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이 제 아버지인데
신상품 개발팀의 윤현정 팀장이 인사부 사무실을 찾았다.
무엇 때문에 자기를 보자고 한 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사무실을 찾은 윤 팀장.
난 윤 팀장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상담실로 그녀를 안내했다.
“김용호 씨, 정다혜 씨는 좋아하던가요?”
함께 마주 보고 앉아, 우선 정규직 전환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신상품 개발팀 직원들의 반응을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그 건으로 퇴근하고 회식을 하기로 했어요.”
윤 팀장의 표정 역시 무척이나 밝아 보였다.
“그 정도 건이면 당연히 회식해야죠.”
“감사합니다, 과장님.”
앉은 상태에서 고개까지 꾸벅 숙여 가며 인사를 건네는 윤 팀장을 향해 얼른 손을 내저으며 아니라고 한 다음 만남을 요청한 용건을 꺼냈다.
“아닙니다. 저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고, 약속드린 지 꽤 시간이 흘렀는데 그동안 재촉하지 않고 믿고 기다려 주셔서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는 왜 보자고 하신 걸까요?”
“끝까지 지켜야 약속인 거지, 지키다 만 게 어떻게 약속입니까.”
“네?”
난 싱긋이 웃으며 그녀 앞으로 정규직 전환 계약서를 내밀었다.
“팀장님도 정규직 전환하셔야죠.”
“저도요?”
“왜 그렇게 놀라세요?”
“아니….”
“뭐지? 설마 팀장님은 팀원들 정규직 전환만 시켜 놓고 계약 끝나는 대로 다른 회사로 점프 뛸 계획을 잡고 계셨던 거예요?”
“아뇨, 아뇨. 그럴 리가요.”
윤 팀장은 화들짝 놀랐고, 난 그런 그녀에게 재킷 안주머니에서 내 볼펜을 꺼내 계약서 위로 올려놓았다.
“제가 분명히 약속드렸지 않습니까. 신상품 개발팀 전원 정규직 전환. 팀장님도 신상품 개발팀이잖아요.”
“…….”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현재 팀장님께서 받고 계시는 연봉 수준은 계속 유지가 될 겁니다. 거기에 호봉만 쌓일 겁니다. 계약서 확인해 보시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내 눈치를 살핀 윤 팀장은 내가 올려놓은 볼펜을 들고 한참 동안 계약서를 읽어 내려갔다.
“이거 실화 맞죠.”
“네. 레알 실화 맞습니다. 다만 제일 밑에 붙어 있는 항목은 확인을 잘해 주셔야 할 겁니다.”
정규직 전환 계약서 가장 아랫부분에 다른 신상품 개발팀 직원들의 그것과는 달리 윤 팀장의 것엔 2년간 동종 업계 다른 기업으로의 이직을 불허한다는 조항을 붙여 놓았다.
“신상품 개발팀 전원 정규직 전환. 저는 확신을 가지고 이번 사안을 회사에 요청한 거지만, 회사 차원에서는 모험일 수밖에 없는 파격 인사가 분명합니다.”
“네, 당연히 그렇겠죠.”
“분명 타 부서 쪽에서 형평성의 문제로 잡음이 새어 나올 겁니다.”
“…네.”
“그 부분에 대한 일종의 안전장치라고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윤 팀장은 흔쾌히 해당 계약서에 사인을 한 뒤, 내게 그 계약서를 돌려주었다.
“현재 제가 받고 있는 연봉 테이블만 유지가 된다면, 전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계약서를 챙기며 윤 팀장에게 말했다.
“아직 정규직 전환 이야기를 전달받지 못한 직원들은 계약 기간 종료 3개월 전에 김용호 씨나, 정다혜 씨처럼 인사부에서 정규직 전환 관련 이야기를 개별적으로 넣을 거라고 전달해 주시면 될 거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과장님은 믿었지만, 사실 반신반의했어요.”
“앞으로는 그 나머지 반도 믿어 주세요.”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앞으로 신상품 개발팀이 많은 일을 해 줘야 합니다.”
“그 정도 각오는 이미 충분히 되어 있고요.”
윤 팀장.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시원시원하다.
이런 인재가 있다는 게 행운이고, 다른 건 몰라도 남 사장이 윤 팀장을 직접 스카우트해 온 부분만큼은 정말 잘한 일이다.
“이건 이제 회사 차원이 아니라, 제 개인적인 부탁인데요.”
“네, 편하게 말씀하세요, 과장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저도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저도 직진을 좋아해요.”
