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건 불가능입니다 (55/303)

그건 불가능입니다

손 회장은 아들이 남기고 간 서류 봉투를 열었다.

그 안엔 적당한 크기의 글자로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는 한 질의 사업 기획안이 들어 있었다.

분량이 많지도 않았다.

총 6장.

그나마도 첫 장은 <트래픽 비즈니스 폼>이라는 제목이 전부였고, 그다음 장은 자신에게 전달하는 메시지가 끝이었다.

그 메시지는 재경 그룹을 지켜 내기에만 급급했던 손 회장 자신을 마치 꾸짖는 듯한, 혹은 이해하기에 따라서는 응원이 될 수도 있는 난해한 내용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 꽃을 피우는 일은 무척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꽃이 필 토양이 만들어진 상태라면, 그다음부터는 어떤 꽃들을 피울지를 고민해 봐야 할 단계이겠지요. 현재의 재경은 항공과 식품, 모직이라는 꽃을 피우는 꽤 괜찮은 토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꽃은 언젠가는 시들기 마련입니다. 부디 피어 있는 꽃에 집착하지 말고, 그 꽃을 피우고 있는 토양에 집중해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그 토양만 안전하다면, 꽃이 지는 걸 더 이상은 두려워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해당 메시지를 몇 번이나 다시 읽은 후 손 회장은 기획안을 한 장 더 넘겼다.

그리고 나타난 기획안 내용에 손 회장의 두 눈은 앞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크게 떠졌다.

석상처럼 꽤 오랜 시간을 손 회장은 책상에 앉은 채 기획안만 살펴봤다.

집중을 위해 습관처럼 피우는 담배마저, 오히려 지금의 집중을 방해할까 봐 손가락 사이에 끼울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꽤 오랫동안 기획안에 집중했다.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는 기분이었다.

그 세상은 그간 손 회장이 상상만 해 왔던 세상과 무척 닮아 있었다.

흡사 머리로는 그릴 수 있었지만, 그 실체를 손끝으로 표현해 내기가 무척 힘들었던 세상이 활자로 펼쳐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날 손 회장은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잠을 못 이루는 건 익숙했다.

재경을 이끄는 총수가 된 이후로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숙면을 취할 수 없었던 손 회장.

잠자리에 들 때마다, 현재 자신이 앉아 있는 자리의 무게와 세상이 자신과 재경에게 보내는 차가운 시선을 혼자서 다 버텨 내야 했다.

지난 20여 년 넘는 세월 동안 손 회장에게 잠자리는 그런 고통의 연속이었다.

숨이 막히는 듯한 질식감과 어느 때부터인가 나이가 들면서 살이 퉁퉁 튕기는 떨림 현상이 손 회장의 잠자리를 괴롭히고 있었다.

하지만 아들이 다녀간 그날 손 회장은 또 다른 의미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묘한 설렘이 손 회장을 흥분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아침 손 회장은 세 시간도 채 안 되는 짧은 잠에서 깨었음에도 오랜만에 숙면을 취한 것처럼 온몸이 개운했다.

평소 반 공기도 다 못 먹는 아침 식사였지만, 국에 말아 밥 한 공기를 뚝딱 비워 놓고 출근도 평소보다 10분이나 일찍 했다.

회사에 도착해 다시 한번 전날 둘째가 주고 갔던 기획안을 확인 한 손 회장은 전날 받았던 감동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한 후 폰을 꺼내 들었다.

정태에게 전화를 걸기 위함이었는데, 통화 버튼을 누르기 전 손 회장의 머릿속으로 몇 달 전 둘째 정훈이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번뜩 스쳐 지나갔다.

“물론 저랑 형은 절대 그럴 일이 없겠지만, 정말 만약에 저랑 형이 문제가 생겨서, 지금 형수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정엽이 형처럼 되어 버리면 아버지 심정은 어떠실 거 같으세요?”

그런 뜻밖의 질문을 던졌던 정훈이의 눈빛이 바로 지금 눈앞에서 되살아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들고 있던 폰 통화 버튼을 한참 동안 매만지고 있던 손 회장의 머릿속으로 다시 한번 정훈이가 던졌던 질문이 고여 들었다.

