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RO가 정확하게 뭔데?
“4억 원대 횡령 혐의를 받고 있는 전무식 재경모직 안산 생산 라인 노조 위원장에 대해 검찰이 구속 영장을 청구했습니다.”
재경 그룹 본사 회장실.
손홍준 회장이 패드를 이용해 해당 뉴스를 확인하고 있었다.
“조합비와 계약직 직원의 상여금 등 막대한 공금을 빼돌리고도 자신은 구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장담까지 했던 전 위원장. 그의 구속 여부는 다음 주 월요일에 결정이 되는데, 이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보고 있던 뉴스를 끄고, 패드를 덮은 뒤 손훙준 회장은 남필우, 재경모직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회장님. 전화 받았습니다.
“방금 뉴스를 봤는데….”
―네.
“이제 대충 정리를 좀 하지? 뭐 듣기 좋은 뉴스라고 이걸 계속 방송에 나가게 만드나. 우리 스스로 관리 부분에 허점이 컸다는 걸 인정하는 꼴밖에 더 되느냐 말이야.”
―…네.
“이 정도 했으면 됐으니까, 더는 관련 뉴스 보도 안 되도록 신경 좀 써.”
―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조 전무와 지금 같이 있나?”
―아닙니다.
“그래, 알았어. 신경 좀 써.”
―네.
남 사장과 통화를 끝낸 손 회장은 곧장 조동희 전무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회장님.
“방금 남 사장하고 통화하면서 지시한 내용인데, 모직 쪽 노조 관련해서 더는 시끄럽게 방송 안 나오게 단도리를 쳐.”
―네, 그렇지 않아도 지금쯤 정리에 들어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래, 그거 말고는 별일 없지?”
―네, 별일 없습니다.
“그럼 오늘 같이 저녁이나 하지.”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룹 본사로 들어가면 되겠습니까?
“그렇게 해. 자리는 내가 준비시켜 놓을 테니까.”
통화를 끝낸 손 회장은 사무 책상 위로 자신의 스마트폰을 올려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 앞으로 선 손 회장은 뒷짐을 쥔 채 바깥세상을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스마일 스쿨 생산 라인 파업이 2주 전에 터졌다.
다른 때와는 달리 파업이 터지고 단 하루 만에 직원들이 생산 라인을 가동시켰다.
이 정도면 파업이 아니라 직원들 단합 대회를 한 번 시켜 준 셈 칠 수도 있는 수준.
그뿐만이 아니었다.
노조원들 스스로 화물연대를 제외한 자체 노조를 해산시켜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고 한다.
그 와중에 그룹 본사 차원에서 해당 노조 쪽으로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진행 중에 있고.
그럼에도 노조 쪽에선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고 있고, 오히려 노조 측 대표 7인 외 노조 중심 인물의 해고 건에 대한 이야기까지 구체화되고 있는 중.
그리고 강성 노조를 상대로 이런 결과를 만들어 낸 게 다름 아닌 자신의 아들, 손정훈이라는 점에서 손 회장은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룹 내의 실력 좋다는 인물들조차도 번번이 끌려다니기만 했던 노조 문제.
그 노조 문제를 회사 경영엔 아무런 관심도 없다고 했던 녀석이, 회사 일은 배우고 싶지 않다고 했던 녀석이 단 하루 만에 정리해 버린 거다.
어디 그뿐인가.
반드시 실패할 거라고 예상했던 재경모직의 하반기 공채는 너무나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고, 신입 사원 연수 기간을 거쳐 현장으로 배치된 신입 직원에 대한 관리자의 만족도는 이전 공채 신입의 평가에 비해 무척 높은 편으로 집계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리고 그런 내용보다, 지난 추석 연휴 때 자기가 직접 생뚜앙 지사를 방문해서 파견 주재원을 독려하고 떡값을 전달하고 오겠다 했던 그 모습은 여전히 손 회장을 가슴 뛰게 만들고 있었다.
둘밖에 없는 자식.
자신과 형을 상대로 아버지가 하셨던 것처럼, 손 회장은 자신의 자식들을 경쟁 붙일 마음이 추호에도 없었다.
그저 정훈이가 정태의 반만 닮아 주면 좋겠다는 생각만 아쉬움처럼 항상 하고 있을 뿐이었다.
“…….”
하지만 자신과 형을 항상 경쟁 선상에 놓고 엄하게 가르치셨던 아버지의 마음을 이제는 좀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지난 몇 달 동안 정훈이가 보여 주고 있는 재경모직 인사부 안에서의 퍼포먼스.
