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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걸렸다

“스너프 인수 건 말이야. 자네들 생각은 어때?”

그룹 회장실로 불려 온 남 사장과 조 전무.

너무나 당연한 질문 앞에 두 사람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서로에게 먼저 대답을 드리라는 눈빛만 보내고 있었다.

결국 남 사장이 먼저 말했다.

“손 상무가 큰일을 해낸 거 같습니다.”

옆에서 조 전무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남 사장의 생각에 힘을 보태었다.

“단순한 매출적 성장뿐 아니라 그룹 전체의 사기를 올려 줄 수 있는 프로젝트라고 보입니다. 현재 고여 있는 임원진 배치 부분도 한결 자연스럽게 이뤄질 수 있을 거고요.”

조 전무가 말을 받았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이번에 손 상무가 만루 홈런을 쳤습니다.”

“만루 홈런?”

“그럼요. 만루 홈런이죠. 밖에 나가 있는 주자르 이 한 방으로 싹 다 홈으로 불러들일 수 있게 된 거 아닙니까. 항공, 식품, 모직… 동시다발적으로 맞물려서 일으켜 낼 시너지 효과가 벌써 기대됩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남 사장님 말처럼 플랫폼 비즈니스가 시작되면 곧바로 그룹 임원 운영이 수월해질 겁니다. 현재 스너프에 근무 중인 직원들의 고용 책임에 대한 부분은 어쩔 수 없이 떠안아야 하는 부분이겠지만, 거기 임원진은 별개로 봐야죠.“

손 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처음 시장에 나왔을 땐 4천억에 나왔던 물건이었어. 그걸 정태가 3천 700억까지 내려놓은 거고.”

그 말에 조 전무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손 상무 보너스 좀 두둑하게 챙겨 주셔야겠는데요?”라며 손 회장의 흥을 북돋웠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이 좋은 내용을 앞에 두고도 손 회장은 아까 회의실에서와는 달리 무거운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300억 깎자고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잡아먹더군.”

“그게 적은 돈입니까, 회장님. 큰돈입니다….”

“진행에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많이 보이더란 말을 하는 거야.”

조 전무는 눈알만 살짝 옆으로 돌려 남 사장을 쳐다봤다.

남 사장 역시 손 회장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아 조 전무와 눈을 마주쳤다.

“그 일주일이 내게는 1년보다 길었거든. 시장에 스너프가 나온 건 재경 전체로 봤을 땐 천운이야. 그 천운이 4천억에 떨어졌는데도, 그걸 앞에 놓고 고작 300억 딜을 하겠다고 일주일씩이나 사람 간을 떨리게 만들더란 말이야.”

남 사장이 뭔가 손 회장 말에 이상한 낌새를 채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기획 전에 회장님께서는 미리 알고 계셨던 내용이었던 겁니까?”

“그래서 내가 자네들만 잠시 따로 보자고 한 거야. 방금 조 전무 자네가 이걸 만루 홈런이라고 표현을 했지?”

“…네.”

“나도 그렇게 생각을 해. 그런데 여기에서 내가 헷갈리는 게 있어.”

“어떤….”

“홈런을 친 건 정태가 맞는데, 그 홈런을 만든 건 정태가 아니라 정훈이거든.”

동시에 남 사장과 조 전무가 입을 반쯤 벌린 채 어떠한 반응을 보여야 할지 난감해하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 앞으로 손 회장이 기획한 한 질을 내려놓았다.

정훈이가 놓고 갔던 기획안이었다.

그 기획안을 먼저 확인한 남 사장은 침을 한 번 꿀꺽하고 삼킨 후 말없이 조 전무에게 그 기획안을 넘겨주었다.

조 전무 역시 기획안을 확인하는 내내 숨소리조차 쉬이 내지 못했다.

“이제 내가 왜 자네들만 따로 보자고 한 건지 알겠어?”

남 사장과 조 전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사업을 기획하는 것과, 그 기획을 실제 사업으로 만들어 내는 건 별개의 문제야.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해.”

기획안이 전해 준 충격은 실로 엄청나서, 남 사장과 조 전무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손 회장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나는 정태한테 이번 기획에 관한 기본 소스들만 던져 줬을 뿐이고, 그걸 오늘 발표 때 보여 준 디테일로 만들어 낸 건 정태야. 정태라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결과물을 만들어 올 게 분명했으니까. 반면에 정훈이는?”

“…….”

“나는 이 기획안을 정훈이 놈한테 받고 확인하는 순간 이런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어. 두 놈한테 기회를 공평하게 한 번씩은 줘 봐야겠다는 생각. 나는 이미 이 기획안의 총괄을 정태한테 맡겼어. 이건 정훈이 입장에선 불공평이겠지. 그래서 자네들한테 부탁하는 거야.”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네, 회장님. 이게 손 과장이 만든 기획안이라고 하시니… 저 역시 이 비슷한 기회가 손 과장에게도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중입니다.”

