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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을 좀 해야 할 것 같네 (52/303)

거짓말을 좀 해야 할 것 같네

큰 감나무 집이 없어졌구나.

태산이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이 동네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게 동네 입구에 있는 카도집에서 뻗어 나오는 감나무였다.

그 감나무 집이 사라져 버렸다.

그래도 이 동네는 세월의 흔적이 적은 듯 보인다.

당시 정권으로부터 항공 사업권을 따내고, 공항 건설을 성공적으로 유치해 낸 보상으로 내가 그룹 본사 전무였던 태산이에게 선물로 지어 주었던 집.

사실 그건 보상이라는 명분이었을 뿐이고, 친구 그 이상의 관계로 내가 태산이를 생각한다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신경을 써서 해 준 선물이었다.

뭘 해 줘도 아깝다기보단 부족하다는 미안한 감정만 들게 만들었던 내 인생의 동반자.

난 술김에 농담처럼 했던 말이 아니라, 실제로도 태산이와 가족으로 엮이고 싶은 마음이 컸기에 자식 대, 그게 안 된다면 손주 대에서라도 사돈 관계로 가족이 되고 싶었다.

태산이라면, 내 친구 장태산이라면 뭐든 믿고 맡길 수가 있었으니까.

뭐든 믿고 맡기며 함께 할 수 있을 테니까….

띵동!

오랜 망설임 끝에 초인종을 눌렀다.

오는 길에 근처 백화점에 들러 양주 한 병과 무거운 과일 바구니 하나를 준비했다.

지이이잉. 털컥.

문의 시건장치가 자동으로 풀리며, 철문이 안으로 부드럽게 들어갔다.

그 안으로 들어서니 마치 바로 어제 이 집에서 새해 떡국 한 그릇 얻어먹고 태산이의 자식 놈들에게 용돈을 쥐여 주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돌계단을 다 올라가니 넓게 펼쳐진 초록의 잔디가 나왔고, 그 잔디 중앙에 위치해 있는 철제 야외 탁자에 홀로 앉아 부채질을 하며 날 기다리고 있는 내 친구 태산이의 모습이 보였다.

입에선 반가움에 웃음이 번지기 시작하는데, 30년이라는 세월을 혼자 겪어 버린 오랜 친구의 변화된 모습에 눈에선 서글픔이 느껴졌다.

워낙에 타고난 기골이 장대한 친구라 여전히 자세는 곧고 단단해 보였지만 부채질을 하고 있는 팔뚝에 퍼져 있는 검버섯이나 눈가에 패인 깊은 주름 탓에 세월의 흐름을 숨길 수는 없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난 태산이를 향해 내 정수리가 보일 정도로 깊게 허리를 숙였다.

언젠간 나도 태산이에게 이런 인사 한 번 정도는 장난 삼아 해 보고 싶었다.

친구임에도 태산이에게 항상 이런 인사를 받아야만 했기에.

하지만 여전히 태산이는 정훈이 놈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날 못마땅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하여간 고약한 성질머리하고는….

집까지 불렀을 땐, 이미 어느 정도 마음이 열린 상태라는 걸 내가 안다.

내가 모르면 누가 태산이를 알까.

마음을 열고 싶으면서도 그걸 못 하고 있는 친구 곁으로 내가 다가갔다.

“그냥 오면 되지, 뭘 그렇게 가지고 왔나?”

“빈손으로 오기가 좀 그래서 좋아하실지는 모르겠지만 몇 개 좀 집어 왔습니다.”

마침 집 안에서 사람이 하나 나오고 있었다.

이런, 이런….

이게 누구란 말인가!

태산이 첫째 아들놈, 영석이가 아닌가.

얼굴이 그대로 남아 있다.

내겐 친아들이나 다름없었던 이놈이 이젠 나와 친구를 해도 될 만큼 나이가 들었구나.

“이게 누구야? 정훈이 어서 와. 내 안 그래도 정훈이 너 온다는 이야기 듣고 얼마나 어른이 됐을지, 많이 궁금해하던 참이야.”

“아, 안녕하세요.”

“이야… 이젠 길에서 만나면 누군지도 모르고 그냥 지나치겠다. 이만할 때 보고, 이게 진짜 얼마 만이야?”

다행히 태산이와는 달리 아들, 영석이는 정훈이를 살갑게 대하려 노력을 하고 있었다.

난 얼른 준비해 온 것들을 영석이에게 건넸다.

“뭘 또 이런 걸 사 가지고 왔어? 그냥 오면 되지.”

영석이는 내가 건넨 걸 한 손으로 건네받은 뒤, 남은 손으로 내 어깨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식사 준비는 다 됐나?”

“네, 아버지.”

태산이는 내게 같이 들어가자는 말도 없이 집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고, 영석이는 그런 자신의 아버지 몰래 내게 너무 신경을 쓰지 말라는 듯 얄궂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실없는 건 제 아비를 쏙 빼닮았네.

