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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눈에 거슬립니다 (54/303)

상당히 눈에 거슬립니다

며칠이 지나 주말이 찾아왔고, 난 마치 하기 싫은 밀린 숙제를 억지로 해내듯 홍명이 놈이 잠들어 있는 곳을 혼자 찾아갔다.

마음고생이 많았겠다는 생각.

그 마음고생도 결국은 내가 만든 재경이 시켰을 거라는 미안함.

그런 생각들로 홍명이 놈이 잠든 묘에 잠시 머물렀다가 이내 모든 걸 털어 내고 머리를 비운 다음 홍준이 놈을 찾아갔다.

본가에 도착했을 땐 저녁 8시가 넘어 있었다.

“어쩐 일이야? 부른 것도 아닌데, 먼저 집을 다 찾아오고.”

집 안으로 들어선 아들을 반기는 장혜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장혜란을 홍준이의 짝으로 만든 건 나의 선택과 판단이었다.

그 선택과 판단이 잘못이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 남편은 너와 네 친정으로 인해 그 많은 걸 잃어야 했는데, 그래서 너와 네 친정은 분에 넘치는 모든 걸 다 가지게 되었구나.

장혜란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훈이 놈이 평소 제 어미를 보고 어떠한 미소를 지었을지를 상상해 보며, 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살가움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회장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회장님? 뭘 집에서까지 그렇게 불러? 낯설다.”

“이게 편하네요, 이젠. 회사 일로 찾아온 거기도 하고. 회장님 어디 계세요?”

“서재에 계셔.”

일전에 한번 들어가 본 적이 있었던 홍준이의 서재.

그 앞으로 서서 노크를 했다.

이미 담배 냄새가 문을 열기도 전에 약간의 그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문을 열자 뻑뻑한 담배 연기가 홍준이 놈이 앉아 있는 서재 책상 주위로 몽글거리고 있었고, 크리스털 재떨이 속으로는 다 타 버린 담배꽁초 3개가 건조하게 쓰러져 있었다.

“앉아. 저녁은 먹었고?”

난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이며, 홍준이를 마주 보고 앉았다.

“며칠 뒤면 볼 건데, 뭐 하러 주말에 집을 다 찾아와?”

“궁금한 게 몇 가지 있어서요.”

난 홍준이를 더 이상 내 아들이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현 재경 그룹의 회장, 손홍준.

딱 거기까지가 내가 홍준이 놈과 긴밀하게 유지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거리라고 판단을 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내가 홍준이를 내 아들이라고 생각해 버린다면, 난 내 아들놈의 아들 역할까지 해야만 한다.

거기까지는 내가 자신이 없었다.

“전화로는 묻기가 힘들었던 내용인가 보네?”

“직접 묻고, 직접 듣고 싶어서요.”

“뭔데 이렇게 비장해? 뭐? 물어봐.”

“재경의 비전을 듣고 싶습니다.”

“뭐?”

홍준이는 내게서 이런 질문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는 듯, 잠시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그걸 제가 정확하게 좀 알고 싶습니다.”

“너 근데 말투가 왜 그래?”

“제 말투가 어떤…데요?”

“너무 진지하잖아.”

놀래라.

“제가 요즘 좀 진지해요.”

“어째서?”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문 때문에요.”

“이상한 소문? 무슨 이상한 소문?”

“제가 솔직하게 대답해 드리면, 회장님도 회장님이 생각하는 재경의 비전을 솔직하게 말씀해 주실 겁니까?”

“회장님? 야, 이놈아. 너 진짜 왜 그래?”

“말씀드렸잖아요. 제가 요즘 진지하다고. 저 당분간 집에서도 회장님 모시듯 대하려고요.”

“너 무슨 일 있었냐?”

진짜, 계속 쓸데없는 말만 이어지게 만드네….

“제가 이렇게 다른 모습으로 회장님을 찾아왔을 땐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그냥 넘어가 주시면 안 됩니까?”

“허, 이놈 봐라? 그래, 좋다. 네가 이렇게 나오면, 나도 정확하게 해 줄게. 어느 회사 그룹 총수가 일개 계열 인사부 과장이랑 이렇게 독대를 하냐?”

“회장님.”

“그래, 알았다, 알았어. 여기저기에서 들려온다는 이상한 소문이라는 게 뭔데? 그거부터 먼저 말해 봐.”

꼭 두껍고 뾰족한 바늘을 내가 직접 아들놈의 허벅살에 찔러 넣는 기분으로 물었다.

“큰아버지를 돌아가시게 만든 게 회장님과 부경 그룹이었다는 소릴 들었습니다.”

잠시 시간이 멈춘 듯했다.

뻑뻑하게 뭉쳐 있던 서재 안 담배 연기마저 미동조차 없는 듯한 기분이 한동안 이어졌다.

하지만 잠시 후 홍준이 놈이 피식하고 웃음을 흘리며 그 정적을 깨뜨렸다.