조 전무의 말에 손 회장은 본능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남 사장과 조 전무를 차례대로 쳐다봤다.

“이 정도 기획안을 만들어 낼 정도라면… 그리고 지난 하반기 모직 공채 건도 그렇고, 노조 터진 거 마무리 지은 것도 있지 않나. 기획을 사업으로 실행시키는 역량이 어느 정도 되는지 확인을 해 봐야 할 거 같아. 남 사장.”

“네, 회장님.”

“정훈이가 모직 쪽에서 새로운 브랜드 론칭에 집중을 해야 한다는 소릴 했다던데?”

“네.”

“지원해 줘 봐.”

“그럼 어떻게 부서 이동을 개발부 쪽으로 돌려야겠습니까?”

“그 내용 역시도 자네랑 조 전무가 정훈이하고 이야기를 해 보고 결정해. 생뚜앙 지사 쪽으로 자기 사람을 보냈다며?”

조 전무가 대답했다.

“네. 보내면서 그곳 지사장이 해외 지사 규모를 키울 수 있도록 돕고 오라는 주문을 했다고 합니다.”

“뭔가 그려 보고 싶은 큰 그림이 있으니까, 자기 딴에 이리저리 계산기를 돌려 보고 있는 거 아니겠어? 큰 도화지 하나 얼마나 한다고, 이 정도 기획안을 만들어 올리는 놈한테 아비가 제대로 된 도화지 하나 못 사 줘서야 되겠냔 말이야, 내 말은.”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오늘 기획안 관련된 내용은 다른 사람들 귀에 안 들어가게끔 입단속들 잘하고, 앞으로 두 사람은 정훈이 쪽으로 좀 더 신경을 써 주게.”

지금 이 자리에서 손 회장이 자신들을 상대로 하고 있는 말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이었기에, 내심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남 사장이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회장님.”

“안 괜찮을 건 또 뭐가 있나. 좋은 보기가 하나 더 새로 생긴 건데.”

자식 관련된 내용이라도 그룹 회장으로서의 객관적인 시선과 중심 잡힌 균형을 유지하겠다는 투로 손 회장이 말했다.

“나는 항상 이 재경 안에서 내 포지션에 의문을 품어 왔던 사람이야.”

남 사장과 조 전무는 지난 세월 손 회장으로부터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종종 들어 왔기에, 오로지 그의 편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과연 난 나중에 어떤 경영자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까… 하는 걱정 혹은 의문을 항상 들고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인 거지. 아버지가 손중길 회장님이셨어. 세상은 날 형을 죽음으로 몰고 간 기회주의자라고 말하고 있고.”

“아닙니다, 회장님.”

“세상이 그렇다고 하는데, 조 전무 자네 혼자 아니라고 한다고 아닌 게 되는 건 아니지 않나. 상관없어.”

“…….”

“이제 와 갑자기 이런 욕심이 생기기 시작해.”

남 사장과 조 전무는 고개를 반쯤 숙인 채 숨소리마저 조심하고 있었다.

“그래, 타고난 복이 이런 거라면 차라리 이방원이 되자.”

“…….”

“아버지는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것처럼 재경을 만드셨고, 세상은 날 친형까지 몰아내고 왕위에 앉은 인물로 만들어 놨어. 여기에서 내가 내 손에 진짜 피를 묻혀 가며 제대로 기반을 다져 놓고 더 많은 선택지를 가진 재경으로 자식 대에 넘겨줄 수만 있다면, 욕심만 많은 무능한 경영인으로 남지는 않을 거 아닌가. 이게 내 복이라면 이방원이라도 좋으니 그런 평가라도 들었으면 좋겠어. 욕심이 많았다는 소리는 칭찬으로 넘길 수 있겠는데, 무능하단 소리는 여전히 듣기에 아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약점을 자신의 최측근인 두 사람 앞에 고백한 뒤 힘든 미소를 지으며 손 회장이 말했다.

“두 놈 중에 세종을 찾아 왕위에 앉힐 수만 있다면, 내 손에 더러운 것은 얼마든지 더 묻힐 준비가 되어 있어. 그러니 앞으로 자네들이 날 좀 도와줘.”

“…네.”

“자네들도 알다시피 이제 우리한테는 그렇게 시간이 많지가 않아. 세대교체. 좀 더 집중해서 신경 써야 할 때가 온 거야. 자식 놈들 대에선 옛날 같은 그런 큰 잡음이 안 나왔으면 하는 게… 솔직한 지금 내 심정이기도 하고.”

* * *

“김 부장님?”

“아, 좀… 그만 좀 하시라니까요, 과장님.”

참 요즘 것들 재미없다.

흥이라는 걸 모른다, 이놈들이.

기껏 고 부장을 생뚜앙 지사로 보내고, HRO까지 만들어 줄줄이 승진을 시켜 놨으면 축제 분위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으쌰으쌰 하는 분위기는 만들어내어야 정상 아닌가?

