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이인가?
협상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이번에 저희 그룹 본사에서 소셜 커머스 플랫폼을 인수한 내용에 대해 혹시 알고 계십니까?”
“물론이죠. 요즘은 리조트 객실 판매의 30퍼센트 이상이 다 그런 커머스 플랫폼에서 이뤄지다 보니 그 부분에 대해선 예전부터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었어요.”
꼭 그런 내용이 아니었더라도 이번 스너프 인수 건은 재경 그룹이 뛰어들어 손쉽게 가져갔다는 내용으로 많은 언론을 탄 상태였다.
윤정기 회장이 말을 이었다.
“스너프. 투자 대비 영업 이익 가성비가 잡힐 수나 있을까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는데, 이게 웬걸? 그걸 가져가는 쪽이 다름 아닌 재경 그룹이더군요.”
조동희 전무와 윤기태 사장은 그때부터 그 자리의 들러리일 뿐이었다.
“재경으로 매각이 됐단 소릴 듣고 제가 무릎을 쳤어요. 재경이 항공 관련해서 트래픽만 잘 만들어 내면 커머스 플랫폼 시장의 판도가 바뀔 수도 있겠다 싶더군요.”
윤 회장에 말에 남 사장은 절제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저희 회장님께서도 매입을 준비하기 전 그 부분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하셨습니다. 그리고 매입과 동시에 항공 관련해서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치고 있으니, 처음 시장에 나왔을 때 사람들이 했던 우려와는 반대로 결과물이 빨리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스너프는 재경이 아예 통인수를 한 거라고 하던데, 맞습니다.”
“네, 통인수였습니다.”
“흠….”
남 사장은 통인수였단 대답에 갑자기 표정이 굳는 윤 회장의 모습을 보고, 개인 지분을 어느 정도 보장받고 싶어 할 거라는 손 과장의 예상이 맞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중간에 끼어 있는 투자사들이 너무 복잡하게 얽혀 있었거든요.”
“스너프가요?”
“네. 지분 구조가 상당히 지저분했습니다. 해외 쪽 투자라고 해서 좀 자세히 뜯어봤더니 결국은 차명 계좌였고, 실제 해외 투자는 투자사가 다른 투자사 자본을 끌고 들어와 있는 상황이었죠.”
“원래 땅쟁이들이 좀 지저분합니다.”
윤 회장은 커머스 플랫폼 사업을 부동산 사업에 비유했다.
남 사장 역시 윤 회장의 생각에 동의했다.
가상의 부동산이라고 봐야지.
화면 속에 만들어진 건물.
그 건물 안에서 각자의 자리를 월세 개념의 수수료를 주고 상품을 노출, 판매하고 있으니.
“동명물산 역시 지금은 부동산 쪽으로 집중을 많이 하고 있긴 하지만, 예전에는 그런 땅쟁이 소리 듣기가 싫어서 의류 쪽으로도 손을 댔던 거고, 수입에도 잠시 발을 담갔죠.”
“그렇게 따지면 이 세상에 부동산 기업이 아닌 게 어디에 있겠습니까? 당장 저희 재경모직만 해도 안산 공단부터 시작해서 몇몇 시설 공단이 자산을 크게 불려 준 게 사실인데요.”
“그렇죠.”
남 사장은 재치 있게 시니어즈를 다시 대화 주제 속으로 끌고 들어왔다.
“그래서 스너프 같은 경우는 통인수가 불가피했습니다. 같은 커머스 플랫폼으로 인수가 됐다면 모를까, 저희 재경 같은 그룹이 매입 금액을 낮추겠다고 지분 인수를 할 이유는 없는 거니까요.”
“그럼 시니어즈도 통인수를 기대하고 계시는 겁니까?”
“시니어즈는 다르죠.”
윤정기 회장과 윤기태 사장의 눈에 빛이 생겨나는 순간이었다.
“어떻게 다르다는 겁니까?”
“얼마든지 조율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저희 역시 그런 조율을 기대하며 이 자리에 나온 겁니다.”
“조율이라면 어떤 조율을 말씀하시는 거죠?”