“둘째의 삶. 어떠셨어요? 저도 둘째잖아요. 할아버지 밑에서의 둘째의 삶. 어떠셨을지 궁금해서 여쭤보는 겁니다.”

결국 손 회장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정태가 전화를 받았다.

―네, 회장님. 전화 받았습니다.

“바쁜가?”

―아닙니다.

“괜찮으면 지금 내 방으로 좀 올라오지.”

―네, 지금 바로 올라가겠습니다.

* * *

옆 소파 자리에 앉은 정태를 바라보는 손 회장의 눈에 얼핏, 정태 옆으로 정훈이가 함께 앉아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허튼 걱정을 모두 없애 놓고 손 회장이 물었다.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 꽃을 피우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겠지?”

“네?”

정태는 지금껏 자신의 아버지가 회사 안에서 자신을 상대로 이러한 선문선답을 시도한 적이 처음이라 영문도 모른 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분명 무척 힘든 일일 거야. 사람에 따라선 불가능이라고 시도조차 못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시도를 한다고 해서 다 꽃을 피울 수도 없는 거겠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꽃은 언젠가는 시들기 마련이지?”

“그렇… 죠?”

“그 당연한 걸 두려워한다는 거 자체가 어리석은 짓일 것이고.”

“혹시 무슨 일 있으셨어요?”

“너는 지금 우리 재경이 어떻다고 생각하냐?”

“어떤 부분에서 물어보시는 건지부터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우리 재경이라는 토양이 지금보다 더 많은 꽃을 피울 수 있는 잠재력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물어보는 거야.”

그 질문에 정태의 대답은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물론입니다.”

“너는 그 방법을 가지고 있어?”

“방법이요?”

“지금보다 더 많은 꽃을 피우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해 본 적이 있어?”

“그럼요. 항상 하는 고민입니다.”

“그 고민을 말해 보라는 거야.”

잠시 신중하게 고민을 하던 정태가 자세를 앞으로 당겨 앉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식품 쪽으로 좀 더 많은 집중을 하셔야 합니다.”

“식품?”

“네, 회장님. 항공은 더 이상의 성장이 힘듭니다. 5천만 인구. 이 한정된 자원으로 재경은 항공으로 긁어낼 수 있는 최대치를 이미 다 긁어낸 거나 다름없습니다.”

손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훈이가 주고 간 기획안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손 회장 역시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항공은 안전하고 가장 현금 회전율이 높은 건강한 캐시 카우 역할은 가능할지 몰라도, 앞으로도 계속 항공을 재경의 메인 비즈니스로 가져가기엔 뚜렷한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식품은 아니다?”

“현재 재경이 가지고 있는 항공, 식품, 모직 중에선 유일하게 수출에 기대를 걸 수 있는 종목이 식품 아니겠습니까. 모직은 원자재까지 다 포함을 한다면 수입 비중이 수출보다 6배 이상 높은, 가장 위험 요소가 높은 사업이고, 항공은 총매출의 80퍼센트가 내수라고 봐야죠. 하지만 식품은 현재 유일하게 내수와 수출의 비중이 5 대 5 정도가 됩니다. 해외 시장 공략에 좀 더 많은 투자를 넣어서 수출 비중을 높인다면 틀림없이 지금보다 더 많은 꽃을 피울 수 있을 겁니다.”

“네가 생각하는 꽃은 뭐야?”

“뭐긴요. 당연히 매출이죠.”

“…매출?”

“그런 의미로 물어보셨던 거 아닙니까?”

순간 손 회장은 정태 앞에서 실망스러운 표정을 들켜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것으로, 정태의 생각에 동의하는 척해 주며 다시 물었다.

“식품 쪽 사업을 키워 볼 구체적인 계획은 있고?”

“여러 방면으로 방법을 모색 중에 있습니다.”

