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 말하는데, 대답을 해야지?
채서린의 스캔들은 그 후로도 며칠간 계속 많은 인터넷 뉴스에서 돌아다녔다.
하지만 처음 터졌던 기사에서 더 발전되는 내용은 더 이상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채서린으로부터 먼저 카톡 문자가 날아왔는데, 내가 데일리 온의 정창호 기자를 직접 만났던 사실을 다 알고 있는 눈치였다.
짧게 통화를 했다.
그 통화에서 채서린은 일전에 통화를 하면서 내게 했던 말이 그냥 한 말은 아니었다며, 잠시 활동을 접고 개인 시간을 가지기 위해 괌 여행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왜 그랬어? 그냥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조용해질 스캔들이었는데.
“그럴 리가. 왜 약점도 아닌 약점을 그딴 놈들한테 잡혀 있어?”
―…….
“그렇게 사는 거 습관 되면 안 돼. 연예인은 네 직업일 뿐이야. 그 직업이 약점이 되는 삶이라면 지금이라도 그만두는 게 맞는 거고.”
―내가 오빠한테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
“무슨 말.”
―고마워.
털털한 성격과는 어울리지 않게 아주 소심하게 내게 전달되는 그녀의 진심이었다.
―스캔들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그동안 다른 이슈들은 몇 번 있었어. 그럴 때마다 지금처럼 소속사 대표가 다 해결을 해 줬고. 근데 오빠처럼 날 상품이 아닌 사람으로 걱정을 해 주는 사람은 내 옆에 한 명도 없었거든.
“그럴 리가 있나. 사람이 상품이었으니, 네가 그렇게 느꼈던 거겠지.”
―어쨌거나. 고맙… 네. 진심으로.”
“나만 기억을 못 한다뿐이지, 우리 사이에 그 정도 의리는 있었다며?”
“응?”
“내가 그 기억을 못 한다고 해서 그 의리를 너 혼자서만 지키게 하는 건 말이 안 되지. 오히려 난 나 때문에 터진 일 같아서 미안하기만 한데, 네가 고맙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냐?”
―이게 왜 오빠 때문에 터진 일이야? 실은 나 그동안 이쪽 일 하면서 힘들고 지칠 때마다 오빠한테 위로를 많이 받았어. 기억을 못 하겠지만. 그날도 위로가 필요한 날이었고, 그래서 오빠를 만났던 거야.
“그랬어?”
―그러니까 오빠 때문이 아니라고. 그 전부터도 난 오빠 통해서 위로도 많이 받았고, 그러면서도 이기적으로 생각 없이 사는 오빠 보면서 내 주제에 우월감 같은 것도 느껴 보고 그랬어.
“재밌네.”
―정말 완전 다른 사람이구나. 말투까지 듣기가 어색해. 이렇게 전화로 이야기를 하니까, 꼭 아예 다른 사람하고 통화를 하고 있는 거 같다.
“그렇게 생각을 해. 나도 이젠 내가 모르는 손정훈에 대한 미련은 다 버린 상태거든. 아예 새로 사는 거. 나름 할 만해.”
―새로 사는 게… 할 만하다고?
“산다는 거 자체가 얼마나 고마운 일이야? 그렇게 생각하니까 미워할 상대도, 원망할 상대도 없어지더라. 타격은 있겠지만, 이번 일에 너무 묶여 있지 말고 여행 잘하고 돌아와.”
―기분 이상하다.
“왜?”
―오빠가 그렇게 말하니까, 꼭 잠시 쉬고 다시 한국 돌아오면 그 자리에 오빠가 기다리고 있겠단 말처럼 들려서.
“…….”
―오버하지는 말고. 그냥 그 순간 내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는 거니까. 진짜 이젠 안녕하자. 더 이상 엮일 일도 없으니까, 서로 각자 삶 살자. 잘살아. 오늘도 연락을 할까 말까 고민 많이 했어. 근데 고맙단 인사는 꼭 해야 할 거 같아서.
“너도 힘내고. 항상 응원할게.”
어쩌면 이렇게 해 주는 게 나에게 몸을 뺏긴 정훈이 놈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을 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다시금 정훈이 놈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에 대한 원론적인 궁금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내가 찾을 수 없는 답이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내 손자인데….
그렇게 겨울이 깊어지고 있었다.
* * *
의외로 정태 놈이 스너프 인수와 더불어 그곳의 운영을 빠르게 정상화시켜 나가고 있었다.
기대를 전혀 안 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내가 기대를 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르고 공격적으로 스너프를 커머스 시장 안에서 띄우고 있었다.
항공을 무기로 잡고 다른 커머스 플랫폼들과의 차이점을 두는 건 무척 바람직했다.
하지만 이 부분은 누구라도 해야 할 선택이었기에 기특해할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을 했는데, 재경항공뿐 아니라 제휴 항공사, 다른 제휴 기업들까지 빠르게 포섭해서 마케팅을 만들어 내는 과정은 무척 기특했다.
거봐, 할 수 있잖아.