“우선은 회장님께서 기대하고 계시는 조건을 먼저 듣고 싶습니다. 한일어패럴 쪽과 교환 중이셨던 조건 내용도 상관은 없을 거 같고요.”
동명물산 쪽에서 기대하는 조건을 다 들은 후 남 사장이 말했다.
“설마 그 조건을 한일어패럴 쪽에서 안 들어줬다는 건가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식의 연기를 펼치며 남 사장이 물었고, 그런 남 사장의 반응에 윤정기 회장과 윤기태 사장은 기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윤 회장은 재빨리 남 사장의 반응이 식기 전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시켰다.
“참 한일어패럴 이놈들이 선수인 게, 처음 인수 관련 이야기를 주고받을 땐 그 정도 조건이라면 충분히 들어줄 것처럼 하더군요. 그래서 저희도 이 정도면 적당한 선이겠다 싶어서 진행을 하려고 하는데, 디테일을 잡는 과정에서 이야기가 계속 달라져요.”
“나오는 사람들이 바뀌지는 않던가요?”
“네, 맞아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윤 회장이 깜짝 놀라며 묻자, 남 사장은 그저 가볍게 웃으며 솔직하게 대답을 해 줬다.
“협상이라는 건 아무래도 시간과 자본이 많은 쪽으로 기울 수밖에요. 한일어패럴 쪽에서는 급한 게 없었을 겁니다. 그쪽을 폄하하거나 비난하려는 게 아니라 한일 입장에서는 회장님처럼 급할 이유가 크게 없지 않았겠습니까?”
“…….”
“그러니 협상 대표를 바꿔 가면서 희망 고문 비슷하게 상대의 진을 빼놓으려고 했을 겁니다.”
“그렇게 따지면 재경이라고 다르지는 않을 거 같은데요?”
“회장님 말씀대로 그렇게 따지자면 저희 재경은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겠죠.”
그 말에 조 전무가 슬며시 눈알만 돌려 대화 분위기를 왜 이런 방향으로 틀고 가느냐는 식으로 남 사장에게 눈치를 줬다.
반대 쪽 윤기태 사장 역시 얼굴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곧 남 사장이 온화한 미소를 얼굴에 띄워 놓고 윤정기 회장을 설득해 나갔다.
“하지만 저희는 한일어패럴이 아니지 않습니까. 패션 업계 안에서만 보면 분명 한일어패럴이 재경모직보다 위에 있습니다. 그쪽에선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저희는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의 격차라고 생각을 하고 있고요. 저희 재경은 모직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오히려 모직은 이제 막 출발한 커머스 플랫폼 사업보다 규모가 더 작습니다.”
이 내용은 윤정기 회장 입장에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한일어패럴 입장에선 시장에 나와 있는 좋은 물건을 어떻게든 한 푼이라도 저렴하게 사고 싶을 겁니다. 능력이 아직은 그렇게밖에 안 될 테니까요. 반면에 저희 재경은 흥정에 이겨서 세이브할 수 있는 돈보다 그 흥정에 낭비될 시간과 에너지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있는 기업입니다. 분명 시장에 나와 있는 시니어즈라는 물건은 당장 우리한테 필요한 물건이고, 그렇다면 제값을 다 지불하고 구입을 해야죠. 파는 사람 입장도 생각을 해야 할 거 아닙니까.”
“그 말씀을 저희 쪽 조건을 다 들어주겠단 소리세요.”
“물론입니다. 다만 한 가지 제안하고 싶기는 합니다. 그리고 이 제안이 회장님께서 기대하고 계시는 개인 지분 10퍼센트보다 앞으로 훨씬 더 많은 수입을 회장님께 안겨다 드릴 거라는 말씀도 미리 드리고 싶습니다.”
“어떤 제안인가요?”
“회장님께서 보장받고 싶어 하시는 그 10퍼센트에서 5퍼센트만 양보를 해 주신다면 앞으로 재경모직이 관리하게 될 시니어즈의 매출은 현재보다 최소 두 배 이상은 뛸 겁니다.”
“두 배 이상이요?”