왜 이런 날까지 좋은 감정을 숨기고 있지?

다들 웃음을 참느라 광대뼈가 봉긋한 게 빤히 보이는데 말이다.

“그만하긴 뭘 그만합니까? 안 그렇습니까, 박 차장님?”

“크흠… 이제 좀 적당히 하셔도 될 거 같긴 합니다, 과장님.”

이거 봐라, 이거….

“에이, 진짜 재미없다. 누군 뭐 이렇게 오버를 하고 싶어 합니까? 왜 다른 부서 신경을 씁니까? 우리가 잘해서 줄줄이 승진이 이뤄진 건데, 오늘 같은 날은 인사부 타이틀 내려놓고 그냥 편하게 좋아만 하자고요.”

요즘 사람들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뭐랄까… 쓸데없는 겁이 너무 많다고 할까?

아무튼 그런 생각이 종종 든다.

“우린 뭐 맨날 다른 부서 사람들 챙기는 일만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까? 오늘 같은 날 누가 우리 인사부 직원들한테 축하한다고 인사를 해 줍니까? 우리끼리라도 해야죠.”

물론 인사부 전체 줄줄이 승진은 보는 사람에 따라 신상품 개발팀 전체 정직원 전환과 더불어 형평성의 문제로 말이 나올 수도 있는 부분.

그런 부분을 가지고 다들 너무 조심하는 모습이 한 번씩 날 답답하게 만들 때가 있다.

과연 요즘 사람들이 알기나 한 걸까?

30년 전과 비교해 요즘 사람들이 훨씬 더 남의 눈치를 많이 살피고, 다른 사람들에게 비칠 자신의 모습에 신경을 병처럼 쓴다는 걸.

좋은 걸 오로지 좋다고 말하지 못하고, 싫은 걸 솔직하게 싫다고 표현하지 못하는 건 요즘 사람들이 몰라서 그런데 옛날보다 요즘이 훨씬 더 심한 게 분명하다.

결국, 난 꽥! 하고 사무실 정중앙에서 소리를 질렀다.

“자, 자! 다들 잠시 주목 좀 해 주세요!”

그제야 이번 줄줄이 승진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이 올라 있는 광대를 애써 숨기며 날 쳐다봤다.

“우리 인간적으로 오늘 같은 날은 승진자들이 돈 걷어서 회식 한번 합시다.”

여기저기에서 이번 하반기 인사에 포함되지 못한 직원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기회가 좋아요? 개별적으로 승진 턱 내려면 돈이 얼마야? 다 같이 모아서 승진 턱 내면 메뉴도 풍부해지고 자리 분위기도 훨씬 더 잘살고 다 좋지. 안 그래요?”

“네, 맞아요! 승진자들 승진 턱 쏘세요!”

“쏘세요!”

“쏴!”

“쏴!”

난 사무실 직원들을 진정시켜 놓고 진행을 맡았다.

“회식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너무 자주 하면 서로 피곤하고, 한 번 할 때 확실히 하는 게 좋은 거 아닙니까. 지난달 회식 때처럼 1차는 회사 앞 한우집에서 팀 회식비로 계산하고 2차, 3차는 이번 승진자들이 돈 모아서 내는 거로. 난 그게 완벽할 거 같은데, 다른 의견 있으신 분?”

결국 김원호 부장이 못 이긴 척 내 옆으로 다가와서 사무실 직원들에게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손 과장님 말대로 오늘은 승진자들 축하 겸 팀 회식. 1차는 지난달 회식했던 한우집에서 하고 2차는 그냥 제가 다 낼게요. 3차는 나머지 승진자들이 뿜빠이해서 해결하는 걸로!”

“와!”

직원들의 박수 소리와 환호가 인사부 사무실을 폭발시키기 일보 직전까지 올라가 있을 때였다.

진동으로 안 해 놨으면 전화가 오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바지 주머니에서 폰이 진동을 일으켰다.

난 그제야 축제 분위기로 바뀌어 버린 사무실 모습을 뒤로한 채, 전화를 받으러 잠시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남 사장의 전화였다.

“네, 사장님.”

―뭐야?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라니요? 뭐가요?”

―지금 이거 사람들 고함 소리 아냐?

“아, 오후에 인사 공지 떴잖아요. 직원들끼리 서로 축하하고 기분 좋게 떠들고 있는 중입니다.”

―놀래라. 난 또 뭐라고. 그럼 지금 사무실이겠네?

“네.”

―나도 지금 본사 사장단 회의 참석했다가 금방 복귀했거든. 잠시 내 방으로 좀 올라와. 할 이야기가 있어.

“지금이요?”

―왜? 바빠?

“바쁜 건 아닌데….”

아니구나.

지금 가야겠구나.

지금 가면 남 사장한테 팀 회식비 찬조도 좀 뜯어낼 수 있겠는데?

잘 걸렸다.

“네, 지금 바로 올라가겠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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