충분히 할 수 있는 놈들이 그동안 왜 아무것도 안 하고 시장에 끌려만 다녔어?
그런 불만과 기특함이 동시에 섞여 스너프를 키우고 있는 정태를 먼발치에서만 기특하게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연말에 연초가 겹치면서 재경모직 인사부 안에서 내가 할 일은 거의 없었다.
정현수 과장이 맡아 나가고 있는 HRM이나 정신이 없을까, 내가 맡아 나가고 있는 HRO 쪽에선 특별한 업무가 잡히지 않고 있었다.
스마일 스쿨 생산 라인도 문제없이 돌아가고 있었고, 윤현정 팀장의 신상품 개발팀 역시 지난 몇 달 사이 전원 정규직 전환 계약서에 사인하며 안정화를 이루는 데 성공했다.
시니어즈 인수 건은 남 사장이 직접 앞으로 나와서 진행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염려할 부분이 아니었고, 오히려 조 전무가 시니어즈를 인수한 뒤 새로이 개편해야 할 개발부 조직도에 대한 의견을 내게 물어 왔을 땐 벌써 인수 진행이 거기까지 고려를 해야 할 정도로 긴박하게 이뤄지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1월의 중순이었다.
부경 그룹 장씨 집안에 잔치가 잡혔다.
통신사업부를 맡아 나가고 있는 그 집안의 둘째 아들 장선길.
그의 장남이 유명 인기 아나운서와 결혼을 하게 됐다.
재경 입장에서도 어쨌거나 장혜란의 친정 잔치이기에 나와 정태도 함께 참석해야 했는데, 거기에서 사고가 터졌다.
신부 측 하객들은 절반 이상이 연예인이나 아나운서 선후배였다.
반면에 신랑 측 하객들은 어쩔 수 없이 기업가, 정치인들이었고 나와 정태 같은 자녀들도 상당수 참석을 했다.
내겐 아주 좋은 기회였다.
현 대한민국의 주요 재계 인사들이 어떻게 이뤄져 있는지를 직접 확인해 볼 수 있는 자리였고, 그 안에서도 재경의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었으니까.
현 재경의 위치는 딱 내가 재계 순위로 예상하고 있는 수준이었다.
적당히 괜찮은 자리로 식사 테이블을 지정받았고, 결혼식이 시작되기 전 적당히 고만고만한 인사들이 우리 테이블 쪽으로 먼저 찾아와 홍준이와 장혜란, 그리고 나와 정태에게 아는 척을 해 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내가 참 속이 쓰렸던 건 오래전 나와 깊은 우정을 쌓았던 정 회장네나 이 회장네처럼 더 이상 우리 재경은 부경의 사돈 그룹임에도 가장 앞줄로 배정을 받지 못했다는 점과 장혜란이라는 부경가의 일원이 이 안에 있음에도 부경 쪽에선 어느 누구 하나 우리 쪽으로 먼저 찾아와 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런 상황에서 애써 표정 관리를 하고 있는 홍준이 놈의 모습이 날 안쓰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내 눈에 아주 밉상인 놈이 들어왔다.
바로 장민석이라는 놈이었다.
현 부경 그룹 총수, 장선동이의 장남이기도 했다.
사돈 집안에 저런 놈이 있다는 건 내가 눈을 감기 전부터도 알고 있었다.
내가 재경을 이끌 당시에만 해도 부경 놈들은 각종 날만 되면 어떻게든 우리 재경과 함께하는 시간을 만들고자 많은 자리를 마련했으니까.
현 재경의 꼬라지가 이렇게 형편없이 가라앉아 있는 이유에 부경의 지분도 어느 정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곧바로 부경 그룹에 대한 조사를 했다.
장민석이.
우리 정엽이보다 한 살이 어리다.
벌써 부경화학의 부사장 자리까지 올라가 있고, 결혼까지 법조계, 정계 쪽 인물들을 많이 배출해 낸 단단한 배씨 집안 장녀와 했다.
자기 딴에는 자기 집안 잔치이고, 또 자기가 그룹의 장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내 눈에는 너무 나대는 거 같았다.
집안 잔치인 건 맞으나, 따지고 보면 사촌 동생의 결혼식인데, 마치 자기 친동생의 결혼식인 양 이 테이블, 저 테이블을 휘젓고 다니며 영향력 있는 인물들과 인사를 주고받고 있는 모습이 내 눈엔 너무 경박해 보였다.
그러다 이놈이 자기 처인 배씨 집안 여식과 함께 우리 테이블로 인사를 왔을 때였는데, 건방지게도 정태 어깨에 두 손을 올려놓고 지그시 누르는 듯한 행동을 하는 게 아닌가.
가족 모임도 아니고, 많은 기업가, 정계 인사가 모두 모인 자리에서 자기가 직계 혼주인 듯 다 휘젓고 다니며 이목을 집중시켜 놓은 상태에서, 현 재경 그룹 장남의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행동은 누가 봐도 어떠한 의도가 깔려 있는 거라고 봐야 했다.