테이블 위로 깍지 낀 손을 올려놓고 입을 열기 전 윤 팀장의 눈을 한참 동안 쳐다봤다.
“팀장님 입장에선 충분히 월권이라고 불쾌해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
“그리고 개발부 부장님 입장에서도 크게 기분 좋을 상황은 아닐 거라고 보이고요.”
“돌려 말하지 않겠다고 하셔 놓고 상당히 돌아가시네요.”
“신상품 개발팀의 모든 걸 알고 싶습니다.”
윤 팀장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는 순간이었다.
“어쨌거나 지금 저는 인사부 과장일 뿐이고, 제 자리에서 신상품 개발팀이 진행 중인 프로젝트, 내부 상황에 대해 깊게 관여를 한다는 건 여러모로 보기가 안 좋을 거라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팀장님께서 어떤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진행을 하시든 저를 통하시면 이번 정규직 전환 건처럼 훨씬 더 수월하게 앞으로 나아가실 수 있을 겁니다.”
“혹시 지금 저한테 과장님의 라인을 타라는… 뭐 그런 말씀이신가요?”
“아뇨, 라인은 무슨 라인입니까. 회장님이 제 아버지인데.”
“호호호… 너무 시크하신데요?”
“그게 사실인데 어쩌겠습니까?”
“반박의 여지가 없네요.”
기분 좋게 웃으며 짧은 귀밑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놓고 날 쳐다보는 윤 팀장이었다.
“제가 인사부가 아니라 전략기획팀에 있었다면 윤 팀장님과의 접촉이 좀 더 수월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고… 그럼에도 저는 앞으로 꾸준히 신상품 개발팀의 움직임과 프로젝트에 관심을 가지고 싶습니다.”
“월권이라는 생각도 안 들고, 불쾌하지도 않네요. 어쨌거나 저는 월급쟁이예요. 제가 우리 팀이 진행 중인 프로젝트와 내부 상황을 과장님께 공개하는 부분에 있어, 저희 개발부 부장님만 불편해하지 않으신다면 못 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부장님께는 제가 따로 식사를 하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제 부담은 한결 줄어드는 거고요.”
“그럼 절 도와주시는 거로 알고, 앞으로 더 많은 지원이 신상품 개발팀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과장님. 그런데 저도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네, 말씀하시죠.”
정말 눈빛이 마치 조명 아래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이 나는 사람이다.
특히나 지금처럼 뭔가 목적을 가지고 사람을 대할 때 만들어 내는 눈빛은 그 금액이 얼마가 되더라도 구입을 해서 우리 회사 전 직원의 눈에 모두 다 박아 넣고 싶을 정도로 탐이 나는 눈빛이다.
“지난 2년간 아무도 저희 신상품 개발팀의 중요성과 가능성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심지어 팀장님을 직접 스카우트했던 사장님마저 그 관심이 흐지부지됐으니, 그 소외감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아뇨, 그런 부분은 진작에 포기한 부분이기 때문에 큰 상관은 없는데… 아무튼, 아무도 관심을 안 보이고 있던 저희 신상품 개발팀 쪽으로 유독 이렇게 관심을 보여 주시는 이유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선수는 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무슨 긴말이 필요할까.
“지난 2년간 팀장님이 재경모직 안에서 느끼셨을 그 답답함. 저도 그 답답함을 함께 느끼고 있는 중입니다.”
그 말에 윤 팀장이 숨기지 않고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팀장님보다 더 많은 자신감이 저한테 있습니다.”
“그 자신감. 저도 한번 보고 싶은데요?”
“만약 KS 인터내셔널만큼 우리 재경모직이 신상품 개발팀 쪽으로 지원과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면, 팀장님은 팀장님이 어디까지 하실 수 있을 거 같습니까?”
“혹시 신상품 개발 쪽으로 들어가는 KS 인터내셔널의 지원과 투자 규모를 대충이나마 알고 물어보시는 건가요?”
“그건 팀장님께서 알려 주시면 되는 부분이죠.”
윤 팀장의 얼굴에 기분 좋은 흥분이 생겨나고 있었다.
“회사의 지원과 투자가 그만큼 이뤄진다는 전제하에, 어디까지 할 수 있으시겠어요?”
“현실적으로 KS 인터내셔널을 뛰어넘는 건 힘들다고 보이고요, 그 정도 지원과 투자가 이뤄진다면 업계 2위인 한일패션 정도는 향후 1, 2년 안에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고 보이는데요?”