그 퍼포먼스는 지난 몇 해 동안 그룹 본사 안에서 상무의 위치에 앉아 있는 정태의 퍼포먼스를 크게 뛰어넘고 있다.
심지어 정훈이를 살피겠다고 붙여 놓은 조 전무마저, 더는 보고할 내용이 없다는 식으로 자신의 노선을 확고히 알려 오지 않았나.
어떻게 그 짧은 몇 달 사이에 정훈이가 이렇게까지 바뀔 수 있었던 것인지, 노조 문제와 같은 예민한 내용을 휴지로 코 풀듯 큰 힘 들이지 않고 손쉽게 해결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인지… 손 회장의 생각은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 * *
11시가 조금 넘어서 남 사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오후에 하기로 한 미팅을 조금 앞당기자. 전무님이 오후에 본사 들어가실 일이 생기신 거 같네.
“네, 그렇게 하죠. 그럼 뭐 지금 올라가면 되겠습니까?”
―그래, 그렇게 해라. 지금 올라와.
남 사장과 통화를 끝내고 김 차장을 찾아갔더니, 김 차장은 난처한 표정으로 자기는 곧 부서장 회의에 참석을 해야 한다고 했다.
차라리 잘됐다.
어차피 그간 남 사장, 조 전무와 가지는 미팅 자리에 김 차장과 함께 다녔던 건 인사부 안에서 그의 위치를 존중해 주기 위함이었지, 딱히 미팅 자리에 김 차장이 필요해서는 아니었으니까.
“전무님이 오후에 본사 들어가실 일이 생겼다네요.”
―이거 어떻게 하죠? 저도 빠지기가 애매한 자리가 되어서….
“할 수 없죠. 어차피 그 내용이 그 내용 아니겠습니까? 신상품 개발팀 계약직 직원들 정규직으로 전원 전환시켜 달라고 한 내용은 받아들여질 겁니다. 제가 가서 대답만 듣고 오겠습니다.”
―네, 저도 같이 올라가고는 싶은데, 어쩔 수가 없네요.
요즘 난 김 차장이 보여 주고 있는 업무 처리 능력에 가끔씩 놀랄 때가 많다.
고 부장이 생뚜앙 지사로 넘어가고 벌써 한 달 가까이 시간이 흘렀는데, 그 빈자리를 꽤나 잘 채워 넣고 있다.
김 차장에게 다녀와서 보고를 하겠다는 말만 남기고 난 사장실로 올라갔다.
조동희 전무가 먼저 도착해서 남 사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김 차장은 부서장들 오찬 미팅이 잡혀 있어서 함께 못 왔습니다.”
김 차장이 함께 오지 못한 이유를 짧게 설명한 후 자리에 앉았다.
남 사장과 조 전무 역시 그 부분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을 안 쓰는 눈치였다.
“오늘 안건이 두 갠가?”
“네.”
“바로 시작하지.”
남 사장의 진행으로 난 우선 우리 인사부의 인사 부분에 관해 내 의견을 제시했다.
“다음 달 정기 인사가 있을 때, 인사부 안에서는 김원호 차장을 부장으로, 박종근 HRD 과장을 차장으로 민은석 HRD 대리를 HRD 과장으로, 정현수 HRM 대리를 HRM 과장으로 승진을 시켜서 조직을 재개편하는 방안을 제안드립니다.”
“한 칸씩 올려주는 건데 그게 무슨 재개편이야? 그건 그렇고 그럼 손 과장은?”
“HRO팀을 개설해 주시길 요청드립니다.”
“HRO?”
현재 재경모직의 인사부는 조직 자체에 많은 문제점이 있다.
우선 조직 인사 운영을 하고 있는 HRM의 업무 범위가 너무 넓고, 인사 교육을 맡고 있는 HRD의 전문성이 너무 떨어진다.
이게 꼭 인사부의 문제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이미 인사부 직원들은 부족한 인력으로 자신들의 역량을 120퍼센트 이상씩 발휘하며 일을 하고 있는 중.
생산 라인, 계약직 직원들까지 다 포함해서 현재 재경모직의 전체 직원은 3,200여 명.
이 큰 조직의 인사를 맡아 나가는 인사부의 총원은 고작 15명.
이 부분은 내가 김 차장을 통해 현재 재경항공과 재경식품의 인사부는 어떻게 운영이 되고 있는지를 직접 확인해서 비교를 해 보고 내린 문제점이다.
“재경모직의 인사 규모가 재경항공이나 재경식품과 비교를 해 큰 차이가 나는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나는 이미 그 이유를 한눈에 파악을 해서 알고 있었지만, 남 사장과 조 전무에게 그 이유를 직접 설명해 달라는 의미로 물어봤다.