하긴, 영석이는 어릴 때부터 성격이 좋은 녀석이었다.

활발하고 장난기도 많았으며, 어른들이 오랜만에 가족들 다 같이 만나 노래 한 곡 해 보라고 하면 주저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면서 노래를 맛깔나게 뽑아낼 줄 알던 녀석이었다.

만약 영석이 이놈이 아들놈이 아니라 딸이었다면, 난 망설임 없이 홍명이 놈을 이놈에게 줬을 거다.

영석이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익숙하면서도 낯선 집 안의 모습이 내 눈앞으로 펼쳐졌다.

분명 집 구조는 그대로인데 가구들은 전부 바뀌어 있었다.

특히 태산이의 처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금방 알 수 있었다.

태산이의 처도 세상을 떠난 상태라는 걸.

거실 소파 맞은편 벽에 가족사진이 크게 붙어 있었는데, 그 사진 속에는 태산이 처의 모습이 없었다.

백발의 태산이가 중간에 앉아 있고, 그 양옆으로 첫째 영석이, 둘째 영진이가 나란히 배우자들과 서 있었으며, 그 뒤로 영석이와 영진이의 자식들이 서 있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저 사진 속에 있는 얼굴들은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내가 다 알고 있는 얼굴들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소파에 앉아 이 집의 가족사진을 보고 있을 때였는데, 저 안쪽 주방에서 “할아버지.”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봤더니 가족사진에서 영진이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는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의 얼굴과 무척 닮은 아가씨가 거실로 나오고 있었다.

분명 저 사진 속 여자아이가 커서 지금 저 아이가 되어 있는 것이겠지?

“식사 준비 다 끝났어요. 들어오시래요.”

내가 눈인사를 하며 아는 척을 할 때였다.

저런 걸 요즘 말로 쪼갠다고 하는 건가?

한쪽 입꼬리만 살짝 말아 올려 놓고, 아주 가소롭다는 듯 비웃는 모습을 내게 보였다.

나는 저 아이가 내게 왜 저러는 것인지, 영문도 모른 채 그저 태산이와 영석이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갔다.

영석이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다시 한번 싱겁게 말했다.

“너 우리 집에 밥 먹으러 온다는 소리를 듣고, 일부러 하늘이도 집에 들어와서 저녁을 먹으라고 했어.”

하늘이?

이 아가씨의 이름이 하늘이인가?

영석이가 분위기를 맞춰 보겠다고 기분 좋은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둘이 대학 같이 다녔잖아.”

아, 잠깐만!

이건 돌발 상황인데?

정훈이와 이 아가씨가 대학을 같이 다녔다고?

“같이 다니긴. 그냥 학교만 같았던 거지.”

하늘이는 정훈이의 존재가 크게 탐탁지 않은 눈치였다.

아주 탐탁지 않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며 말했다.

“맞잖아. 우리 학교 다닐 때 서로 아는 척도 잘 안 했잖아. 학년도 달랐지만, 오빠는 오빠대로 한국 애들하고만 어울리고, 나는 가급적 그 무리랑은 거리를 두려고 했고.”

골때리는 상황인데?

이걸 어떻게 극복하지?

“그랬었나? 나는 기억이 잘 안 나네.”

“그럴 리가. 오빠 학교에서 완전 유명했잖아.”

“내가?”

“이거 왜 이래? 설마 우리 할아버지, 아빠 앞이라고 점잔 떠는 거야? 이야… 천하의 손정훈이 점잔을 떨 줄도 알아? 이거 내가 오늘 저녁 약속 취소하고 집에 온 보람이 있는데? 아주 보기 힘든 장면을 보고 있어, 내가 지금.”

뭔지는 모르겠지만 정훈이 놈이 하늘이 이 아이에게 뭔가 상당히 좋지 않은 인상을 심어 준 게 틀림없다.

난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

“동생은?”

아까 거실에서 본 가족사진 속엔 하늘이보다 한참 더 어려 보이는 남자아이도 함께 있었다.

“태양이? 태양이는 지금 군대에 있어. 곧 전역이야.”

“아… 그래? 수고가 많네.”

“그러니까. 동생이지만 참 든든해, 그런 거 보면. 기특하지 않아? 내 주위에도 그렇고, 태양이 말 들어 보면 자기 주위 친구들은 어떻게 하면 군대에 안 갈 수 있을까, 누구처럼 빽까지 써 가며 어떻게든 군대를 뺐다던데, 태양이는 입대하겠다고 미국 시민권도 포기했잖아. 누구랑은 완전 다르지?”

그 누구가 혹시 정훈이 놈인가?

어째서 아까부터 계속 “누구처럼.”, “누구랑은” 이런 표현을 강하게 할 때마다 날 콕 찝어서 쳐다보는 것일까?

“그렇네. 누구랑은 많이 다르네.”