평소였다면 정태가 내놓은 이 정도 대답에도 충분히 만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손 회장은 전날 정훈이와 주고받았던 대화와 간밤에 자신의 잠을 설치게 만들었던 기획안을 확인한 이후였기에, 정태의 이번 대답이 실망스럽기만 했다.

그런 실망스러운 감정을 다시 한번 애써 숨겨 놓고 정태에게 물었다.

“그럼 네 말은 앞으로 재경은 식품 쪽에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하고, 항공은 큰 성장은 없겠지만 유지는 될 것 같다, 그리고 모직은 사업 모델링을 새로 해야 한다… 그런 말이 되는 거야?”

“네.”

한참 동안 손 회장은 입을 꼭 다문 채 침묵을 유지했다.

그런 손 회장을 바라보는 정태의 얼굴엔 혹여나 자신의 대답에 뭔가 실수나 아버지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내용이 있었는지를 되새김질하느라 근심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잠시 후 손 회장이 생각을 정리해 놓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래, 일리가 있는 생각이다.”

그제야 정태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손 상무.”

“네, 회장님.”

“내 생각엔 아직 우린 항공 쪽에서 더 많은 것들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항공 쪽에서요?”

“그래.”

“이미 재경항공은 국내 항공업계 1위입니다. 자국 항공 기업들로만 놓고 보면 80퍼센트 가까이 되는 점유율을 가지고 있고요. 여기에서 뭘 더 할 수 있다는 말씀이신지….”

“그러니까. 자국 항공 기업들 사이에서나 시장 점유율 80퍼센트가 되는 거지, 국내 항공 전체 시장으로 놓고 보면 40퍼센트가 겨우 넘는 수준인 거잖아.”

정태는 손 회장이 보이고 있는 욕심을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항공은 다른 업계와는 달리 국내 항공 전체를 놓고 시장 점유율을 따질 수가 없는 업계다.

작지만 선진국, 국제 도시 3개나 품고 있는 주요 국가로 성장해 있는 대한민국.

재경항공이 가지고 있는 국제 노선, 즉 해외 도시 직항만 286개다.

확보하고 있는 직항 노선으로는 세계 톱5 안에 들어가는 항공사가 바로 재경항공.

물론 그게 가능할 수 있었던 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만들어 낸 여권 파워가 한몫을 하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대한민국이 그런 여권 파워를 만들어 내기까지 재경항공 역시 많은 역할을 해 왔다.

그럼에도 정태는 재경항공이 국내 항공 전체 시장에서 40퍼센트대의 시장 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는 걸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만큼 현재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해외로 나가는 사람보다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의 숫자가 훨씬 더 높고, 그네들의 국적 항공사까지 다 포함한 상태에서의 40퍼센트는 이미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실적이기 때문이다.

손 회장이 말했다.

“만약 이걸 우리가 자국 항공 시장 점유율이 아닌 국내 항공 전체 시장에서 점유율을 50퍼센트, 60퍼센트까지 끌어올릴 수 있게 된다면… 그렇게 되면 어떨까?”

정태는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건 불가능입니다, 회장님.”

“불가능이다?”

“네. 전 세계를 통틀어 자국 항공 기업들이 해당 국가의 항공 전체 시장 점유율을 50퍼센트 이상 가지고 있는 국가는 단 4개밖에 없습니다. 미국, 인도, 중국, 러시아. 거긴 땅이 넓죠. 우리처럼 도시 간 이동을 대부분의 사람이 차나 기차로 하지 않습니다. 국내선 운항 건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국가에서나 자국 항공 기업들이 국가 전체 항공 시장 점유율을 50퍼센트 이상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손 회장은 정확한 데이터를 근거로 자신을 설득시키고 있는 정태의 모습에 그나마 흐뭇한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반면에 한국은요? 인구수 대비, 국제선 이용 비율이 세계 6위까지 올라가 있는 나라입니다. 바로 옆 나라 일본, 홍콩, 중국에서 저가 항공으로 공략해 들어오고 있고, 호주나 러시아 쪽 항공은 미주발, 유럽발 항공에 경유를 끼워 가격 경쟁력 면에서 자국 항공사들을 압박하고 있죠. 그런 척박한 사업 환경 속에서 현재 우리가 해내고 있는 전체 시장 점유율 40퍼센트는 사실상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봐야 하고, 앞으로 우린 이 퍼센트를 유지해내는 데에만 집중하기에도 부족합니다.”