“난 또 뭐라고. 너는 그 소릴 이제야 들은 거야?”

내가 예상했던 반응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더 조금은 기대를 하게 만드는 반응이기도 했다.

흡사 해당 내용은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저는 궁금합니다. 다들 뒤에서 쉬쉬하고 있는 내용인 거 같은데, 그래서 회장님을 통해 정확한 사실 관계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걸 확인한다고 달라질 게 있어?”

“제 마음가짐은 크게 달라지겠죠?”

“마음가짐?”

“지금의 재경이 부끄러운 기업인가, 아니면 제가 정말 최선을 다해서 그런 루머가 더는 돌지 못하고 쏙 들어가게끔 만들어 볼 가치가 있는 기업인가 하는 마음가짐이요.”

여전히 담배를 만지작거리며 홍준이가 물었다.

“네 말은 만약 내가 정말 그렇게 해서 재경의 회장 자리에 앉아 있는 거라면, 재경은 더 이상 너에겐 그만한 가치가 없는 기업이다… 라는 식으로 이해를 해야 하는 거야?”

“저는 회장님을 통해 직접 아니라는 대답을 듣고 싶은 겁니다.”

홍준이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아니야.”

난 단호한 얼굴로 아니라고 대답한 홍준이의 얼굴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그런 다음 물었다.

“그럼 정엽이 형과 백모는 왜 집안 제사에 안 오는 거죠? 회장님께서 못 오게 만드신 거라고 그러던데요?”

“집안 제사에 못 가게 한 건 내가 아니라 네 백모라는 사람이야.”

“네?”

“방금 네가 물었던 것처럼 어디에서 이상한 소문이나 듣고 와선 형님 그렇게 된 게 다 나 때문이다, 내가 그렇게 되도록 만들었다… 그러면서 형님 기제사에 우리 가족을 못 가게 만든 건 네 백모였다고.”

뭐야?

이거 왜 태산이와 말이 완전 달라?

“그래도 정엽이가 장손이니까, 네 큰아버지 그렇게 되신 이후 집안 제사는 네 백모한테 부탁했지. 근데도 우리랑은 연을 끊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나? 어? 그럼 형님 제사만 가지고 가셔라, 나머지 제사는 우리 집에서 모시겠다. 그렇게 너한테는 작은 증조할아버지 되시는 분 기제사하고 할아버지, 할머니 기제사를 받아 온 거야.”

“…….”

“못 오게 한 적도 없어. 오히려 처음 몇 해는 정엽이라도 보내라고 전화를 했어. 근데도 안 보내더라. 자기가 그래 놓고 또 어디 가선 우리가 형님 재산을 어떻게 했니, 안 했니… 그런 이상한 소리나 하고 돌아다니고. 내가 그 여자 이상한 소리 하고 돌아다니는 거 꼴 보기 싫어서 파리에 건물 하나 사 준 거 아니냐. 그거 줄 테니까, 정엽이랑 같이 가서 살라고.”

“건물을… 사 주셨어요?”

“그럼 어떡해? 길거리 나앉는 거 지켜만 봐? 정엽이라도 어떻게 우리랑 계속 교류를 하게 만들었다면 모르겠지만, 그것까지 막고 밖에선 이상한 소리나 하고 돌아다니고….”

결국 담배에 불을 붙인 홍준이는 이번엔 내가 먼저 묻지도 않았는데, 태산이의 존재를 입에 담았다.

“장 회장님 알지?”

“미래금융 장태산 회장님이요?”

“그래, 우리 그룹 본사 전무님이셨던 그분.”

“네.”

“그분한테 가서 계속 이상한 소릴 해 대는 거야. 그럼 또 그 양반은 다시 나한테 와서 그 여자한테 들은 말만 믿고 피곤한 소릴 하는 거고. 나도 내가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게 벌써 20년도 더 지난 일이야, 그때 나는… 지금처럼 마음이 편하지를 못했다. 항상 긴장하고 있었고, 그 긴장 때문에 매 순간 날카로워져 있던 상태였지.”

“…….”

“내가 모든 걸 다 챙길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던 거지.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것들을 쳐 낼 수밖에 없었어. 그래야 재경을 지켜 낼 수 있었으니까.”

그래, 됐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나는 진실을 알고 싶은 게 아니었다.

잘잘못을 따져 보고 싶은 건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내가 알고 싶었던 건 당시 홍준이가 했던 선택들이 상황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것들이었는지, 아니면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자기만의 소신으로 그 소신이 만들어 낸 명분대로 움직인 결과였는지를 알고 싶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궁금해하지. 어째서 네 큰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내가 옆에서 부경 그룹을 통해서 자금줄을 열어 보자는 제안을 했었는지, 꼭 부경이어야 했던 건지.”

“…….”