분위기가 어색하게 흐르기 시작하자, 결국 영석이가 “크흠.” 하며 분위기를 잠시 진정시킨 뒤, 태산이를 향해 “아버지, 식사하시지요.”라고 말했다.

* * *

식사하는 동안 난 태산이와 영석이가 나누는 대화를 통해, 태산이가 현재 회장으로 있는 미래금융의 대략적인 구조를 파악할 수 있었다.

태산이가 회장으로 있긴 하지만, 실질적인 경영은 부회장인 영석이가 하고 있고, 그 밑에서 딸 하늘이가 경영 수업을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미래금융 쪽에서 재경모직의 지분을 상당수 확보하고 있는데, 아마도 그 지분이 홍준이 놈을 불안하게 만드는 거 같았다.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이 부분은 어느 누구의 편을 드는 게 아니라, 객관적인 관점에서만 봐도 홍준이 놈이 충분히 불안을 느낄 수 있는 내용이다.

하물며 그 관계가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지금처럼 틀려 있는 상황이라면, 그 불안은 더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리고 태산이의 둘째 아들 영진이는 미래금융과 관련된 모든 사업에는 일체 관여를 하지 않고, 따로 건물 임대업을 하고 있는 중인 거 같은데, 영진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식사 자리에서 나오지 않았다.

식사를 끝내고 거실로 나갔다.

나는 태산이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태산이가 영석이를 함께 부르면서 자리는 어쩔 수 없이 셋이서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난 오늘 이 자리에 미래금융이 확보하고 있는 재경모직의 지분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순수하게 내 친구 태산이를 보고 싶어서 찾아온 거뿐이다.

물론 정엽이의 소식도 얻어 갈 수 있음 얻어 갈 계획이고.

“식사도 끝났으니까, 이제 편하게 용건을 말해 봐. 왜 그간 안 하던 명절 인사까지 해 가며 날 만나고 싶었던 건지.”

“부끄러운 짓이라는 걸 알면서, 염치없게도 정엽이 형에 대한 소식을 좀 얻을 수 있을까 싶어 회장님께 뵙기를 부탁드렸던 겁니다.”

내 말에 태산이와 영석이는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태산이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네 사촌 형 소식을 왜 여기에 와서 물어?”

“…….”

“네 아버지한테 가서 물어봐. 아님 네 형 정태한테 물어보든지. 그게 훨씬 더 수월하고 빠르지 않겠어?”

“그렇게 한다면 제가 정엽이 형 소식을 궁금해하는 것 자체를 탐탁지 않게 여기겠죠.”

실눈을 뜨고 날 쳐다보던 태산이가, 결국 한발 물러나 주겠단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정엽이 소식은 알아서 뭘 하게?”

“궁금합니다.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잘 지내고 있는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가족으로서 궁금합니다.”

그 말에 태산이가 콧방귀를 끼며 웃었다.

“그렇게 더는 한국에서 못 살게끔, 회장님, 사모님 제삿날조차 찾아오지 못하게끔 외국으로 쫓아낼 땐 언제고, 이제 와 가족으로서 소식이 궁금하다? 말에 앞뒤가 안 맞잖아.”

홍준이, 이놈!

내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가족 제사에 참석조차 못 하게 외국으로 쫓아내?

그것도 남도 아닌 제 조카를?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기분이다.

정말 지금 당장이라도 홍준이 놈을 찾아가 종아리를 내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정말 그랬습니까?”

“정말 그랬다니, 뭐가?”

“정말 제 아버지가… 정엽이 형과 숙모님을 외국으로 내쫓은 겁니까?”

정말 화가 많이 났다.

표정을 숨기는 것조차 힘들만큼 화가 많이 났다.

화를 억지로 참으며 물어본 그 말에 태산이는 물론이고 영석이까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몰랐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몰랐습니다.”

“허, 허….”

“정말 몰랐습니다.”

난 더 이상 내가 하는 말에 그런 비웃음을 보이지 말라는 뜻으로 태산이를 강하게 쳐다보았다.

그러자 태산이는 내가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기 시작하는 거 같았다.

“제가 그런 사실을 알았다면, 무슨 낯짝으로 회장님을 찾아와서 정엽이 형의 소식을 묻겠습니까?”

“…….”

“제 아버지와 제 가족이 그런 결정을 한 것일 텐데, 그냥 아버지한테 왜 그런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묻는 게 정상이지, 회장님을 찾아와 정엽이 형의 소식을 물을 순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정말 몰랐다?”

태산이.

정말 미안하네.

내 지금부터 자네한테 작정을 하고 거짓말을 좀 해야 할 것 같네.

그러지 않고서는 정엽이 놈의 소식을 자네 입을 통해 들을 수가 없을 것 같아.

아무래도 자네는 날, 아니 정훈이 놈을 믿지 못하는 거 같고, 그런 자네를 나 역시 충분히 이해하기 때문에 지금부터 내가 하는 거짓말은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거짓말이야.

그렇게 이해를 좀 해 주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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