“최소로요. 앞서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재경은 이제 스너프라는 유통판을 가지고 있는 그룹입니다. 그리고 그 유통판은 앞으로 커머스 플랫폼 시장에서 점점 강해질 겁니다. 재경모직의 모든 제품은 그 유통판 안에서 판매가 될 것이고, 덩달아 수수료의 부담도 크게 줄어들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니어즈는 재경모직의 첫 번째 자체 생산 브랜드가 되는 겁니다.”
윤정기 회장과 윤기태 사장은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고 있었다.
“당연히 집중해야죠. 그 집중의 정도가 자체 생산 브랜드를 이미 네 개나 가지고 있는 한일어패럴 쪽과 비교가 되겠습니까? 당장 저희에게는 시니어즈가 유일할 텐데요. 정말 공격적으로 마케팅을 할 겁니다. 그러기 위해선 같은 가족이라도 스너프 쪽으로 노출 빈도에 따른 추가 홍보비를 줘야겠죠”
“…….”
“아무리 줄어들었다 해도 수수료는 수수료대로 나가고, 노출 홍보비는 노출 홍보비대로 측정해야 한다면, 결론적으로 재경모직 쪽에선 크게 남는 게 없을 겁니다. 어림 계산으로만 놓고 봐도요. 안 그렇겠습니까?”
“계속 말씀하시죠.”
“회장님께서 단순하게 비교를 해 보시면 될 거 같습니다. 결국 협상의 포인트는 한일어패럴 쪽과도 그러셨듯 저희 쪽과도 개인 지분 보장을 해 주냐, 안 해 주냐 아니겠습니까?”
“맞아요.”
“저희는 해 드리겠습니다. 대신 10퍼센트는 저희 입장에서도 과한 면이 있다고 판단이 되기에 5퍼센트 정도로 서로가 한 발짝씩만 양보하면 어떨까 하는 제안을 하고 싶은 겁니다.”
“5퍼센트요?”
윤 회장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눈치챈 남 사장을 좀 더 강하게 몰아 나갔다.
“시니어즈를 앞으로 핸들링하게 될 회사를 한일어패럴이냐, 아니면 재경모직이냐로 보지 마시고, 한일어패럴이냐, 재경 그룹이냐로 봐 주셔야 됩니다. 어디에서 핸들링을 하느냐에 따라 브랜드 가치가 달라지는 거죠. 그동안 재경모직이 왜 스마일 스쿨이라는 교복 브랜드 말고는 자체 브랜드를 안 했겠습니까?”
“재경은 그동안 해외 브랜드 수입에 집중을 했던 기업 아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럼요?”
“어설프게 할 거면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 하다는 생각에 자체 브랜드 취급을 안 했던 거뿐입니다. 할 거면 제대로 해야죠. 시니어즈. 회장님 개인 지분은 저희 쪽에서 최대한 성의를 보여서 5퍼센트까지 보장을 해 드리겠습니다. 저희랑 같이하시죠.”
잠시 후 윤정기 회장은 오래 묵힌 숙제를 끝냈다는 듯 한숨을 길게 내뿜었다.
그리고 아들 윤기태 사장을 향해 술병이 비었다며 위로 서비스 직원을 올리라고 지시했다.
새로 들어온 정종병을 들고 직접 자리에서 일어난 윤정기 회장.
그는 남필우 사장과 조동희 전무의 잔에 직접 술을 채워 준 뒤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이번엔 남필우 사장이 직접 자리에서 일어나 윤정기 회장과 윤기태 사장의 잔을 채워 주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세상 일이 참 재미가 있습니다.”
윤 회장이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지난 1년 넘게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협상에 협상을 거듭했음에도 이렇게까지 시원한 결과물을 만들어 내지 못했는데, 이렇게 간단하게 결론이 나 버리네요.”
건배를 하자는 식으로 술잔을 높게 치켜든 윤 회장.
“아마 처음부터 이렇게 되려고, 한일어패럴 쪽과의 협상이 계속 지지부진했었던 거 같네요. 그렇게 하죠.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 전에 회장님. 제가 이거 건배하기 전에 한 가지 요청할 내용이 있는데요.”
“말씀하시죠.”
“혹시 동명물산 소유 골프장 중에 서울 근교에 있으면서 영업이 좀 부진한 골프장이 있을까요?”