“하지만 그땐 내가 아니라, 네 큰아버지가 재경 그룹의 회장이었어. 난 이런저런 방법이 있는데, 급한 대로 지킬 수 있는 것들은 지키고 포기할 건 포기하자는 제안만 할 수 있는 입장이었지, 결정권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당시 그 일이 여전히 가슴에 걸려 여지껏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는 듯 홍준이가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당시 결정권은 네 큰아버지와 장 회장님 두 분이 가지고 있는 거였어.”

“그래서 회장님이 생각하시는 앞으로의 재경 그룹의 비전은 뭔가요?”

“비전… 비전이라….”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홀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홍준이에게 내가 곧바로 물었다.

“언제까지 그런 이상한 소문이 흘러 다니게 만드실 거예요?”

“뭐?”

“그간 제가 모직에서 근무하며 느낀 재경은요, 과거 30년, 20년 전에 발목이 잡혀서 한 발짝도 앞으로 전진을 못 하고 있는 거 같습니다.”

타고 있던 담배가 홍준이 놈의 손안에서 반토막이 나 버렸다.

부러진 담배를 재떨이 속으로 떨어뜨려 놓고, 손가락 사이에 묻은 재를 털어 내고 있는 홍준이에게 내가 말했다.

“그 세월 동안 그렇다 할 변화가 우리 재경에게 없었으니, 이젠 묻힐 법도 한데, 20년도 더 지난 그 일들이 아직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흘러 다니고 있는 거 아닐까요?”

“…….”

“앞으로도 변화가 생기지 않으면, 우리 재경은 언제까지고 계속해서 과거에만 발목을 붙잡혀 있게 될 겁니다. 회장님.”

“…왜?”

날 쳐다보며 홍준이가 힘겹게 대답했다.

“왜 우리 재경의 사업이었던 건설, 물산, 생명, 쇼핑… 그것들이 다 부경에 넘어가 있는 겁니까?”

“……!”

“그거 다 우리 거잖아요.”

“…….”

“그래도 처가 쪽으로 넘어간 거니까 회장님은 괜찮으신 겁니까?”

“뭐?!”

결국 홍준이의 눈에도 날이 서기 시작했다.

“결과로 증명을 하세요, 그때 회장님께서 하신 선택은 옳은 선택이었다는 걸. 자존심보다는 실리를 선택하셨던 거 아닙니까?”

내 말에 홍준이는 콧김만 내뿜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상황이 너무 안 좋으니, 어떻게든 재경의 존재만이라도 살려 놓자고 한 결정 아니셨냐고요. 저는… 그렇게 이해가 되는데요?”

“그게 최선이었으니까. 그건 네 큰아버지 생각도 마찬가지였어. 다만 그 결정에 죄책감을 너무 많이 느끼셨던 게 문제였고….”

“그러니까요. 선택을 하는 순간엔 맞고, 틀리고가 없는 거잖아요.”

“맞고 틀리고가 없는 거다?”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맞다, 틀리다를 말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내 말에 홍준이는 고개를 수차례 끄덕였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할아버지는 회장님과 큰아버지께 무엇을 물려주고 싶으셨을까요?”

“뭐?”

“회장님은 저와 정태 형에게 앞으로 뭘 물려주고 싶으십니까?”

“……!”

“그저 지금의 재경을 저희 형제가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잘 나눠서 키워 나가도록 하실 생각이세요?”

“…….”

“혹시 할아버지는 회장님과 큰아버지께 회사가 아닌 선택의 다양성을 물려주고 싶으셨던 게 아닐까요?”

“선택의 다양성?”

답답한 놈….

“그 짧은 세월 동안 그 많은 사업을 할아버지가 벌이신 건, 회장님과 큰아버지께 지금이 아닌 재경의 미래를 보여 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해서요. 어느 정도 규모가 갖춰지면 그때부터 기업가에게 있어 진짜 힘은 돈과 권력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의 폭과 다양성에서 나오는 거… 아닙니까?"

“……!”

내가 눈을 감기 전 홍명이와 홍준이를 불러 놓고 입버릇처럼 해 줬던 말이었고, 당부였다.

“저와 정태 형이 함께 재경을 키워 나가기 위해선, 한정된 지금의 재경 안에서 밥그릇 싸움을 하기보다, 같은 생각, 하지만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갈 수 있도록 회장님께서 선택의 폭을 넓혀 주셔야 합니다.”

그렇게 말한 다음, 난 준비해 온 서류 봉투를 책상 위로 올려놓았다.

“이건 뭐야?”

“확인 한번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가 그간 모직 인사부에서 근무하는 동안, 회사 일과는 별개로 저 나름대로 앞으로 재경의 미래를 구상해 봤습니다. 저는 회장님.”

“…….”

“부경이 과거 우리 재경이 만든 사업들을 지금처럼 저렇게 원래부터 자기들 것인 양 하는 꼴이 상당히 눈에 거슬립니다. 그리고 저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 멋대로 하고 있는 회장님의 평가도 무척 거슬리고요. 가 보겠습니다. 담배 좀… 줄이시고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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