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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코패스야, 뭐야? (64/303)

사이코패스야, 뭐야?

장민석이가 배씨 집안 여식과 함께 다른 테이블로 인사를 건너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당연히 우리 테이블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정태는 정태대로 홍준이의 눈치를 살피며 불편한 기색을 숨기려 하고 있었고, 장혜란이도 갑자기 이 자리가 불편해진 듯 애꿎은 물잔만 자꾸 들었다 입술에 붙이길 수차례 반복하고 있을 때였다.

“회장님.”

내 뒤에서 여자 목소리가 났다.

그리고 홍준이의 표정을 보아하니, 회장님을 부르는 여자 목소리는 우리 테이블을 향해 들어온 소리인 것 같았다.

홍준이뿐 아니라, 장혜란이, 정태까지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난 곧바로 고개만 뒤로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했는데,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장태산이의 손녀딸, 하늘이었다.

“이게 누구야? 하늘이 아니야?”

“네, 사모님. 오랜만이에요.”

그날 태산이의 집에서 내게 보여 줬던 모습과는 달리 하늘이는 홍준이와 장혜란이, 그리고 정태 앞에서는 요조숙녀인 척 능청을 꽤 잘 떨었다.

“사모님이라니. 네가 그렇게 부르니까 괜히 거리감 느껴진다.”

“그러세요?”

“그래, 그냥 예전처럼 편하게 불러.”

“에이, 어떻게 그래요? 이젠 저도 나이가 있는데”

“그래, 그래, 그래… 어떻게 부르는 게 뭐가 중요해? 어머, 근데 어떻게 여기에서 다 만나? 혼자 온 거야?”

장혜란은 식장 안을 둘러보며 미래금융 쪽 다른 인물들도 함께 왔는지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홍준이 역시 하늘이의 등장에 고개만 살짝 옆으로 돌려 다른 테이블을 확인하고 있었다.

“아니에요. 저는 신랑 측 말고 신부 측 하객으로 온 거예요.”

“신부 측?”

“네. 신부가 제 고등학교 친구예요. 저 혼자 왔어요.”

“어머, 그래? 이리 와, 그럼 이쪽으로 와서 우리랑 같이 앉아.”

“아뇨, 괜찮아요. 다 지정석이잖아요. 제 자리는 저쪽에 따로 있더라고요. 신랑이 부경가 사람이잖아요. 당연히 회장님, 사모님도 계실 거고, 계신다는 걸 아는데 인사를 안 드리는 것도 말이 안 되잖아요. 아까부터 계속 찾았어요.”

“그랬니?”

“네.”

홍준이가 형식적인 인사말을 건넸다.

“회장님은 잘 계시지?”

“네, 그럼요.”

“아버지는?”

“아버지도 잘 계세요. 회장님도 잘 지내셨죠?”

“그래. 나야 뭐… 항상 똑같지.”

하늘이가 원래 이렇게 싹싹한 아이였던가?

그런데 왜 난 그날 태산이의 집에서 이 아이가 버릇이 없다고 오해를 했을까?

“아 참, 정태 오빠. 아빠 됐다면서? 축하해.”

“고맙다.”

아주 여우같이 홍준이와 장혜란을 향해 아쉽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하늘이가 말했다.

“예전에 저 어렸을 때처럼 가족들끼리 연락도 자주 하고 왕래가 많았을 때가 참 그리워요.”

어쩐 일인지, 그 말 앞에서는 홍준이도 장혜란도, 심지어 정태까지도 아쉬운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정태가 갑자기 자기 옆자리 의자를 빼어 내며 하늘이에게 말했다.

“그러지 말고 우리랑 같이 앉자. 혹시 일행 있어?”

“일행이 있는 건 아닌데….”

“와이프가 지금 애 재운다고 애랑 같이 객실에 올라가 있어. 지금 이 자리 빈자리야. 일행 있는 거 아니면 우리랑 같이 앉자.”

홍준이도 정태가 하고 있는 처세를 아주 달갑게 느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랜만에 이렇게 만났는데 식사 같이하자.”

홍준이까지 거들고 나서자 하늘이는 더는 거절하기가 힘들었던지, 못 이기는 척 나와 정태 사이에 비어 있던 자리로 들어와 앉았다.

* * *

한 시간 넘게 이어진 결혼 본식.

난 입으로는 식사를 하며 귀로는 정태와 하늘이가 나누는 사소한 안부 대화를 들었고, 눈으로는 결혼식장에 참석한 신랑 측 하객 테이블의 위치와 각 테이블의 분위기를 살폈다.

본식이 모두 끝이 나고 사진 촬영을 할 때였는데, 우리 가족은 어쩔 수 없이 신랑 측 가족사진 촬영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부경 그룹 속에 끼어서 촬영을 하고 있자니, 그 순간만큼은 가족 수가 어마어마한 부경가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하의 손중길이가 부경 그룹 따위를 부러워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나의 재경 그룹을 자신의 울타리 속으로 담고 있는 부경가.