“아무래도 사업의 안정성이 가장 큰 이유이겠죠?”
조 전무가 날 떠보듯 대답했다.
“모직이 그룹 안에서 안정성이 높은 사업이라는 뜻입니까, 아님 아니라는 뜻입니까?”
“항공과 식품에 비해서는 안정성이 높은 사업이라는 뜻입니다. 항공은 보십시오. 코로나 터진 직후부터 2년 연속 큰 적자를 봤습니다. 그 기간 동안 회사가 해고한 직원 수가 얼마이고, 또 장기 휴가에 관해 처리해야 할 내용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식품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죠. 가공품 유통에 관해서는 반사 이익이 컸지만, 요식업 프랜차이즈 사업부는 거의 전멸을 하다시피 했습니다.”
“그에 비해 모직은 그 타격이 크지 않았다 정도로 제가 이해를 하면 되겠습니까?”
“그렇죠.”
남 사장과 조 전무를 차례대로 쳐다본 후 내가 말했다.
“그런데 저는 오히려 항공과 식품이 안정성이 높은 사업이고, 반대로 우리 재경모직이 그룹 내에서 위험도가 가장 높은 사업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부분에서요?”
“재경모직은 전체 매출의 70퍼센트가 타 기업 브랜드의 수입 유통으로 이뤄지고 있는 거 아닙니까. 자체 브랜드로 올리는 매출은 교복 사업이 유일합니다. 그런데 그 교복 사업 역시 결국은 사양 산업일 수밖에 없고요.”
난 남 사장과 조 전무를 향해 더이상 날 떠보는 작업으로 피곤하게 만들지 말아 달란 뜻을 담아 말했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말씀드릴까요? 항공과 식품은 어쨌거나 자기들끼리 짜고 치는 고스톱 아닙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조 전무 이 친구가 지금 감히 날 상대로 장난을 치나….
“재경항공의 기내식. 어디에서 납품합니까? 재경식품 아닙니까? 바꿔 말해서 항공과 식품은 어쨌거나 자기들끼리 주거니 받거니 협업을 하면서 사업에 필요한 단가를 낮추고, 또 고정 납품처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내가 만들어 놓은 시스템인데, 어디 감히 내 앞에서 그런 기본적인 내용을 내가 아는지, 모르는지 확인을 하려고 들어?
“반면에 모직은요? 그룹 차원에서 1990년대 후반에 백화점 사업을 모두 정리하면서 항공과 식품처럼 모직은 짜고 칠 수 있는 고스톱 파트너를 완전히 잃은 상황 아닙니까? 지금 제 눈에 재경모직은 성장이 아닌 유지에만 집중을 하고 있는 거 같습니다. 맞습니까?”
남 사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대로 봤어. 그게 맞아. 지금은 국제적으로 경기가 너무 안 좋아. 뭘 시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이럴 땐 유지에 모든 힘을 쏟아부어야 해.”
“아뇨.”
난 단칼에 남 사장의 생각이 틀렸음을 꼬집었다.
“사장님께서는 지금 정반대로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거 같습니다.”
“뭐?”
“아니면, 지금은 유지가 아니라 성장에 박차를 가해야 할 때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계시면서 실패를 두려워하고 계시거나요.”
조 전무는 그룹 본사에서 모직 쪽으로 옮겨 온 게 얼마 안 된다.
그리고 조 전무의 역할은 조직 운영에 있다고 봐야 하고.
모직 사업 관련해서는 남 사장만큼 전문적인 지식이 있을 리 만무하다.
“만약 사장님께서 정말 현재는 국제적으로 경기가 너무 안 좋아, 현상 유지에 모든 힘을 쏟아부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셨다면, 연봉 1억 8천이라는 큰돈을 약속해 가며 왜 KS 인터내셔널에서 윤현정 팀장을 스카우트하셨던 겁니까?”
“…….”
“1억 8천이면 유로로 13만 유로 정도가 됩니다. 13만 유로면 생뚜앙 지사에서 강한 브랜드 하나 따내기 위해 사용하는 리베이트 총경비에 해당됩니다. 말씀에 앞뒤가 안 맞지 않습니까. 유지를 하기 위해 연봉 1억 8천짜리 신상품 개발팀 팀장을 스카우트해 온다? 전혀 논리적이지 못한데요?”
그제야 조 전무가 쓰고 있던 안경을 매만지며 남 사장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고, 남 사장은 크게 숨을 내쉬며 다리를 꼬아 앉았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그래서 개설해 달라는 HRO가 정확하게 뭔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