“영업이 부진한 골프장이요?”
윤 회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들을 쳐다봤다.
윤기태 사장 역시 이번 질문만큼은 그 요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내용이 아니라 회사 복지 차원에서 여러 사내 동호회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네.”
“최근 들어 골프 동호회 규모가 갑작스럽게 커지고 있다고 합니다.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골프장 중에 협약을 맺어서 저희 쪽 직원들에게 혜택을 줄 방안을 모색 중인데, 혹시 도움을 좀 받을 수 있을까 해서요.”
윤 회장은 아주 통 크게 약속했다.
“그런 거라면 굳이 영업이 부진한 골프장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윤 사장.”
“네.”
아들을 부른 윤 회장은 이제야 상대 앞에서 자신의 권위를 보여 주고 싶은 욕심이 생긴 듯, 큰 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실무자들끼리 자리 마련해 줘. 재경모직 직원들에 한해서도 우리 회사 직원들이 받는 골프장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주라고 일러 줘 놓고.”
“네, 알겠습니다.”
그런 다음 남 사장에게 윤 회장이 말했다.
“직원 카드 같은 게 있을 거 아닙니까.”
“네, 있죠.”
“사내 골프 동호회 회원들뿐 아니라 앞으로 재경모직 전 직원에 한해 저희 쪽 직원들한테 제공하는 직원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이야기해 놓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건배할까요?”
* * *
내가 정훈이로 살기 시작한 지 어느덧 네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오늘 난 그간 더 이상은 인연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한 여자의 스캔들, 그것도 나와 관련된 연예인 도킹 스캔들 기사를 확인하게 되었다.
채서린.
나로 인해 터진 기사였다.
일전에 내가 보낸 요청으로 호텔방을 찾아왔던 채서린.
007 작전처럼 치밀하고 은밀했던 그간의 만남이 모두 세상에 공개가 되어 버렸다.
호텔 주차장에 세워 둔 차바퀴 속에서 객실 룸 카드를 찾는 장면, 혼자 호텔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 그리고 채서린이 룸 카드를 찾았던 해당 차에 얼굴에 모자이크가 된 내가 혼자 타는 모습….
비록 기사 속 사진의 채서린은 검은 모자에 선글라스, 거기에 검은 마스크까지 쓰고 있었지만 그렇게 얼굴을 철저하게 다 가렸음에도 신기할 만큼 그 주인공이 채서린이라는 걸 부인할 수 없을 정도였다.
신고 있는 신발, 들고 있는 가방, 그리고 호텔 주차장에 세워진 그녀의 차….
모든 게 그 사진 속 여자가 채서린인 걸 증명하고 있었다.
다만 내가 이 스캔들 기사를 보고 채서린에 대한 걱정과 동시에 의아했던 건 벌써 세 달 전에 있었던 일인데, 이게 왜 이제야 터졌냐는 거다.
하지만 그런 의아함도 잠시.
난 채서린에게 괜찮냐는 카톡 문자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방금 기사 봤어.
내가 보낸 카톡 문자에 대한 답장은 두 시간이 더 지나, 오후 4시가 지났을 때 도착했다.
그리고 채서린은 해당 스캔들에 관한 내용이 아닌 나에 대한 걱정을 물었다.
―혹시 아직도 기억 상실?
난 혹여나 사무실 사람들이 해당 카톡 내용을 보지는 않을까, 모니터 화면에서 카톡을 숨겨 놓고 폰으로 다시 답장을 보냈다.
―지금 내 걱정할 때야?
―걱정하는 게 아니라 궁금한 거야
―여전히 기억 상실. 근데 잘 적응하고 있는 중.
―다행이네. 다른 사람들한테 들키지는 않았고?
―스캔들 괜찮냐고.
―안 괜찮으면 어쩔 거야? ㅋㅋㅋ
ㅋㅋㅋ?
지금 이 상황에서 웃는다고?
돌아이인가?
그런데 곧바로 도착한 다음 카톡 문자에 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오빠한테는 아무 피해 안 가도록 만들어 놨으니까, 별일 없을 거야. 너무 신경 쓰지 마.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