비록 사돈 관계이긴 해도, 내가 재경을 이끌 당시엔 상상도 해 보지 못했던 굴욕이다.

가족사진 촬영을 모두 끝내 놓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는데, 하늘이가 혼자 앉아 우리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엔 신랑, 신부 측 지인 촬영을 위해 하늘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여기에서 인사드릴게요, 회장님.”

들고 온 가방을 다소곳이 두 손으로 들고서 고개를 꾸벅 숙인 뒤 하늘이가 말했다.

“그래, 이렇게라도 오랜만에 얼굴 봐서 반가웠다. 돌아가면 회장님하고 아버지한테 안부 전해 주고.”

“네, 그렇게 할게요.”

그런데 바로 그때….

지인 사진 촬영을 위해 하늘이가 꽃길 위로 올라가고 있을 때였는데, 다시 한번 장민석이가 우리 테이블을 찾아왔다.

홍준이와 장혜란도 가족들 모임 자리에 참석을 하기 위해 자리를 벗어나려고 할 때였다.

“야, 정태야.”

언제 왔는지, 나와 정태 사이에 끼어서 장민석이 물었다.

“어, 형.”

“저기 저 아가씨 미래금융 장녀 아냐?”

“맞아, 하늘이.”

“맞지? 이상하게 낯이 익다 했어. 같이 온 거야?”

“아냐, 신부 쪽 하객으로 왔대. 제수씨랑 고등학교 동창이래.”

“아, 그래?”

장민석은 아예 몰랐던 내용이었다는 식으로 눈까지 크게 떠 가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럼 뒤풀이 같이 가자고 해야겠네.”

“신부 측 손님들도 다 오는 거야?”

그 질문에 장민석은 마치 말 같은 소릴 하라는 식으로 정태를 쳐다보며 말했다.

“당연히 아니지. 한데 다 섞어 놓으면 모임에 나오는 애들이 좋아하겠어? 근데 저 아가씨는 미래금융 사람이잖아. 우리 모임 안에서도 저 아가씨랑 서로 안면 있는 사람들이 더러 있을 거야. 저 정도면 급이 되지.”

급?

급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올 때 같이 데리고 와라.”

순간 헷갈렸다.

어쨌거나 장민석이는 정태와 정훈이에게 사촌 형이다.

그리고 이 자리는 가족 잔칫날이고.

사촌 형제 중에선 가장 맏이로서 저 정도는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면서, 그와 동시에 너무 나댄다는 생각이 함께 들었다.

우선 정태의 표정부터 살펴봤다.

“한번 물어는 볼게. 신부 측 하객으로 온 거잖아. 자기들끼리 미리 잡혀 있는 약속이 있을 수도 있는 거니까, 한번 물어보고 괜찮다고 하면 데리고 갈게.”

“에이, 앓느니 죽지. 됐어, 인마. 내가 직접 가서 물어볼게. 나랑도 안면 있어.”

곧 홍준이와 장혜란이도 객실에 올라가서 원수경이 데리고 있는 승현이 얼굴을 보고 가족들 모임에 참석을 하겠다며 식장을 빠져나갔다.

나와 정태는 자리에 앉아 하늘에게 접근을 하는 장민석이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고만 있었다.

* * *

“괜찮겠어?”

신랑 측 피로연장으로 예약이 잡혀 있는 호텔 북 카페로 향하는 길이었다.

난 앞까지 정태와 함께 걸어가며 물어봤다.

“뭐가?”

“형수 말이야. 혼자 계속 승현이랑 객실에만 있게 만들어도 돼? 식도 다 끝났는데, 승현이랑 같이 데리고 내려오지?”

“네 형수가 싫대.”

“왜?”

“이런 자리에 애 안고 등장하고 싶겠어? 애나 좀 크면 몰라. 집안 잔치라 애를 안 데리고 나올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성격상 애 봐주는 아주머니한테만 맡겨 놓는 건 더 못 하는 사람이고. 신경 쓰지 마. 나도 적당히 얼굴만 비추고 빠질 거니까. 1시간 정도 있다가 난 조용히 빠질 거니까, 너도 분위기 봐서 적당할 때 빠져. 끝까지 자리 지키고 있을 필요 없는 자리야.”

“그래?”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남겨놓고 정태가 먼저 북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이 모임이 그래. 끝날 때까지 자리 지키고 앉아 있는 사람들은 민석이 형, 부경 그룹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게 있는 사람들이야. 근데 우린 그런 게 아니잖아. 가족으로 묶여 있다 보니 거절하기 힘든 모임인 건 사실이지만, 이런 모임에서 너나 내가 비싼 척 굴지 않으면 재경이 부경의 들러리라는 걸 인정하는 거밖에 안 돼.”

“…….”

“그동안 내가 다른 건 네가 뭘 하든 별말 안 해 왔지만, 이 자리에서만큼은 행동에 무게를 좀 실어라.”

이놈 봐라?

아예 맹물인 줄 알았더니, 그래도 손중길이의 손자다 이 말이지?

“왜 그렇게 웃어?”

“누가? 내가?”