난 고개를 가로저으며 틀린 대답이라는 뜻을 보였다.
“1, 2위 격차가 큰 거지, 2, 3위인 한일과 우리 재경의 격차는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고작 한일 잡자고 KS 인터내셔널에서 신상품 개발팀으로 쏟아붓고 있는 지원과 투자 규모를 언급한 게 아닙니다.”
“…….”
“저는 1등이 아니면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사업은 스포츠가 아니잖아요. 비즈니스에는 아름다운 은메달, 가치 있는 동메달 같은 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생존이니까요. 제 목표는 금메달입니다.”
“금메달이요?”
“우선은 국내 대회 금메달. 그다음 목표는 국내 대회 금메달부터 따 놓고 새로 만드는 걸로 하고, 저는 해 보고 싶은데 팀장님 생각은 어떠세요?”
“1등 안 해 보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요? 다 해 보고 싶지.”
“그럼 됐습니다. 해 보고 싶으면 하면 되는 거죠. 합시다, 우리.”
마치 내가 보이는 열정을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윤 팀장 앞으로 난 말아 쥔 주먹을 뻗었다.
그 주먹에 자신의 주먹을 가볍게 맞대며 윤 팀장이 물었다.
“저의 경우 만약 전사적인 지원이 필요할 때엔, 저희 부장님보다는 과장님을 먼저 찾는 게 더 빠를까요?”
“사소한 지원이라도 저랑 먼저 통하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요?”
“그럼 저희 쪽 부장님 커버는 과장님이 책임지고 쳐 주시는 거고요?”
“앞으로 팀장님이 저랑 같이하게 될 프로젝트는 어차피 개발부장이 커버를 못 치는 내용들이 될 겁니다. 아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렇게 윤 팀장과의 자리를 정리하려고 할 때였다.
바지 주머니 속에서 폰 진동이 전해졌다.
“그럼, 이 계약서는 제가 잘 정리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바지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윤 팀장이 몸을 돌리려고 할 때 발신자 번호를 확인했다.
가슴이 쿠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태산이.
내 친구 장태산이의 전화였다.
폰 액정 화면에선 일전에 정 대리가 저장을 해 둔 그대로 ‘미래금융 장태산 회장님’이라는 이름이 뜨고 있었다.
“네, 여보세요.”
무수한 감정이 전화를 받기 전까지 짧은 찰나 동안 수십 번이나 교차했는데, 다행히도 목소리에 큰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 장태산이야.
어떻게 통화를 이어 가야 하는 것일까.
나는 태산이 이 친구가 이 시간에 내게 전화를 줄 거란 생각을 전혀 못 하고 있었기에, 이 전화가 무엇이라고 나도 모르게 긴장을 하고 있었다.
“네, 회장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추석이 끝나면 전화를 주기로 하지 않았나?
“네, 일전에 제가 그렇게 한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나는 또 자네가 이 늙은이 기억력을 테스트하고 있는 중인가… 하는 생각을 했어. 아님 젊디젊은 친구가 나보다 더 기억력에 문제가 있거나.
“그럴 리가 있습니까. 중간에 회사 일에 문제가 조금 있었습니다.”
―온 세상이 시끄럽게 처리되고 있는 일인데, 그걸 내가 모를까.
“죄송합니다. 제가 먼저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경황이 없었습니다.”
―경황이 아니라 성의가 없었던 건 아니고?
적당히 좀 해라, 이 친구야.
노조 터지고 나서 한창 정신이 없었다는 걸 다 알고 있었다는 친구가 심술은….
―자네는 언제쯤 시간이 괜찮나?
“회장님 편하실 때라면 전 언제든 괜찮습니다.”
―미리 말해 두지만, 지분 관련된 내용으로 날 만나 보고 싶어 하는 거라면, 헛걸음하는 게 될 걸세.
“회장님께서 그 말씀을 먼저 꺼내시더라도, 그땐 제가 덮어 주십사 하겠습니다.”
―저녁이나 같이하지. 일 마치면 집으로 와.
“여전히 그 집에 살고 계시죠?”
이건 알면서도 그냥 괜히 한번 물어본 거다.
―기억은 나나? 자네 어릴 때 한 번인가 와 보고 그 후로는 안 왔던 걸로 기억하는데.
“네, 기억합니다.”
당연히 기억하지.
내가 선물을 한 집인데….
“6시 괜찮으시겠습니까?”
“집에 있는 사람이 찾아오는 사람 시간에 맞춰야지. 편하게 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