪽으로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지출 내역을 보내지 않은 데에 이유가 있으신 겁니까?”

여전히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만 꼭 닫고 있는 노조 측 대표들을 향해, 무척 날카롭고도 건조해 보이는 눈빛으로 감사팀장이 말했다.

“법적 절차를 밟기 전, 확인차 물어보는 겁니다.”

“…….”

“대답해 주셔야 됩니다.”

“우리는 지금 이런 감사를 받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게 아닙니다.”

전무식이 흐름을 깨뜨리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감사팀장의 짧은 대답에 다시 또 입을 꼭 다물어야만 했다.

“그건 전무식 팀장님 입장인 거고요.”

“…네?”

“저는 앞에 계신 일곱 분을 상대로 현장 활동 지원비 지출 내역에 관한 감사를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겁니다.”

“…….”

“저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묻고 법적 절차를 밟도록 하겠습니다. 지출 내역을 보내지 않은 데에 이유가 있으신 겁니까?”

노조 측 대표들의 불안한 시선을 확인한 후, 감사팀장은 곧바로 조 전무에게 허락을 구했다.

“저는 지금 바로 법적 절차 밟도록 하겠습니다, 전무님.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해. 그럼 구 팀장은 나가고. 문 팀장.”

“네, 전무님.”

“라인 마스터키 관련해서 정리해.”

“네, 알겠습니다.”

조 전무의 지시를 받은 법무팀장 역시 꽤나 건조한 표정으로 전무식에게 말했다.

“이 부분 역시 법적 절차를 밟기 전, 확인차 물어보는 겁니다.”

“지, 지금 사람 불러 놓고 협박하는 겁니까?!”

테이블을 내리치며 전무식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런 전무식을 향해 조 전무가 두 눈에 살기를 담아 놓고 말했다.

“앉아. 진짜 콩밥 먹이기 전에.”

이번엔 조 전무가 먼저 법무팀장에게 해당 라인 마스터키에 관한 내용으로 도난 신고를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법무팀장까지 자리를 나서자, 대회의장 안의 사측 교섭단은 조동희 전무를 포함해 셋만이 남은 상태였다.

조 전무가 말했다.

“말해 봐. 교섭 조건. 들어나 보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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