“그래, 인마. 형 지금 진지하게 하는 말이야. 안에 들어가서는 그렇게 실실거리지 마.”

“알았어.”

“명함 지갑 가지고 있지?”

“어.”

“먼저 주지 말고, 아는 얼굴이라고 가볍게 다가가지도 말고. 딱 너한테 먼저 다가오는 사람들하고만 인사 나눠. 그래도 충분한 모임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으니까, 걱정하지 마.”

북 카페 안으로 들어가자 벌써 많은 사람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안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모습에서 정태를 어려워한다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입구 테이블에 놓여 있던 샴페인 한 잔을 들고 안으로 들어선 정태는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과 가볍게 대화를 시작했는데, 그 모습에서 기특하게도 쓸 만한 격이 느껴졌다.

날 데리고 다니며 자기 동생이라고 무리하게 소개하려 들지도 않았고, 적당히 내 주위를 맴돌며 내가 하는 행동을 눈으로 체크만 할 뿐, 그 어떤 간섭도 하지 않았다.

관리자로서의 역량이 꽤 잘 갖춰져 있는 모습이었다.

나도 함께 샴페인 잔 하나를 들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였는데,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 채 샴페인 잔을 들고서 하늘이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확실히 오빠가 정태 오빠는 무서워하나 봐?”

이 녀석은 그날 태산이와의 식사 자리에서도 그러더니, 왜 자꾸 나한테만 시비지?

식장 안에서 홍준이, 장혜란이 앞에서 보였던 요조숙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꼭 심술궂은 어린아이처럼 내게 바짝 붙어서 시비를 걸어왔다.

“너 신부 측 하객이라고 안 했어?”

“근데도 신부 측 하객 쪽보단 신랑 측 하객 쪽에 아는 얼굴이 더 많은 결혼식이네.”

그 순간 살짝 소름이 돋았다.

이야기를 하던 중 우리 앞으로 누군가가 지나가며 아는 척을 한답시고 하늘이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였는데, 그 순간 하늘이의 얼굴 표정이 싹 하고 바뀌어 버린 거다.

언제 내게 시비를 걸었냐는 식으로 아주 온화하고, 품격 있는 미소로 상대에게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여 주더니, 그 상대가 지나가자 다시 정색을 하며 내게 말했다.

“근데 그거 진짜 오빠야?”

또 뭐가?

얘 왜 이래?

“너 나랑 친하냐?”

“그럴 거 같냐?”

“근데 왜 자꾸 말 걸어? 딴 데 가, 딴 데. 아는 얼굴 많다며? 딴사람한테 가서 시비 걸어.”

“채서린 스캔들. 그거 오빠 아냐?”

좀처럼 당황이란 걸 잘하지 않는 나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내 표정을 보며 싱긋이 미소를 지으며 하늘이가 말했다.

“설마설마했는데, 진짜였나 보네. 이야… 손정훈 능력 좋네? 그동안 채서린이랑 놀았어?”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대한민국 찌라시를 왜 메이드 인 증권가라고 하겠어?”

“…….”

“우리 미래금융으로 안 들어오는 찌라시가 있겠어? 직접 보도 기자 찾아가서 추가 기사 덮으라고 협박까지 했다면서? 내가 어지간한 내용은 잘 골라 듣는데, 그건 좀 헷갈리더라. 진짜야? 나 그 이야기 듣고 오빠 다시 봤잖아. 이야, 손정훈한테 그 정도 카리스마가 있었다고?”

하! 요놈 요거… 태산이 손주라 혼을 낼 수도 없고, 이걸 어떻게 하지?

“내가 오빠를 잘 알잖아.”

날 잘 안다고?

“내가 아는 오빠는 잠시 데리고 논 여자를 그렇게까지 커버를 치는 스타일이 아니거든. 아닌가? 채서린은 조금 달랐나? 그냥 잠시 데리고 논 게 아니라, 막 찐사랑 그런 거였나?”

“너 나랑 친하지?”

“그러고 싶어?”

“네가 지금 나한테 하는 게 딱 그렇네. 어떻게든 시비를 걸어서 말 한번 걸어 보자… 그런 거 아냐?”

“으이구, 인간아. 기회를 줘도 못 잡냐.”

“기회? 무슨 기회?”

“됐다, 치워라. 할아버지 말만 듣고 널 다시 봐 볼까 했던 내가 미친년이다.”

너?

방금 이놈이 나한테 너라고 한 게 맞나?

내가 아니라 정훈이한테 한 말이라도, 오빠한테 너?

“그럼 계속 똥폼 잡고 돌아다니세요. 난 다른 사람들이랑 인사나 하러 갈 테니까.”

“잠깐만.”

하늘이를 잡아 세웠다.

“왜?”

“대답은 해 주고 가.”

“무슨 대답?”

“내가 물었잖아. 무슨 기회를 말하는 거냐고.”

“양심이 없는 거야, 아님 얼굴이 두꺼운 거야? 그것도 아님 사이코패스야, 뭐야?”

“뭐?”

“내가 꼭 내 입으로 그때 그 일을 꺼내야겠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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