이런 모자란 놈들!
그런 수모를 당하고 있으면서도 정태 놈은 불편한 기색을 보이는 게 아니라 어색한 미소를 유지하기에 급급했고, 명색이 그룹의 최고 어른이라는 홍준이 놈조차 그 행동에 적절한 제재를 못 하고 있었다.
“고모부, 오랜만이에요. 고모 이러시면 반칙입니다?”
“반칙? 왜?”
“계속 고모님 혼자 젊어지고 계시잖아요.”
“호호호….”
웃어?
이 상황에서 웃는다고?
난 성질 같아서는 웃고 있는 장혜란이의 입안으로 두 손을 집어넣고 양옆으로 찢어 버리고 싶었다.
“정태, 늦었지만 아빠 된 거 축하한다.”
“고마워, 형.”
“자리를 한번 만들어야지, 만들어야지… 하고 생각만 하고 내가 그걸 못 했네. 근데 애는 어딨어? 안 데리고 왔어?”
“같이 왔는데, 식 하는 동안 혹시 울 수도 있어서 애 엄마가 객실에 데리고 올라가서 재우고 있어.”
“아… 그럼 나중에라도 볼 수는 있겠네.”
“상황 봐서. 우리끼리 왔음 모를까, 애가 있다 보니까 움직이는 게 쉽지가 않네.”
“상황 봐서는 무슨. 이런 기회에 가족들한테 얼굴도 보여 주고 하는 거지. 밑에서 피로연 준비하고 있는 거 알고 있지?”
아무리 봐도 정태는 그 피로연 자리를 피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애 아빠가 거기 끼어서 뭐 해?”
“나는 뭐 애 아빠 아니냐?”
“…….”
“내가 명단 다 확인했어. 어지간하면 다들 아는 얼굴이겠지만, 뉴 페이스도 몇 명 있으니까 나중에 정훈이 데리고 같이 내려와. 정훈이.”
성질 같았으면 적당히 설치고 자리로 돌아가라고 무안을 줬을 텐데, 그럴 수도 없고….
“어, 형.”
“너는 인마, 아까 로비에서 형을 봤으면 인사를 해야지, 그냥 그렇게 휙 하고 들어가 버리는 게 어딨냐?”
“아까 로비에서 나 봤어? 난 못 봤는데?”
봤다.
봤는데, 정훈이와 이놈의 평소 관계까지는 정확하게 파악을 하지 못했기에 못 본 척 들어왔던 거다.
“못 보긴, 인마. 나랑 눈까지 맞춰 놓고.”
“진짜? 내가 왜 그랬지?”
“암튼 너도 같이 와라. 너도 요즘 모직에서 일 배우고 있다며?”
아는 거 많아서 먹고 싶은 것도 많겠네.
남의 집안일에 무슨 관심이 이렇게 많아?
“정태는 거기 멤버 거의 다 알겠지만, 넌 아직 아닐 거 아냐. 그래도 아는 얼굴 더러 있을 거다. 이참에 너도 이런 자리 통해서 미리미리 앞으로 대한민국 경제 이끌어 갈 친구들이랑 안면 터놓으면 편할 거야.”
인맥 쌓기 전에 실력부터 쌓아라, 이놈아.
네가 어떤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하고 있는 이런 경박한 짓거리를 보아하니 소리만 요란한 빈 깡통인 거 같은데, 적당히 하고 좀 자리로 돌아가라.
그런데 바로 그때.
“정훈이. 형이 말하는데, 대답을 해야지?”
순간 뭘 잘못 들었는 줄 알았다.
“뭐?”
그런데 반대로 이번엔 녀석이 내가 던진 “뭐?”라는 말을 자기가 잘못 들은 건 아닐까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네?
순간 아무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어색한 분위기가 형성되어 버렸고, 홍준이 놈이 헛기침하는 것으로 상황이 무마되어 가고 있었다.
“크흠….”
그래도 집안 어른이라고 홍준이 눈치는 보는 모양이네.
이런 걸 설마 내가 지금 다행이라고 생각을 해야 하는 건가?
홍준이의 헛기침으로 얼굴에 미소를 걸기 시작한 장민석이 이번엔 정태의 어깨에 올려놓고 있던 손을 거둬 내 뒤로 와서는 그 손을 내 어깨 위로 올렸다.
지금 이 손 꼼지락거림이 안마를 해 주겠다고 만들어 내는 꼼지락거림은 아닐 거 아냐.
“우리 정훈이 조금 이따가 형이랑 같이 와인 한잔하자.”
그 순간 날 쳐다보는 정태와 눈이 마주쳤다.
정태 놈의 얼굴 표정 역시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난 알 수 있었다.
날 보는 정태 놈의 두 눈이 지금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건지….
꼼지락거리던 손짓을 멈추고, 가볍게 내 어깨를 토닥거려 놓고 장민석이 말했다.
“그럼 고모부, 저는 옆 테이블에 인사 좀 가 보겠습니다.”
“그래, 수고가 많다.”
“수고는요, 무슨.”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