그런 정태에게 손 회장이 물었다.

“외국인 빼고 한국 사람들 중 우리 재경항공을 한 번이라도 이용해 본 사람이 대략 몇 명이나 되지?”

“데이터 기록상 1,800만 명 정도 되는 걸로 나와 있습니다.”

“그럼 한국 사람 중에 재경항공과 제휴된 항공사 항공 마일리지에 등록이 된 회원 수는?”

“그건 조금 더 많습니다. 2,100만 명 정도 됩니다.”

“그 2,100만 명으로 트래픽 폼을 만들어 내면 어떤 결과가 나올 거 같아?”

순간 정태는 자신의 아버지가 던진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지 못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떤 트래픽 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항공 마일리지로 쇼핑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거야.”

“……?”

“반대로 쇼핑으로 쌓은 포인트를 항공 마일리지로 돌릴 수도 있게 만드는 거지. 잘 생각해 봐. 재경항공 마일리지로 재경식품의 식자재를 쇼핑할 수 있어. 재경모직의 수입 브랜드들을 구입할 때 마일리지로 가격 차감을 할 수 있어.”

“……!”

“우린 이미 항공으로 2,100만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트래픽을 확보하고 있는 기업이야. 그런데 그간 그 많은 트래픽을 담을 수 있다는 생각을 못 해서, 다른 플랫폼 기업에 항공과 식품, 모직의 상품을 올려 팔고 있지. 그것도 수수료를 줘 가면서. 우린 이미 다른 플랫폼보다 더 많은 트래픽을 자체적으로 만들어 낼 토양을 가지고 있는데, 엄한 곳에서 지금 꽃을 피우고 있다는 말이야. 그것도 우리 돈을 떼어 줘 가며.”

“회, 회장님….”

“정말 재경항공이 국가 전체 항공 시장 점유율 50퍼센트를 못 만들어 낼 거 같아?”

“…….”

“난 할 수 있지 싶은데?”

정태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 그 순간 아버지에 대한 진심 어린 존경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간 얼마나 이런 순간을 기대하고 있었던가.

재경 그룹의 회장.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

정태는 손 회장이 언젠가는 이런 한 방을 터뜨려 주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네 생각은 어때?”

“정리해 볼 시간이 필요할 거 같습니다.”

그 대답에 손 회장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리해 봐. 스너프라는 커머스 플랫폼 들어 봤어?”

“네, 들어 봤죠. 그런데 현재 미국 쪽 투자가 철수되면서 재정난이 덮쳐 위험한 수준이라고 들었습니다.”

“4천억에 시장에 나와 있다고 한다.”

“…….”

“그거까지 같이 엮어서 기획안 한번 만들어 봐라.”

손 회장은 정훈이가 자신에게 올렸던 기획안과, 정태가 만들어 낼 기획안을 서로 비교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미 정태에게 알려 준 모든 소스가 정훈이의 기획안에 든 내용이었지만, 정태라면 정훈이가 미처 짚어 내지 못한 리스크나 추가 발전 가능한 방향을 좀 더 새롭게 구상해 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면서.

“그런데 회장님. 스너프는….”

잠시 하던 말을 끊어 놓고, 곧바로 수긍하며 정태가 말을 이었다.

“하… 아니네요. 어쩌면 지금의 우리에겐 스너프가 제일 제격이겠습니다.”

“……?”

“갖춰진 시스템은 좋지만, 확보하고 있는 트래픽이 부족해서 그걸 4천억이나 주고 가져올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는데… 우리한테는 회장님 말씀하신대로 2,100만이라는 항공 쪽 트래픽이 이미 있네요.”

“전 계열 사장단, 그리고 그룹 본사 임원들 앞에서 보여 줄 수 있게끔 기획안 발표 준비해.”

“네, 알겠습니다.”

*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